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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다비트 힐버트, 「무한에 대하여」
DAVID HILBERT,「On the infinite」
『수학의 철학 Philosophy of mathematics』(1964)
수학의 철학
대우학술서 543 - 번역
1관 1쇄 펴냄 2002년 10월 25일
1판 2쇄 펴냄 2006년 2월 10일
지은이 : 포올 베나세랖,힐러리 퍼트남
옮긴이 : 박세희
펴낸이 : 김정호
펴낸곳 : 아카넷
Selected readings SECOND EDITION (1983)
Edited by Paul Benacerraf
STUART PROFESSOR OF PHILOSOPHY PRINCETON UNIVERSITY
Hilary Putnam WALTER BEVERLY PEARSON PROFESSOR OF
MODERN MATHEMATICS AND MATHEMATICAL LOGIC HARVARD UNIVERSITY
평
우리는 힐베르트의 이 글에서도 역시 리만이 말했고, 토렌티가 동의했던 무한에 대한 한 정의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본다. 내 식대로 말해보자면, 이들이 연구하는 무한이란: 거대한 안이 마치지 않고 새로이 주름지며 만들어지는 바이다. 그리고 거리를 두는 무한이란: 광활한 밖이 끝나지 않고 거듭 펼쳐지며 만들어지는 바이다. 이는 끝이 없다는 어원의 infinite가 아니라, 바깥이 없다는 어원의 apeiron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데, 그렇지만 이 말apeiron의 번역어로 줄곧 선택되는 현대어 infinite는 두 가지 의미장에 모호하게 걸쳐있는 듯하다. 이렇게 현대어 in+finite가 외관상 명백하게 끝이 없다는 어의를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토렌티도, 힐베르트도, 리만도 무한을 논할 때 꼭 이를 분별하는 문장을 명시해 두는 것 같다.
리만: “공간의 구조들을 헤아릴 수 없이 크게 확장할 때부터는, 무한정과 무한[l’illimité et l’infini]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토렌티: “리만은 다양체가 끝이 없지(무한, unendlich) 않더라도 아마도-사실은 반드시- 너머가 없다(unbegrenzt)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힐베르트: “유계가 아닌 것과 유한은 양립가능하다[Unboundedness and finiteness are compatible.]” “ 무한을 운용하는 것은 유한적인 것에 의해서만 확실해 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자연의 표현으로서 실물들은 개체화되어 있는 것이고, 그 점에서 유한한 단위들이다. 그리고 이 유한한 단위들의 합이, 세기 힘들만큼 많다고 하여도, 엄밀히 말해서 셀 수 없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역시 유한한 것이다. 이렇게 실물들은 유한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실물에 대해서 ‘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실물들에 대해서 정당하게 ‘여럿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할 때, 유한하게 표현될지라도, 그 유한 자체를 생산된 것으로서 생산하면서, ‘한’ 자연으로 있는 어떠한 권능을 연역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한’ 자연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한’은: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연을 부정사로 만들어서 생성 그 자체를 뜻하여 어떠한 양태의 생성이든 끌어안게 만드는 표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표면에서의 유한한 ‘하나’와 심층에서의 무한한 ‘한’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탐사는 아마도 플로티누스에게서 가장 철저히 이루어졌겠다. 또한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이를 읽고 있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한한 ‘한’ 자연은 우리가 그 의미를 파악하려 어찌할 수 없이 ‘하나’의 자연에서 지금 다소 떨어뜨려 볼지라도, 사실은 유한한 ‘하나’의 자연까지도 포함하는 무한한 전체이지, 영혼과 몸체처럼 이원적으로 연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짧게 말하면, 자연은 언제나 무한하다. 풀어서 달리 말할 때만이, 자연은 무한하게 유한하고, 한 여럿이다. 이러한 ‘형언할 때의’ 이중적인 관계 앞에서 최초로 수학적인 무한을 엿보았던 힐베르트 등등은 꽤나 당혹해하고 있다. 수학은 근원적으로 단위의 학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힐베르트의 해결책은 계산하기 손쉽도록, 그리고 두렵지도 않도록, apeiron의 개념 자체를 자연에서 격리시켜서 수학자가 ‘직관’은 할 수 있는 순수 수학의 사고실험이자 아이디어로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이러한 회절을 꽤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힐베르트가 무한의 ‘한 여럿’ 특성을 예감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더 나아가지는 않았고, 이 점은 매우 아쉽다. 이 ‘한 여럿’의 의미 자체만을 따진다면, 그 훨씬 이전 플로티누스와 스피노자가 무한론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
무한에 관하여
다비트 힐버트
1925년 6월 4일, 바이어슈트라스 Karl Weierstrass 를 기념하는, 뮌스터에서의 베 스트팔렌 수학회 Westphalian Mathematical Society 총회에서 발표됨. Mathematische Annalen (BerUn) vol. 95(1926), pp. 161-90 으로부터 에르나 퍼트남 Erna Putnam과 매씨 Gerald J. Massey 가 번역함. 이 논문의 번역과 이 책에 수 록하는 데 대하여 슈프링거 출판사Springer Verlag 의 친절한 허락을 받았다.
아득한 옛날부터, 무한은 어떤 다른 의문보다도 더 인간의 감정을 휘저어왔다. 어떤 다른 아이디어도 이만큼 인간의 마음을 유익하게 자극한 경우는 없었다. 아직도, 이것보다 더 규명을 필요로 하는 개 념은 없다.
무한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우선 무한에 어떤 의미가 실제로 주어지는가에 간단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로 우리가 물리학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보자. 자연 현 상과 물질에 관한 최초의 소박한 인상은 항구성과 연속성이다. 우리 가 금속의 어떤 조각이나 액체의 어떤 양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러 한 것들은 무제한으로 분할할 수 있고, 그들의 최소부분들은 전체와 똑같은 성질을 가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물질의 물리학을 탐구하는 방법이 충분히 연마되어 있으면, 언제나 과학자는 노력 부 족의 결과가 아닌 물질의 본질 자체에서 유래하는 분할의 한계를 만 나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대 과학의 경향을 무한소로부터의 해 방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오랜 원리인 natura non facit saltus 대신에 우리는 정반대로, 즉 “자연은 비약한다”라고 언명하기까지 한다.
모든 물질은 미세한 구성체인 “원자”로 구성되고, 그들의 결합과 연결이 모든 거시적인 대상들의 모든 다양성을 만든다는 것은 상식 이다. 그러나 물리학은 물질의 원자론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19 세 기 말에 처음 보기에 훨씬 더 기이하게 보이는 전기의 원자론이 출 현했다. 그 때까지 유체로 생각되었고 연속적인 행동체의 활동 모델 로 생각되어 온 전기는 그리하여 양과 음의 전자로 이루어진 것이라 고 밝혀졌다.
물질과 전기 외에, 물리학에서 보존의 법칙이 성립하는 또 다른 실체, 즉 에너지가 있다. 그러나 에너지도 무한분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랑크 Planck 는 에너지의 양자를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무한소를 인식하는 데 필요한 분할의 종류를 받아들이는 균질적인 연속체는 실재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발견되지 않는다. 연속체의 무한분할은 사고에서만 존재하는 연산이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의 자연관찰의 결과와 우리의 물리 실험과 화학 실험의 결과로 부터 비난받는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서 무한이 발견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만나게 되는 두번째 영역은 전체로서의 우주를 고찰할 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주가 무엇이든 무한히 큰 것을 포함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주의 범위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다시 여기에서 현대과학, 특히 천문학은 의문을 재현시켰고, 형이상학적 사색의 불완전한 방 법이 아닌, 실험과 자연의 법칙의 적용에 바탕을 둔 이성에 의하여, 이것을 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여기에서 또한, 무한에 대한 진지한 반대 의견이 나타나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필연적으로 공간은 무한하다는 공준을 낳는다. 비록 유클리드 기하학이 참으로 무모순 적인 개념적 체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정말로 실재에서 실제로 성립한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의 공간이 유클리드 공간인가 아닌가는 오직 관찰과 실험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순수 한 사색에 의하여 공간의 무한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엄청난 과오 를 포함한다. 공간의 어떤 부분 바깥에는 항상 공간이 더 있다는 사 실로부터 나오는 것은, 공간이 유계가 아니라는 것뿐이지, 공간이 무 한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계가 아닌 것과 유한은 양립 가능하다.[The attempt to prove the infinity of space by pure speculation contains gross errors. From the fact that outside a certain portion of space there is always more space, it follows only that space is unbounded, not that it is infinite. Unboundedness and finiteness are compatible.] 이른바 타원 기하학에서의 수학적 탐구는 한 유한 우주의 자연스러운 모델을 제시한다. 오늘날 유클리드 기하학의 포기는 더 이상 단지 수학적 또는 철학적 사고에서가 아니라 우주의 유한성의 문제와 원래 아무 관련이 없었던 고찰들에 의해 제기되고*있다. 아인슈타인 Einstein 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포기되어야 함을 보였다. 그의 중력 이론의 기반 위에서, 그는 우주론적 의문을 다루고 유한 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더욱이, 천문학의 모든 결과는 우주가 타원적 이라는 공준과 완전히 합치된다.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즉 무한소와 무한대에 관하여, 우주가 유한이라는 것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무한은 우리의 사고 안에서 정당 화된 장소를 차지하고, 필수불가결한 개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 이 아직도 사실일 것이다. 수학에서의 상황은 어떤지 알아보자. 먼저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 정신의 산물인 수론을 심문하여 보자. 수론의 아주 다양한 기본 공식 중의 하나로, 예를 들어 다음 공식을 살펴보자:
285~287.
우리는 중요하고 효과적인 이상적 원소들을 쓰는 방법에서 무한의 개념에 관하여 완전히 다르고 아주 특이한 개념에 직면하게 된 다. 이상적 원소들의 방법은 초등 평면기하학에서조차 사용되고 있 다. 평면의 점과 직선은 본래부터 실재이며 실제로 현존하는 대상이 다. 그들에 대하여 성립하는 공리 중 하나는 다음 연결공리이다: 두 점을 지나는 직선은 꼭 하나가 존재한다. 이 공리로부터 두 직선은 고작해야 한 점에서 만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두 직선이 항상 어떤 점에서 만난다는 정리는 없는데, 왜냐 하면 두 직선은 평 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적 원소, 즉 무한히 긴 직선과 무한원점을 도입함으로써, 두 직선은 항상 오직 한 점에서 만난다라는 정리를 보편적으로 참이 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이상적인 “무한” 원소들은 연결법칙의 체계를 가능한 한 간단하고도 명백하게 만드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점과 직선 사이의 대칭성 때문에, 기하학에서 매우 효과적인 쌍대원리가 결과 적으로 나타난다.
이상적 원소의 다른 용례는 익히 알고 있는 대수학의 복소-허수의 크기의 경우인데, 이것은 방정식의 근의 존재와 개수에 대한 정 리들을 단순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무한히 많은 직선들, 즉 서로 평행인 직선들이 기하학에서 이상적인 점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는 것처럼, 무한히 많은 수들의 어떤 체 계가 이상적인 수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이상적 원소들의 원리의 이러한 적용은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착상이다. 만약 우리가 대수학 전체를 통하여 이 원리를 체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자연수 1, 2, 3, 4, ...에 관하여 성립하는 정확히 동일한 간단 하고 친숙한 분할의 법칙들을 얻는다.
이제 우리는 가장 심미적으로 또 미묘하게 세워진 수학의 구조, 즉 해석학에 다다랐다. 당신은 무한성이 해석학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어떤 뜻에서, 해석학은 무한의 교향곡 이다.
미적분학에서 이룩한 괄목할 만한 진보는 주로 무한히 많은 원소 들을 가진 수학적 체계들의 운용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무한을 “매우 큰”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주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고대의 소피스트들에게 부분적으로 알려진 모순들, 즉 미적분학의 이른바 역리(패러독스)들이 당장 나타난다. 그러나 유한에서 성립하는 많은 정리들(예를 들면, 부분은 전체보다 작다, 최소와 최대의 존재, 합이 나 곱의 항의 순서의 교환 가능성)이 즉각적으로 또 제한없이 무한 으로 확장될 수 없다는 인식은 기본적인 진보를 뚜렷하게 해주었다. 나는 이 논문의 서두에서 이런 문제는, 특히 바이어슈트라스의 예지 를 통하여, 완전히 밝혀졌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해석학은 자기 영역 안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한을 사용하는 데 실제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해석학만이 무한의 본질에 가장 깊은 통찰력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이 통찰력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철학적 사고방식에 더 가까우며 또 무한에 관한 모든 복잡한 의문들을 새로 조명하려는 한 분야를 통하여 확보되 었다. 이 분야는 칸토르 Georg Cantor 가 창안한 집합론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칸토르의 학설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집합론의 독특하면서 독창적인 부분, 즉 초한수들(transfinite numbers)의 이론에만 관심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이론은 수학적 재능의 가장 멋진 산물이며 인간의 순수한 지적 활동의 최고의 업적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이 이론은 무엇인가?
칸토르가 도입한 무한의 새로운 개념을 간단히 나타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해석학에서 무한대와 무한소를 무엇인가 되어가는, 일 어나는, 극한적 개념으로서만, 즉 잠재적 무한 (potential infinite)으로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의 참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무한의 참모습을 수 1, 2, 3, 4, ... 전체를 한 완성된 단일체로 생각할 때, 또는 어떤 구간의 점들을 동시에 존재 하는 사물의 한 전체로서 생각할 때 만난다. 이런 종류의 무한은 실 무한 (actual infinity)으로 알려져 있다.
288~290.
수학의 기초에서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두 수학자, 프레게 Frege와 데데킨트 Dedekind 는, 서로 독립적으로 실 무한을 사용하여 직관 과 경험 양쪽과 무관한 산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기초는 오직 순수논리에만 기반을 두었고 순수논리의 연역만을 사용하였다. 심지 어 데데킨트는 유한수의 개념을 직관으로부터 취하지 않고 무한집합 의 개념을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이끌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실 무한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칸토르이었다. 이미 언 급한 무한의 두 가지 예를 보자:
1. 1, 2, 3, 4, ...
2. 0에서 1 까지의 구간의 점들 또는, 같은 것이 되는, 0에서 1 까지의 실수들 전체.
크기[기수]의 관점에서 이러한 예들을 다루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다루는 것은 오늘날의 모든 수학자들에게 친숙한 늘 라운 결과를 드러내준다. 왜냐 하면, 우리가 모든 [양의] 유리수, 즉 분수 1/2, 1/3, 2/3, 1/4, … ,3/7, ... 의 집합을 생각할 때, 우리는 — 오직 크기의 입장에서 보면-이 집합이 정수의 집합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리수들을 일상 적 방법으로 세어나갈 수 있다; 즉, 가부번(enumerable)이라고 말하 게 된다. [자연]수의 거듭제곱근들 전체의 집합, 심지어 모든 대수적 수들의 집합에서도 같은 것이 성립한다. 두번째 예는 첫번째 것과 유사하다. 놀랍게도 정사각형 또는 정육면체의 모든 점들의 집합은 0 에서 1 까지의 구간의 점들의 집합보다 결코 크지 않다. 모든 연속 함수의 집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 배울 때, 크기의 관점에서 오직 하나의 유일한 무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 (1)과 (2)의 집합은 말하자면 “동치”가 아니다. 오히려, 집합 (2)는 가부번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 집합은 집합 (1)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칸토르 의 이론에서 새롭고 특징적인 것을 만난다. 한 구간의 점들은 보통 의 방법, 즉 1, 2, 3, •••과 같이 셀 수는 없다. 그러나 실 무한을 허 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중단할 필요는 없다. 1, 2, 3, •••과 같이 셀 때, 우리는 열거된 대상들을 특정한 순서로 동시에 존재하 는 한 무한집합으로서 가부번이라 생각할 수 있다. 칸토르를 따라, 이런 순서의 유형을 w라 부른다면, 자연스럽게 w+1, w+2, ••• 부터 w+w,즉 w*2까지 계속 세어나갈 수 있고, 다시
290~291.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무한은 어떠한 경험, 관찰, 지식에 호소 하더라도 실재에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생 각이 사물과 그토록 많이 다를 수 있는가? 사고의 과정이 사물의 실 제 과정과 그토록 다를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사고는 실재와 그토록 멀어질 수 있는가? 어떤 현실적 뜻에서 우리가 무한과 만났 다고 생각할 때, 실재에서 극단적으로 크거나 극단적으로 작은 차원 들을 흔히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단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 혹받았다는 것은 다소 덜 분명하지 않은가?
실질적인 논리적 연역이 실제의 일이나 사건에 적용될 때 다소 우리를 기만하거나 비틀거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원주1) [본 논문에서 독일어 ‘inhaltlich’는 ‘material’ 또는 ‘materially’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들은 그 같은 목적으로 유보된 것이며 물질 또는 내용과 논리 형식 사 이의 전통적 구분의 뜻에서의 물질(matter)을 지시하는 데 사용된다. —원래 의 옮긴이]. [우리는 이를 ‘실질적’이라 번역하기로 한다. —현재의 옮긴이.]] 그렇지 않다! 실질 적인 논리적 연역은 필수불가결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의 추상적인 정의를 내릴 때에만, 특히 이것이 무한히 많은 대상을 포함 할 때 우리를 기만한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비정통적으로 실질적 인 논리적 연역을 사용해 왔다; 즉 우리가 그것의 타당한 사용에 필 요한 전제조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반드시 고 려해야 될 전제조건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는 철학자들, 특히 칸트 Kant 와 자기도 모르게 견해를 같이 하게 된다. 칸트는- 이것 은 칸트 학설의 핵심적인 부분인데-수학이 논리와는 독립적으로 주어진 주제물을 다룬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수학은 오로지 논리에 만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수학을 그런 식으로 세우려는 프레게와 데데킨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논리적 연역의 사용과 논리적 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추가적인 전 제조건으로서 개념에 무엇인가 주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고에 우선하여 직접 경험한 것으로 감지되는 어떤 논리외적인 구 체적 대상들이 주어져야 한다. 논리적 연역이 확실해지기 위하여, 우 리는 이런 대상들의 모든 양상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대상들 자 체와 함께 그들의 성질, 차이, 열, 이웃들이,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도 없고 어떠한 환원도 요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 주어져 있어야 된다. 이것은 비단 수학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적 사고와 이해와 전달을 위해 필요한 기본 철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이론에 따 르면, 수학의 주제물은 구조가 즉각적으로 분명하고 인식될 수 있는 구체적 기호들 자체이다.
294.
이제 나의 마지막 으뜸패를 내놓겠다. 새로운 이론의 정밀 검사는, 비록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특별히 이 이론이 풀도록 디자인 되어 있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는 것이다. “열매로 나 무를 알 수 있다”는 격언도 이론들에 적용된다. 칸토르가 그의 첫번 째 초한수들인 이른바 제 2 종의 수들을 발견하였을 때, 이미 언급 한 바와 같이, 셈의 이 초한적 방법이 보통 뜻으로는 셀 수 없는 다 른 곳에서나 알려진 집합을 세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지 여부에 관한 의문이 즉시 일어났다. 한 구간의 점들은 현저하게 그러한 집합으로 나타난다. 한 구간의 점들, 즉 실수들은 앞에서 주어진 표의 수들을 써서 셀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칸토르가 제기하였지만 해결하지 못한 유명한 연속체 문제이다. 어떤 수학자들은 연속체의 존재를 부 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다음의 주의 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잘못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연속체 문제는 그 것의 유일성과 내적 아름다움 때문에 다른 문제들로부터 돋보인다. 더욱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특질을 결합시키는 다른 문제들을 능가하는 우월성을 제시한다: 한편, 낡은 방법이 그것을 푸는 데 실 패했으므로 새로운 방법이 그것의 해결을 위해 요청된다; 다른 한편, 이것의 풀이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얻어질 결과 때문에 최고로 중요 하다
내가 전개한 이론은 연속체 문제의 해법을 제공한다. 모든 수학적 문제는 풀릴 수 있다는 것의 증명은 그 해를 구하기 위한 최초의 가 장 중요한 단계이다.
요약하여,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서 무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사고로 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자. 우리의 주된 결과는 무한이 실재에서 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 속에 존재하 지도 않으며-존재와 사고 사이의 놀랄 만한 조화인-합리적 사 고에 대한 정통적 기반을 마련해 주지도 않는다. 프레게와 데데킨트 의 초기 노력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어떤 직관적 개념과 통찰이 과학적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며, 논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을 확신한다. 무한을 운용하는 것은 유한적인 것에 의해서만 확실해 질 수 있을 따름이다.
무한이 행할 수 있는 역할 중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아이디어의 역할뿐이다—칸트의 용어대로, 아이디어가 모든 경험을 초월하고 구체적인 것을 한 전체로 완성하는 이성의 개념을 의미한다면-우 리가 우리의 이론으로 세워진 틀 안에서 주저없이 믿을 만한 아이디 어의 역할이다.
끝으로, 지적인 협조를 해주었고, 전문적인 면과 편집의 면 양쪽으로, 특히 연속체 정리의 증명에서, 유익한 도움을 준 베르나이스 P. Bemays 에 게 감사를 드린다.
307~309.
인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 Karl Theodor Wilhelm Weierstrass ]
요약 독일의 수학자. 멱승수(冪乘數)로서 복소함수이론의 기초를 이룬 일이 최대의 공헌이다. 여기에 나타난 그의 엄밀성은 모든 연구결과에 나타나, 그 이후의 수학의 엄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출생-사망
1815.10.31 ~ 1897.2.19
국적
독일
활동분야
수학
출생지
독일 바이에른주(州) 오스텐펠데
1815년 10월 31일 바이에른주(州) 오스텐펠데에서 출생하였다. 1834~1838년 본대학에서 상업과 법률을 배운 뒤 뮌스터대학교에서 C.구더만에게 사사하여 타원함수론을 연구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가톨릭 계통 김나지움의 교사직을 맡으면서 수학관계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고, 1856년 베를린대학의 초빙을 받아 교수로서 종신토록 재직, 항상 용의주도하게 준비된 강의로 성가(聲價)를 높여 많은 청강생이 모여들었다.
김나지움 시대에는 초타원적분(超楕圓積分)·아벨함수, 나아가 대수적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발표한 복소변수의 해석함수(解析函數)에 대한 개념은 G.리만의 개념과 자주 비교된다. 바이어슈트라스가 엄밀한 해석적 표현을 중시한 데 반하여 리만은 기하학적·물리학적 직관에 의존하였다.
최대의 공헌은 멱승수(冪乘數)로서 복소함수이론의 기초를 이룬 일이다. 이는 J.L.라그랑주의 미적분 대수화(代數化)를 복소평면에서 더욱 완전하고 엄밀하게 기초를 이룩하고 다시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어떤 수렴원(收斂圓) 안에서 멱승수로서 전개되는 함수의 값을 다시 해석접속(解析接續)으로써 이를 확장하였다.
그의 엄밀성은 모든 연구결과에 나타나, 변분법(變分法)의 연구, 동일수렴(同一收斂)의 발견, 도처에서 미분할 수 없는 연속함수의 제시 등 그 이후의 수학의 엄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Karl Theodor Wilhelm Weierstrass] (두산백과)
바이어슈트라스
[ Karl Weierstrass ]
출생 - 사망
1815년 10월 31일 ~ 1897년 2월 19일
독일의 수학자. 1864년 베를린 대학 수학과 교수. 구데르만에게서 해석학을 공부하고 해석학의 기초를 확립. 후설은 1877년부터 81년까지 그 밑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83년에는 지명조교가 된다. 후설 자신이 자기는 바이어슈트라스로부터 수학의 근본적 근거짓기라는 과제와 학문적 영위의 파토스를 물려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실제로 수를 '셈하다'라는 심적 작용으로서 파악하는 그의 입장은 『산술의 철학』으로 결실되는 초기 후설의 사유에 출발점을 제공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이어슈트라스 [Karl Weierstrass] (현상학사전, 2011. 12. 24., 노에 게이이치, 무라타 준이치, 와시다 기요카즈, 기다 겐, 이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