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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3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 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에 대한 영적인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천국’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너희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되라.’ 하신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 할 때,
‘처음 나타나는 믿음의 모습(신앙의 모습)’이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입니다. 거듭난 자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은~,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나의 구주이신 그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10달 동안 엄마 배속에 있다가 태어난 애기가
끊임없이 엄마를 바라고 찾는 모습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은 그 ‘심령이 가난해진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신다 하신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땅의 것만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신 그 ‘천국을 소유한 자’가~
그 다음 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애통도 할 수 있고, 온유한 자가 될 수 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애통할 수도, 의를 위하여 핍박 받을 수도 없고,
믿는다, 하는 말은 하지만 실상은 세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에 ‘천국’이 없는 자는,
결국 이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 것을 위해 살다가
음부로 간 ‘불의한 청지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 천국’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결코, 이 땅의 것을 가득히 채우라고, 이 땅의 것을 쥐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자에게 주시려고 한 ‘천국’을 소유한 자, ‘천국’을 침노하는 자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천국’이 아닌 세상의 것을 채우려고 하는 자인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재물이 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세상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세상과 다시 구별시켜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철저히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삽니다. 구분된 삶을 삽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구약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은 세상과의 구별, 분리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일행들이 집시처럼 온 광야를 돌아다닐 때~
사람들이 볼 때는 허송세월 하는 것처럼 보이고,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브라함이 광야를 떠돌아다닐 때
가인의 후손, 함의 후손은
성을 쌓고, 도시를 세우고, 탑을 세우고, 무기를 만들고, 상권을 장악하고,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애굽이라는 놀라운 도시에서도 그들은 400년간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함의 자손들이, 도시를 세우며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을 때,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떠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과의 구별, 분리를 원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들과 언약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가나안 족속들이 한 것처럼 세상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떠나 살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방인이지만 선조의 유지를 받아 세상과 구별, 분리되어 사는 ‘레갑 족속’을
등장시킵니다.
“이방인 레갑 족속은 선조의 유언에 따라 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사는데 내 백성들은
세상으로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5장 16, 17절
16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 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그 명령을 준행하나 이 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17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신약에서도 믿는 성도들에게 원하신 것은 세상과의 구별, 구분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눈을 두고 마음을 두고 살고서는 하나님이 그 심령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들이 이러한 부분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 분리를 원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이 세상과 구별, 분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심령에 세상의 것이 아닌, ‘천국’을 주시고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구하고, 높아지기를 구하고, 더 얻기를 구하고,
더 커지기를 구하고, 더 모이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믿는다 하는 증거를 이런 것에다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의 구별이 아닌~
도리어 예수님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 버려 샤아머니즘 종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예수님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정욕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단체 행동을 일삼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의 뜻과 욕심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는
결국은 알곡은 추수가 되고 가라지는 불에 타고 이 세상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알곡을 추수하시는 것이지,
이 세상이 파라다이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질 이 땅에서 기독교인들이 힘을 가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 되겠습니까.
‘구원받은 자’는 ‘거듭난 자’입니다.
‘거듭난 자’는 ‘하늘에 소망을 둔 자’이지, 이 세상에다가 정욕을 쏟는 자가 아닙니다.
‘복음’은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교회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하면 정작 ‘내가, 교회’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부패해질수록 ‘알곡’은 더욱 그 '알곡 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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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세상을 있게 한 이유입니다. 바벨론을 있게 한 이유입니다. 애굽을 있게 한 이유입니다.
곧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있게 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했습니다.
“맛을 내라, 빛을 비추어라.”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이 부패해도 너희는 그러한 세상 속에서
‘소금의 맛을 잃지 말고, 빛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싼 교회의 모습을, 신부의 모습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까지 있었던 현실을 보면 어떠합니까.
본인은 소금의 맛도 잃고, 빛도 내지 못하고,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세상이 변해야 된다고,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고~ 사람을 선동하고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너와 내가 변하는 것에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역사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한 적도, 그러한 일이 이루어 진적도 없지요. 다니엘이 바벨론을 변화시켰습니까. 모세가 애굽을 변화시켰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변화시켰습니까. 베드로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변화시켰습니까. 바울이 로마를 변화시켰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즉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목적으로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 그들이 바로 신사도 운동(사단복음)을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행동은~
세상적입니다. 거칩니다. 이기적입니다. 땅의 것에 목을 맵니다.
세상의 일에 분노하고 편을 가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사모합니다. 거칠지 않습니다.
잠잠한 양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신 예수님처럼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고,
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과 구별이 되어 지며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것, 천국’을 바라고보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 이런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팔복의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향하신 소원이 무엇이고 꿈이 무엇이었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천국’을 넣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자녀가 세상의 것이 아닌,
그 ‘천국’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요 소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무엇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신 것을 보고 ‘천국이 왔다’라고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처음 하신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하신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인류에게 천국을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 거듭났다, 구원받았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넣으신 ‘천국’으로 기뻐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눈과 마음을 세상에 두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세상에 두면 세상의 것으로~
육신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다투게 됩니다.
투쟁하게 됩니다. 더 싸워야 합니다. 더 가져야 합니다. 더 누려야 합니다. 더 높아져야 합니다.
더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목적을 두고 예수님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나 자신, 나 자체’를 오로지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구원하신 ‘사랑과 은혜’는 알지만,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세상을 보고 살게 되어~
예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질로, 권력으로,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가 혼인을 하게 됩니다.
누가 예수님과 혼인을 하게 됩니까.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고 그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혼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땅에서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됩니까.
신부될 자, 신랑 될 자는 각각 결혼할 때까지 서로만을 사랑하고, 서로만을 생각하고,
함께 이루어갈 가정을 꿈꾸며 그렇게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물며 땅에서의 결혼도 이와 같은데,
당연히 이 땅에서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 성도가~ 천국을 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천국잔치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본문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 말씀이 ‘천국’입니다.
‘천국’을 죽어서나 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의 자녀들이 ‘천국’으로 살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그 마음에 ‘천국, 예수 그리스도’로 산 사람이,
죽어서도 ‘그 마음에 있었던 천국’으로 ‘천국’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특성과 의미’ 는 무엇일까요.
‘심령의 가난하다.’는 것은~ 착하다거나 하는 그런 인간적인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아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 영적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1.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알지 못해 영적인 빈곤에 처해
‘영적으로 벌거숭이가 된 자신, 영적으로 가난에 처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채워줄 자가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영에 대한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여 찾는 사람.’
이를 두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 마치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하고 살 방법만 찾듯이~
‘어떻게 하면 내 영이 행복할 수 있을까’하며 영이 사는 방법을 찾는~
그런 ‘영적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2.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감격을 알고
‘나’라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진심으로 알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이 전부이고, 그 예수님을 날마다 침노하며 사는 사람,
이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이라고 합니다.
오래 동안 자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처음 느끼는 것이 허기, 배고픔이듯이
영적으로 어둠에 있다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영적 빈곤, 가난함’입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것,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전부요, 소망이요, 신부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죠.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뭔가를 얻기 위해 찾는 존재입니까.
3.
나는, 육체와 정신 그 이상의 영적 존재임을 알고,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도 예수님을 찾지 않은 영적 빈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도우심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입을 열어 전하신 ‘산상 복음, 천국 복음’의 처음 말씀은~
네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꿈이 있든 없든, 성공했던 실패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받아 영적 빈곤함에서 벗어나 참 행복을 누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천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시를 소원하셨던 것, 사람이 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구세주이시고,
또 예수님을 어떤 자가 만날 수 있는지,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런 영적인 것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살게 하시는 내용들입니다.
결코 땅의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땅에 것에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을 어떻게 해 보시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여기서 ‘새 사람’이란,
세상과 구별되고 구분 된 자, 영적인 것, 영원한 것, 천국을 사모하는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속했느냐, 세상에 속했느냐,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땅의 것 때문에 영의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마음이 ‘가난한 심령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찾는 마음’입니다. ‘영의 은혜를 구하고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되고 구분되어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신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한울타리 교회 카페에 방문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소원’인 ‘천국’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