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통과 이단>이란 책을 2002년 번역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은 부흥주의의 부흥인가 아니면 부흥이 부흥주의?이다. 이 제목은 여러 가지를 기억시킨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다 보니 헷갈리곤 한다. 부흥(Revival)과 부흥주의(Revivalism)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부흥은 영적이고, 부흥주의는 수적인 외적이다. 부흥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고, 부흥주의는 제18세기 존 웨슬리로부터 시작한다. 숫자가 많으면 부흥과 정통인가? 적으면 이단인가? 좋은 이름을 가진 아파트를 선호한다고 해서 좋은 아파트인가? 월급이 많다고 해서 인격도 높아지나? 나이가 든다고 해서 지력도 늙어지나? 젊다고 해서 사고가 건전한가? 외모가 준수하다고 해서 심정도 청결할까?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인격도 고상한가? 경력이 많다고 해서 실력도 좋은가?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헷갈리는 일을 직면한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모두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성향도 있다. 내가 이렇게 여기니까 타인이 모를 것이라는 착각이다.
우리말은 주어 없이 문장을 사용할 때가 자주 있다. 목적어만으로 의사를 전달하곤 한다. 게다가 목소리가 말인 줄로 착각한다. 소리가 목소리가 아닌 듯 입숭의 소리라고 하여 말은 아니다. 말은 힘과 사상을 지닌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말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자신의 인격을 명시한다. 어떤 어휘와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은 드러난다. 불과 100여 개의 단어로 초등학생은 의사를 전달한다. 배우면 배울수록 표현하는 방식. 사용하는 어휘도 달라진다. 대학생 정도 되면, 5,000여 개~7,000여 개의 단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다. 단어는 얼마나 많은 책이나 정보를 읽고 접했느냐에 따라 폭과 깊이가 다르다. 독서 습관이 없는 자는 그만큼 선택하는 단어 폭이 좁고, 깊이가 없다. 문장도 짧고 길지도 않다. 이런 표현으로 의사를 표현하다 보면, 그의 인격과 무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요즘 TV의 동영상이나 짧은 동영상을 통해 깊은 지식을 간혹 얻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희희낙락하는 유행어만을 익숙하기에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나 말을 사용하지 못한다. 말이 짧거나 얕으면 사고도 생각도 넓거나 깊지도 못한다.
신앙에서는 더욱이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신학 용어가 신앙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런지 몰라도 자신이 궁금해하는 신앙의 정보를 얻으려면 책을 접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책의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나 강의를 듣는 데 익숙한 단어나 용어를 모르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청취자나 독자가 말의 깊이가 없다는 것이고 생각도 저자나 설교자에게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돼지에게 진주 목걸리를 걸어주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인간은 언어, 말로 의사를 전달한다. 말의 수가 많다는 것으로 그의 인격을 판단하기 어렵지만 침묵하다가 툭 던지는 말 한마디로 인해 타인에게 큰 상처로 주지만 위로도 주곤 한다. 어떤 단어를 채택하여 표현할 것인지 늘 생각하여 사용해야 한다. 유사한 말, 반대말, 존댓말, 높임말, 저급한 말, 농담, 말장난, 욕설, 찬사 등등으로 분류되는 것 중 어느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격은 다듬어진다. 말은 존경받는 자의 표현을 닮는 데서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에게 말하고,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사람은 말의 표현을 배운다. 그래서 격조 높은 글과 품격의 사람의 말에 귀와 눈을 기울여야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알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면, 그의 사상과 태도는 극단적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품격과 말의 격조를 높인다고 하여 외식이나 위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두 차례 격조 있게 말할 수 있거나 품격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지속성이 없으면 금세 그의 본모습은 탄로 난다. 지속성 있는 품격은 그만큼 자신의 인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