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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10~12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란 무엇인가]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오늘 본문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누가복음 16장은 여러 가지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 즉 불의한 청기기가 누구인가, 청지기는 왜 불의한 청지기가 되었나, 불의한 청지기가 받을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작은 것에 충성하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속한 자인가’
그리고 ‘세상과 재물을 사랑하는 자의 마지막은 심판’이라는 한 가지 내용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결론이 되는 말씀, 가장 핵심적인 말씀, 주제가 되는 말씀이 13절’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누가복음 16장 마지막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은 한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말씀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결론의 말씀으로
‘하나님님을 사랑하는 자와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결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전해드린 불의한 청지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는 것은,
↳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바라보고, 그 언약을 지키며,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을 잘 가르쳐야 하는데
누가복음 16장 14절의 말씀처럼 바리새인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은 돈을 좋아함으로
하나님도, 하나님이 주신 언약도 버리고 도리어 세상 재물을 쌓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자기 법대로 백성들을 가르쳐
백성들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나게 살게 한 것을 가지고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 한 것입니다.
※ 누가복음 16장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리고 청지기의 직분을 빼앗긴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한 한 가지 꾀를 내는데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마음대로 그 빚을 탕감하고 거짓 장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주인에게 진 빚은, 인류의 죄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악은 예수님만이 탕감할 수 있는데 이 불의한 청지기가 마음대로 죄를 탕감해주는 일을 합니다.
↳ 이것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직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율법과 언약을 마음대로 가르치고
잘못된 제사를 드리고도 도리어 백성들에게는 권위자로 존경받는 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불의한 청지기로 그들은 심판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뜻으로 전하고 사람의 입맛에 맞게 가르치고도 권위와 존경의 위치에 앉아 있는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그 외 부분은 지난주 전한 말씀을 참고 하시고,
누가복음 16장은 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 심판을 받게 된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서 설명이 되어져야 하고 적용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서 불의한 청지기의 내용과 상관없이 ‘지극히 작은 것’만 따로 툭 떼어서 전하니까
↳ 인간의 생각에 맞출 수밖에 없어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해 설명하기를~
‘맡은 직분, 헌신, 봉사로 설명을 하고 충성하라, 최선을 다하라.’ 라고 가르칩니다.
↳ 여러분, 맡은 직분이나 봉사나 청소 같은 것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하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도들은 목사가 전하는 것을 다 맞나보다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 무엇인가’를~
‘불의한 청지기’가 왜 ‘불의한 청지기’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것’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청지기’는 처음에는 ‘바른 청지기’였지만 나중에 ‘불의한 청지기’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더 사랑하고 재물을 주인 삼아
세상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 앞서 읽었던 13, 14절에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신 것을 통해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은~ 심판이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물론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옳은 청지기였던 자가 불의한 청지기’가 된 원인이 된 것~
즉 ‘불의한 청지기의 중심에 주인이 되어 있는 세상과 물질을 두고 지극히 작은 것’이라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는 것은~
↳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듯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 그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되어 있는 세상에 대한 모든 탐욕 이러한 것들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 이 작은 것을 속히 버리고 이 작은 것에서 속히 나오는 이것을 두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것’은~ ‘육은 무익하니라.’ 하신 것처럼 ‘무익한 육의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지금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을 주인 삼은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재물을 주인 삼고 있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 이 비유의 말씀의 의도는 이것을 말하는데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의 생각과 상황에 맞추어 인간중심으로 해석을 해서~
“사람이 볼 때는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모든 직분과 헌신과 봉사는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솔선수범하여 충성하라.
휴지도 열심히 줍고 화장실 청소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다 보시고 더 큰 것을 맡기신다.”고 가르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물로 한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일들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간적인 도리로 다 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도리적인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요,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 예수님의 의도와 다른 이런 가르침이 구원받은 성도가 경계해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누룩이요
이런 가르침이 더욱 그 사람을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바르게 알아야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 ‘큰 것에 충성된다.’ 했습니다. ‘큰 것’이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 ‘큰 것에 충성된다.’ 는 것은
⇨ 자기의 정욕으로 사랑하는 세상과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 그것에서 나오면
큰 것 즉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과 사귐의 관계가 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참 신부가 된다, 는 의미로
‘큰 것에 충성된다.’고 한 것이고, 이런 교회, 이런 성도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 불의한 것이 없어야 예수님의 참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요한일서 2장 16절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세상, 세상의 임금인 사단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불의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지극히 작은 것인
세상을 사랑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불의 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래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 하는 이 말씀에서
‘큰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예수님이 아닌, 더 큰 직분, 더 큰 명예, 더 큰 부’로 말하면서
↳ 여러분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 하다 보면 하나님이 더 큰 직분, 더 큰 명예, 더 큰 부로 충성하게 하신다,
그러니 직분 잘 감당하세요, 열심히 봉사하세요, 한다면 이것이 옳은 가르침이겠습니까?
이어서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하신 것은
세상과 재물을 주인 삼는 그것에서 나오지 않으면 예수님을 참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1, 12절 말씀도 10절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1절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했습니다.
↳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이라는 것은~
9절 말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10절 말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 하신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정욕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주인 삼아 살고 있는 거기에서 나오지 않으면’ 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하셨습니다.
⤷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주인 삼아 살고 있는 거기에서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의 참 뜻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한 뜻입니다.
12절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남의 것’이란~ ‘사단이 준 세상의 것, 세상에 대한 정욕의 마음, 돈을 주인 삼는 것’을 말합니다.
↳ 그래서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이라는 것은~ ‘사단이 준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으면 이라는 말이고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에서~
↳ ‘너희의 것’이란~ 예수님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 평안, 감사, 소망, 약속을 말하고
그래서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한 것은~
↳ ‘사단의 것을 버리는 일에 충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인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도, 10절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이 말씀은~
↳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구원받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받을 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 세상을 어떻게 구분되어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친히 보이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이 땅에서 더 잘 살고, 더 잘 먹고, 더 높은 권력을 얻고, 이 세상에서 힘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내용도,
이것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내용도, 이것으로 영광돌리라고 하는 내용도,
이 땅에 것을 말하기 위함도, 인간 사이에 있는 윤리나 도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2절에도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본 것을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고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결론
초대교회 때, 즉 사도 시대 때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즉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산 신앙입니다.
삶에 있어서는~ 제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것을 다 내어 놓는 신앙,
영적으로는~ 날마다 내 안에 있는 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 안에 있는 자기를 부인하며 산 신앙입니다.
몇 번 말씀을 드렸듯이 로마가 313년부터 기독교를 더 이상 핍박하지 않자
기독교에는 자유를 얻은 것 같았지만 실상은 더 위험하고 악랄한 존재가 기독교를 병들에 했습니다.
바로 기독교를 영의 것을 바라보는 것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로 속여서 바꾸어 버렸습니다.
카톨릭 이전의 복음은 참 복음으로~ 그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영이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카톨릭 이후의 복음은 거짓 복음으로~ 그 거짓 복음으로 ‘육의 부요를 찾는 성도’가 늘어났습니다.
⇨ 이 때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통해서 참 복음을 깨달은 성도들’이 다시 세례를 받게 되는데
카톨릭은 이들을 ‘제세례파’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단으로 내 몰아 엄청난 살상을 하게 됩니다.
카톨릭이 복음이라는 미명아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몰라 살상을 했다는 자체가
카톨릭이 진짜 이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때부터, 성경을 통해 참 복음을 깨달은 자들~ 영원한 소망에 대한 신앙,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통해 로마의 핍박이 아닌 카톨릭의 핍박을 피해 숨거나 아니면 멀리 외딴 곳으로 가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이어오고 있고
그 바른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을 드렸듯이 지금은, 카톨릭에 의해 왜곡된~ 물질과 권력의 얼굴로 바뀐 번영신학이라는 거짓 복음이
개신교에 들어야 복음의 자리에 가면을 쓰고 앉아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의 방향을 ‘영원한 곳’이 아닌
예수님이 버리라고 하신 ‘이 땅을 주인 삼고 있는 그 작은 것’이 목적이 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요구하는 종교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거짓 복음인 번영신학이라는 이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참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마태복음 26장 51~54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요, 예수님이 자기의 피 값으로 사신 예수님의 신부도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세상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신랑을 찾는 것은 거짓 신부이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전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지금도 성령님이 무엇으로 그 예수님을 증거하시는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뜻과 생각으로 전해지는 것, 이 땅을 바라보게 하는 가르침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으로는 환란의 날과 괴로운 날에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한울타리 교회 성도님들은,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달아 복음 안에 사셔서 승리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