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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여성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 (Simone Weil)
시몬느 베이유는 ‘에디트 슈타인’과 함께 사람들이 여성철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고등학교 교사에서, 공장의 노동자로, 스페인 전쟁의 참전용사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소크라테스주의자로, 정치적 비평가로 그리고 철학자로, 무엇보다 신비가로 살다간 시몬느 베이유는 역사에 다시없을 예외적인 여성이었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한 인격의 신비’를 보여준 여성이다.
1909년 파리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베이유는 직업이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뇌프샤토, 망통, 마이엔느, 알제리, 샤르트르 그리고 라발 등 여러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베이유는 1919년에 라발(Laval)에서 라발 여자고등학교인 리세(Lycée) 페넬롱에 다니기 시작하였지만, 1924-1925년까지 파리의 빅토르-뒤루(Victor-Duruy) 고등학교로 전학하여 여기서 철학자 흐네 르 센느(René Le Senne)의 강의를 즐겨 들었다. 1925년에는 앙리4세 고등학교에 입학 하였는데, 여기서 3년 동안 철학자 알렝(Alain)의 지도를 받게 된다. 베이유는 같은 알렝의 제자로서 자신보다 한해 선배인 시몬느 드 보부와르(Simone de Beauvoir)와 매우 친하게 되는데, 후일 프랑스의 유명한 문호이자, 철학자 사르트르의 절친 이기도 했던 보부아르는 베이유의 젊은 시절의 삶을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단정한 젊은 소녀에 대한 기억들(Mémoires d'une jeune fille rangée)』이란 책을 통해 젊은 베이유의 인물됨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데, 그 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베이유는 그녀의 지성적인 명성과 그녀의 이상한 행동으로 인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큰 기근이 일어 중국 전역을 황폐하게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소식을 접한 베이유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그녀의 눈물은 그녀의 철학보다도 훨씬 더 그녀에 대한 나의 존경을 유발하였습니다.
베이유는 소녀시절부터 세상의 불행에 대해 매우 민감하였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애가 천성처럼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베이유는 1928년에 프랑스의 영재학교라고 불리는 에꼴 노르말 슈페리외르(l’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1931년에는 철학교사 자격증(l'agrégation)을 획득하였다. 이후 파리근교의 지방도시에서 여러 고등학교를 거치며 교사생활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시몬느 베이유는 사회정의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한 번 옳다고 결정한 것은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자기 신념이 확고한 주체적인 특성을 나타내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성격은 1931년에 쀠이(Puy)에서 실업과 낮은 인금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조합원들 만났을 때, 주저함 없이 그들에 동참하게 하였다. 그녀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조원이 되었고, 노조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노동조합들의 연합을 주장하는 글을 「자유학교(L’École émancipée)」와 「프롤레타리아 해방(La Révolution prolétarienne)」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2년부터 베이유는 니콜라스 라자레비치(Nicolas Lazarévitch)의 중재로 알게된 보리스 수바린(Boris Souvarine)의 「민주공산주의 서클」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그룹은 ‘반-스탈린 공상주의’를 지향하였다. 시몬느 베이유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진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매력을 느낀 때문이었고, 이때부터 이미 그녀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1932년에 독일에서 나치즘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베이유는 나치당이 힘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 몇 주 동안 독일에 머물기도 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베이유는 독일의 나치당과 관련하여 미래의 위험을 알리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된 레프 트로츠키와도 긴밀한 친분을 가지고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1934-1935년 사이에 베이유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교사생활을 잠시 그만두고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였다. 시몬느는 알스톰(chez Alsthom) 전자회사, JJ 가르토(JJ Carnaud) 철강회사, 포르제 드 바스-엥드르(Forges de Basse-Indre) 철강회사, 르노(Renault) 자동차회사 등에서 일하였다. 베이유는 당시의 노동의 경험을 노트에 메모해 두었는데, 이는 후일 그녀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조건』이란 책을 쓰게 하였다. 1935년에 베이유는 건강히 매우 나빠졌고, 공장에서의 노동을 멈추어야 했는데, 당시 공장 근로자의 열악한 삶으로 얻은 두통은 그녀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시몬느는 다시 부르쥬(Bourges)의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월급의 반 이상을 어렵게 생활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제공하였다. 피카르는 당시의 시몬느에 대해 “그녀는 쀠이의 실업자들처럼 하루에 5프랑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였고 자신의 급여의 나머지 모두를 학급의 어려운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하였다”라고 회상하였다. 1936년 베이유는 파업에 동참하였고, 국가 간의 평화협정에도 매우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조르쥬 우르뎅은 시몬느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녀는 아주 특이한 교사였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투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베이유는 이미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소명으로 고통 겪기 시작한다. 타인의 비참함을 함께 나누어야만 했고, 그렇게 해서 베이유는 짧은 인생 내내 불행의 동반자가 된다.
1936년 8월에 스페인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젊은이들을 참수하는 소식을 접한 베이유는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에 큰 화상을 입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하고 있는 정치-경제 잡지인 「새로운 노트들(Nouveaux cahiers)」의 출간에 협력하게 된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베이유는 가톨릭 종교와 접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아시시의 성당의 모자이크 등은 그녀에게 종교적 영감을 불어 넣었다. 1938년부터 시몬느 베이유는 조금씩 크리스천이즘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당시는 시몬느가 처음으로 신비적인 체험을 한 때이다. 베이유는 자신의 체험들에 대한 이해와 가톨릭 신앙에 대해 알고자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제인 요셉-마리 뻬렝(Joseph-Marie Perrin)신부를 만나게 된 것도 이 때인데, 뻬렝신부는 베이유가 종교와 신앙에 대해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뻬렝신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가 되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만의 영성적인 삶을 시작하였지만, 특정한 종교의 체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타고난 자유로운 성향과 철학적 신념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죠르주 우르뎅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베이유는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될 마음은 있었지만, 결국 세례를 받지 않는다. [...] 그 어느 것도, 아무 것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감싸 안지 않으려 하는 현실과 함께 하기를 선택함으로써, 베이유는 교회 밖의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자, 모욕 받는 자, 신을 부정하는 자들까지를 감싸 안으려 했다. [...] 그녀는 그것을 말하고 글로 쓰면서 누군가가 지켜 나가야하는 그 자리의 중요성을 증거 했다.
뻬렝신부는 시몬느 베이유가 임종하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베이유의 정신과 삶을 고려하면 그녀가 정식적으로 가톨릭에 귀의 하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리’이지, 이를 감싸고 있는 외관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종교와 영성적인 삶에 관련된 자신의 내적인 삶에 대해서는 매우 비밀스러웠고 누구에게도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의 벗들이 그녀의 영성적인 삶의 깊이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녀가 죽은 이후였다. 사후에 출간된 『신의 사랑과 불행』, 『영적인 자서전』, 『어느 수도자에게 보낸 편지』, 『뿌리내리기』,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림』, 『초자연적인 앎』등은 모두 그녀의 영성적인 특성과 깊이를 말해주는 저작들이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1940년 6월 13일에 파리 시가 독일군의 입성을 허락하자, 베이유는 가족과 함께 남쪽 항구 도시인 ‘마르세이유’로 피신한다. 베이유가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정식으로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리스 철학자들과 특히 플라톤의 저작들에 대해 정리하고 이에 대한 해석과 주석을 달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작업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의 근원들 그리고 先-크리스천에 대한 영감들(La Source grecque et les Intuitions pré-chrétiennes)』이란 제목으로 1, 2권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당시 베이유는 고대 인도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는데, 바가바드기타와 우파니샤드는 그녀의 애독서였고, 이러한 종교적 탐구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어우러져 그녀만의 독특한 영성을 형성하게 하였다. 당시에 행해졌던 다양한 철학적 반성들을 적은 그녀의 “까이에(Cahiers, 노트)”는 후일 1, 2, 3부로 출간된다.
전쟁 중에도 그녀는 프랑스의 독립을 위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한편으로 에밀 노비스(Émile Novis)라는 가명으로 ‘자유프랑스紙’에 글을 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용(Lyon)의 예수회 사제들을 통해 결성된 레지스탕스에 협력하였다. 베이유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1941년 새로 생긴 법으로 인하여, 그녀를 학교에서 제명시켰다. 학교를 떠난 베이유는 생계조차 어렵게 되자, 뻬렝신부의 도움으로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 신부가 경영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그녀는 진정한 농부가 되고자 노력하였고 농장에서의 추억은 베이유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된다. 하지만 독일군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시몬느는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미국으로 모셔갔다. 미국 당국은 시몬느에게 정치적 망명을 권유하며, 시민권을 제시하였지만, 베이유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전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은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았고, 그녀의 양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몬느 베이유는 곧 바로 미국을 떠나 프랑스의 독립운동을 위해 영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드골 장군(général de Gaulle)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와 합류하고 이들을 위한 매체 활동을 전담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은 1943년에 그녀를 드골 장군의 조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녀는 프랑스로 잠입해 현지의 레지스탕스와 합류하고자 청했으나, 건강상의 이유와 유대인의 신분으로 인한 위험 부담 때문에 거절당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24일 베이유는 폐결핵으로 쇄약해진 상태에서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43세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시몬느 베이유의 ‘행동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하여 그녀의 철학적 작업들에 대해서는 다소 과소평가된 점이 있다. 그녀의 생전이나 사후에 출간된 그녀의 저작은 무려 27권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여러 번 재출간 된 도서들도 매우 많다. 그녀의 책을 출간된 연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독일의 인상(Impressions d'Allemagne)』, 1932 / 『철학의 교훈(Leçons de philosophie)』, 1933-1934 / 『자유의 원인과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성(Réflexions sur les causes de la liberté et de l'oppression sociale)』, 1934 / 『복종과 자유에 관한 명상(Méditation sur l'obéissance et la liberté)』, 1937-1938 / 『게오르그 베르나노스에 보내는 편지(Lettre à Georges Bernanos)』, 1938 / 『야만에 대한 반성(Réflexions sur la barbarie)』, 1939 / 『히틀러주의의 근원에 대한 반성(Réflexions sur les origines de l'hitlérisme)』, 1940 / 『일리아드 혹은 힘에 대한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 1940-1941 / 『제조공장의 삶에 대한 체험(Expérience de la vie d'usine)』, 1941 / 『양자이론에 관하여(A propos de la théorie des quantas)』, 1942 / 『피타고라스의 저작들에 대한 주석(Commentaires de textes pythagoriciens)』, 1942 / 『신의 사랑과 불행(L'Amour de Dieu et le malheur)』, 1942 / 『영적인 자서전(Autobiographie spirituelle)』, 1942 / 『마르세이유에서의 노트(Cahier de Marseille)』, 1941-1942 / 『뉴욕에서의 노트(Cahier de New York)』, 1942 / 『어느 수도자에게 보낸 편지(Lettre à un religieux)』, 1942 / 『뿌리내리기(L'Enracinement)』, 1943 / 『중력과 은총(La pesanteur et la grâce)』, 1947 / 『신을 기다림(Attente de Dieu)』, 1942 / 『초자연적인 앎(La connaissance surnaturelle)』, 1942 / 『노동자의 조건(La condition ouvrière)』, 1951 / 『그리스적 원천(La source grecque)』, 1953 / 『억압과 자유(Oppression et Liberté)』, 1955 / 『런던에서의 글 그리고 마지막 편지들(Ecrits de Londres et dernières lettres)』, 1957 /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글(Ecrits historiques et politiques)』, 1960 / 『신의 사랑에 관한 자유로운 사유(Pensée sans ordre concernant l'amour de Dieu)』, 1962 / 『과학(학문)에 관하여(Sur la science)』, 1966.
불과 10여 년 동안 무려 26권의 책을 저술한 그녀의 저술 작업은 놀랍다. 게다가 그녀가 거의 한해도 쉬지 않고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고려하면 마치 ‘슈퍼우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주체 할 수 없어 젊은 시절에 완전히 불타버린 모차르트처럼 시몬느 베이유 역시 불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시몬느 베이유에 대한 철학자들의 찬사는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아래 글들은 철학자, 문호들이 여성 철학자이자 신비가인 시몬느 베이유에게 바치는 찬사들이다.
•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
시몬느 베이유가 제조공장들 안으로 피신하였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은 가장 겸손한 이 운명을 함께 하고자 하였던가? 한 사회가 저항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에로 치달을 때, 열정적인 심장을 가진 한 사람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은 특권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뿌리내리기(Enracinement)’ 안에서 우리는 시몬느 베이유의 이러한 ‘포기’가 어디에까지 도달하는 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안에서 시몬느 베이유는 자신의 취향을, 아니 차라리 진리에 대한 미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그녀가 가진 하나의 특권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코 휴식하지 않고 사람들이 인생전체에 걸쳐서 지불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열정은 시몬느 베이유로 하여금 가장 자연스러운 편견들을 넘어서 자기 시대의 병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하며, 그 치유책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한다.
어쨌든 나에게는 시몬느 베이유가 ‘뿌리내리기’ 안에서 규정한 요청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유럽을 위한 ‘재-탄생’은 상상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 이처럼 시몬느 베이유가 말한 그토록 많은 심오한 것들이 진정한 위대함을 획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예로운 힘에 있어서 위대하고, 절망이 없는 그것에 있어서 위대하다. 이러한 것이 이 저술가의 덕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아직도 고독하다. 그러나 이 고독은 희망을 간직한 전달자로서의 고독이다.
• 시오랑(Cioran)
시몬느 베이유에게는 한편으로는 회의론을 고수하는 자아에 대한 부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성(聖性)에 접근하였다. (...) 나는 그녀의 삶을 감탄과 격분 사이에서 읽었다. 그녀의 지성보다 더욱 나를 휘어잡은 것은 전례가 없는 오만함이었다. (...) 어제 저녁 헝가리의 시인 필두스키(Pildusky)와 시몬느 베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하였다. 그는 시몬느 베이유를 성녀(聖女)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나 역시 그 만큼이나 그녀에 대해 감탄하고 있지만, 그녀가 성녀는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정열과 인내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하여 자기 문화의 근원인 구약성경을 경멸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녀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멸을 이 구약성경 안에 집약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시몬느 베이유는 현대의 ‘에제키엘’이거나 혹은 ‘여성 이사야’였다. (...) 에디트 슈타인과 시몬느 베이유, 이 두 놀라운 유대 여성들을 나는 좋아 한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목마름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엄격함이 나를 겸허하게 하고 있다.
•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
사후에 출간된 시몬느 베이유의 저작들이 그녀의 지성을 전부 증언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영혼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완전히 증언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고통들을 껴안으면서 마치 성녀처럼 살았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와 그녀 사이를 분리시키는 3가지 심연을 남겨두고 죽었다. 우리는 이 중 하나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어떻게 그녀를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시몬느 베이유가 유다이즘에 대해 무지하였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나는 그녀가 유다이즘에 대해서 명예롭게(royalement) 무지하였다고 믿고 있다.
• 프랑수와 모리악(François Mauriac)
에디트 슈타인과 시몬느 베이유, 이 두 구약의 딸들, 원자화 된 세기의 화장터의 연기 속에 나타난 이 두 여상주(女喪主)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사유하는 지성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가 선택한 여성들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악마에게 사로잡히자 말자, 모든 악마들의 먹잇감으로 이 둘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이들을 선택하였다. 이 두 여성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문제였다. 세례를 받지 않은 시몬느 베이유는 가르멜의 성녀였던 에디트 슈타인만큼이나 관상적인 삶을 살았다.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은 에디트 슈타인이 다른 수녀들이 놀랐을 만큼 삶으로서 살았다.
위의 철학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시몬느 베이유는 비록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었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한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모든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껴안으면서, 이러한 사회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시대적 병폐를 강하게 질책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의 정신은 결코 타협할 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면모는 그녀의 종교적인 체험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진리에 대한 순수성을 간직한 성녀(聖女)의 이미지로 와 닿는다. 그리스도교에 밀접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 모든 종교의 사람들을 자신의 정신 안에 품기 위해서 제도적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자유로운 여성이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전혀 겪지 않았고, 급격히 문화와 삶의 형태가 변화한 격동기를 겪지 않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철학자나 문호들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시몬느 베이유에 대한 평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의 다른 의미에서 오늘날 여전히 세계적인 위기와 격동기를 겪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말은 충분히 우리들의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