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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6월에 나는 6주간의 기본 군사교육을 마치고, 육군 제15사단 38보병연대 인사과에 배치를 받았다.
이듬해인 75년 4월 30일에 자유월남이 공산베트남으로 무력적화통일이 되었다.
따라서 남북은 초긴장 상태로 대치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의 추억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
명동초소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는 일명 ‘명동초소’라고 불리우는 최전방초소가 있었다.
이곳은 뉴스화면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철책선 안쪽에 위치한 곳이다.
즉 '통문'이라고 부르는 철책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본래의 초소명은 아라비아 숫자를 앞에 붙여서 ‘×××초소’등으로 통상 부르는데, 이 초소를 특별하게 ‘명동초소’라고 부르는 연유는 이러하다.
최전방 철책근무를 하게 되면 일정 기간 동안은 무척 엄격한 시스템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을 한 부사관 들이나 장교들은 순번을 정해서 외박을 하게 되어 있다.
어느 날 외박을 나간 선임하사로 불리던 ‘명동초소’의 부사관이 있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부하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귀대 길에 당시 유행하던 ‘라면땅’이라는 과자를 한상자 구입하였다.
그리고 박스를 비웠다.
비워진 박스 밑 부분에 ‘경월소주’ 댓(大)병을 넣은후 위에는 ‘라면땅’ 과자봉지를 채워넣었다.
검문을 하던 헌병초소에서는 당연히 과자상자로 알고 통과를 시켜주었다.
철책 근무 중에는 부대에서 음주를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부하들에게 회식을 한번 시켜주겠다는 선임하사가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하여 펼친 기발한 작전이었다.
과자상자로 위장하여 소주 운반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리하여 멋진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아뿔싸!
기어코 대형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몇 달 동안 술맛을 모르고 지내오던 터라 오랜만에 마신 소주 탓으로 인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였다.
그 결과 1개초소(소대)원 들은 그날 밤 야음을 틈타서 내려온 북쪽 특수부대원들에 의해서 모두가 죽음을 당한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이튿날부터 군의 책임자들을 비롯한 장성들이 헬기를 타고 엄청나게 들락 거렸다.
방문하는 장군들이 달고 있는 별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네온불이 반짝이는 서울의 ‘명동’을 빗대어 그 후로는 이곳을 ‘명동초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휴전당시엔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과 북 각 2km씩 되어 있던 비무장지대가 최전방초소의 안전을 위하여 양쪽에서 조금씩 더 앞으로 당기게 되니 지금은 실제 거리가 4km가 훨씬 못된다.
휴전당시엔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나무기둥으로 된 목책에 철조망을 쳐 두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오늘날은 모두가 쇠기둥으로 된 철책으로 교체가 되었다.
군 헬기 월북 미수 사건
오늘날 같으면 당장 매스컴에 보도가 되는 바람에 일반인도 모르는 일이 없다.
그러나 50여년 전에는 보도통제가 되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어느 날 헬리콥터가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전방 지역에는 가상의 ‘비행금지선’이 있다.
이 구역을 넘어서면 경고 사격을 하게 되어 있고 그래도 계속 비행을 하면 격추를 하게 되어 있다.
그날도 경계병들이 근무를 서는데, 헬기가 ‘비행금지선’을 넘었다.
경고 사격을 하였지만, 무시하고 계속 비행을 하자 격추를 시키게 되었다.
조사 결과 상급부대의 ‘공병참모’인 모장성이 전방시찰 명목으로 비행중 월북을 시도하다가 격추가 된 사건이다.
그 장군은 회계부정을 저지른 것이 감사 결과 적발이 되어 처벌을 받게 될 위기에 처하자 탈북을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제팬티 사건
인사과에 근무하면서 휴가를 다녀 온 어느 날 갑자기 부대장의 내무검열이 있다고 불시집합을 하였다.
내무반 정리정돈을 비롯하여 부대원들의 의복 중에서 내의를 집중적으로 검열하는 일종의 위생검열을 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가 많았다.
우리들은 손수 바느질을 하여 조그마한 주머니를 3개씩 만들어 내복의 양쪽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밑에 매달았다.
그 주머니에는 ‘디디티’라는 살충제를 넣어서 ‘이’를 방제하던 시절이었다.
부대에는 오늘날 같이 세탁소나 세탁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별도로 없었다.
한겨울에 고무장갑도 없이 얼음을 깨고 냇가에서 맨손으로 자기빨래를 하던 시절이었다.
군용팬티는 무명천으로 만들어서 착용감도 뻣뻣한 게 별로인데다 색깔마저 흰색이라 때가 잘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휴가 시에 좀 더 착용감이 부드러운 ‘쌍방울표’ 사제 삼각팬티를 몇 개 부대로 가져가서 입고 있었다.
그날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무검열을 하였다.
사제팬티를 착용한 것이 발각되면 큰일이므로 정말로 급하게 군용팬티로 갈아입고 집합에 응하였다.
차례대로 검열을 받고 있는데 내 앞에서 부대장이 갑자기 멈추었다.
긴장한 가운데 부대원들이 키득이는 소리가 들였다.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는데 아뿔싸!
“이상하다. 분명히 남자팬티인데 오줌구멍이 없는 팬티이네!
귀관 뒤로 돌아!”
라고 명한다.
“이 팬티는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하면서 부대장은 남자용 팬티에 뚫려있는 소변용 구멍으로 들고 있던 지휘봉을 밀어 넣었다.
순간 바짝 긴장되어 있던 내무반에서는 한꺼번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연인즉 워낙 급하게 갈아입는 과정에서 앞뒤를 바꿔 입은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의 군용팬티는 오줌구멍이 없으면 앞뒤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조잡한 것이었다.
워낙 급하게 갈아입느라고 앞뒤를 바꿔서 입은 것이 원인이었다.
긴급내무검열 때문에 바짝 긴장을 한 부대원들 앞에서 웃음으로 넘어가는 당시 부대장님은 결코 속이 좁은 지휘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라면 먹다 영창 갈 뻔한 사건
당시 우리부대막사는 마룻바닥으로 되어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마루 틈새로 빠진 몽당연필과 지우개를 구하러 마루한쪽을 들어내고 밑으로 내려가면 옆교실과 연결이 되는 그러한 구조였다.
길게 늘어선 막사중 우리내무반 구석에 있는 비밀나무판자를 들어내고 밑으로 기어가면 옆칸은 부식창고였다.
친한 동료들끼리는 인계인수가 되는 비밀사항이었는데 어느 날 그 판자 밑으로 들어가서 옆 부식창고에 들어갔다.
우와?
꿈에도 그리던 ‘삼양라면’을 비롯하여 온갖 부식들이 가득하였다.
우리들이 가장 먹고 싶었던 라면과 건빵을 가져와서 야간근무시에 수시로 즐기며 달콤한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부대정문 근무당번이 되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배짱이 맞는 동료와 나는 자정이 다되어 가는 시간이라 출출함을 못 견디고 라면을 끊여 먹기로 뜻이 통하였다.
그리하여 근무지에서 가까운 우리사무실에서 라면을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어두운 밤하늘로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아차! 싶어서 부리나케 정문으로 달려 나갔다.
‘근무지를 이탈하여 라면을 몰래 끊여 먹었으니 우린 틀림없이 부대영창(감옥)을 가게 될 거야!’
달리는 도중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도 하기 전에 찝차가 ‘부릉!’하면서 부대장관사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연인즉 그날은 부대장회의가 상급부대에서 열렸는데 회의 후 회식자리가 길어졌고 술을 마신 부대장이 돌아오는 도중에 잠이 들었다.
고맙게도 부대장운전병이 친하게 지내던 전입동기였다.
그가 오늘 정문 근무는 ‘인사과’임을 기억하고 기지를 발휘하여 자기가 직접 내려서 차단기를 치우고 술이 취해 잠이 든 부대장을 관사로 모셨기에 우리들은 무사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동기에게 술은 한잔 사주었지만,
“어휴! 큰일 날 뻔했네......”
어떤 놈이 감히 '부대장 화장실'에서 '응가'를?
내가 근무하던 곳은 한국의 냉장고라 할 정도로 대단한 추위를 자랑하는 강원도 '대성산'부근이었다.
6개월을 순환주기로 최접적지역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겨울철 혹한기 훈련 중에 있었던 일이다.
한겨울 어느날 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기상을 한 후,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하얀메밀꽃 보다도 더 하얀, 눈이 하얗게 덮인 막사 앞 임시연병장에서 덜덜 떨면서 기합을 받았다.
엄청 화가 난 작전참모왈,
“어떤 놈이 부대장이 개시도 안한 화장실에서 실례를 했느냐?”
하면서 범인 색출 작전에 들어갔는데, 범인이 쉽게 자수할 리가?
덕분에 우리들은 단잠에 빠져있던 추운 겨울 한밤중에 하얀 눈이 덮인 막사 앞에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기합을 받은 멋진 추억을 만들었다.
훈련중이라 부대가 이동을 한 후 부대장이 사용할 간이화장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몹시 급한 어떤 놈이 부대장보다 먼저 그곳에서 볼 일을 보고 말았다.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꽁꽁 얼어서 흔적으로 남아있는 아주 큰 ×덩어리 때문에 죄 없는 우리들이 기합을 받은 사건이었다.
‘똥은 가려서 누어야지 이 친구야!
아무리 급해도 부대장용 화장실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지!’
취침을 방해하기에 권총을 발사했심다!
그 무렵 장*순이라는 부대장 당번병이 있었다.
이 친구는 나보다는 후임병이어서 같은 내무반을 사용하는 관계로 공짜 술을 엄청 많이 얻어 마신 친구이다.
고향이 인천인데 부친이 선박사업을 하여 경제력이 탄탄한 친구다.
돈이 많은 관계로 부대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안부대원을 자기편으로 만든 아주 솜씨가 탁월한 친구였다.
나는 이 친구를 통해서 군대내 고급 정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의 정보원은 물론 보안부대원이었다.
김대중정부시절 어느 날 학교로 전화가 걸려와서 나를 찾는다.
“이선생님 되세요?
저 장O순인데 기억나십니까?
38연대 인사과에 근무하신 적이 있죠?
저는 지금 '국회사무처'에 국장으로 근무합니다.
서울 오시면 한번 들리세요.”
하고 통화를 한 적이 있는 친구다.
우리 부대가 최전방 접적지구에 근무할 때였다.
철책순시를 마친 부대장이 잠시 취침을 하기 위하여 상황실 야전침대에서 군화를 신은체로 잠이 들었다.
순간 이 친구가 부대장의 권총을 들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 친구는 평소 나를 비롯한 몇몇 고참들과의 술자리에서
"저는 권총을 한번 꼭 쏴보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찾아온 기회를 이용하여 희망사항이었던 권총을 발사하였다.
“탕! 탕!”
총소리에 놀란 부대장이 잠에서 깨어나서 야단이 났다.
그런데 이 친구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위기를 모면하는데
“부대장님께서 곤하게 주무시는데 까마귀가 울어대어 취침하시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까마귀 쫓느라고 발사를 했습니다.”
하고 능청스레 대답을 하니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녀석은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어느 날 주석에서 자랑삼아
“모두들 군에서 여자들이 많이 그리울 텐데,
나에게 잘 보이면 여자들 나체를 공짜로 실컷 구경할 수가 있다!”
하고 큰 소리를 뻥뻥 친다.
내용인즉, 이곳은 전방부대인 탓으로 민간목욕탕 구경하기는 엄청 힘이 든다.
그래서 부대 자체로 목욕탕을 만들어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군인가족들과 군인 상대 장사를 하는 술집 등 민간인들도 사용일정표에 의해서 부대목욕탕을 사용하도록 했었다.
녀석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부대 내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목욕탕 관리병’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 관리병이 비밀스레 만들어 둔 비밀구멍을 통하여 목욕하는 여자들을 훔쳐보는 그러한 녀석이었다.
그 후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부대장이 우연히 집무실 밖을 내다보았다.
어떤 건방진 놈이 우산을 쓰고 아가씨와 팔짱을 끼고 부대 정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화가 난 부대장 명령에 의해서 잡혀온 놈은 바로 그 친구다.
군인은 비가와도 우산을 들지 못하고 판쵸우의를 입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산을 쓰고 게다가 아가씨 팔짱까지 끼고 간도 크게 부대정문을 거닐다 직통으로 걸려들었다.
그동안 몇 건의 죗값까지 더해서 부대영창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몇 명은 그동안 녀석에게서 엄청 많은 대접을 받았기에 한 달간의 자대영창 형기만료로 부대로 돌아온 그 친구를 위로하기 위하여 PX에서 막걸리 파티를 하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위로를 건네는 순간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이병장님! 놀라지 마세요.
사실은 제가 영창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인천 집에 다녀왔습니다.”
라고 한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보안부대원을 내편으로 만들어두었으니 부대에서는 자대영창을 간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집에서 휴가를 보내다 왔단다.
보안부대원이 만들어 준 휴가증으로…….
요즘도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휘발유 한통이 소주 1병
이 접적지구에는 ‘민촌’과 ‘재건촌’이라는 민간인 마을이 있다.
서부전선에 ‘대성리’마을과 비슷한 형태의 마을이다.
모내기철이 되면 대민봉사활동을 나가는데 농촌 출신들은 이때가 엄청 즐겁다.
모내기를 할 때 나오는 새참과 막걸리는 군대식만 하다 모처럼 맛보는 민간음식이어서 엄청 인기가 많다.
시골출신인 나를 포함하여 농사일을 할 줄 아는 동료들은 도시출신 동료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며 한 철을 즐겁게 보냈었다.
군대사회는 좋은 보직이 엄청 큰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 인사과는 소위 잘나가는 부서였다.
회식이 있을 때면 보급품 담당부서인 군수과에 가서 회식용 고기를 요구하면 두말없이 고기를 줄 정도였다.
대신에 우리과에서는 ‘외출증’이나 ‘휴가증’등의 증명서나 진급 심사시 조금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위력을 부리곤 했었다.
요즘엔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배급된 고기중에서 비정상으로 빠져나가는 고기가 상당했다.
그렇게 몇 단계를 지나다 보면 최말단 부대에서 살고기구경을 하기는 어렵다.
비계는 어쩌다가 맛을 보고 고기가 목욕한 국물만 구경하는 일이 예사로 벌어진다.
또한 PX에서 겨울철에 막걸리를 사서 마시면 얼음이 버적버적한다.
배달 도중에 막걸리는 민간에게 빼돌리고 양을 맞추기 위해서 개울가에서 맹물을 보충한다.
그 흔적,
어느날 PX앞에서 배달용 차량 막걸리탱크 겉면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나는 분명히 목격을 했다.
당시에는 요즘같이 페트병에 담긴 상태의 막걸리가 아니고 한되, 두되 하면서 주전자로 팔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기름을 운반하는 유조 차량같이 막걸리도 커다란 탱크에 담아서 각 부대 PX에 배달을 하던 시스템이었다.
돈에 욕심을 낸 운전병들이 있었기에 그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렇게 큰 탱크에서 몇말정도는 팔아 치워봐야 맹물을 보충하면 양을 맞출 수가 있었다.
부대에 배달된 다음에도 마음이 고약한 PX판매병이 또 장난을 쳤다.
맹물 몇 말만 보충하면 내주머니가 두둑한데…….
누가 막걸리 도수를 검사 하는 것도 아닌데…….
덕분에 우리들은 도수가 낮아진 막걸리를 마시면서
‘전방 부대의 겨울 막걸리는 왜 이렇게 얼음이 버적버적 하지…….’
하였다.
이런 시절이었으니 우리는 가끔씩 회식을 하기 위하여 군용찝차뒷부분에 매달린 한말들이 스피어통에 휘발유를 넣어서 구멍가게에 들고 갔다.
그러면 당시 강원도 화천에서 많이 팔리던 ‘경월소주’나 ‘대선소주’ 1병(大)과 바꾸어 주었다.
20L 한말들이 휘발유값과 소주 1병값을 비교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지만 당시엔 예사로 일어났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수많은 사연과 함께 근무하던 군 생활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제대일자를 달력에 표시하며 근무하던 1976년 8월 어느 날,
판문점에서 경계에 방해가 되는 ‘미루나무’를 절단하던 미군을 북한군이 공격하여 도끼로 살해한 엄청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 결과 비상사태인 ‘데프콘 3’이 발령되었다.
일체의 휴가나 외출이 금지되고 심지어 만기복무후 전역하는 장병들의 전역마저 중지가 되었다.
큰일이다.
제대를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에서 제대가 중지라니…….
당시 나는 말년휴가를 받아둔 상태였다.
엄청 걱정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은 식사를 하는 식당에 까지 철모와 개인화기까지 지참하고 다녔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얼마가 지난후 휴가부터 다시 실시가 되었다.
이는 장병들의 사기를 고려한 조치였다.
나도 제대를 앞둔 상황이라 말년휴가라 불리는 마지막 휴가를 받아서 휴가 길에 올랐다.
이 휴가 때 아마 안동아가씨를 만나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부산행 중앙선 10시 47분 야간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영주역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교행 하는 상행선 열차에는 위장막으로 가리고 탱크를 실은 열차가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낮에 이동하다가 일반인들이 보게 되면 전쟁에 대한 공포심 등으로 민심이 동요할까봐 위장을 해서 야간에 남쪽부대에 있던 탱크 등을 북으로 이동을 시키는 것 같았다.
아무튼 휴가를 무사히 마치고 복귀한 나는 당초에 우려했던 전역중단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아서 77년 2월에 무사히 3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3월에는 복학을 할 수 있었다.
'얼룩고무신'과 '밤배'
요즘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최전방지구 부대에서의 사진촬영은 오직 허가를 받아 부대에서 운영하는 사진병만 가능했다.
부대 내 시설이나 위치 등이 비밀사항이므로 개인사진기는 물론 휴대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부대사진병이 독점으로 촬영하여 흑백사진이었던 당시 현상작업도 부대 내에서 직접 하던 상황이었다.
어느 날 예하 소총부대에서 근무하던 거무튀튀한 병사하나가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것도 부대장의 특별지시에 의한 휴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병사가 ‘둘다섯’이라는 듀엣의 멤버 이두진과 오세복중 오세복이었다.
입대전 ‘긴머리 소녀’라는 노래를 발표했었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무명가수로 입대를 하고난 후 이 노래가 엄청 크게 히트를 하였다.
그래서 당시 가수협회장이었던 최희준을 비롯한 유명가수들이 우리 부대에 면회를 왔었다.
부대장 면담후 오세복은 소총수에서 일약 부대 내 2명밖에 없는 사진병으로 특별 보직이동이 이루어졌다.
힘이 있고 유명인이 대접을 받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 예하부대로 나갈 때는 인사과에서 ‘외출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헌병이 근무하는 검문소를 통과하기 때문에 증을 발급받기 위하여 담당자인 나와는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당시 나는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참병이었다.
일등병인 오세복은 증을 발급받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나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나또한 고참병의 특권으로 업무가 한가할 때는 부대 내 사진관을 자주 찾아서 막걸리도 한잔씩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병장님 다음에 발표할 곡이 이 곡입니다.
특별서비스로 발표 전에 먼저 들려 들릴게요.”
하면서 몇 곡을 기타로 연주하며 수정을 하면서 들려준 노래가 나중에 엄청 히트를 한 ‘얼룩고무신’과 ‘눈이 큰아이’, ‘밤 배’ 등이다.
운이 좋으면 땅굴도 발견한다.
어느 날 ‘휴가증’을 발급하는데 특이한 휴가증이었다.
당시는 1년에 25일 휴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병사는 무려 6개월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가 야간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고는 소나무 밑에서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소총을 턱에 괴고 꼬박꼬박 졸고 있는 그때 땅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 옆에 세워진 소총이 청진기 원리에 의해서 땅 밑 소리가 더 크게 들린 것이다.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를 재차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를 하였다.
그 결과 북한의 남침용 땅굴임이 확인되어 이 병사는 6개월의 포상휴가라는 엄청난 행운을 안게 되었다.
‘복 많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 밭에 넘어진다.’
라는 속담처럼 이 병사의 ‘근무 중 졸음 행위’는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땅굴발견으로 연결이 됨으로 엄청 긴 포상휴가를 가게 되는 행운이 따랐는데 이런 현상이 일반적일 수는 없겠지?
이상한 돼지몰이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북괴군!”,
“쳐부수자 공산당!”,
“이룩하자 평화통일!”
이렇게 시작되는 멸공구호가 있다.
74년 무렵에는 전방 부대에서 철책근무에 투입되기 전 북측을 향해서 멸공구호를 외친 후에 투입이 되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우리 측 관측소에서 보면 쉬는 시간에 ‘외다리 씨름’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관찰이 될 정도의 거리이다.
그 해 추석 무렵의 일이다. 우리 측을 향해서
“야! 박정희 졸개들아. 북쪽으로 넘어 오너라!
우리는 오늘 쌀밥에 고깃국 먹었다.”
라고 함성을 질렀는데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아주 잘 들렸다.
북측과의 거리가 휴전 당시엔 4km였지만,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새로운 철책을 만들면서 조금씩 거리가 좁혀졌다.
산악지역에서는 골짜기가 워낙 깊으니, 높은 곳에 위치한 고지와 고지 사이에 직선거리는 실로 얼마 되지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쪽이 더 잘살고 좋은 나라라고 맞대응을 하는데, 아무리 고함을 쳐도 끝장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가 사용하는 비상수단이
“때려 잡자 김일성!”으로 시작하는 멸공구호다.
자기들의 우상화된 신 김일성을 때려 잡는다니 그들은 꼼짝없이 꼬리를 내리고 막사로 사라지고 만다.
74년 현재 그들이 우리보다 못 사는 것은 확실하다.
그해 추석 며칠 전에 돼지에 목줄을 해서 앞에서 한명이 끌고 뒤에서 한명이 채찍으로 몰아서 산을 오르는 것이 목격되었다.
산 위쪽에는 물론 그들의 초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돼지가 옆에 산을 오르는 것이 또다시 목격되었다.
그후에 또 다른 옆에 산을 반복해서 오르는 것이 목격이 되었다.
‘분명히 같은 돼지와 몰이꾼인데…….’
“쌀밥에 고깃국 먹었다.”
라고 자랑을 하더니 우리가 관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일한 돼지와 몰이꾼으로 위장 돼지몰이를 한 것이다.
각 초소마다 이렇게 돼지를 잡아서 잘 먹는다고…….
못 사는 것이 확실하다.
녹슬은 기찻길
군 생활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 마칠까 한다.
7.4남북공동성명에 의해서 당시 철책 선에는 대북방송이 중단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다시 시작될 대북방송을 위하여 사단 심리전요원들은 방송기기를 수시로 점검하고 있었다.
그날도 점검을 하던 중, 한 방송요원이 스위치 조작을 잘못하는 바람에 대형 확성기에서
“휴전선 달빛아래 녹슬은 기찻길......”
로 시작되는 노래가사 같이 정말로 최전방 철책선 부대의 고요한 달빛이 밝은 어느 밤중에 나훈아의 ‘녹슬은 기찻길’이 흘러나오는 방송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 방송요원은 징계를 받아서 보직에서 해임이 되고 부대 자체 영창(감옥)에 갔다.
영창을 갔다는 사실은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고 동료에게서 전해들은 얘기이다.
다만 노래가 방송되는 것은 내가 분명하게 들었다.
- 녹슬은 기찻길 : 하모니카연주 -
휴전선 달빛 아래 녹슬은 기찻길
어이해서 피빛인가 말 좀 하렴 아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어버이 정 그리워 우는 이 마음
대동강 한강 물은 서해에서 만나
남과 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너처럼 내 마음도 울고 있단다.
첫댓글 군대이야기
진짜 사건사고 일화가 넘치네요
이렇게 글로 남겨놓으니까
두고두고 추억하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군대의 3년근무에 사건사고 참많았네요 울신랑은 72년도1월10일 입대해서 36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는데 아직도 사람들 만나면 근대예기가 끝이 없이 나오더군요 남자들의 최고의 얘기는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추억인가 봅니다 재미난얘기 긴장하면서 잘읽었읍니다 고생 많으셨네요 감사 합니다
저는 일잔하러...
직전 회장님은 운동하러...
우연히 만나서 반가워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