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개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한일간의 전투.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구 일본군과 교전한 일련의 전투로, 전투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 인용되는 매체마다 정보가 달라 이런저런 의문점이 많은 전투다.
전과나 병력의 규모부터 신문이나 증언, 사료에 따라 중구난방인 데다 일각에서는 전사했다는 지휘관 등 군인이 다른 출처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등, 진위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기록이 많다.
배경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독립운동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마침내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간도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계획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독립군의 준비
일본에 맞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은 무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기 도움을 준 이들은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의 독립군인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었다.
원래 이들은 러시아군 소속으로 유럽 러시아 일대에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 파우스트슐라그 작전을 발동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유럽 러시아 일대로 물밀듯이 들어오자 이들은 시베리아로 밀려났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백군 편으로 가담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했다.
하지만 마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조국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자 귀국을 준비 중이었다.
1920년 2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이들 군단은 소련 적군과의 휴전 협정이 성립된 후 쓸모가 없어진 무기를 처분하고자 했고 마침 독립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의 일부 병사들이 자신들이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 군정서에 판매하였다.
다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체코 군단 자체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들은 일본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일부 군단원들의 일탈 행위였다.
실제로 일본은 군단원들의 무기 판매 행위를 알고 군단 사령부에 이를 근절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군단 사령부는 이 점을 매우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객은 한국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잔존 백군 잔당, 중국 만주의 봉천군벌 등 다수의 구매자들이 있었다.
결국 일부 군단원들이 무기도 처분할 겸 이범석의 말마따나 동병상련의 민족도 도울 겸 규율을 어기고 응원과 함께 개인적으로 판매한 것.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탄약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이때 획득한 무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체코제 무기가 아니라 모신나강 소총, 게베어 1871 등의 타국 소총들이었다.
만리허 소총 같은 체코제 무기는 군단의 적인 오스트리아군이 사용했고 군단은 미국에서 위탁생산해 지원해준 모신나강을 주력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모신나강은 러시아의 독자적인 단위체계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야드파운드법을 쓰는 미국에서 라이센스 생산할 때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제 모신나강은 성능이 영 시원찮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군의 준비
이렇게 독립군이 무장을 구입하는 동안 일본군은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따라서 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28여단, 그리고 관동군 부대를 동원하고 산포, 비행기 등의 무장을 보강하며 훈춘-경원에 전산선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후 일본군은 19사단 예하 병력을(73연대, 74연대, 27기병연대) 히가시 마사히코 소장 하에 병력을 동원하여 청산리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려고 하였다.
양측의 조우
양측이 서로 전력을 강화해 나가던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던 제14, 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 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 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했다.
대한 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후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했던 홍범도 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으나 이 때는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청산리 전투와 관련하여 독립군 책임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청산리 전투의 원인에 대해 독립군이 경거하여 일본이 독립군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과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망신을 당해서 분풀이로 학살을 자행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선 전자를 보면 김경천 장군은 청산리 전투가 발생하기 전 일본이 중국군에게 독립군과 관련하여 압박을 가하여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해산하라고 했는데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며 독립군한테도 잘못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10월 4일...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간도 한국군을 일본의 부추김을 받은 중국군대가 해산하라 한단다.
이는 우리 독립군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
김경천,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학고방, 2019), 121.
1920년 봄부터 독립군이 북간도 지역에서 연합과 통합을 반복하고 국내 진입 작전까지 시도하면서 일제 입장에서 북간도 독립군이 굉장히 '불편한' 존재로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고 이에 따라 간접적인 압박 뿐 아니라 직접적인 공격에까지 나서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북간도의 독립군 입장에서 보면 느긋하게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준비하더라도 일정 이상 세를 불리면 일제가 간섭할 것은 뻔한 이치이므로 빠르게 전력을 모아 공격에 나서는 것도 꼭 틀린 선택지라고 할 것은 아니다.
이는 독립운동가끼리 노선의 차이를 보인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 한쪽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해석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간도 참변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은 배경 항목에도 나와 있듯 일찍이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19사단과 28여단, 기타 관동군 부대를 동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은 독립군을 토벌하려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화풀이로 간도 참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간도의 조선인 세력을 초토화시키려고 계획까지 세워놓고도 청산리에서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동안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학살이 화풀이성이라고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이 청산리 전투보다 먼저 세워진 이상, '청산리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작전 목적 달성 실패가 간도 참변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위에서 서술하였듯 이미 일본은 청산리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간도 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결심하고 대규모 부대를 간도로 투입하였기 때문이다.
전투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 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어리 두 덩이 동지들 입에 넣어 주었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뒤이어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아예 전투 자체를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 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독립군을 공격한 일본군은 우회 공격에 실패하여 어랑촌으로 이동한 가노 노부테루 대좌가 지휘하는 27기병연대 병력이었다.
당시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에 일본군은 야포까지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고 전투는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탄약부족과 일본군 증원 부대를 우려한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다.
다음 날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대체로 독립군은 흩어져서 이동했다.
24일 저녁 8시 천보산의 광산을 지키던 일본군 중대와 전투를 벌였고 25일 새벽 식량을 수집하러 갔던 독립군이 재차 전투를 벌였다.
한편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여 급습했다.
추위로 인해서 불을 피운 것 때문에 발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난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새벽 무렵 방어 태세에 들어간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이동휘의 제안에 따라 소련으로 올라갔다가 자유시 참변 문제가 불거지기까지 하는 등 악재 속에서 투쟁 역량을 상실해 갔다.
또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한 것과는 별개로 전략적으로는 일본군이 간도참변을 자행하는 동안 동포 사회를 보호할 방법을 내놓지 못한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에 의해 '간도참변'이 야기될 때 상해임시정부가 효과적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고, 더구나 서·북간도의 동포사회를 궁극적으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내외에서 비판여론이 적지 않게 일어났고, 북경과 상해의 반임시정부 세력들은 반임시정부 운동을 강화하게 되었다.
성립 초기에 임시정부 지지와 봉대를 표명했던 연해주의 국민의회 역시 반임시정부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2005, 명지사),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