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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강해 일부 자족하는 마음
말씀 디모데전서 6장 1-디모데전서 6장 10
요절 디모데전서 6장 6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디모데전서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 중에 가장 나중에 쓰여진 서신입니다. 바울의 노년에 죽음을 앞두고 쓰여진 것이므로 사도바울의 인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로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수고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였습니다. 바울은 또한 감사가 충만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의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바울은 모든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 때 우리가 사는 곳이 진정으로 행복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종들의 윤리).
1절을 보십시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크리스찬 중에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존경할 자로 알아야합니다. 바울이 종들에게 주인을 범사에 존경하라는 말씀은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변화를 먼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노예제도를 없애라! 로마 사람 물러가라! 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을 먼저 바꾸면 사회제도가 자연히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제도를 먼저 바꾸고자 하는 것은 공산주의입니다. 제도를 바꾸고자 한 공산주의는 망했습니다. 개인이 바꾸면 제도도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노예가 비뀌고 주인이 바뀌니 자연스럽게 노예제도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중생의 길을 먼저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내적인 것을 외적인 것보다 우선시합니다. 사람들은 새집에 가서 다시 싸우지 말자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 싸운다고 합니다. 집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남편을 바꾸어도 되지 않습니다. 재혼한 사람의 70-80프로가 다시 이혼한다고 합니다. 나 자신의 속 사람이 문제입니다. 삶의 자세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남자가 여자가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사람이 바뀌어야합니다. 종의 윤리를 가르치는 말씀은 신자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사명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취감과 행복감을 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받았으면 가정생활, 사회생활, 직장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부부가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예뻐 보여야지 왜 태어나서 말썽이냐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아름답게 보아야합니다. 직장의 상관이 존경스럽게 보여야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당시 로마에 노예는 6천만 명이었습니다. 인구의 삼분일이 노예입니다. 삼분의 일이 자유인이고 삼분의 일이 주인입니다. 로마의 유적은 노예가 만든 것입니다. 일반적인 노예는 인간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짐승과 같았습니다. 노예는 옷도 신도 없었습니다. 지푸라기 깔아 놓고 돼지 우리에서 잤습니다. 노예는 경매합니다. 노예가 도망가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노예는 당나귀와 같고, 다른 점은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을 듣기만 하지 말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노예가 예수님을 믿으면 교회에서 노예를 형제로 대접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노예를 평등하게 대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노예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형제자매로 취급하였습니다. 노예와 가난한 사람과 여성을 똑같이 대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려면 세 가지 차별의식을 극복해야합니다. 인종차별을 극복해야합니다. 성차별을 극복해야합니다. 교만하지 말고 열등의식에 잡히지 말아야합니다. 연령차별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이 많다고 벼슬처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나이가 적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선후배를 따지지 말아야합니다. 외국에서는 25살이 회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 밑에 60살 사원이 있기도 합니다.
(노예가 그리스도인이고 상전은 믿지 않는 경우)
첫번째 상황은 노예는 그리스도인이고 주인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노예는 평상시보다 주인에게 더 잘 해야 합니다. 그들이 상전을 존경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비방을 받지 않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 노예라면 비기독교인 주인에게 전도를 위해서 잘해야 합니다. 로마 대제국이 뒤집혀 기독교 국가가 되는데 세 사람의 힘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순결하였습니다. 노예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주인이 감동하였습니다. 주인이 노예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며느리라면 믿지 않는 시어머니에게 선교사로 양을 대하듯이 잘 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교수에게 학생은 더 잘해야 합니다. 불신자 친구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야합니다.
(노예가 그리스도인이고 믿는 상전인 경우)
2절을 보십시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둘째 상황은 믿는 노예이고 믿는 상전인 경우입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생각하여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형제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아래서 주인이므로 불신자 주인을 대할 때마다 더 잘 섬겨야합니다. 그들이 섬겨서 유익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보다 신자를 더 잘 대하고 다른 교회에 밖에 있는 불신자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더 잘 대해야합니다.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합니다. 예수 믿는 노예와 예수 믿는 주인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오면 형제입니다. 종이 집사요. 장로도 됩니다. 주인은 종을 향하여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종이 주인에게 형제라고 잘 대해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내 편에서 하는 것이지 상대방에게 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주인이 왜 저런가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는 형제라고 하면서 집에서는 왜 그런가 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대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합니다. 유익을 얻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입니다. 어느 직장에 있든 상관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잘해야 합니다. 신앙을 빙자하여 게을러지거나 상대에게 인내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인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에 대한 경계)
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복음을 가르시는 스승 중에 어떤 스승은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의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대한 교훈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삶의 경건이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된 경건이 없습니다. 보석에는 가짜가 있듯이 하나님의 복음에도 가짜가 있고 그를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말씀 선생은 그리스도를 전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교주를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이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또한 말씀 선생은 경건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을 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경건은 기독교만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신앙 생활 전반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경건입니다. 경건은 경외심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경건은 사랑입니다. 물질적이고 음란하고 이기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거룩함입니다. 초월성을 말하고 능력을 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자들은 경건해야합니다. 경건한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합니다. 경건은 사회생활 가정생활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란하고 물질을 도적질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떠나고 경건을 떠난 선생은 떠나야합니다. 경건이 있고 참지식이 있습니다. 경건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사람들은 세 가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부모를 잘 만나야합니다. 둘째로 부부를 잘 만나야 합니다. 셋째로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부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부부는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짝지워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선택이 가능합니다. 교수를 잘못 만나서 일생의 운명이 바뀐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교수를 만나서 사회주의자가 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생 때 그렇습니다. 좋은 스승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 스승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특히 신앙을 가르치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과 경건을 잃어버린 선생을 주의하고 돌아서라고 합니다. 마누라는 못 바꾸어도 선생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선생이나 랍비에게 돌아서라고 합니다. 그 잘못된 선생의 경우는 어떤 경우도 돌아서고 믿을만한 스승이라면 일생을 걸고 따라야합니다.
(거짓스승은 교만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바울은 계속하여 거짓 스승에 대해서 말합니다. 복음을 따르지 않는 선생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를 통하여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생겨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떠나면 교만해집니다. 선생은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생이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이 얼마나 많이 알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많이 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수법의 제일조가 겸손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다 말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얼마나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상을 기다리며 존경해야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칭찬하고 존경해야합니다. 예수님처럼 아이들을 어른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가르쳐야합니다. 존경하고 가르쳐야 아이들이 받아들입니다. 대상을 사랑하고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수법의 핵심적인 것이 인내입니다. 어떤 아이는 한 마디 해도 알아듣고 어떤 아이는 일곱 번 말해야 알아듣습니다. 그래도 잊어버리는 사람이 두어 명 있습니다. 재수 삼수한 선생들이 학생들을 잘 가르칩니다. 내가 너만 했을 때는 나는 너만 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가르쳐서는 됩니다. 자기가 먼저 이해하고 가르쳐야합니다.
법륜스님은 고등학교 중퇴하였습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는 유명한 수학 강사였다고 합니다. 그는 학생들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자기 속에 경험한 것이 없으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백프로 설명해야 듣는 자가 오십프로 알게 됩니다. 선생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변론하고 언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수가 학생들도 이기고 다른 학설도 이기고자 합니다. 학생이 비판적으로 질문하면 교만한 교수는 너 퇴학이야 라고 말합니다. 투기와 분쟁은 경쟁심과 승부욕입니다. 미국에 어느 학교는 60명이 있는데 다 상을 줍니다. 성적표가 없습니다. 승부욕에 사로집히면 자신을 버립니다. 내가 올라가지 못하면 끌어내립니다. 일등해서 꼭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발명가는 아이큐가 90-110입니다. 아이큐가 150이상인 사람이 사기꾼이 많습니다.
(마음이 부패한 거짓 선생)
5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거짓 선생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거짓됩니다. 마음이 썩고 인격이 없습니다. 지식은 인격과 감정과 도덕성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합쳐져야 온전한 지식이 됩니다. 인격이 없으면 백화점에서 지식을 파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어야 온전한 지식이 됩니다. 그들은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실과 진실을 버렸습니다. 거짓교사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합니다. 경건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익의 수단이 아닌 축복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노래방 가는 것과 교회 가는 것 중에서 교회에 오는 것이 행복해야합니다. 경건 자체가 행복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으면 무너집니다. 예수님 믿고 교회에서 장사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인이 목사님께 와서 개가 죽었는데 장례식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안 된다고 하니 목사님에게 헌금을 많이 내면 안 될까요? 그러니 목사님이 진작 예수 믿은 개라고 하지 라고 말했습니다. 경건은 목적이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를 돈벌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할 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걸림돌입니다. 이익지향적인 생활태도입니다. 무엇이든지 계산적으로 따집니다. 어떤 목사 사모님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기록해놓습니다. 어느 때는 자녀들이 이자까지 줄 테니 얼마 달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모나 자식이 서로 주는 것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늙은 부모님에게 옷을 해 드릴 때 얼마 인 있으면 돌아가실 것을 계산하고 해드리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십일조를 내고 선을 하면 얼마나 돌아오나 생각하고, 악수를 해도 얼마나 돌아올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철저히 이익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경건이 아닙니다.
(사도의 자족하는 마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됩니다.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채워져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도록 해석을 해야 합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해도 만족하고 가난해도 만족했습니다. 감옥 밖에 있을 때도 만족하고 감옥 속에 있으면서도 만족하였습니다. 그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정욕과 욕심을 조절하는 사람은 경건에 도움이 됩니다. 이익을 초월해야 신앙생활이 쉬워집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새벽기도 나오기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은 경건에 도움이 됩니다. 자족하는 것은 물질적인 데에서도 만족합니다. 내가 가진 집이나 차로 만족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을 소망합니다. 사글세에 살다가 전셋집으로 가고 전셋집에 있다가 집을 삽니다. 집을 사고 너무 좋아하지만 그 만족이 한 달도 못갑니다. 더 가지면 좋겠다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돈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 순간에 만족해야합니다. 빚없고 건강하다면 만족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큰 부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식에 대해서도 만족해야합니다. 많이 공부해도 오십이 넘으면 잘 잊어버립니다. 건망증이 생기면 비슷해집니다. 지식이 많으면 많은 대로 만족해야합니다. 내가 공부 못했다고 일생을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남보다 못한다고 자학해서는 안 됩니다.
링컨은 정규공부를 하지 않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도 마찬가집입니다. 이들은 상고 출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나온 사람이 발명왕 상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건강, 키, 생긴 것도 만족합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만족합니다. 나이가 많아지는 것도 만족합니다. 한계를 미리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간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입니다. 성프란시스는 자기가 죽을 때를 알았습니다. 그는 알몸으로 땅에 누웠습니다. 그는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한 벌 옷을 입고 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썩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주어지는 대로 만족하며 살아가야합니다. 땅을 더 차지하려고 하다 많이 땅을 사야 죽을 때는 한 평만 필요합니다. 수장하거나 수목장을 하면 한 평의 땅도 필요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살이 찔까봐 많이 못 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한계를 정해야합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옷도 한계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정하여 준 것으로 만족해야합니다. 35세 되면 한계가 정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오늘도 일어났으니까 행복합니다. 이렇게 말씀공부하니 행복합니다. 아침 먹고 옷 입고 있으니 행복한 것입니다. 적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작은 일이나 큰 일에도 만족합니다. 직장 일도 그렇습니다. 불만하는 사람은 어디가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불평하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
9절을 보십시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요즘에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잠언 23장 4-6절입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잠언 28장 20절입니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부하려고 하는 것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합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물질은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이 돈 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건강하면 건강을 쓸 줄 알아야합니다. 돈이 있는데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으로 망합니다. 노력 없이 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하려 하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합니다. 합당한 수고와 노력을 지불해야합니다. 공짜를 바라면 불한당의 마음입니다. 강도입니다. 복권 당첨된 사람이 잘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합당한 노력을 하고 얻어야 합니다. 언제나 한계를 알아야합니다. 무한대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너무 욕심이 지나쳐서 망합니다. 부의 가치관이 분명하지 않으면 돈이 해가 됩니다. 돈을 바라면서 노력하지 않고 벌고자 하니 망합니다. 시험에 빠지고 올무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도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은 애써서 노력해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가 뉴욕에서 차를 빌려 로스엔젤라스까지 여기저기 돌며 15일 구경을 하며 오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고학하며 공부하고 죽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은 공유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돈을 벌게 하면서 나도 벌어야합니다. 문어발식 경영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 사람은 생산하고 유통하고 저 사람은 이것 만들고 나는 저것을 만들어야합니다. 부에 대해서 자유인이 되어야합니다. 돈이 있어도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근심걱정에 매이면 한계를 넘어갑니다. 넉넉하게 부를 다스릴 수 있어야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10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지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헬라어로 필라아구리아입니다. 한자어로 수전애입니다. 돈을 사랑하는데서 살인도 도적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사단에게 마음을 열어놓게 됩니다.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가룟유다의 마음에 돈을 사랑하자 예수님을 배신하는 마음이 들어갔습니다. 돈이 양귀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돈이 우리를 유혹하여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돈은 사랑할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하워드 휴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큰 재산을 상속했고 영화와 비행기 사업에 투자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인 중에 그의 땅을 밟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강박증에 시달려 무려 15년을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하여 방안에만 있다고 합니다. 18센티의 금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만 그에게 말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머리를 깎는 사람이 죽일까봐 일 년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아서 집에 있다가 죽었습니다. 외출할 때는 자기와 같은 열 사람을 변장시켜 함께 다녔습니다. 그 돈이 많이 있어도 밖에 나갈 것을 두려워한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어 DNA감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돈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알렉산더는 정복할 곳이 없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33살에 죽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두 손을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인 록펠러도 손을 내놓고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공수래공수거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을 갖습니다. 그 근심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찌릅니다. 제가 은퇴한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부부의 연금을 타서 물질적으로 넉넉합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아들에게 주는 문제로 딸과 한 집에 사는데 말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딸은 엄마가 돌아가시면 재판이라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이 현재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합니다. 탐욕을 버리고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저는 요즘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생각하면 과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내가 더 구하면 그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만 그것이 안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 투쟁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애를 써야 합니다. 물질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강해 일부 하나님의 종들의 윤리
말씀 디모데전서 6장 1-디모데전서 6장 10
요절 디모데전서 6장 1절
디모데전서 6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