가장 좋은 지금...사람꽃
정혜령
열시 넘은 밤시간에 집 앞 편의점에 갔다. 저녁 먹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체기가 있는 듯 영 편치않다. 비상약통에 소화제는 없었다. 전반적으로 위의 기능이 좋지않은 가족들이 가끔 체하거나 소화불량일때가 있어 항상 상비로 챙겨놓았었는데 약이 떨어진 것을 몰랐던 것이 밤시간 외출의 원인이었다. 요즘 편리해진 것은 약국은 문을 닫아도 편의점에서 소화제나 간단한 상비약 정도는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을 사고는 아파트 단지를 걸어오는데 앞서가는 시커먼 덩치 큰 그림자 하나가 보인다. 휘청휘청 비틀비틀 웬 남자가 술을 제법 마신 양인지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걷는다기보다는 땅 위에 긴 두다리 붓으로 뭔가 휘적휘적 그어내는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으니 걷는 것은 분명할터. 위태위태 불안하다. 그래도 꽃다발은 놓치지 않고 꼭 붙들고 있다. 가는 길이 그길이라 내가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였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동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누르는데 5층 사는 아기 아빠인듯 싶다. 그집이 이사온지 얼마 되질 않아 그집 남편의 얼굴은 모르지만 항상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 눈에 띄는 예쁘장한 아기엄마. 네 살이라는 여아의 육아와 살림만으로도 벅찰텐데 오며가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늘 단정하고 인사를 잘한다.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그집 남편의 늦은 시간의 귀가를 보면 부부 기념일은 아닐테고 부부가 일상적으로 꽃다발을 주고받는 모양이다. 꽤나 낭만적이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봤다. 가끔은 꽃을 사들고 들어오던 남편은 아이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까지도 내게 기념일이나 마음에 내키면 꽃을 다발로 안겨주는 낭만을 보였었다. 그렇다고 감동을 주고 세밀하게 살피는 낭만적인 성향의 남자는 아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가 몸에 밴 그 시절 그 연령대의 일반적 남편 성향이다. 어찌보면 막내이므로 부단히도 막내스러운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부분은 있으나 뭔가에 대한 배려는 이프로 부족한 사람이다.
어느 순간부터 꽃보다는 아이들이 먹을 로스트치킨이나 회사 근처의 유명하다는 일본식 과자나 줄서서 먹는다는 족발 등등을 사들고 왔다. 나 또한 실용을 따지는 아줌마스러운 아줌마인지라 별반 섭섭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키우느라 아름다운 꽃을 보고도 편안하게 느끼고 감상할 만한 여유가 있을리 만무했던 바쁜 시절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제 가정을 갖고 직장생활을 하고 독립을 한 이즈음에 나의 시간들을 널럴하고 풍족한 여유로움으로 채우게 됐다. 이제사 예쁜 꽃들과 화분에 눈길이 가고 정성을 들이게 되지 뭔가. 온통 신경과 정성을 쏟아붓던 사람꽃에서 비로소 예쁜 꽃들에게로 마음이 가는 것이다. 젊은 날 남편의 꽃다발은 없으나 대신 사위가 어머니께 드린다며 형언할 수 없는 예쁜 꽃바구니로 나를 감동케 하고 작은 딸애는 그 꽃들이 시들을만 하면 다른 꽃들을 사다 꽃병에 꽂아 놓는다. 집안 가득 향기와 꽃이 만발해서 행복한 마음이다. 꽃들로 해서 부자된 기분이랄까. 물론 아름다운 꽃들도 사람꽃에 비할까마는.
아이들을 다 키우고보니 어느덧 중년의 나이먹은 여자가 되어있다. 결혼한 큰애가 언젠가 애를 낳으면 할머니도 된다. 젊은 날의 화사하고 빛나던 것들은 어디론가 다 슬어졌다. 지금의 나는 눈가의 주름을 고민하고 날렵했던 몸에 붙어가는 군살을 걱정하는 평범한 아줌마이다. 누군가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갈래 라고 묻는다면 당차게 노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지금의 안정감이나 나이듦에서 오는 연륜과 그 여유가 너무나 좋다. 그 넉넉한 여유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봉사활동도 생각해 보는데 구체적으로 어찌할지 여부는 아직 생각을 못하고 있다.
젊음 자체가 빛이나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 외모에서 발산하는 빛은 없지만 내면의 미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늙었다고 나이 먹었다고 서글퍼 하지 말자. 우리 나이가 아름다운 나이이다. 젊음이 따라올 수 없는 합리적인 지혜들이 마음의 창고에 넉넉하고 그득하게 쌓여만 가고 뛰지않고 느긋하게 걸어도 아무도 재촉하는 사람이 없는 지금의 여유있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
얼마전 티비 강연에서 노철학자이며 현재 백세가 넘으신 김형석 교수께서 말씀하셨다. 백세 넘은 지금까지 살다보니 육십부터 칠십대 중반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말씀에 아직 오십대의 중년인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 지금 내가 뭔가를 시작한다해도 결코 늦은 건 아니구나 라는 희망의 메세지가 가슴에 들어와 아로 새겨졌다.
내 속에는 푸름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없는 노련함과 삶의 연륜 그리고 안정적 여유로움이 있으므로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못할까. 꽃이 지고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어진다. 이제는 아름다운 꽃의 시절이 지나갔다해도 실한 열매로 어딘가에 보탬이되고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주변을 돌아다보며 살다보면 빛이나는 사람이 되지 않겠나.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의 빛이 아닌 참다운 나눔과 사랑의 빛이 말이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늘 보던 풍경들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평소 못느꼈던 생소함에 잠시 낯설었으나 금새 익숙해졌다. 그렇게 생각한대로 살아가면 되는 게 맞는 것일 게다. 가장 아름다운 꽃 사람꽃이 되는 일 말이다.
정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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