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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전이 다 그렇듯이 이 책 "소파 방정환 평전"은 이 연보의 상술이다. 그래서 이 연보를 옮긴다.
* 방정환의 인생은 손병희의 사위가 되기 전과 된 후로 나뉜다. 사상적인 변전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실천을 뒷받침한 자금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가를 잘 가야 하나. 잘 간 장가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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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연보
-표제/저자사항∥소파 방정환 평전 : 문학을 사랑하고 어린이운동으로 독립을 준비한 진보주의 청년 : 문화를 사랑한 어린이 인권운동가 / 민윤식 지음, 풀과별[1947-],
-발행사항∥서울 : 스타북스, 2014, -형태사항∥543 p. : 삽화, 초상 ; 24 cm, -- 주기사항∥특별부록: 초판 머리말|소파는 고민하고 행동하고 사랑했습니다 ,민윤식 ; 서평|"청년아 너희가 시대를 아느냐"에 대하여 -- 중앙일보 조우석 기자 ; 평전 취재 후기|소파 방정환에 대한 중대한 '3가지 오해' "소파 방정환 연보" 수록,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338.5099 듀이십진분류법-> 362.7092,
-주제명∥방정환[1899-1931], 한국 인물[韓國人物] 아동 문학가[兒童文學家] 아동 인권[兒童人權]
528~543
1899(01세)
-11월 9일(음력 10월 7일) 광무(光武) 3년,서울 야주개(현재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전과 싸전을 운영하던 할아버지 방한용(方漢龍),아 버지 방경수(方慶洙)의 외아들로 출생하다.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견지동〈堅志洞) 118번지.
1901 (03세)
- 이 무렵 천도교 3세 교주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동학혁명 실패 후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이상헌으로 변성명(變姓名)하고 망명 길에 오르다. 미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잠시 체류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가다. 그곳에서도 미국에 가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일본 각지에 체류하다. 손병희 선생은 훗날 소과의 장인이 된다.
-7월 30일 : 홋날소파의 부인이 되는 손용화〈孫溶嬅)가손병희 선생 3 녀로 서울에서 출생하다.(1991년 10월 24일 별세)
1902(04세)
- 3월 : 동경에 머무르던 손병희 선생은 인재 양성을 위해 제1차로 젊
은이 24명을 선발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다.
1903(05세)
― 9월 3일 : 이때부터 할아버지의 권유로 서당에 나가 천자문 둥을 배 우다. 서당은 일곱 살 될 때까지 다니다.
1905(07세)
- 4월 : 두 살 위 삼촌이 다니는 신식 학교인 사립 보성소학교에 따라갔
다가 교장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삭발당하고 이 학교 유치반에 입학 하다. 보성소학교는 경성중학교(현 서울역사박물관) 건너편(시티은 행 빌딩 뒤쪽)에 있었다. 8년 과정의,말만 신식학교이지 서당과 비숫 했다. 이 학교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다.
1907(09세)
- 이 무렵 소파는 흩이불로 휘장을 치고 경대 주변을 분장실로 쓰는
등 연극 비슷한놀이를자주 해서,모인 동네 동무들을 즐겁게 하다.
1908(10세)
- 손병희 선생은 항일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 교 등 여러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기부하거나 학교를 인수해 직접 운 영하기도 하다.〈황성신문〉은 이런 손병희 선생의 교육열에 대해 ‘사 손병희씨교육열의(謝孫秉熙氏敎育熱意)’라는 제목의 사설로서 칭찬 하다.
- 중조부의 사업 실패로 전 재산과 생가를 채권자에게 빼 앗기다. 소파 의 가족은 겨우 이부자리와 부엌세간만을 가진 채 사직골 도정궁 앞 (현 사직터널 부근) 초가집으로 이사하다. 이때부터 소파의 궁핍한 소 년 시절이 시작되다.
- 콩나물죽으로 끼니를 이으며 도시락 없이 등교하고 점심때면 변소 뒤에 숨거나대고모 댁에서 밥 얻어먹기,쌀꾸러 다니기, 전당포 심부 름 다니기,물 긷기 둥극도로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 총명한 정환의 재질을 아까워한 어느 화가가 양자로 맞고 싶어 부모님께 요청했으나 외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회답을 받 게 되자 환등기를 한 대 선물로 주다. 정환은 동네 어린이들을 모아 그 환등기를 비쳐 보이면서 변사 흉내를 내는 등 구연에 대한 천재적 소질을 이때부터 나타내다.
- 어린이 연설토론 단체 ‘소년입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다, 이 ‘소 년입지회’는 대한문 맞은편(현 시청 앞플라자호텔 부근)에 있는 아버 지 친구인 최 씨 댁 사랑방을 중심으로 어린 동무들이 모여 자주 토론 회를 갖다.
1909(11 세)
- 매동보통학교(현 매동초등학교)에 입학하다.
1910(12세)
-10월 4일 : 매동보통학교에서 새문 밖 서대문에 있는 미동보통학교
(현 미동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다.
- 소년유년군올 조직해서 대장이 되다.
1913(15세)
- 3월 25일 : 미동보통학교(4학년)를 졸업하다.
- 인쇄소에 연판공으로 다니시던 부친의 권유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다.
1914(16세)
- 졸업 1년을 앞두고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선린상업학
교를자퇴하다. 이 무렵부터 독서에 열중하다.
- 정환은 이 시기를 전후해 육당 최남선의《청춘》《소년〉(붉은 저고 리〉《아이들보이〉(새별〉등을 탐독하는 한편 독자 투고난에 자주 투고하다.
1916(18세)
- 하세가태長谷川 好道) 가 조선총독부로 부임하다.
- 이 무렵부터 천도교당에 나가 청년회 활동에 참여하다.
1917(19세)
- 음력 4월 8일 : 천도교도이며 기미년 3.1 독립선언서의 33인 중 한분
인 권병덕의 추천으로 천도교 저丨3세 교주 손병희 선생의 3녀 용화《溶 嬅)와 결혼하다. 결혼 후 동경 유학할 때까지 재동 처가에서 신혼살림 을 하다.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소년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되
다. 신부는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출신, 나이는 17세.
- 5월 6일 : 가난과 신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별세하다.
1918(20세)
- 3월 22일 : 재동 처가에서 장남 운용(云容) 태어나다. (2002년 10월 4 일 별세)
- 7월 : 장인 손병희 선생이 인수해서 경 영하던 보성전문학교(보성법 률상업학교로 강급되었다가 현재 고려대학교로 바뀜)에 입학하다. 당시 보성학교는 전동(현 수송동,조계사 인근)에 있었다.
- 7월 7일 : 비밀결사 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이중각,이복원,유광렬 둥 과 함께 결성하다. ‘청년구락부’는 회원 200명으로 발전하며,3.1 독립운동 직후까지 활동하다.
- 9월 : 구파발에서 ‘청년구락부’ 전 회원이 참석하는 모임인 습율
(拾 栗)대회를 갖다.
- 12월 : ‘청년구락부’ 망년회를 서울 봉래동 소의소학교(현 동성중고
둥학교 전신)에서 갖다. 이 모임에서 정환은 극본과 연출은 물론 주연 배우로출연해서 연극〈동원령〉을공연하다.
1919(21 세)
- 1월 20일 : 이중각,이복원,유광렬 둥과 함께 ‘청년구락부’ 기관지 성
격으로 문예지《신청년〉을 창간하다. 처음에는 등사판으로 내다가 두 번째부터는 정식 인쇄물로 발행하다. 창간호 권두사는 만해 한용운이 기고하다. 이 무렵 정환은 3.1 독립운동 민족 대표 포섭 문제를 협의 하기 위해 장인을 자주 방문하는 만해 한용운과 접촉하고 독립을 위해 청년들이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가르침을 받다.
- 3월 1일 : 기미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발행하던〈독립신문〉의 발행인 보성학교 윤익선 교장이 체포되는 바람에 발행이 중단될 위기에 놓이 자 재동 처가에서 몰래 오일철(오세창 선생 아드님) 등과 함께 신문을 등사관으로 만들어 비밀리에 배포하다.〈독립신문〉과 함께 ‘독립선언 서'를 몰래 배포하다가 왜경에 검거되다.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다행
히 중거불충분으로 일주일 만에 석방되다.
- 12월 5일 :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예술)잡지《녹성(綠星)〉을 창간하 다. 일본 당국의 까다로운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발행소 주소를 동경 시(東京市) 신전구 원락정(神田區猿樂町) 2정목(町目) 3번지로 했으 나 실제 사무실은 경성 죽첨정(竹添町) 1정목《町目) 39번지이다. 표지 포함90쪽에 정가40전, 발행인 명의는 이일해이다.
1920(22세)
- 3월 : 김원주의 요청으로 유광렬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여성지〈신여자》편집 고문이 되다.〈신여자〉에「처녀의 가는 포 둥을 발 표하고,이 잡지의 편집에 참여하고 있던 신줄리아를 만나 깊은 우정 을 나누다. 신줄리아는 3.1 독립운동 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이화학 당 출신의 신여성이다.《신여자》편집 진용은 이들 외에 박인덕,김활 란 등이다.《신여자〉는 4호까지 발행하다. 김원주는 일명 일엽(一葉)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훗날불가에 귀의해서 비구니가 되다.
- 6월 5일 : 장녀 영화(榮華) 태어나다.
- 7월 6일~7월 22일 : 천도교청년회 주최로 서울,문천,장연 둥지에서 모임을 갖고7월 27일부터 8월 9일까지 학생대회를 열다.
- 8월 건일 :《개벽〉제3호에〈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라는 번역 시 를 잔물이란 필명으로 발표하다.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호칭을 사용 하다.
- 9월 15일 :〈독립신문〉편집,배포사건으로검거되었다가석방된 이 후 일본 경찰의 요시찰대상이 되어 활동에 큰제약을받게 되자동경 유학의 길에 오르다. 동경에 도착해서 도요대학 문화학과 특별청강생 이 되다.
- 이 무렵부터 (개벽〉지 동경 특파원을 맡다.《개벽〉은 천도교를 배 경으로 이해 6월 25일에 창간한 후 일제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4민 족 저항지’ 잽족 개조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종합잡지이다.《개벽〉 은 창간호부터 내용이 문제되어 발매금지 처분을 당하였으나 이에 굴 하지 않고 6월 30일 임시 특대호를 발행하다.
1921 (23세)
- 2월 13일 :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뽑히다.
- 5월 1일 : 일본에서 잠시 귀국하여 김기전, 이정호와 함께 천도교청 년회의 한 부서로 있던 ‘소년부’를 ‘천도교소년회’라는 명칭으로 바꾸 어 발족시키다. 발족 당시 30여 명이던 회원은 이해 10월에는 370여 명으로 늘어나다. 이때부터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란 표어를 내걸 고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을 펴는 둥 소년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다. 이 사실은〈동아일보〉1921년 5월 22일자에 상세히 보도되 다.
- 6월 12일 : 천도교소년회 운동회를개최하다.
- 6월 15일 : 경성 삼청동에서 천도교소년회 회원 탁족회(소풍)를 갖 다.
- 6월 22일~8월 6일 : 천도교가주최하는 강연회에 ‘내일을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80여 회에 걸쳐 전국 순회강연회에 연사 로 참여하다.
- 7월 10일 :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소년강연회’를 개최하다.
- 9월 4일 : 경성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대강당에서 공연된 연극〈신생(新生)의 일(3 )〉극본을 쓰고 연출, 주연도 하다. -11월 11일 : 이해 2월 16일 발생한 양근환 의사의 ‘친일파 민원식 살 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이른바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일본 내 조선 유학생들을 선동하여 저항운동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청년회 간부 박달성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구금되다.
- 12월 : 안데르센 동화,그림 동화,아라비 안나이트 둥을 모아서 번안 한 세계 명작 동화집『사랑의 선물』번안작업을 끝내다.
1922(24세)
- 5월 1일 : 창립 1주년을 맞아 천도교소년회는 독자적으로 이날을 ‘어린이의 날이 란 이름으로 선포하고, “10년 후 조선을 여(廬)하라”는 내 용의 전단을 서울 시내에 배포하는 한편 "우리는 참되고 씩씩하게 자 라는 가운데 인정 많은 소년이 됩시다”라는 표어를 내건 자동차와 창 가대를 동원해서 대대적인 행사를 거행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어린 이날의 실질적인 효시이다. 이 행사의 지도위원은 방정환, 김기전, 구 중회, 차상찬, 박달성 둥이 맡다.
-5월 19일 : 소파의 정신적, 경제적 후원자인 장인 손병희 선생이 고문 후유중 둥으로 인한 신병으로 병보석 후 치료 중에 별세하다. 향년 62 세.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귀국한자리에서 친구 유광렬과 토론 끝 에 민족의 10년 후를 준비하는 소년운동을 하기로 뜻을 굳히다.
- 6월 : 번안 동화집『사랑의 선물』을 개벽사에서 출판하다. 출간되자 마자 워낙 인기가 있어서 10여 판까지 발행했으며 훗날 박문서관으로 판권을 바꿔 계속 출간하다.
- 이 무렵부터《개벽〉《신여성〉둥 여러 잡지에 소파,목성,북극성,물 망호 몽견초,몽중인,삼산인,파영생,성서인,삼봉생,7 국생,잔물, 노덧물,길동무,0헤 쌍5생,깔깔박사,잠수부,은파리,일기자 둥의 필명으로 동요,동화,동극,수필,소론,기행문, 탐사기,인물평 둥 다 양한 글을 기고하다.
- 12월 10일 :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安昌南)의 고국 방문 비행 쇼가 동아일보 주최로 경성~여의도~인천 상공에서 펼쳐지다. 《개벽〉지에 동경 특파원 자격으로 안창남을 인터뷰한 기사를 싣다. 안창남을 고국 독자에게 대대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안창남은 3.1운동 실패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다.
1923(25세)
-1월 14일 : 천도교소년회 주최로〈한네레의 죽음〉(2막)〈별주부전)
(2막) 둥의 동화극 대회를 개최하다. - 2월 18일 :《어린이〉지 창간을 축하하는 기념 가극대회를 개최하다.
- 3월 16일 : 아동 문제 연구 단체 ‘색동회’ 발기 회합을 일본 동경에서 갖다.
- 3월 20일 : 동경에서 색동회 동인들과 함께 정성스레 편집해서 보낸 원고로 잡지《어린이〉를 창간하다.
- 3월 30일 : 색동회 제2차 발기 모임을 갖다.
- 4월 14일 : 단체 명칭을 ‘색동회’로 결정하는 발회 준비 모임을 갖다. 이날의 모임에서 색동회 외침(표어)을“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로 정하다.
- 4월 17일 : 천도교소년회 주관으로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이 통합 하여 ‘소년운동협회가 창립되고,사무실을 천도교당 내에 두기로 하 다. 이 모임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이날기념행사를 갖기로 하다.
- 4월 17일~4월 18일 : 천도교당에서 소년운동협회가 주최하는 ‘소년 문제강연회’와‘소년연예회’가 열리다.
- 5월 28일 : 동경에서 ‘소년문제강연회’룰개최하다.
- 5월 30일 : 색동회가정식으로동경에서 조직되다. 이 자리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5월 1일 기념식을 갖도록 추진하다.
- 5월 1일 : 이미 3월 16일 동경에서 제1차 모임올 가진바 있는‘색동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문화 운동 단체로 정식 발족되다. 한편 서울 에서는 제1회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기념식이 열리다. 전국적인 제1회‘어린이날인 5월 1일을 기해 조선소년운동협회가주최,천도교와〈동 아일보〉〈조선일보〉후원,천도교당에서 1천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갖고 대대적인 행사를 거행하다. 이날‘어른에게 드리는글’ ‘어린 동무 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제목의 전단 12만장이 뿌려지 다. 또한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선언’이라고할 수 있는‘소년운동의 기초 조항’이 조선소년운동협회 명의로 선포되다.
- 5월 18일 : 색동회 선전 및 하기 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갖다.
- 6월 9일,7월 23일 : 색동회에서 전국 소년지도자대회 및 아동예술강 습회를 열다.
- 6월 23일 : 색동회 주최로 제1회 아동문제강연회와 아동예술강습회 를 천도교 대강당에서 갖다.
- 11월 25일 : 동화대회를 열다.
1924(26세)
- 4월 21일 : 제2회 어린이날 기념 선전 준비위원에 선출되다.
- 5월 1일 : 오후 3시, 천도교당에서 제2회 어린이날 기념 축하식을 갖 다.
- 5월 2일 : 오후8시,천도교당에서 ‘어머니대회’를 갖다.
- 5월 3일 : 오후 8시, 천도교당에서 ‘아버지대회’를 갖다.
- 5월 4일 : 서울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노동소년위안회’ 및 대원유회 (大園遊會)룰개 최하다.
- 7월 23일 : 색동회와《어린이〉사 공동주최로 1주일간 ‘전 조선 소년 지도자대회’를 천도교당에서 개최하고 전국 소년 단체가 참가한 가운 데 제 1회 아동문제강연회 및 아동예술강습회를 갖다.
- 8월 : 천도교 대강당에서 4전 소년 지도자대회’를 소집하여 흩어져 있 는 소년 단체의 통합을 꾀하다.
- 이해 특히 소파는《개벽〉지는 물론《어린이〉《신여성〉을 개벽사의 3대 잡지로 키우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
-11월 25일 :《어린이〉사에서 방정환동화회를개최하다.
1925(27세)
-1월 13일 : 둘째 아들 하용(夏容) 태어나다.
- 2월 12일 : 오후 7시,천도교 청년당 주최로 서울 용산에서 ‘살아날 길’이란연제로 강연하다.
- 3월 21~30일 :《어린이》지 창간 2주년 기념행사로 서울,대구,마산,
김천, 인천 둥 전국 5대 도시 소년대회를 위해 지방을 순회하다. 니월 20일 : 제3회 어린이날기념 선전 준비위원에 선출되다.
- 4월 30일 :《어린이〉사, 색동회 공동 주관으로 동화구연대회를 개최 하다. 이 자리에서〈귀만의 설움〉〈어린이날 이야기〉둥을 구연하다.
- 5월 1일 : 제3회 어린이날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다. 서울 장안에 오 색의 선전 전단 50만 장이 배포되고, 어린이들은 소파가 가사를 지은‘어린이날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희망은 어린이’ ‘앞날의 임자는 어린 이’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를 잘 키우자’ 둥의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서 행진하는 소년군 취주악대를 뒤따르며 시가행진을 하다. 연이어 동화구연대회,강연회, 기념여흥대회 둥이 열리다.
- 5월 31일 : 경성소년지도자연합회 회합에서 고한승, 정홍교 등과 함 께 지도위원으로 선출되다. 또 서울에 있는 40여 개 소년 단체를 통합 하여 소년운동협의회(집행기관은 ‘오월회’)를 조직하고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를 갖다.
- 6월 16-26일 서울 시내 각 소년회가 주최하고 ‘오월회가 후원하는 ‘소년문제강연회’와 ‘소년지도자강습회’에서 강연하다. 내월 4일 :《어린이》사에서 아동문제강연회를개최하다.
- 8월 1일 : 경남 울산 언양에 있는 ‘언양 조기회’를 방문하다. 이 단체 는동문학가신고송(申孤松)이 이끄는소년 모임이다.
- 8월 26일 :《어린이〉사 주관으로 서을의 교통량을 조사하다. 월 15일 : 소파가주도하던조선소년운동협의회에서 오월회가사회 주의사상에 물든 정흥교를 중심으로 이탈하여 ‘경성소년연맹회’를 결 성하고 총회를 갖다.
- 12월 12일 : 오후 7시,‘소년소녀문예회’가 청진동 예배당에서 주최한 ‘어머니대회’에 나가서 강연하다.
- 12월 그몸 무렵 : 동요 작곡가 정순철, 아동문학가 이정호 두 사람과 함께 최영주가 지도하는 수원화성 소년회의 동화회와 강연회에 참석하다.
- 이 무렵《어린이〉지 독자난을 통하여 유지영,윤석중, 서덕출,이원 수, 이정구,최경화,최순애,신고송, 목일신 둥 훌륭한 아동문학가들 이 잇따라배출되다.
1926(28세)
- 5월 1일 : 순종 황제 국장으로 인해 이해의 어린이날 행사를 중지하기로 소년운동협회에서 결정하다. - 6월 10일: ‘6.10 만세사건’으로 예비 검속당하다.
- 8월 1일 : 발매금지 처분 와회,정간 조치 1회,벌금형 1회 둥 총독부 로부터 갖은 수난을 겪던《개벽〉지가통권 72호로 발간 금지되다. 곧 소파는〈개벽〉을 대신해서 11월부터《별건곤〉지를 차상찬과 같이 편 집 발행하다.
- 8월 25일 :《어린이〉사에서 개최하는 동화,동요,동극 대회를주관하 다.
- 12월 18일 : 문예운동사와 조선일보사 공동 주최로 기독교 청년회관 에서 열린 ‘문예대강연회’에 나가 강연하다.
1927(29세)
- 2월 16일 : 경성방송국에서 한국,일본어 혼합 단일방송이 시작되자
그 다음 날 소파가 최초로 동화「어린이와 직업」올 라디오로 방송하
다.
- 4월 20일 : 백상규와 김명순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개벽사 편집 동료 인 차상찬과.함께 종로경찰서에 구속되다. 서대문감옥에서 미결수로 있다가 같은 달 26일에 풀려나다.
- 5월 1일 : 제5회 어린이날 기념식이 소파가 이끄는 민족소년운동단 체인 소년운동협회와 좌경화한 정 홍교 중심의 무산소년운동단체인
‘오월회가 전해에 이은 지도 노선의 대립으로 두 파로 분열되어 따로 따로 거행되다.
-10월 16일 : 여론에 못 이겨 소년운동협회와 오월회가 통합하여 ‘조 선소년연합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피선되다.
-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하기로 결의하다. 이유는 5월 1 일이 ‘메이데이’와 겹치고 일본인 교육기관에서 평일의 어린이 동원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1928(30세)
- 2월 7일 : 조선소년연합회 주최로 어머니대회를 개최하고 ‘소년운동
과 가정교양이 란 제목으로 강연하다.
- 2월 12일 : ‘오월회가 해체되고 그 후신으로 ‘경성소년연맹’이 정흥교 중심으로 결성되다.
- 3월 22일 :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총동맹으로 이름이 바뀌어 순수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고 일본 경찰의 압력이 더욱 심해지자 소년 운동 단체에서 손을 떼다. 소년운동 최전선에서 물러난 소파는 대신 《어린이〉지 발간과 동화구연대회, 강연회,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서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다. 그러는 한편으로 중앙보육학교(현 중앙대 학교 전신)와 경성보육학교에서 아동 문제와 동화,유회에 관한 강의 를 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다.
- 4월 17일 : 차녀 영숙(榮淑) 태어나다.
- 5월 1일 : 제6회 어린이날에 천도교기념관에서 1,500여 명의 어린이 가 모인 가운데 동화구연대회를 개최하다.
- 6월 5일 : 종로에 있는 단성사 극장에서 어린이날 실황 극영화를 상 영하다.
- 10월 2~9일 : 만4년 동안준비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아동예술 전람회로서 주최는 (어린이〉사(개벽 사),주관은 색동회,후원은 동아일보 학예부,협찬은 ‘동경해외문학회’
이다. 전람회 기간중 어린이들의 동요발표대회, 무용발표회를 열다.
- 10월 12일 :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성황리에 마치고〈동아일보〉에 ‘경과보고와 감사’라는 제목으로 아동 예술 활동의 현황과 희망을 밝 히는 글을 쓰다. 이 무렵부터 극심한 과로로 인해 얼굴이 자주 붓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둥 병색이 짙어지기 시작해서 두통약과 냉 수 또는 빙수를 하루에 7~8그릇씩 비워야 견딜 정도로 지병이 악화되다
- 일본 경찰로부터 강연과 동화 구연 활동을 전면 금지당하다.
1929(31 세)
- 3월 1일 : 개벽사에서 월간지《학생〉을 창간하다. 이 잡지는《어린
이》지를 졸업한 독자들을 위한 중학생잡지이다. 소파는《어린이〉 지 못지않은 정성을 기울이며 많은고정 칼럼을 직접 쓰다.〈어린이〉 《학생》지의 발행과 집필 활동에만전념하다.
1930(32세)
- 창간 7년째를 맞는《어린이》지의 발행 부수가 10만을 돌파하다. 당
시 서울 인구가 30여 만 명,〈조선일보〉〈동아일보〉같은 신문 발행 부수가 5만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천문학적 부수이다.
-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
1931 (33세)
- 3월 1일 : 월간종합지《혜성〉을 개벽사에서 발행인 차상찬 이름으로
창간하다. 이 무렵부터 개벽사는 감당하기 힘든 부채로 인해 경영이 어려워졌다. 이를 책임지고 있는 소파는 그 부채 때문에 극심한 정신 적 고통,육체적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또한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10여 년간 무리한 소년운동을 한 탓에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무리가 끝내는 신장염,고혈압 악화로 진행되다.
- 7월 9일 : 사무실 근무 중 코피를 쏟고 쓰러지다. 오랫동안 개벽사의 운영난으로 인한 정신적 부담과 육체적인 과로가 겹치고, 동아일보사 의《신동아》창간공세로 개벽사 영업 조직이 일시에 이탈한 것에 충 격올 받다. 일주일 정도 집과 인천에서 요양했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다.
- 7월 17일 : 신장염, 고혈압 등의 병세가 악화되어 경성제대 부속병원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다.
- 7월 22일 : 주치의 이등 박사는 급성 요독증이 악화되어 온몸이 붓고 치료 불가능하므로 임종을 준비하도록 지시하다.
-7월 23일 : 부인과 색동회 조재호,개벽사 박진,주치의 이등박사,장 남 방운용이 입회한 가운데 오후 6시 되분 별세,고작 33년의 힘들고 짧은 삶을 마감하다. 운용에게는 “공부 잘하라”고 했고,병문안 온 동 료 후배들에게는“일 많이 하라’고 말하다.
- 7월 25일 오후 1시 : 천도교 대교당 앞마당에서 개벽사와 색동회 주 관으로 영결식이 거행되다. 영결식장은 사람들의 울음바다로 변하 다.
- 7월 26일 : 색동회에서 ‘소파추도식’올 갖다.
- 8월 20일 :《어린이〉지 9권 7호가‘소파추도호’로 발행되다. -〈어린이〉지 주간을 색동회 이정호 동인이 맡고 중앙보육학교에서 소과가 담당했던 동화 강의 둥은 이헌구 색동회 동인이 맡다.
1932년(1 주년)
- (어 린이〉지가 통권 122호를 끝으로 폐간되다.
1934년(3주년)
- 5월 : 일제의 탄압으로 어린이날 기념식이 전면 금지되고 소년운동 단체도 해산당하다.
1936년(5주년)
- 7월 23일 : 소파 환원 5주기를 맞아 5년 동안 홍제동 화장터 납골당
에 봉안되어 있던 유골을 망우리 아차산 묘역으로 이장(移葬)하다. 최 영주가 발의하고 유광렬,차상찬, 정순철,마해송,최영주, 이정호, 윤 석중 및 장남 운용 등 27명의 발기인에 의해 자연석으로 제작된 묘비 가 세워지다.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비명이 오세창 선 생의 글씨로새겨지다.
1940(9주년)
- 5월 25일 : 최영주와 마해송이 편집한『소파전집』이 박문서관에서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되다. 국판 462쪽,정가 3원 50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