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근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춘천시의 <봄내>에서 매달 자료를 찾아 소개해오고 있고, 특히 이번에 소개한
지도 자료(27쪽)를 보며 재작년 내가 GBN에서 강의했던 내용의 미흡하게 여겨졌던
의문점이 이번의 오영섭 교수의 강좌 내용과 함께 드디어 시원히 풀리게 되었기에
여기에 다시 한번 정리하여 글을 올린다.
오영섭 교수도 한림대 시절부터 춘천에 대한 관심을 키워온 개인적인 사정을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그간 의병을 연구할 때부터의 글들을 보아오던 터에 지역사로서의 춘천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관심이 반가웠다. 이번 강좌는 그가 집필중이라는 글의 일부를 소개한
것으로서 경춘국도가 개설된 내력을 잘 소개해준 점이 돋보였다. 강의 전에 문화원장님과
함께 했던 식사 자리에서도 오교수는 성급하던 지난 시절의 관점을 돌아보며
좀 더 차분한 관심으로 춘천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그간의 소회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나는 재작년 강원방송에서 근대 춘천의 풍경을 사진으로 강의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고,
<춘주문화>에 <춘천의 근대풍경 3제>란 글에서 경춘국도의 첫 개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오교수는 강의 전에 이 글을 잘 보았다는 말을 하였는데, 과연 좋은 자료를 원문으로
소개해주었다. 내가 소개한 건 1912년의 이학수가 지은 <소양정중수기>의 "개통도로"라는
말로써, 그 직전부터 석파령 길이 아닌 삼악산을 강가로 돌아오는 경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봄내> 4월호에는 "경춘국도의 시작"이라는 제목 아래 1930년 편찬된 <군세일반>이란
자료에서 당시의 춘천을 중심으로 한 '2등 도로망' 지도를 사진으로 실었다. 그와 함께
"1913년~1915년 사이 시작"되어 1915년쯤 신작로가 정비되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번 24강에서는 별지로 배포한 강좌자료에서 "4. 조선총독부의 경춘도로 개통사업
(1911-1915.5)"란 제목 아래 원문을 소개하며 "삼학산의 남동 기슭에 해당하는 한강의 연안을
'개착'한 것"이 3년을 거쳐 준공되었다고 한 것이다(강의에서 1912년을 1911년이라고 구두로
정정하였음!). 그러니까 추정만 해오던 사실이 이제는 총독부 자료를 통해 명확하게 확인된
셈으로 더 이상의 다른 추정을 불필요하게 만든 것이다. 강가의 경춘도로는 1911년부터
개수하기 시작하여 1915년에 완공한 것이다.
또한 <봄내>에 소개된 2등 도로망 지도는 총독부의 조선통치라는 커다란 계략 아래 춘천이
겪어나간 근대의 발자취를 잘 보여주는 좋은 자료였다. "경성오리진선과 김충선"이 교차하는
춘천의 교통망이 성립되면서 춘천은 개화된 문물이 더 원활하게 소통되는 도시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연강철교의 준공과 관련한 문제다.
나는 그간 1931년의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하며 춘천에 1934년까지 소양교와 모진교가 세워짐
으로써 "3대철교"로 이름이 났었다고 소개했었다. 철강으로 만든 이런 대형 구조물은 이전에
쉽게 보지 못했던 근대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여겨져 언론에서도 높이 찬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가장 높은(22m) 다리"로 소개됐었다는 이번 <봄내> 기사나 오영섭 교수
모두 그 연도를 1930년으로 바로잡아 주어 확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동아일보 에는 1930년도에 신연강철교의 준공 기사를 싣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본 결과 1931년의 기사는 "준공 축하회" 기사였는데, 거기에는 30만원을 들여 1930년에 준공되어 축하회
까지 준비했다가 대수재가 나서 바로 진행을 못하고 이듬해에 축하회를 개최했다고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로써 1930년이라고 재삼 밝혀진 점이 반가왔고 모두 그렇게 기억하길
바란다.
질의시간에 발언을 해주신 박승한 고문님의 어릴 적 서울행의 기억도 무척 소중하게 들었다.
'8인승 포드무개차'와 12인승차로 춘천의 자동차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생생한 증언이었다. 또
경동현 선생님이 들려주신 경춘철도 개통시 노임으로 받은 돈으로 산 소 한 마리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철도가 1939년 개통되기까지 재작년 5강좌 때 나도 강의에서 아버님께서
강촌역에 처음 공사구역이 진척되어 기차가 왔을 때 구경가서 보셨다는 쇳덩어리 기차('철마')와
산천을 뒤흔들었던 기적소리의 기억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5강좌 때 소개하였던 사진 셋을 다시 보자.
먼저 이종학 자료를 소개한 노형석의 <한국 근대사의 풍경>(2006년)에서 찾아낸 춘천의 배다리
사진이다. 신연강 철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용되던 다리로 내가 아는 한 거의 유일한 사진이다.

아래는 동아일보 1928년 12월 19일자에 소개된 신연강철교의 기공식 사진이다.

아래는 1933년의 춘천농고9회 졸업앨범에서 찾아 소개했던 신연강철교의 위용이다.

1900년 준공된 한강철교의 아래 사진과 비교해보라.

이런 근대 문물의 도입을 기억해내면서 우리는 염두에 둘 점이 있다. 흔히 말하듯 근대화는
폭력성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것이었기에 더욱 강도가 높았고
속도도 빨랐을 뿐이다.
이번 강좌에서 오영섭 교수는 조선 말기부터의 연구 경력과 더불어 춘천의 근대화를 찬찬히
소개하는 입장에서 그 특징을 "급속한 개화와 이식성'이라고 요약하여 말했다. 이런 특징이
춘천의 근대문화를 다 포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특징을 잘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표현을 썼던 사람도 전에는 없었다. 더구나 이궁의 건설을 전후해서부터 그 과정을
볼 때 그 적실성을 높이 살 만해 보였다.
다만 춘천의 지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는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특정한 시기에 춘천지역이 겪은
변화의 결들에 세세한 주목을 요한다. 구체적인 만큼 세세한 변화의 양상도 더 잘 파악되고, 현재
우리의 삶과도 생생하게 연결지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에만 촛점을 두다
보면 그 그늘로 밀려나 사라지게 되거나 파괴된 과거의 유산도 함께 보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연강철교와 더불어 우리가 떠올려 봐야 하는 대표적인 과거 춘천의 유산이
있다. 바로 '문암(門巖)'이다. 3대철조구조물이 찬양되면서 소리소문도 없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전에는 신연강나루로 강을 건너다가 신연강철교가 놓이면서 암벽 아래로 길이 났다. 그 공사의
자료를 보진 못하였으나, 추정컨대 문암은 이때부터 파괴되어 사라져갔을 것이다. 고지도에 늘
신연강 표기와 함께 등장하던 문암이었다. 아래는 규장각 소장의 19세기 전반 <광여도 춘천부>
지도이다. 문암에 표시해놓았다.

오영섭 교수도 경춘도로가 개통되고도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서울을 다녔다고 말하였지만,
위 지도와 비슷한 시기에 다산 정약용은 춘천을 기행하며 1820년에 남긴 <천우기행권>에서
"춘주 남쪽 20리의 문암 바깥에 등달협이 있다"며 당나라 때의 두보 시에 차운하며 협곡(등달협)을
지날 때 옥죄었던 근심과 문암에서의 시야의 트임을 이렇게 읊었다.
하늘과 땅이 홀연 밝게 트이매 二儀忽昭廓
들빛 어찌 이리도 장쾌한가 野色噫何壯
숨죽이며 옹송그림도 어느덧 풀리고 悚息俄縱弛
명랑함 흩뜨리며 향하는 곳 궁금해지네 散朗疑所向
배를 타고 춘천에 오자면 이렇듯 문암은 춘천부로 들어서는 길목의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도로와 철교의 개설도 중요하였지만 이제 춘천에는 그 바람에 없어졌던 문암도 기억되어야 한다.
근대화로 사라진 춘천 인문지리의 자연유산이었다. 사라진 것과 새로 바뀐 것을 함께 구체적으로
살피는 안목이 우리 춘천역사문화연구회의 시선이 아닐까 한다. 긴 시간의 호흡으로 그간 급격한
근대화의 물살과 선택의 판가름 가운데서 이지러지고 사라졌던 역사의 결을 찬찬히 풀어내며
그 진면을 드러내고 살려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닐까 싶다.
춘천시보의 필자와 오영섭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강연 가려고 했는데 바쁜 일이 갑자기...
명쾌한 글 잘 읽었습니다. 지역사 정리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시민강좌를 진행하면서 '춘천의 근대화'란 주제로 강좌를 한 것은 이번 24강이 처음인 듯 하다. 그러다 보니 일제 강점기의 한국사회'근대화' 논쟁이 부각된다. 춘천의 근대화 논의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강좌에서 제기된 주된 춘천사회의 근대화 이행기 과정중 3단계인, 1910년대 경춘간 신작로의 개통과 자동차의 왕래, 4단계 경춘선 철도 개통, 즉 일제의 춘천에 대한 식민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의 도로망과 철도 건설의 사회간접 시설의 실태를 심도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은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몫이 요청된다. 이는 우리 역사문화연구회의 과제 이다. 연구회의 자체 세미니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턱없이 짧게 준비한 강의에 운영위원장님이 사회를 보면서 박승한 고문님의 기억 이야기도 듣게 하면서 시간운용을 잘 하여 오히려 더 좋은 마무리가 된 거 같았습니다. 오영섭교수는 무슨 따끈따끈한 새 자료를 소개한다는 줄로 들었는데 위에 말한 거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으니 본인이 접어넣은 게 아닌가도 싶었습니다. 논문을 쓰는 중이라고 했으니 연말이면 알게 되겠지요!
작은 할아버지(1914년생)가 말씀입니다. 경춘선 철도 공사때 강촌지역에서 터널 공사를 했는 데 발파작업을 한 후 채 먼지가 걷히기 전에 작업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방진 마스크도 없이 그냥 공사터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먼지를 마셔서 병이 생겼는 데 고춧가루 물인가를 들이키면 좋다고 해서 이것을 잡숫고 혼났다고 합니다. 두달 일한 노임으로 받은 60원을 가지고 송아지를 한마리 사서 춘천에서 홍천 북방까지 끌고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전에 강촌지역의 터널을 지날 때마다 공사를 한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