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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미아리고개
이승하
1
할아버지가 저렇게 화내는 모습을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요 프로에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어, 뭐 저런 게 다 있어. 순 엉터리. 제기랄, 웃기까지 해? 어어, 저놈 지휘자도, 악단도. 기가 차네. 이런 투덜거림이 이어지다가 에이 씨, 방송국에 전화를 할까 보다. 나 참 기가 막히네. 뭐 저런 게 다 있지? 저 가수 너무한 거 아냐?
할아버지의 투덜거림은 노래가 시작되고서부터 끝날 때까지 근 오 분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KBS 열린음악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가수가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수는 종종 봐왔던 혼혈 여자였는데, 노래는 처음 듣는 곡이었다. 노래 중간에 독백을 하는 대목도 있었고, 전반적으로 꽤 흥겨운 가락이었다. 가수는 물론 수많은 청중과 악단의 지휘자나 연주자들의 표정도 밝았다. 무엇보다 흥겹고 경쾌하게 편곡된 곡이었고, 일요일 저녁에 하는 프로의 성격에 맞게 잘 선곡된 것이라 여겨졌다. 노래가 끝나고 청중의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방 안에까지 울려 퍼지자 할아버지는 리모컨을 찾아 들더니 흡사 권총을 쏘듯 앞으로 불쑥 내밀면서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승호야, 저 프로 담당자 전화번호 좀 알아봐라.”
“왜요?”
할아버지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지 씩씩거리면서 말을 했다.
“세상에, 다들 미쳤다. 저 노래를 저렇게 흥겹게 부르다니!”
“할아버지 지금 화나셨죠? 도대체 무슨 노래기에……. 케이비에스에 전화해서 저 프로 담당 피디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면 용건이 뭐냐고 먼저 물어볼 겁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여린 수심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됐다. 이미 방송 다 끝났는데 항의를 해봤자지.”
“공영방송에서 부르면 안 되는 노랜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세상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저렇게 신이 나서 부르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바로 내 아버지 얘긴데 말이다.”
“잠깐만요.”
의아한 생각이 든 나는 스마트폰을 열어 인터넷 창에 여덟 글자를 쳐보았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옛날 가요인 것 같았다. 가사가 이랬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고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1956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에, 이해연이라는 가수가 처음 불렀다고 되어 있었다. 제목의 ‘단장斷腸’은 창자를 끊어 내는 고통을 뜻한다고 설명이 붙어 있었다. 1953년에 한국전쟁이 끝났으니까 전쟁 후에 나온 대중가요 중 하나였다.
“아, 그러니까 이 곡은 애절하게 불러야 하는데 가수가 노랫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흥겹게 불러서 화가 나신 거로군요. 피디가 가수에게 따로 주문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나 봐요.”
화면에 나온 사람들 모두 표정에 슬픔이나 안쓰러움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가수나 악단 연주자나 청중이나 다들 밝은 표정이었으니 할아버지가 화를 내신 것도 이해가 갔다. 할아버지가 아까 꺼내신 “내 아버지 얘기”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여쭤보려고 입을 연 순간, 할아버지의 눈이 충혈되더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소리를 질렀다.
“그 노래에 나오는 용구라는 어린애가 바로 나란 말이다!”
할아버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 댔다. 나는 얼른 일어나 화장지를 몇 장 뽑아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고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회의원이었다는 것, 한강 다리가 아군의 폭격으로 끊기는 바람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것, 오랫동안 생사 여부를 모르다 근년에 와서야 아주 일찍 작고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손자인 내게 들려준 적이 거의 없었다. 그 가요 프로를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서 시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내 증조할아버지의 생애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띠고 부르면 절대 안 되는 노래라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불러야 할 노래, 그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듣게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동안 내게 한 번도 안 해주셨던 걸까?
2
6월 19일, 꿈에 부풀어서 나간 등원 첫날인데 공기가 좀 무거웠다. 그래도 우리 제2대 국회의원 120명 일동은 제7회 국회를 열어 개원식을 거행했고 의장단을 선출했다. 앞으로 국회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다들 얼굴에 ‘의욕 충천’이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날 국회의 분위기는 기대 반, 불안 반이라고 할까. 장마전선이 북상한 하늘과 같았다.
하루 일정을 다 마치고 나오는데 어느 의원이 근심 가득한 낯빛으로 한마디 했다.
“삼팔선 일대에 북한군 동태가 영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다른 의원이 반박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괴가 쳐내려오면 일주일 안에 퇴치한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 앞에서 국방장관이 허언을 했으려고요.”
“하모, 미 군사고문단이 버티고 있는데 쉽사리 못 내려와.”
“그놈의 에치슨 라인이……. 전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이런 얘기가 오갔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6월 25일, 새벽부터 북쪽에서 쿵쿵하는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 소식이 금방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라디오를 틀었더니 남침은 사실이었다. 우리 국군이 잘 대처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하라며 아나운서는 대통령・국방장관・참모총장의 말을 인용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3군 참모총장이 말했다.
“전면적인 공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한의 혼란을 야기하고 감옥에 있는 남로당의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입니다.”
참모총장은 너무 뚱뚱해 행동이 좀 굼떠 보였다. 요즘 군대 부식이 잘 나와서 저렇게 살이 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월 26일, 국회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는가. 대통령과 전 국무위원이 출석했다. 몇 시간 동안 사태 수습을 위한 회의가 이어졌다. 몇몇 화난 국회의원이 소리를 질렀다. 참모총장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말했다.
“북한군이 어느 규모의 병력으로 남침했는지 지금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삼팔선 쪽에서 교전이 심하긴 합니다만 여러분들이 불안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 군경이 수도를 잘 방비할 테니 여러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방장관이 옆에서 그를 거들었다.
“서울은 우리가 사수합니다. 우리 병력이면 격퇴는 물론이고 일주일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만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영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런 사람이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라니, 기가 찼다. 적의 병력과 우리 병력은 얼마만큼이고, 지금 어디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언제쯤이면 물리칠 수 있을지 따위의 구체적인 이야기 없이 큰소리만 치고 있으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6월 27일에는 국회의원들이 일찍부터 모여 여러 가지 일을 눈코 뜰 새 없이 했다. 우선 유엔과 미국 정부에 보낼 전통문의 초안을 잡고 꼼꼼히 수정한 뒤에 발송했다. 영어 실력이 좋은 의원과 보좌관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북한의 불법 침략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는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중대한 사태임을 강조했다. 미국 대통령과 미국 의회 앞으로 긴급 원조를 요청하는 메시지도 띄웠다. 의원들은 우리 정부도 어서 긴급조치를 발령해 국민의 동요를 막고 임전 태세를 갖출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수도 사수에 관한 결의안’과 ‘사태 수습 긴급조치에 관한 건의안’을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창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행정부가 국회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했대요.”
“국회의원들 각자 알아서 피신을 하든지 숨어 있든지 하랍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다들 남쪽으로 떠났다는데 우리가 계속 남아서 국회를 지켜야 할까요?”
이런 말을 하는 의원들 모두 낯빛이 컴컴해졌다.
‘정부가 국민과 국회를 버리고 피난을 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위시한 조정의 대신들이 의주로 몽진한 것과 똑같구나. 그때 임금은 백성은 버렸지만 문무백관은 데리고 의주까지 갔는데, 대통령과 장관들이 이 나라 국민과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까지 버리고 도망을 갔다고?’
저녁에 집에 가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오늘 국회에서 들은 말은 뉴스에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의정부, 동두천, 연천 등지에서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물리쳤다, 승리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국회 출입 기자가 쓴 기사가 몽땅 차단당했다는 뜻이었다. 이유가 뭘까?
6월 28일 새벽 2시 반부터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집 밖으로 뛰쳐나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한강 쪽입니다.”
처음엔 비행기 폭격 소리 같았지만 가만히 들어 보니 다리 폭파 소리였다. 인민군의 탱크를 두려워한 우리 국군이 한강 다리를 끊은 것으로 짐작이 갔다. 그럼 서울 시민이 몽땅 갇힌 것인가? 다리 폭파 소리를 알아챈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이 밝았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떠들썩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원 세상에! 정말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저벅저벅 시내를 행진하고 있었다.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다니. 서울 시민 모두가 독 안에 든 쥐가 되다니. 세 개의 한강 다리가 모두 폭파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빨갱이 세상이 되었네. 한강 다리가 죄 끊겼으니 피난도 못 가고……. 부자들은 이제 다 죽었다.”
“설마 부자라고……. 친일파들은 잡아내 처단하겠지.”
6월 29일, 수원으로 내려간 정부가 곧바로 대전을 임시 수도 삼기로 했다고 라디오방송이 전해 주었다. 우리 국군은 아직도 잘 싸우고 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특유의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로 용감한 우리 국군이 어쩌고 하면서 허망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서울이 점령되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한강 다리 폭파 명령을 내리기 전에 해놓은 녹음을 수원에 있는 방송국 지국에서 틀어 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일단 외출을 삼가고 집에 은거해 있기로 했다. 사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이 시국을 잘 버티고, 어떻게든 배를 구해 가족들과 남으로 피난을 가야만 한다. 지금은 잘 버티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6월 30일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7월 1일, 이른 아침에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커 아내가 투덜거리며 나가서 대문을 열었다. 방문을 빠끔히 열고 보았더니 세 명의 건장한 사내가 마당으로 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이 집에 국회의원이 있다는 고발이 들어왔소. 지금 집에 있소?”
“당신네들…… 누구시죠?”
“내무서원이오. 북에서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러 왔소. 남편이 국회의원이오?”
한 사내가 차고 있는 새빨간 완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방문을 왈칵 열었다.
“내가 국회의원 박○○요.”
“잠깐 물어볼 말이 있으니 동행해 주시오.”
“애들이 놀라겠소. 나가서 얘기합시다.”
아내를 돌아보았다.
“옷 좀 꺼내 주시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마당을 지나 대문으로 갔다. 다시 아내를 돌아보았다.
“조사받고 곧바로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죄를 진 게 없으니 큰일은 없을 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주시하는 아내, 내복 바람으로 엄마 품에 뛰어드는 두 아이가 눈에 밟혔다. 집 밖으로 나오자 붉은 완장을 찬 사내가 지프에 타라고 했다. 태도가 싹 바뀌었다.
“인민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하오. 인민이 낸 고혈로 국회의원이 되어, 인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착취하는 일에 앞장섰으니 당신 죄가 여간 무겁지 않소. 재판은 북에 가서 받게 될 거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해결할 수가 있는 일인가. 머리에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뇌리에 스쳤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 국회의원 된 지 이제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았잖은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벌을 받겠는가.
차가 움직이자 아내와 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뇌리를 스치는 부모님의 얼굴.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국회의원이 된 지 고작 한 달 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을 것이다.
5・30선거.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표차로 떨어지자 지인들과 동네 사람들이 애통해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는 공고가 나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될 겁니다. 뽑아 놓은 저 사람 그간 한 일도 없었으니.”
“제헌의원이라고 하지만 헌법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놀고먹은 겁니다. 이번에 반드시 출마하셔서 우리 동네, 우리나라 제대로 만들어 주십시오.”
부추기는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내 사업체를 그대로 잘 꾸려 갔을 텐데.
곧장 평양으로 갈 줄 알았던 차는 어느 공장 창고 앞에서 멈췄다. 동료 국회의원 여러 명이 이미 잡혀 와 있었다. 그들 속에 내동댕이쳐지고 나서야 나는 이곳이 서울의 미아리고개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 말로는 미아리고개가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 도로라고 했다. 북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면 여기가 바로 관문이었다. 잡혀 온 국회의원은 얼추 스무 명쯤 되어 보였다. 우리를 정말 북으로 끌고 가려는 것인가. 국회에 등원한 지 열흘 남짓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내게 몰아닥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제1대 국회의원은 더 많은 수가 모처에 잡혀가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우리는 창고 같은 감옥에서 보름 가까이 조사를 받았다. 성분 조사, 사상 조사, 사람들과의 관계 조사가 지겹도록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조사가 행해지는 동안 차례차례 잡혀 온 제2대 국회의원의 수가 총 27명,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당선된 120명의 국회의원 중 이 자리에 잡혀 온 우리 27명은 이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평양 당국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저자들이 우리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일단은 그게 제일 궁금했다.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볼모로 삼아 이승만 대통령과 협상을 하겠지.”
“한두 명도 아니고 스무 명이 넘는데 총살하면 자기들한테 득 될 게 없지.”
“우리를 협상의 카드로 써먹을 거야. 틀림없어.”
7월 20일, 눈매가 매섭게 생긴 젊은 장교가 사복 차림에 붉은 완장을 찬 꺽다리 중년 사내를 앞세우고 나타나 외쳤다.
“인민의 적인 당신들을 군용트럭에 태워서 북으로 이송할 수는 없소.”
이번에는 붉은 완장을 찬 사내가 목청을 높였다.
“남쪽의 인민들에게 인민의 적인 당신들이 어떻게 죗값을 치르고 있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당이 명령을 내렸소. 모두 이 군관의 인도하에 걸어서 북으로 가시오. 삼팔선 넘는 지점까지만 걸어가면 차량이 나올 거요. 발이 좀 아프더라도 그때까지는 참으시오.”
그들은 수갑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우리를 철삿줄로 묶었다. 손목이 찢어질 듯 아파 왔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두 아이 생각이 났다. 이제 겨우 열네 살 된 용구와 열두 살인 성연……. 이대로 식구들과 생이별이란 말인가?
소위 ‘평양 당국’이란 데서는 다수의 국회의원을 데리고 있으면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인민들에게 선전 도구로 쓸 요량으로 우리를 끌고 가기로 한 것 같았다. 남쪽의 국회의원들이 이렇게 많이 우리 품에 안겼소.
27명 중 보행이 불편한 둘을 제외한 25명이 철삿줄로 꽁꽁 묶인 채로 미아리 고갯길에 섰다. 일정 때 포승줄로 묶고 용수를 씌우는 죄수는 봤지만 이건 훨씬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노보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서울과 서울 외곽이 지역구인 국회의원의 가족들이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몰려들었다. 남편과 아버지가 미아리 고갯마루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근에서 민박을 하며 죽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사가 끝나면 대다수 석방해 주리라 믿었는데 몽땅 북한으로 끌고 간다니, 가족들도 모두 기절할 노릇이었다.
아수라장도 이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울고불고 완전히 아비규환의 도가니였다. 여보! 아버지! 석이 아빠! 삼촌! 아저씨! 아무개야!
우리는 모두 신발과 양말을 벗은 채였다. 살인범도 사형수도 이런 식으로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돼지 몰 듯이 내몰지는 않으리라.
이럴 수가! 울부짖는 일행 중에 아내가 있었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여보!”
목이 터져라 아내를 향해 외쳤다. 아내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여보!”
아내는 울고 있었다. 얼굴이 완전히 눈물범벅이었다. 애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들은?”
“어머니한테 맡기고 왔어요.”
“잘했어요. 이 와중에 애들 잃기 딱 좋으니.”
가족과 의원들 사이에는 총을 든 인민군들이 좍 도열하여 가로막고 있었다. 철삿줄로 두 손이 묶인 맨발의 국회의원이라니.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량은 무슨 선량인가. 포로고 인질인 것을. 인민을 착취한 중죄인인 것을.
“출발하시오!”
붉은 완장이 손짓을 하자 인민군 장교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복창했다.
“출발! 날래 가시오!”
우리는 걸음을 옮겼고, 뒤로는 수많은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몇몇 아낙이 실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도 대다수 흐느끼며 걷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회의원에 당선된 기쁨에, 등원의 설렘에, 나라의 온갖 현안을 처리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그래도 우리를 평양까지 이렇게 걸어서 이동시키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설마하니 다들 중년과 노년인 우리를 계속 맨발로 걷게 하지는 않으리라, 그 약속은 지켜 주리라 믿으며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시로 찌르는 듯이 발바닥이 아팠다. 아내는 여전히 주저앉아 울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3
“증조할아버지는 북한에 가서 어떻게 되셨을까요?”
“잘 모르겠다만, 일행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계속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을 거다. 만포면 고갯마루 문턱에서 이광수가 병사했다는 소식, 용성 가는 길에 최규동 서울대 총장이 폭사했다는 소식 등.”
할아버지는 열네 살 때 그렇게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와 헤어진 뒤 지금까지 북한에서의 아버지 행적을 알아내려고 팔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1972년 처음으로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이 노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아마 돌아가셨겠지만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무덤은 있는지 줄기차게 수소문했다고 한다.
납북은 국회의원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교수, 학자, 작가, 예술가, 정치가……. 이광수와 최규동 외에도 정인보,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사상개조를 위한 특별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제헌의원은 무려 40명이나 납북되었다.
국군이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어 북한군의 승리로 전쟁이 곧 끝날 줄 알았는데, 9월 1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서울은 9월 28에 수복되었다. 국군이 삼팔선을 돌파한 것이 9월 30일,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으니 서둘러 후퇴하게 된 공산당 수뇌부는 납북 인사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큰 숙제를 풀어야만 했다. 거의 100명에 달하는 이들을 먹이고 재우면서 함께 퇴각하기로 했다.
공산당 수뇌부는 성분 조사, 사상 조사 결과에 따라 납북 인사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북한에 비교적 협조적인 이들을 한 부류로 묶어 평양, 순천, 개천, 묘향산, 회천, 전천, 강계를 거쳐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 집결하기로 했다. 비협조적인 이들을 또 한 부류로 묶어 평양, 순안, 숙천, 안주, 박천, 태천, 운산, 적유령산맥을 넘어 초산, 강계를 거쳐 만포진 별오동에 집결하기로 했다. 뺑뺑이를 돌리며 고생을 시키고, 그 상간에 죽은 사람은 버리고 가는 방식이었다. 몇 대의 트럭에 태워 전자는 10월 8일에, 후자는 10월 9일에 평양을 출발했다.
나는 아까부터 궁금히 여기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왜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간 저한테 납북되신 제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나요? 대단한 애국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분단 상황에서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분이잖아요?”
“그건…… 북한에서는 납북 인사들을 모두 자진 월북한 이들이라고 계속 주장했기 때문이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고 있던 이들이 전쟁 발발과 함께 자진 귀순한 것이므로 ‘납북’이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고 한사코 주장했다는 것이다. 북쪽의 주장을 남쪽에서는 수십 년 동안 한마디도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거론했다가 자칫 잘못하면 월북자 집안이 될 수도 있었고, 그러면 평생 연좌제에 묶일 수 있어 함묵하기로 했던 것이란다. 70년대 말까지는 연좌제가 행해졌다 아이가.”
우리 집은 ‘신원 특이 가족’으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한다. 취직에는 불이익이 없었지만 해외에는 나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70년대 말까지 해외에 나간 적이 없었다. 물론 그때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지만.
게다가 정부는 거짓 방송으로 서울 시민들의 발을 묶고 줄행랑친 것에 대해 누구 한 사람 사과하지도 않았다. 납북자들 생사 확인에 나서지도, 그들의 명예 회복에 힘쓰지도 않았다. 국회의원 사망자 유골 송환에 누구 한 사람도,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래서 그간 침묵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났지.”
“그게 무슨 일인데요?”
할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두 장의 신문을 들고 나왔다. 2000년 12월 21일자 <조선일보>와 2005년 7월 27일자 <동아일보>였다. <조선일보> 40판 ㉮ 제5면 정치면 기사를 읽어 보았다.
최병렬(崔秉烈) 한나라당 의원은 20일 전대열(全大烈) 한나라당 서울 강북을지구당 위원장이 청원한 ‘납북 국회의원 생사 확인 등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최 의원은 청원 소개 의견서에서 “6・25전쟁 중 제헌의원 40명과 제2대 의원 27명(4명 중복)이 납북됐다”며 “우리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는 무조건 북한에 송환하면서, 우리 제헌의원과 제2대 의원의 납북 문제를 북측에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최 의원은 “이제 국회 차원에서라도 이들에 대한 생사 확인과 함께 유해 송환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정부도 이들의 생사 확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사 밑에는 청원서에 기록된 납북 의원 명단이 실려 있었다. ◆ 제헌의원 강기문(산청), 구중회(창녕), 권태희(김천), 김경도(함양), 김경배(연백)……. ◆제2대 의원 구덕환(서천), 김용무(무안), 김철성(부산), 김헌식(논산), 박성우(상주)…….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네 증조할아버지 함자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였지만 실룩거리는 입가가 보였고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아일보>에는 더욱 놀라운 기사가 실려 있었다. 증조할아버지가 1954년 2월 4일에 작고했으며, 평양시 용궁동 ‘재북 인사 묘역’에 비석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신문기사를 읽고 있노라니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평양발 기사였다. 남쪽의 기자가 북한에서 쓴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것이었다. 사진도 실려 있었다.
“그해 7월 20일에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남북작가대회 본대회가 열렸느니라. 그때만 해도 남북이 통일의 물꼬를 트고, 무슨 일을 낼 줄 알았다.”
평양 시내에 새로 만들어진 납북 및 월북 인사 묘역에 안장된 62명 전체 명단이 한국 측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월간지 《민족21》은 지난해 5월호에 완성되기 전의 이 묘역을 소개한 바 있다. 북한은 20~25일 평양 등지에서 열린 남북 민족작가대회 기간 중 남측 참가단의 요청에 따라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1동에 있는 ‘재북 인사(납북 및 월북인사) 묘역’을 공개했다.
이곳에는 춘원 이광수, 국문학자 위당 정인보, 안재홍 전 민정장관,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김약수 최대 국회부의장, 송호성 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백상규 전 적십자사 총재, 무정부주의 애국지사 박렬 등 6・25전쟁 당시 납북 및 월북한 저명인사 62명의 묘가 조성돼 있다.
이중 제헌의원을 지낸 이는 23명,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는 21명이다. 묘역 안내원은 “원래 이들의 묘는 평양시 삼석구역 정동, 형제산 구역, 신미리, 용추동 등에 흩어져 있었는데 2003년부터 여기에 안치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계속 조성 중”이라며 “친일 반공 인사들의 묘도 있지만 ‘통 큰 정치’의 일환으로 안치했다”고 말했다. (……)
62명의 명단 옆에는 사망했을 때의 나이와 출신 지역, 직업(현직과 전직), 작고 일자가 적혀 있었다.
“나이를 봐라. 47세, 한창 혈기 왕성할 이 나이에 왜 죽어야 했을까?”
“전쟁 중에 포로로 계속 끌고 다니면서 먹을 걸 제대로 줬겠어요? 수십 명이었는데.”
일전에 북한 적십자사에서 증조할아버지의 근황을 잘못 알려 준 적이 있다고 한다. 1956년 7월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뽑혔고 1957년에 협동농장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생존의 희망을 놓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라고 정정하고는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이후 증조할아버지 함자 아래 ‘1954년 2월 4일 서거’라고 적힌 비석과 비석에 박힌 사진까지 확인된 것이다. 우리 기자가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도록 북한이 허락해 준 덕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정부는 납북 유가족이 ‘납북’이란 말만 꺼내면 남북 화해 무드가 깨진다는 식으로 반응을 해서 지금까지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북한이 기분 나빠하니까 납북자라는 명칭을 쓰지 말고 실종자로 바꾸자고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지. 그런데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저렇게 신바람이 나서 웃으며 부르다니…….”
할아버지가 내게 화장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짜식, 사내가 눈물 헤프면 못 쓴다.”
4
내 이름은 박창오다. 1917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39년에 진방남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해 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42년에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작사 활동도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많은 친일가요를 작사했다. 그때는 남들처럼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이치느라 그게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해방된 후 크게 반성했다. 돈만 밝히던 나를 죽이고 새로 태어나자고 결심했다. 여기저기서 희망에 찬 노래를 많이 불렀고, 특히 작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열차를 타고 처갓집이 있는 경북 김천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김천의 터줏대감인 작곡가 나화랑이 있었고, 콤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화랑은 육군본부 군예대(KAS)에 입대해 악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전후방 각 부대를 찾아다니며 위문 활동에 매진했다. 노래를 부를 때 군인들이 따라 부르는 것이 제일 좋았다.
나는 처자식을 서울에 둔 채 나름대로 애국하면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9・28 서울 수복 후 집에 가보았더니, 둘째 딸이 죽었다고 했다.
“여름 내내 쌀밥은 한 끼도 못 먹었어요. 호박과 감자로 연명하던 중에 둘째가 더위를 먹었는지 탈진 상태가 되어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
그때 둘째는 다섯 살이었다. 9・28수복은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총소리와 대포 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그 소리들이 어떤 날은 멀리서 들려왔지만 어떤 날은 가깝게 들려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그 와중에 둘째가 경기를 일으키더니 얼마 안 가 숨을 거두더라는 것이다. 아내는 이웃 아낙한테 들은 또 다른 이야기도 해주었다. 1950년 7월 20일, 국회의원들이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던 날, 이별의 장면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통한 마음으로 펜을 잡았다. 그들은 철삿줄로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걸어갔다고 한다. 맨발로 다리를 절고 또 절며. 북한에 끌려가서는 감옥살이를 한 것으로 보였다.
딸을 죽인 것이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바로 나였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아빠의 보살핌이 없어서 죽어간 내 둘째 딸을 위한 이 아비의 참회록이다. 가수 이해연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졌다. 그때 끌려간 그 많은 국회의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남한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심정은 어떨까. 내가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그때의 그 고생, 그 고통을 잊으면 안 된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 북한이 하는 짓을 봐라.
5
나는 대학생이자 군인이다. 휴가를 받아 집에 와 있다가 할아버지로부터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는 1910년생으로 우리가 일제에 강점되던 해에 태어났다. 1954년이면 40대 중반의 나이. 왜 그 젊은 나이에 북한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을까. 북한의 회유에 반항하다가 처형당한 것일까. 무슨 병이 들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 걸까. 그래도 다행히 북한은 묘를 썼고 비석까지 세웠다. 비석에 사진을 넣어 주기까지 했다. 정말 애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해준 것일까. 남쪽과의 대화에 이용하려고 조성한 묘역일까.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일들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 그건 오로지 내게 주어진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서 평양에 갈 수 있다면 용성구 용궁동에 있는 재북 인사 62기 묘역에 꼭 가볼 것이다. 가서 분향하고 큰절을 올리리라.
할아버지가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의안번호 제 0091호. 납북자 결정서. 성명 박○○. 귀하를 6・25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라 납북자로 결정합니다.
2017년 4월 27일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국무총리 황교안
대한민국 정부가 증조할아버지를 납북자로 인정해 준 것이 2017년 4월 27일이라면 67년 만의 일이다. 67년 동안이나 내 증조할아버지는 자진 월북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환한 얼굴로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나 또한 분노가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약력>
문예창작학과 79학번.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8년 제2회 1천만원 상금 KBS방송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받아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 출간. 1999년부터 2025년까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재 명예교수, 중앙문학회 미래발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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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아! 이승하 교수님 소설, 끝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