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 사 : 곽노순 (목사, 후기기독교신학연구소 연구실장) ● 일 시 : 2001년 5월 9일 (수) 저녁 7시 ● 장 소 : 여성경제인협회 충북지회 세미나실 |
생태교육연구소 ‘터’
충북 청주시 흥덕구 복대2동 917번지 / 전화: (043)234-3429 전송: 235-3429 http://www.ter.or.kr 전자우편 ter@ter.or.kr
생태적 삶과 영성
곽노순 (목사, 후기기독교 신학연구실장)
올 여름 동해안 피서객이 지난해 두 배인 600만명이나 몰린 것으로 집계됐다. … 백사장은 쓰레기장이고 밤의 해수욕장은 거대한 술판이나 다름없다면 이건 휴양이 아니고 추태와 광란이다. … 취객들의 고성방가로 분위기를 흐리기 일쑤다. 경포대 해수욕장에서만 하루 평균 20t의 쓰레기를 수거한다니 백사장인지, 쓰레기장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피서객들이 떠난 자리에는 술병과 캔, 포장지와 담배꽁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심지어는 기름기 있는 음식 찌꺼기나 과일 껍질을 모래 속에 묻는 얌체족들도 적지 않다. 그로 인해 일부 지역 모래는 검게 변했고, 비가 오면 청정바다가 쓰레기로 오염된다.
놀이에도 문화가 있다. 선진국의 피서지에서는 가벼운 스포츠를 즐기거나 독서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여 앉으면 화투판이나 술판을 벌이는 게 일상화되다시피 했고, 고기를 구워대는 연기가 주위에 진동한다. 도대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에티켓은 찾아보기 어렵다. …
이상은 8월 10일자 조선일보 사설내용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우리는 툭 하면 천 년 묵은 기억장치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을 운운한다. 이미 동방무례지국이요, 허례지국임을 자타가 다 아는 터에 도리어 일본이나 서구사회를 퇴폐문화라고 하는 것이 입버릇처럼 되었다. 왕래가 빈번하여 가서 본 사람들이 즐비한데도 여전히 동방예의지국론과 퇴폐문화론을 입에 올리는 것은 눈을 꽉 감고 우리 자신들의 진면목을 대하기가 두려워서일 게다. 이 꿈꾸기를 깨지 않는 한 광란의 금수(禽獸)강산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한해 동안 우리들이 도로에서 서로 죽이거나 다치게 한 수가 70만명이라는 끔찍한 통계가 나왔다. 자전거 탄 아이가 앞에 사람이 있으면 멈추거나 돌아서 가야 할 텐데도,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찌르릉 찌르릉 비켜나세요.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 노인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고 상대를 업신여시며 질주하려는 위험한 동요를 불러오더니 저마다 차 한대씩 달리며 기여코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강토를 마구 파헤치며 또한 인명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한반도에 살기(殺氣)가 판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살기는 인간들이 곰이나 사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빨대로 웅담이나 피를 빠는 습성과 무관한 것일까? 바다 생물들을 산 채로 끓이거나, 꼬리치며 정을 나타내던 동물을 때려서 잡는 야만스러움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용의 눈물이나 왕과 비와 같은 사극이 보여주듯 권세 있는 인간들이 한상 퍼지게 차려먹는 행태와 사람 잡을 궁리를 하는 것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성이 존재하는 듯하다. 아무튼 강토를 마구 파괴하며 한해에 70만명씩이나 서로를 살상하면서도 걸핏하면 우리들은 몇 백 년 묵은 기억장치로부터 상생이니 홍익인간이니를 들먹인다. 이런 잠꼬대가 멎지 않는 한 살기에 대한 불감증은 가셔지지 않으리라.
그러면 누가 이런 광란과 살기를 멈추게 할 건가? 그 해답은 자명하다. 어지간히 먹고, 어지간히 나대면 된다. 헛소리를 끊고 우리 자신을 직시하며 부끄러워 할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맑은 정신과 조용한 것을 즐길줄 알면 된다. 그러면 우리를 낳아준 자연이 가지런히 놓여 있음에 눈뜨리라. 벌들은 꿀을 따지만,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망가트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잠시 사람으로 살다가는 이 푸른 행성의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느끼는 데 있다. 이를 영성이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그림자를 생태적 삶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 *
산에 핀 꽃이여, 산에 핀 꽃이여, /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어
불함산에 봄이 오니 꽃들은 울긋불긋 / 천신(天神)을 섬기며 태평을 즐기네(단군세기).
멀고 먼 옛시절에도 산에 나무를 해마다 심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산에 핀 꽃을 노래하는 여유이니 밥먹는 일은 해결된 모양이고, 그리고서 함께 천신을 섬기며 태평을 즐긴다고 한다. 불함산 주위에 쓰레기나 고성방가, 술판이 있었을리 만무이다. 이 모두 우리 선조들 의식 속에 땅도 하늘도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고조선인들의 영성과 생태적 풍속도가 부럽다.
살생에 법이 있나니 위로 국왕으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름지기 스스로 때와 물건을 가려서 하나도 함부로 죽이지 아니하였다. … 그러므로 잠자는 것을 죽이지 아니하며 알 품은 것을 죽이지 아니함은 때를 가리는 것이요, 어린 것을 죽이지 아니하고 유익한 것을 죽이지 아니함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의가 이처럼 가히 지극하다 할 것이다(태백일사).
고대의 부여인들은 부득불 먹어야 하는 존재로써 그 먹이를 선택적으로 하므로써 생태적 보존에 마음을 섰던 것이다. 이렇듯 절도를 지닌 이들은 분명 인간 피차끼리도 아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오늘날 닥치는대로 마구 잡아먹어 씨를 말리며 서로도 죽이는 후손들의 모습을 본다면 무어라 할까? 어리석다 할 것이요,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바울은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들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로마서 8:19)고 2000년 전에 설파했다. 바로 고조선인들과 부여인들이야말로 그런 하느님의 자녀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한 언어의 거품을 걸어낼 때다. 그리고 선조들을 본받아 땅과 하늘을 마음에 품는 영성을 지닐 때 이 강토에 뭇 생명을 존중하는 생태적 평화가 정착하리라.
월간 "진리의 벗이 되어" 2000년9월호
자연적 삶과 영성 수련
곽노순 (목사, 후기기독교 신학연구실장)
Ⅰ. 병폐를 씻는 일곱 가지 갑옷 입기
1. 담대하고 당당하라
왼손으로 목을 뒤로 훑어서 서너 번 문질러 줍니다. 손을 무릎에 내리고 편안하게 합니다. 눈은 떠도 감아도 좋습니다. 다음에는 오른손으로 목뒤를 훑어서 서너 번 문질러 줍니다. 이번에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서 목 앞쪽에서 밑으로 훑어 내립니다.
이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몸의 차이를 느껴보십시오. 목덜미가 훈훈하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와 2000년 동안 우리가 만든 예수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친절한 척하며 속으로는 미워도 겉으로는 씽긋 웃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죠. 그런데 예수는 '그 집이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면 신발 흙까지 떨구고 딴 데로 가라' 또 사람을 선별해서 '돼지에게 진주 던지는 꼴이 되지 않게 하라' '오른손이 잘못했으면 오른손을 도끼로 잘라라' 이런 무서운 얘기를 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목이 훈훈하면 예수의 존재양태를 닮아 당당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고, 당당하면 불필요하게 남이 집적거릴 기회를 줄여서 남이 죄지을 기회를 줄일 수 있습니다.
2. 자기영역을 지키라
손을 깍지 낀 상태에서 배꼽에다 대고 숨을 들이쉬면서 위쪽으로 훑습니다. 팽팽하게 숨을 들이쉰 상태에서 가만히 있다가 내쉬면서 천천히 풀어 줍니다. 숨은 코로 쉬어도 좋고, 입으로 해도 좋습니다.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쉽니다. 배를 홀쭉하게, 그리고 천천히 내쉽니다. 이것은 뱃심을 길러 주어서 하느님이 만든 창조세계에서 자기 영역을 지킬 수 있게 해줍니다.
3. 수줍음을 없애라
오른손으로 가슴 윗부분에서 아래로 훑어서 배꼽까지 쓸어줍니다. 서너 번 천천히 인두로 미는 것 같이 합니다.
가슴 앞쪽에서 밑으로 잔잔한 더운 기운이 흘러가게 되면 수줍음이 없어집니다. 수줍음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감추기 위한 방식입니다. 수줍음 중의 하나가 죄의식(guilty)인데 기
독교인들에게 흔히 병을 일으키게 하는 항목입니다. 예수는 자기 동포들이 미주알 고주알다 죄가 된다고 하고 또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 죄의식에 병들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도 들어보고 않고 무조건 '네 죄를 사한다'고 하면서 그 사회의 뿌리깊은 병을 제거했습니다. 이렇게 33살의 젊은 예수는 '용서하는 것'을 지구에 유산으로 남겼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교회는 죄의식이 가장 많은 인간을 배출해냈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자기 자신을 지키라
갓난아기가 잘 때 하는 것처럼 다른 네 손가락으로 엄지를 감싸고 주먹을 꽉 쥔 다음(아기주먹) 힘을 뺍니다. 그리고 이 형태를 유지한 채 헐렁하게 차렷자세 때처럼 팔을 아래에 내려놓습니다. 그런 다음 숨을 들이쉬면서 어깨를 한껏 올립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힘을 빼고 어깨를 턱 내려놓습니다.
이 자세는 숫기를, 당당하게 나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는 백만 년 사는 동안에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여자는 숫기가 있을 필요가 없다', '얌전하고 이쁘고 순종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사자를 만났는데 자세히 보니까 암놈입니다. 그렇다고 맘이 놓이겠습니까? '암 사랑은 유약하다.' 이것은 인류의 길들이기 작전입니다. 일본에는 사무라이 시대가 있었습니다. 칼을 차고 다니기 때문에 그것을 만든 다음 잘 되었나 시험해보기 위해서 지나가는 사람 목도 베었습니다. 피차가 칼을 찼기 때문에 수백 년 지난 후에도 말이 길지가 않았을 뿐더러 상대에게 조심해서 말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은 모든 짐승의 논리요, 자기를 지킬 준비를 하면, 판단의 서늘함
이 생기게 됩니다. 고대의 추장이었던 아브라함, 에녹, 노아도 이런 자세로 당당하게 두발로 대지 위에 선 것이며, 그것을 기초로 나중에 사랑, 친절, 용서의 덕을 실현했던 것입니다. 목과 가슴과 배와 어깨를 이렇게 조율하면 내 영역은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 가지 자세를 할 때 이 행위 자체가 중요한가 보다 하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수영 선수가 스프링보드에서 몇 번 도약하다가 다이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한 다음 가만히 있을 때 오는 그 여운, 진짜 엑기스를 즐기는 것이 동양입니다. 그래서 할 때보다 하고 난 다음에 오는 독특한 진동이 신체 부위에서 퍼져 나가는 것을 예리하게 쫓아갈 적에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문도 즐기고 시도 즐기는 것처럼, 또 가사가 있는 유행가도 즐기고 가사가 없는 클래식도 즐기는 것처럼 '함'(doing)과 '하지 않음'(non-doing)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요.
5. 너그러워지라
양손으로 귀를 조금씩 잡아당깁니다. 천천히 부드럽게 조금만 만져주고 손을 내려놓습니다. 시계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면 천지 자연에 있는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하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게 됩니다. 지금쯤 박하사탕처럼 싸- 하는 따뜻한 기운이 얼굴 쪽으로 퍼져 코위로도 머리도 훈훈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누가 툭 쳐도 씩 웃고 누가 사기 치려고 해도 '에이 가져가라 가져가' 하는 관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팔 때 블레셋 사람들이 돌로 메우면 '다른 데서 파지' 하면서 계속해서 열댓 번 장소를 옮기는 것과 요셉이 형제들에게 모함을 당해서 팔려 갈 때와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만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어라' 하는 예수의 말을 실천할 수 있고 남의 허물을 덮어 주고, 양보하고, 잊어 주고, 또 때로는 속아주는 바보나 어린아이의 소박함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정황은 귀가 따스해지는 것을 한번도 맛보지 못한, 즉 스케이트 안 신고 빙판을 지치는 시늉들을 하는 실정입니다.
6. 평안함을 찾으라
손으로 얼굴을 좀 문지릅시다. 손에서 기운이 나오니까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됩니다. 다했으면 손 내리고 가만히 물결 같은 여운을 즐깁시다.
이런 상태를 평안이라고 합니다. 얼굴이 아랫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집니다. 전신에 관한 정보가 얼굴, 귀, 손바닥, 발바닥에 축소판으로 있는데 거기에 침을 놓는 것과 같은 효과가이 동작입니다. 그래서 자주 얼굴을 만지면 좋은 것이고 여자가 남자보다 10년이나 오래 사는 것도 남자들보다 여자의 손바닥이 얼굴에 가는 횟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7. 태양처럼, 사자처럼
손바닥 밑 가장자리로 얼굴을 사방으로 둘러 가면서 밖으로 세 번씩만 문지릅시다. 12시방향에서 세 번, 1시와 11시 방향에서 세 번,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5시와 7시 방향, 마지막으로 6시 방향에서 마칩니다. 다 했으면 손이 수고했으니까 내려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편안하게 쉽니다.
이 동작은 축도에 해당하는 것인데 얼굴이 광채 나는 태양, 혹은 사자처럼 느껴집니다. 눈을 감았어도 눈앞이 환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열과 빛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목 밑으로 열을 가한 것이고 귀에는 짜릿함을 얼굴은 환함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몸은 더움으로 노곤하고 머리는 밝음으로 환해진 상태를 불가(佛家)에서는 선(禪, Zen)이라 합니다. 그리고 고대인들이나 짐승들은 사냥을 나가서 먹이를 기다리다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중에 이것을 다 경험했습니다. 바로 고요한 상태에 들어가서 자연의 출렁거리는 기를 느꼈던 것이죠. 인간은 뇌를 써서 지구를 점령하고 지금 그 값을 치르고 있는데 이제는 가끔 뇌에서 몸으로 오는(Come back to body) 안식을 취해야 합니다. 엿새 뇌 쓰고 하루 몸을 쓰라는 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사람이 한번은 어떤 이를 따라서 유럽 여행을 갔습니다. 이것저것 편리한 것이 많은데, 샤워기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틀어보니까 소나기가 막 나오는데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꼭지 하나를 훔쳐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후 벽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안 나오는 겁니다.
감옥소에 진짜 도둑과 어떻게 해서 들어 왔는지 철학 전공 한 사람이 함께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손발이 잘 맞아 어느 날 밤 둘은 지붕의 기왓장을 밟으며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도둑이 앞장을 섰고 철학자는 뒤에 쫓았습니다. 한참 가다가 도둑이 발을 잘못 짚어 기왓장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지나가던 경비원이 "이게 뭐야?" 하자 도둑이 "야옹!" 했습니다. 또 한참 가다가 뒤에 있는 사람이 기왓장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비원이 "누구야?" 그랬더니 그 철학자는 "고양이예요" 했답니다.
영성이란 벽에다 샤워 꼭지 붙이는 게 아니며, 자연적인 삶이란 우리 존재에서 '야옹' 소리가 나와야지 '고양이예요' 하는 문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한 일곱 가지 동작은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있는 쭈뼛쭈뼛하고, 죄의식(guilty)에 빠지고, 속은 용서할 준비도 안 됐는데 용서한다고 하는 병폐를 씻어주어 남을 용서하고 관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인간상으로 정형시켜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갑옷'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우리가 갑옷을 입고 나가야 되니까요.
Ⅱ. 피곤을 풀어주는 세 가지 묘약
1. 목에 힘을 빼라
숨 들이쉬고, 고개가 완전히 90도로 꺽일 때가지 왼쪽으로 천천히 돌리면서 내뿜습니다. 다 했으면 숨 들이쉬면서 앞으로 옵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숨을 내뿜습니다. 그런 다음 숨 들이쉬면서 앞으로. 앞으로 왔으면 숨을 내쉽니다.
2. 감각기관을 활성화시키라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숨을 들이쉬면서 고개를 완전히 떨굽니다. 들이쉬면서 앞으로 옵니다. 다시 숨 들이쉬면서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힙니다. 그리고 내쉬면서 앞으로. 다 했으면 손 내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사물을 보십시오. 머리가 맑아졌고 흐리멍덩하던 오관이 고도의 사진기 감광지처럼 활성화되어 하느님이 만든 피조물을 다 만져보고 핥아보고 감각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하루 동안에 남이 내게 욕한 것, 칭찬 받았다고 괜히 우쭐했던 것들을 쓸어내는 방법이 이 두 동작입니다.
3. 감정의 찌꺼기를 씻어내라
오른손 엄지로 오른쪽 콧구멍를 막고 왼쪽 콧구멍으로 마음껏 숨을 들이쉽니다. 그런 다음 둘째손가락으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숨을 참은 다음 엄지를 열어 숨을 마음껏 내쉽니다. 다시 오른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쉬고 엄지로 막은 다음 머물고 둘째손가락을 열어 내쉽니다. 이것은 원망이나 슬픔 같은 감정의 찌거기를 말끔히 증발시켜주는 동작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장성한 아들을 교육시킨답시고 여자들이 벌거벗고 춤추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부자가 나란히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들은 황홀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속 "에이, 에이 참" 합니다. 한참 듣던 아들이 아버지를 쿡 찌르면서 "아버지, 저만하면 됐지 뭘 그러세요" 했더니 아버지 말이 "에이, 니 엄마 말이다."
한 도인이 거의 동년배인 제자들과 함께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데마다 따르는 이들이 "스승님, 스승님!" 하는 것이 언짢아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내가 선생인 것을 티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관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밥을 먹은 후 여관집 주인의 차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자로 받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방을 둘러보며 "누가 나를 선생이라고 알려줬느냐?"고 하자 다들 안했노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내가 스승인 걸 어떻게 아셨소?" 여관집 주인은 "저는 이 한자리에서 30년 여관업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손님께 차를 드렸는데 지금 선생님처럼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고 이 차와 입술과 물뿐인 양 이렇게 계신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떻게 제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늘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애인하고 있으면 시험 볼 교과서가 떠오르고, 교과서를 펴면 또 애인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세 가지 동작은 필름이 포개지듯이 몸과 의식이 포개져서 홀연히 지금-여기(here-now), 하나의 나로 그득해집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함'을 알게 되고, 과거에 대한 잘못도 미래에 대한 근심도 사라져 구름 사이로 빼꼼한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몸을 먼저 고치는 방식을 택하신 것이며, 또한 이것은 도교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드웨어인 몸을 고치면 지극히 작은 힌트와 작은 예화, 짧은 설교만 들어도 양약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금-여기의 상태에 있어야만 맹수처럼 살아 있을 수 있고 인생을 흠 없이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찰나를 사는 것입니다. 80년 살아도 찰나인데, 찰나를 살아봐야 그것의 앙코르로 영혼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을 또 주문할 수 있습니다. 매번 흩어져서 분열증으로 살면서 어떻게 신청곡은 그것으로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형편에는 하느님이 응답하려 해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몸은 여기에 마음은 저기에 있으니까요.
현대인은 늘 피곤하거나 허약하거나 병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근심 걱정 매일 하는 사람은 위가 탈이 나고, 슬픔이나 좌절을 오래 하면 폐가 상하고, 탐욕이 지나치거나 조급증이 과하면 심장이 고장나며, 울화가 터지고 난폭하면 간에 문제가 생기고, 무서운 것이 많으면 신장병이 납니다. 또 마감 날짜에 쫓기는 사람은 치질이 걸립니다. 생애의 작은 기쁨이 다 빠져나간 사람은 당뇨에 걸리고, 남을 이래라 저래라 집적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대개 대머리가 되며, 결단할 것을 보류하면 잇몸에서 피가 나고 잇병이 납니다. 변비는 인색한 사람이 걸립니다. 똥도 아깝다는 거죠. 이렇게 몸이 다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만든 기계는 우리가 만든 컴퓨터보다도 더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미세한 것을 관찰할 만큼 여유가 있고 고요하냐 하는 것이지요.
Ⅲ.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손 자세
1. 힘이 솟게 하는 자세
양손을 깍지 낀 상태에서 가운데 손가락만 세웁니다. 그리고 책상에 놓아도 좋고 무릎에 놓아도 좋고 힘있는 사람은 들어도 좋습니다. 대개 "숨은 어떻게 쉽니까?" 하는데 몸이 알아서 하게 하면 저절로 숨이 깊어집니다. 지네가 길을 가다가 개미를 만났습니다. 개미가 지네더러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다면서 "도대체 언제 오른발 내고 언제 왼발 내냐?"고 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던 지네는 결국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못했습니다. 이제 숨을 아홉 번 쉽니다. 이것은 심장 부분을 특별히 훈훈하게 해주어서 힘을 솟구치게 하는 방식입니다.
2. 평화롭고 조화롭게 하는 자세
다음에는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만 세우고 다른 손가락은 깍지를 낍니다. 아홉 번 숨을 쉽니다. 지금 하는 동작은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분노할 까닭도 두려워할 까닭도 없게 하는 것이죠. 넷째 손가락은 간에 해당하고, 화나는 것과 관계되며 다섯째는 신장과, 겁나는 것에 관련됩니다. 평화라는 것은 바로 두려워 할 대상도, 화를 퍼부을 대상도 애초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간과 신장이 건강하기 전에는 도저히 이 맛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 자세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3. 치유케 하는 자세
이제는 둘째 손가락만 세웁니다. 숨 아홉 번을 쉽니다. 둘째 손가락은 만병통치를 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폐를 건강하게 하여 호흡을 원활하게 합니다. 호흡이 왜 모든 병을 고치는가? 편도선, 두통, 설사가 났을 때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서는 가만히 있어 보십시오. 숨결이 벌써 달라진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지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전화도 한 통 없어 우울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될 때, 가만히 앉아서 이 자세로 10분 내지 20분간 있어보십시오. 그러면 홀연히 그런 생각을 한 게 이상하고 존재의 상태가 지하실에서 10층으로 올라온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산 정상에 서면 모든 것이 조그맣게 보이고 그러면 항아리에 물이 가득찬 것처럼 존재가 뿌듯해지고 제왕이 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대학교수인 어떤 사람이 동료의 임종에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는 이에게 위로는 커녕 한마디의 말도 안 했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죽는 당사자가 뭘 좀 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걱정말게, 자넨 죽지 않아." 처음에는 농담으로 알아들은 동료가 "지금 숨이 넘어가는데 안 죽는다니 농담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아니, 진심이야. 안 죽어. 산 적이 없으니까"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욕망과 후회 사이에서 떠내려간 이것을 자네는 삶이라고 부르겠는가? 자네는 산 적이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결코 죽지 않아"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펄펄 뛰던 이 친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네. 나는 삶도 삶처럼 못 살았는데 자네의 말이 아니었으면 죽음도 죽음으로 못 맞이 할 뻔 했어" 하고 갔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만 강조하면서 나는 안 죽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죠. 나 아닌 누군가가 대신 죽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태어날 때 내 이름으로 태어났듯이 가는 것도 내 이름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예수가 '이렇게 하렷다' 하고 멋있는 동사 변화표를 보여주면서 본을 보이고 또 구체적인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신비한 방법으로 접근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천 년 동안 해 온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는 짓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대로 살렸다" 한 그분의 무서운 말씀에 부딪혀 존재론적 나태의 허물을 벗고 '태어났고, 살았고, 웃었다'는 힘있는 선언 앞에 잠시 멈추어서야 겠습니다.
이런 여러 자세는 제왕처럼 뿌듯해지고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살 수가 있는 것이고, 죽을 수가 있으며 더 나아가 부활할 수가 있습니다. 죽지 않고 어찌 부활하며 살지 않고 어찌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Ⅳ. 그러면 자연적 삶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자연한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대자연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인식이 동트는 것입니다. 넷째, 대자연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를 품고 사는 사람이 어느날 자기 존재에서 '야옹' 소리가 나오는 것을 자연적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롤도라는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깊은 밀림으로 들어가서 한 인디안 밑에서 10년간 약초에 관해 연구하면서 제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은 온갖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로 그를 데리고 가서는 "오늘은 너를 한번 테스트 해보겠다. 이곳의 시끄러움이 멈추지 않도록 걸어보아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살금살금 두 발자국을 떼었고 그때까지는 동물들이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발자국을 떼는 순간 앵무새 소리도, 원숭이 소리도 멎었습니다. 제자는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향수를 뿌리고 면도를 해서 냄새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서는 때마침 다른 인디언이 잡아놓은 짐승의 기름조각을 가져다가 온몸에 칠하고는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세 발짝까지는 성공했으나 다음 순간 소리가 뚝 멈추었습니다. 인디언 스승은 "짐승이 네 몸의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네 속의 포악함과 난폭함을 냄새맡은 것이다"고 말하면서 직접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가 숲을 지나갈 때 짐승들의 오만 가지 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이 교수도 이것을 수행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책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장로, 목사, 감독, 총회장을 뽑을 때 이런 테스트를 하면 어떨까? 궁금증을 일으키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티베트 어느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동네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히말라야에서 도를 닦던 사람이 호랑이가 드나드는 성문 앞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러자 호랑이가 와서는 그냥 가고, 그냥 가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싱거운 반찬은 안 먹고 양념이 잘 된 것만 먹는 것처럼 짐승도 양념이 잘 된 사람, 즉 공포(fear)에 절어 있는 사람만 먹는가 봅니다. 또한 그 도인은 공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타생명에 대한 연민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만해라" 하며 타일렀던 것입니다. 난폭함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난폭한 사람은 겉은 우락부락하지만 속에는 겁이 많은 것이죠. 따라서 자연적 삶이란 난폭함과 두려움이 말끔히 씻겨진 것을 말하며 채식만 했다는 다니엘이라는 소년처럼 언제든 죽어도 좋다며 자기 운명을 하늘에 내어 맡기는 덤덤함을 체현한 삶을 의미합니다. 성경 몇 번 읽었느니 교리문답 한다느니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존재들의 의식에 있는 구체적인 무언가가 우리 속에도 꽃피워져야 하겠습니다.
16년동안 한 인디언 스승에게 사사를 받은 인류학자 케스타네다는 첫날 제자로 받아 주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때 '자신의 자리를 찾는' 시험 문제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없고 깜깜한 하늘에 별만이 초롱초롱한 산골 초가집 뜰에 선 그는 문제 자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냥 마당에 앉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멍하게 보니까 이상한 곳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나는 앉으면 무서움, 근심, 걱정 같은 감정이 일어 몸이 소스라칠 정도로 움츠러들게 하고, 또 다른 곳은 아주 편안하고 나른해져 잠이 스르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우연인가?' 하며 그 편안한 자리에 가서 앉으려니까 옆에 선생이 나타나서 "자네, 드디어 찾았구만" 했습니다.
100-200년 문명을 일구어 오는 동안 인간의 몸은 다 죽어버렸습니다. 남자의 몸보다는 여자가, 여자보다는 아이, 아이보다는 짐승, 짐승보다는 식물, 식물보다는 광물, 광물보다는 지구가 더 예민한 존재입니다. 초속 30Km의 속도로 45억년을 달린 이 덩치 큰 존재가 가장 예민하다니 경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날 때 쥐나 닭은 예민하게 알아채는데 반해 사람만 아둔하게 가만히 있다가 당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다, 첨단 과학이다 하며 뽑내는 인간들이 온갖 장비를 다 갖추고도 당하는 꼴을 보면 짐승들이 얼마나 깔깔거리고 비웃겠습니까? 이렇게 인간들의 몸이 굳어버린 까닭은 생각과 말 때문입니다. 가끔 말과 생각을 멈춘 사람만이 이 지구 전체의 움직임과 춘하추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몇 천년 몇 백년 동안 삼라만상, 산천초목, 금수강산이라 부르던 것을 언제부터인지 '환경'이라 칭하면서 인간들이 주인이고 자연은 도구일 뿐이라고 하는 허위와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듣는다면 지구는 달과 해와 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웃긴다, 웃겨. 최근 백만년 전에 생긴 호모사피언스 후손들이 나를 환경이래요" 하며 또 얼마나 웃겠습니까?
45억년 지구의 긴 생에 비하면 인간의 80년은 하루살이이고, 태양과 달의 크기에 견주면 한톨 먼지인 존재들이 아침마다 신문 보는 까닭은 봄에 꽃피는 향그러움과 가을에 낙엽 지고 과일 열리는 풍요로움에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것은 상실하고 가짜에 매달린 인생들에게 죽음은 너무 늦은 사태인 것이죠.
힌두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 어린 아들을 절간에 보내어 공부하게 했습니다. 수년 동안 여러 가지 학문을 다 섭렵한 그는 12살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스승의 말을 듣고 하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 문안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무얼 배웠느냐?" 아들은 이것저것 배운 내용을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배웠느냐?" "그게 뭡니까?" 한마디 설명도 없이 아버지는 "그것을 배웠는가?"를 재차 반복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거니와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장 가서 그것을 배워라. 그 전에는 집에 올 생각일랑 말아라." 결국 아들은 하룻밤도 지내지 못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가 그걸 배워 오라는데 그게 도대체 뭡니까?" "아니, 진작 얘길 해야지, 공부 다 끝난 다음에 하면 어떡하누. 너 정말 그걸 배우려느냐?" "그거 아니면 집에서 안 받는데요. " "정말 배우겠어, 오래 걸려도?" "그거 아니면 집에 못 들어간다니까요." "그래? 그럼 소 이백 마리를 끌고 산으로 들어가서 천 마리가 되면 돌아오너라."
아이는 소를 끌고 산으로 갔습니다. 가서 뭘 했겠는가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처음엔 친구도 없고 전화도 없고 휴대폰도 없으니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을 것입니다. 그럴 적마다 소가 멀끔히 쳐다보며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는 이건 도대체 어떤 짐승인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그는 조금씩 바람 소리, 풀 내음 같은 자연에 예민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자연밖에는 몰랐으며 그 살아 있는 자연이 그의 존재에 삼투압처럼 스며들어 그것과 하나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가 천 마리가 됐는데도 '천마리가 되면 돌아오라'는 것조차 잊어버렸기에 소들이 "이제는 갈 때다" 하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소들을 끌고 내려왔고 그것을 본 선생은 다른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저기 오는 천 한 마리의 소를 보라."
이것이 바로 '그것'(that)입니다. 부자연한 것을 버려 자연이 된 이야기입니다.
소련이 낳은 괴팍한 도인 구르제프가 한 번은 제자를 받을 적에 열명 정도 들어갈만한 방에 서른 명을 집어넣고 서로 다른 사람은 없는 듯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백일 동안 있으라고 했습니다. 발등을 밟아도 밟은 걸로 치지 말고, 눈빛도 마주쳐도 내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원자 중 삼일 만에 27명이 못하겠다고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명만이 남은 기간을 버텼습니다. 마지막 날 선생이 와서 아무말 없이 이들을 어느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는 속으로 '이제는 말을 해도 돼' 그랬더니 세사람이 동시에 "정말이요?" 했습니다.
미동북부에 메리디트라는 유명한 TV 부사장이 있는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집 정원에 있는 완두콩을 앞에다 두고 고요한 마음으로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러던 중 눈을 감았는데도 앞에 초록색 물감 같은 것이 퍼지는 게 자꾸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일을 집요하게 했더니 그것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갑자기 몸이 앞뒤로 막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게 좋으냐?" 그래서 "아니, 싫어. 막 현기증 나려고 해" 그랬더니 "우리도 싫다. 그러니까 울타리 좀 튼튼히 해라." 그 완두콩이 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식물을 키울 적에 교과서를 보고 비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순전히 식물들의 충고를 받아서 했습니다. 그리고 기가 막힌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한 떼의 새들이 날아갈 적에 "야, 왼쪽이야, 왼쪽. 오른쪽, 오른쪽으로 돌아" 하지 않고 전체가 한 혼인양 가는 것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야웨의 음성을 들은 것은, 1001마리의 소의 세계를 경험해 홀연히 자연에서 초자연으로 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이 속으로 말했는데도 시험에 통과한 세 사람이 동시에 '정말입니까?' 한 이것도 자연을 넘어가는 현상입니다.
에덴동산이나 고대의 세계는 빌딩도 없고, 글자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거짓말도 안 하는 삼라만상이 다 살아 있어 전체가 커뮤니케이션하는 상태였습니다. '환경보호'라는 것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사람이 땅과 협력해서 이루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식물, 동물, 광물, 산, 강, 지구와 대화하는 인간이 배출될 때 그리고 잠깐 사는 동안 강에 있는 물고기나 산에 있는 짐승이 다 동창생이라는 큰 그림에 눈이 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느님께 아뢴 후 조용히 경청한 모세의 자세를 닮아 이 지구소리, 나무소리, 짐승소리를 듣는 겸허함을 가질 때 비로소 낙원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남자가 종교 집회를 마치고 모텔에 가보니 방이 다 차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 빈데 좀 없습니까?" 했더니 매니저가 "침대가 두 개인 방이 하나 있긴 한데 이미 여자 손님이 있습니다. 거기도 괜찮습니까?" 길에서 잘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 그는 아까 그 손님이 주문한 식사라면서 가는 길에 갖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 보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금발 여인이 누워 자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밥을 내려 놓고서 그 앞에 앉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할까?… 말까?… 에이, 그래서야 되나?" "할까?…말까?… 에이,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러기를 한참 후 그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그 여자 밥을 덥석 먹어버렸습니다 .
사람의 기대치를 넘어가는 것, 이 지경으로 사는 것이 바로 자연적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