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묵상의 INPUT
63. 묵상의 INPUT
시 1편과 여호수아 1:8의 공통점은 결과가 '형통'이란 외에도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이다. 즉 말씀을 묵상하여 지키내면, 살아내면 그 삶이 형통해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묵상을 함에 있어 인풋(Input)이 있고 프로세스(Process)와 아웃풋(Output)이 있다면, 우리를 형통케하는 묵상의 인풋은 말씀인 것이다.
반드시 묵상의 인풋은 말씀이어야 하는가?
묵상의 인풋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일 수도 있고, 하나님 만드신 자연과 창조물일 수도 있다. 목사님 설교일 수도 있고, 찬양 가사일 수도 있다. 어느 것도 가능하지만, 나는 먼저 말씀을 묵상 하십시오..라고 고집한다.
64.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깨우친 바를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삶의 자세이다. 찬양 예배 때 가사와 곡조를 묵상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 좋은 자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말씀을 가공한 것은 묵상에 참고할 뿐, 말씀 자체를 묵상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목사님은 이 말씀으로 이렇게 선언하시는 구나.. 좋다..그러면서 나는 다시 하나님 하신 말씀으로 돌아 가서 내게 주시는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찬양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썼구나.. 여기에 이런 곡조를 붙였구나.. 감탄하는 것 좋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왜냐하면 말씀 외에는 진리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65.
때로는 장미꽃 앞에서 묵상할 수도 있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 못을 내려보며, 혹은 반대편에서 떠 오르는 태양을 보며 하나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묵상할 수 있다. 그러나 곧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다윗의 실패가 기억나기 때문이다.
성경의 인물 중 묵상의 대가는 누가 뭐래도 다윗을 꼽을 수 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많은 시편도 남겼다. 그의 묵상은 인간의 한계를 띄어 넘어 메시야를 바라 본 묵상의 대가였다.
그가 부하들을 전쟁에 내보내고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
삼하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거닐었다는 말은 묵상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이 아내를 구하러 간 아브라함의 종을 기다리며 들을 거닐고 있는 장면을 성경은 묵상하고 있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창24: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6.
따라서 삼하 11:2의 표현은 다윗이 부하들을 전쟁에 내보내고 저녁에 왕궁 옥상을 산책을 하며 전쟁 상황을 묵상하다가 목욕하고 있는 바셋바를 보게된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인간, 그 것도 흙이 아닌 인간의 뼈로 만든 여자.. 다윗의 묵상은 바셋바로 옮겨진 후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어 간다. 임신을 시키게 되고, 그 임신을 숨기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취했지만 남편인 우리야의 충성됨으로 인해 실패한다. 급기야 다윗은 충성된 우리야를 죽게 만든다.
바셋바를 범한 후 우리야를 죽일 때까지 상당한 기간.. 다윗은 상황을 놓고 많은 묵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묵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보낸 말씀에 찔림을 당할 때까지 묵상의 대가 다윗은 악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보다 더 하나님께 집증할 수 있다면야 묵상의 인풋에 한계를 둘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함을 묵상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2. 묵상 Process
67. 묵상 Process
묵상의 인풋이 말씀이면 프로세스는 웬만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콩 심은 테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며, 말씀이란 인풋이 워낙 좋기 때문에 프로세스가 웬만하면 아웃풋은 쓸만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묵상을 잘한다 못한다..이런 것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묵상 하고 있나요?
하신다면, 좋습니다..
전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지시나요?
그러시다면, 훌륭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조금이나 닮아가나요?
그러시다면, 계속 하십시오. 더 이상 조언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만약 묵상을 하는데도 하나님과 더 친해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프로세스를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좀더 좋은 콩, 좀더 좋은 팥이 나려면 농사를 짓는 프로세스가 좋아야 하듯이 묵상도 좋은 혹은 바른 프로세스가 필요한 것이다.
프로세스는 성령님과 나와 환경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내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닮아가는 것이 목표이다. 즉 나의 변화라는 아웃풋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inpu t = 말씀 Process = 성령님 - 나 - 환경
Output = 나의 변화
68.
하루는 누가복음 10장을 묵상했다.
눅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눅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10: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눅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내 보내면서 지시하는 장면으로 3절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 같다는 말씀이 많이 와 닿았다. 처음 읽을 때는 어~어! 이상하다!!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이라면, 이리를 피해 가는 방법이나, 긴급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는 방법, 이리를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야지, 이리에게 잡혀 죽기 딱 좋게 제한만 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
69.
다시 찾아보니 3가지가 들어 왔다.
1) 평안
눅10:5-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평안을 전하기만 하면 전도자는 평안 속으로 들어가는 절대 손해보지 않는 사업임을 알 수 있었다. 평안을 전했는데 받아 들이면 그에게 평안이 머물 것인데, 거기에 전도자도 함께 있기 때문에 전도자는 평안하다. 평안을 전했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은 전도자에게 돌아 온다.
2) 너희 말 = 예수님 말씀 = 하나님 말씀
눅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전도자의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자신의 권위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강한 도구가 어디 있으랴.
3) 권능
눅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주님이 이미 원수를 제어할 권능을 주셨으니.. 저리 여유만만하시지..
70.
문득 큰딸 윤주가 시집간다면 이리에게 보내는 양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연이어 성경학교의 간사님들로 옮겨 갔다.
당시 나는 직장인 성경 연구학교장이었고, 20여분의 간사님들이 나를 도와 주셨는데.. 나이가 많은 자매들이 있었다.
왠지 그들은 나의 기도 제목이 되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과도 간사들과도 기도했다. 나이가 지긋하거나 부부애가 좋은 강사가 오시면 쉬는 시간에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분이 한 달 간격으로 결혼한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기도 응담에 대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 이 날 묵상에서 두 가지 적용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1) 간사들의 배우자 될-이리일지도 모르는- 형제를 불러 저녁을 산다. 물론 목적은 저녁이 아니라 우리 간사 뒤에는 나 같이 오빠 역할을 하는 형제 간사들이 많으니 결혼해서 아내에게 잘하라는 압력과 협방성 권면을 하기 위함이다,'
2) 두 자매 간사님들과 따로 시간을 내어 한 달만에 남편을 잡는 법을 가르친다. 내가 결혼 한 달만에 나의 의도와는 달리 아내에게 잡혀 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내가 썼던 방법과 남성의 심리를 말해주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적어도 폭력이나 무시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1.
저녁 학교가 시작되기 전 두 간사님들에게 오늘의 묵상을 나눴다.
형제님들과 시간 좀 내세요. 내가 저녁사면서…
간사님들이 신나서 야호를 불렀다.. 좋을 수 밖에.. 밥만 사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백이 되어 준다는데..
아마도 두 번째 제안을 더 좋아하겠지.. 생각하며 간사님들께 이야기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이 드신 간사님이 갑자기 소리치신다.
'간사님 그러면 안돼요!!'
으잉!!
이 분은 나에겐 삼촌 뻘 되는 연세.. 인격자..
예수전도단 직장인 사역의 다른 훈련 학교에서 이미 학교장 경험도 있으시고, 젊은 리더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세워주는 분이셨다. 내가 좌충우돌하며 리딩을 할 때 뭔가 간사들의 거부감이 보이면 나서서 몇 마디로 제압해 주시는 포스가 대단한 분.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후원자셨다.,
그런데..갑자기 끼어 들어 '안돼!!'라니..
72.
나도 머쓱, 박장 대소하며 즐거워하던 두 자매 간사님도 머쓱한 가운데 들어 오시더니.. 하시는 말씀
내 아들 둘과 자부들이 결혼 할 때 내가 이렇게 부탁했어요.
둘이 결혼해서 살다 보면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운 시간이 온다. 그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결혼 생활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둘이 기도하며 평생 가져갈 기도제목을 만들어라.
구체적으로 시부모와 갈등이 생기면 남편은 어떻게 할 것이고,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이고, 남편은 어떻게 할 것인지
상대가 외도한다고 생각 들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어졌다 생각되면 남편은 어떻게 하고,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기도제목을 만들어라.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니 간사님들도 이런 기도제목을 만드는 것이 좋겠어요.
73.
뒤에 머쓱하게 서 있던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역시.
저게 그리스도의 복음이야.
나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 마음을 듣는 다고 들었고, 선한 일을 한답시고 오늘의 적용을 실천했는데.. 그 묵상 과정이 세상의 복음에 근거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이 간사님에게 걸려서 교정되었기에 망정이지,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내 말이 자매 간사들에게 먹혀 들었고, 자매 간사들도 내가 시킨대로 시도 했었다면.. 나는 가정 파괴의 주역이 되는 것이었다.
74.
앞에서 세상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너무도 세상의 복음으로 기울어져 있음도 경고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나에게 있는 세상의 복음에 대해, 말로만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뭔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었다.
결론을 말하면 묵상 프로세스의 기반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과 성령이 나를 동시에 부른다면, 나는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따라 가야한다.
세상의 복음은 환경을 통해 나에게 소리친다.
너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큰일 난다!!
아주 타당성 있는 이유를 붙인다. 몇 바퀴 껍질을 벗겨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따라갈 수 있도록 위장되어 있다.
75.
예를 들어 나에게 스마트 폰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면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스마트폰 없이 어떻게 살려고 그래. 할부제도 있잖아. 다들 그렇게 구입하는 거야. 그리고 신용카드로 해. 신용사회에서는 신용카드를 좀 써줘야 신용이 올라가..
그래서 신용카드와 할부로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산다. 그리고 그 정도는 충분히 갚을 수 있다 생각했는데 어김 없이 다음 달에 돈을 내라고 청구서가 오면, 이상하게도 돈이 부족한 상황이 되어져 있다.
결재 일이 다가오면 또 세상은 겁을 준다. 반드시 갚아야 해. 아니면 이자가 많이 불어. 잘못하다 너는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어.
알아.. 안다구.. 그런데 어떻게 갚지? 돈이 없는데..
왜 갑자기 돈이 없을까? 내 참
돈이 없어? 그러면 카드 대출이라도 받아야지. 이자가 좀 비싸기는 하지만 연체이자보다는 싸지.. 그렇다고 신용불량자 될 수 없잖아.
그게 낫겠지? 내가 쩨쩨하게 카드 연체자나 되어선 안되지..
이렇게 세상은 작은 허영심을 부추겨 필요를 만들고 빚지는 시스템으로 들어 가게 한다. 멀쩡한 사람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시스템이다.
76.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무섭니.. 그 실체를 봐..
네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자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 꼬임 수를 보라니까!!
계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육백육십육은 6이 3번 연속된 수 이다.
성경에서 한 번 적혀 있으면 중요하다. 두 번은 아주 중요하고, 세 번은 영원히 중요하다. 6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그러면 여기서 1이 모자라는 6은 불완전이다. 7이 승리라면 6은 실패이다. 그래서 계13:18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
너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니?
그러면 그 짐승이 상징하는 수를 세어봐. 6이 세 번 연속되어 있어.
부족하고 완전히 부족하고 영원히 부족하단 말이야.
실패했고, 완전해 실패했고, 영원히 실패했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 짐승을 따라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복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대단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하면 너무도 타당하고 너무도 논리적, 현실적일 때가 많다.
따르기도 쉽다. 훨씬 쉽다.
그런데 경험하면서 아는 것은 세상의 복음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어렵더라도 진정한 복음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그러나 몸과 맘은 여전히 세상의 복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용서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용서를 못해 몇 년을 숨기고 살고, 1년 반 동안이나 빌레몬서를 묵상하고서야 겨우 용서.. 그것도 아주 인심 쓰듯 용서하는 것이 나의 최선, 나의 모습이다. 이는 나의 연약함도 있지만 사탄의 끈질김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78.
묵상은 나의 귀를 열어 준다.
계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우리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로 선다는 것은 세상의 공갈과 위협에 요동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계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 만큼 세상의 복음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위협하고 있다.
이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묵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묵상을 통해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사탄은 끈질기다.
빈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끝까지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나의 묵상 프로세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79. 나의 ‘의’ 내려 놓기
내 안에서 사탄과 예수님, 세상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싸우는 경우는 크게 심각하지 않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세상의 복음은 내려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의 ‘의’가 개입되면 심각한 어려움이 온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여러 가지 호칭이 붙으면서, 나의 ‘의’는 거의 100%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둔갑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주장이 세상의 복음에 속한 것인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속한 것인지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에 연합과 일치에 덕이 되는가 아니면 분열시키고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만일 나의 주장이나 행동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느끼거나. 내가 누군가 때문에 공동체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거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꾸짖고 있다면 아니 일단 나의 주장을 내려 놓고, 나의 의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신하고 있는지 살피기로 했다.
80.
장로가 된 해 교회 성인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나의 담임목사님은 열린 마음과 비전 제시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분이기에 교육의 틀에 넣어서 누군가를 억지스럽게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셨다. 그러나 나는 군 시절부터 논산 훈련소 교관으로 시작하여 컨설턴트, 대학 교수, 예수 전도단 간사 등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어 좋은 교육 훈련은 좋은 군사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의 여러 정책 중 교육 부분에 빈틈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성인 교육 장로로 섬기는 동안 교육 체계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년의 청사진을 만들어 목사님께 보고하면서, 그 준비 작업으로 성경과 묵상을 가르치며 청사진을 구체화 할 공동체를 구성해보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빠르게 성경연구 모임을 만들었다. 목사님께 말씀 드렸던 청사진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나름대로 희망찬 행보를 시작했다.
그런데 전임 및 현 성인 교육 담당 목사 두 분이 나를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시작한 성경 공부 모임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81.
말도 되지 않는..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성경 공부를 하겠다는 모임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평신도를 주인으로 양성하겠다고 외치는 교회에서 무슨 말인가? 목소리를 높여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 분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시점에 사랑의 사도 요한의 편지들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체하고 있는 나의 의를 들여볼 수 있었다.
<주신 말씀>
요일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묵상>
새 계명은 옛 계명의 연속이다
새 계명은 빛이요 참이다.
우리 삶의 표현으로는 형제사랑이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사랑을 형제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순진한 아이이며,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많은 아비이며.
세상을 이길 힘있는 청년이다
그래서 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있다. 흉악한자를 이미 이겼다.
사랑으로
오늘 예배 후 두 목사님을 만나야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그러면 나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사랑의 말, 사랑의 결정을 하고 싶다
광성교회, 한국교회, 열방교회에 대한 사랑을 말하기 앞서, 부목사님들을 사랑합니다.. 선포하고 싶다.
82.
영지주의자들에게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다 혹은 깨달음/지식을 얻었다는 의미였다. 반면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깨달음이나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어디에든 죄가 아닌 것을 미워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 손수 세우신 가정과 교회 공동체이랴!!
내가 고집 피우다가는 교회의 모든 부목사님들과 대결하는 모양이 되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는 꼴이 되겠다.
일단 내가 추진하던 것을 중단하자.
여전히 나의 의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배치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지만, 일단은 부목사님들의 요구대로 중단하자. 담임 목사님께 말하지도 말자. 어디서 거론하지도 말자.
나를 설득하러 오신 분들을 만나자 마자 성경 모임을 해체하겠다고,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먼저 결론을 말씀드렸다. 묵상에서 때 하나님 주신 마음으로 결단은 했지만 ..부수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83.
다음 날의 묵상이다.
<주신 말씀>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묵상>
기름부음 아마도 보혜사 성령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고, 이로부터 시작되는 진리와 지혜들은 사도들이 처음부터 기르치신 것이다.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고로
우리의 배움은 성경 말씀이어야 한다
그 말씀을 살아내라
이것이 우리가 예수 안에 사는 것이다
정리하면 간단한데 살아 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
특별히 시야를 넓혀 공동체의 유익이란 측면과 하나님의 때란 측면에서 어렵다
나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경을 성도들이 연구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부목사님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중단하라 하신다.
아직 때가 아니란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84.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통일한국을 준비하는 성경연구센터를 만들어 보자며 야심 차게 시작했던 30여명의 모임은 해체되었다. 해체의 명분을 만들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냥 나와 교회를 신뢰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왜 목사님들이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의 하나됨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나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에 마치 내가 잘했고, 목사님들이 잘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분들에게도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기술하면 내가 나쁜 고집장이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주장이 잘못된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이란 메시지 속에는 나의 세상적 성공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동안 내가 교회에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물어보기 전에 내 욕심으로 결정한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중단시키신 것이라 생각해서 나의 의를 내려 놓았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성령의 하나됨, 교회의 하나됨은 내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85.
해체한 성경 공부 모임 멤버들 중 반 정도가 교회 성경대학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묵상 훈련반으로 들어와서 몇 개월 귀납적 묵상 훈련을 같이 했다. 그 해 여름 10명이 팀을 이루어 안동지역으로 묵상 전도여행을 가서 그 동안 귀납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했던 창세기를 나눴다. 이듬 해 겨울에는 신안군의 한 섬으로 묵상 전도여행을 떠나 사사기로 말씀 사경회를 섬겼다. 나와 멤버들은 이 묵상 전도여행에서 ‘회복’이란 마음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 하실 일을 기대했다.
첫 묵상 여행 중 일어난 일을 하나만 소개하고 싶다.
출발하는 날,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한 자매님이 도저히 같이 갈 수 없을 정도로 토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자매님을 병원으로 보냈고.. 쉬었다.. 오실 만하면 오시라고 권면해드렸다.
사실은 이번에는 쉬십시오. 맡은 순서 걱정 마십시오..이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저녁 6시 35분 기차로 안동에 도착했다.
예배 때 피아노를 반주하고 있었다.
예배에서 회복을 선포할 때 무딘 나는 그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말씀을 나누고 뒤로 와서 같이 찬양하면서 피아노 치는 것을 발견하며.. 회복이 그녀에게 오겠구나.. 기대되었다.
86.
회복을 바라는 우리 팀의 묵상 나눔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둘째 날 그 자매님의 묵상...
그는 재정 문제로 인해 남편도 본인 자신도 아이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데..
재정을 주십시오. 남편의 사업이 부하게 해 주십시오. 선교하는 기업이 되게 해 주십시오...이런 말이 전혀 없었다.
대신 하나님 저를 정결한 신부로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 가정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하는 간구가 있었을 뿐이다.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나도 한 때 선교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돈 많이 주면, 쓰고 남을 정도로 주면, 선교도 할께요..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교차되면서... 정말 이 자매님의 묵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끄는 묵상이구나.. 감격이었다.
87
이듬해 두 번째 묵상여행...
첫 번째 여행의 묵상 내용이 원망과 억움함을 자제하고 하나님 하실 일을 기대하는 기특함이 감동이었다면, 두 번째 여행의 묵상 내용은 어느새 원망과 억울함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드러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무릎을 펴고 바로 걷겠다는 선포가 장엄한 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나눔을 통해 우리가 참 성숙되었구나 하는 것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내려 놓은 나의 의에 대한 너무도 큰 선물이었다.
묵상 프로세스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둔갑해 있는 나의 의를 찾아내고 내려 놓는 연습이다.
88. 묵상이 아닌 것..
묵상 프로세스가 어때야 하는가를 제대로 정리하기 어렵다면 잠시 머리를 돌려 묵상이 아닌 것을 생각해보면 좋다.
묵상은 말씀은 인풋으로 하여, 즉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는, 세상으로 기울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쪽으로 조정, 조율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나를 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뜻을 기준으로.
혹 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말씀을 이용한다면 이는 묵상이 아닌 것이다.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는 것 역시 묵상이 아니다.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 아닌 비워진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도 묵상이 아니다.
89. 사탄의 세력들도 묵상한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사탄은 하나님의 좋은 것이란 모두 모방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이 너무 부러우니까 사탄도 용,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적 그리스도), 땅에서 올라온 짐승(거짓 선지자)의 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일체는 불가능하지만 3위까지는 시늉을 낸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인치시니까 사탄도 머리나 손에 인 받으라 소리친다.
사탄의 모방을 개략 정리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 백성 인침
- 성부 성자 성령
- 죽음 - 부활
- 어린 양
- 사람 마음에 말씀 하심
사탄
- 표 받지 않는 자 상거래 못하게
-용, 바다 짐승, 땅 짐승
- 상처로 죽게 되더니 - 나음
- 두 뿔
- 사람 마음에 생각 넣음
그래서 사탄은 모방의 명수라 한다.
묵상도 사탄이 모방하는 것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묵상도 사탄이 흠모할 만큼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에게서 빼앗거나 변질시키고 싶을 것이다.
이런 사탄의 묵상은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다.
90.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대결을 벌일 때이다. 송아지 두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양쪽으로 놓고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신을 불러 송아지를 불태우게 해보라고 제시한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을 부르며 제단 주위에서 뛰놀지만 응답이 없자 엘리야가 한 마디 한다.
왕상18: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그들의 묵상은 '명상'과 '공상'의 형태로 발전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묵상과 이교도의 명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이 활발한 사고 작용을 통해 점차 하나님의 진리로 꽉 채워진다 면 이교도의 명상은 자신을 점점 비워 자의식까지도 상실하게 된다
묵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의 말씀, 그의 하시는 일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가지지만 명상은 주문의 반복, 정신 집중, 자기 암시 등을 통해 신비적인 초월감을 누린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대로 신의 응답은 없다.
목적도 판이하게 다르다. 묵상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생활과 인격에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반면, 명상자는 현실에서 갖는 고통 과 어려움을 잊고자 하며, 이를 위해 신을 조정한다. 만약 신이 들어 주지 않으면 신을 바꿔버린다.
91. 시 19편
시 19편은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을 생각나게 한다.
갈릴레이는 재판장에서 나오면서‘그래도 지구는 돌아간다’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시 19편의 5-6절에 해는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저 끝까지 운행한다고 노래하고 있어 문자적으로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움직인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과학 문명이 발달된 오늘날 우리는 어린아이라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 정도는 배워 알고 있다. 성경의 오류인가?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시는 시로 읽어야지 법 조문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오류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오류였다.
성경을 잘 못 해석하면 그 결과 역시 잘못 될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묵상 프로세스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잘 못 해석된 성경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혼 줄이 난 사람들이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그랬고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그랬다.
92.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개량해서 천체를 관측하는데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천체 관측으로 달의 표면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금성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진다는 것, 태양에 흑점이 있어 태양 표면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 희미한 은하수가 실은 많은 별들의 집단이라는 것, 목성 주의에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목성의 위성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그의 지동설이 큰 파문을 일으켰고 161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고, 갈릴레이에게 활동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과학자가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는 교황청에 천동설이 옳다는 책을 쓰고 싶다며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 입장에서는 돌아온 탕자이기에 허락했다.
1632년에 그는 천문대화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표면상으로는 천동설을 지지하고 있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것이 출판 후에 발각되어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괘심 죄까지 더해져 종신 금고형을 받았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공식적인 장례도 묘비 세우는 것도 금지되었다.
93.
그 재판의 근거가 된 성경말씀이 시 19편5-6절이다.
시19:5-6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성경에 해가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저 끝까지 운행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구가 움직인다니…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부하고 신성모독 했다는 것이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죄목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태양이 움직인다는 말이 맞다
그러나 시는 법 조문과 다르다. 시에는 많은 은유적 표현이 있다.
은유적 표현을 법 조문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시 19편에서도 해는 자연 태양을 말하는가 아니면 다른 신적 존재를 말하는가? 신랑은 누구를 말하는가? 등이 바로 해석되어야 한다.
시 19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또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만드신 두 책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1-6절에 묘사된 자연이라는 책이며, 또 다른 하나는 7-14에 묘사된 성경이라는 책이다.
94.
시19편 전체를 한 번 읽어 보자.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하늘의 오묘한 운행이 하나님 위대하심을 선포하며 이 지구가 그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증거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우리가 자연의 섭리를 보면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9: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19: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우리는 신랑의 이미지에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몰랐던 시편 저자의 시대에도 하나님이 남편, 백성이 아내의 개념으로 이해되었었다. 때문에 태양의 움직임을 하나님이나 예수님 같은 신랑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약시대 성도들의 노래로 표현하면..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달려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를 기뻐하셨고, 지금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구석구석 은혜의 빛을 비추고 계신다.. 정도가 될것이다.
해는 자연에 있는 태양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이해되고 그 예수님께서 온 세상 구석구석까지 우리를 돌보신다는 말씀이다95.
6절까지 하나님을 알리신 자연의 책이 우리에게 일반 계시로 다가 왔다면, 이제 7절부터는 특별 계시로 오신 말씀 그 자체에 대해 찬양한다.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 우둔한자를 지혜롭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
이런 식의 말씀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그 말씀으로 경고도 받고, 허물도 깨닫게 되어 결국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에 대해 찬양한다.
드디어 마지막 절에는 나의 말과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는 잘 못 해석되고 잘 못 묵상되어 한 인생을 묶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게 했다,
묵상을 위해서는 성경을 정확히 이해함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96.
당시 종교재판을 하는 재판관들이 정치 재판관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자들이었다면 이 구절을 읽고 묵상하며 재판에 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상당한 성경 지식이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묵상은 하나님께 열납 되는 묵상이 아니었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또한 독자 모두가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묵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잘 못 해석한 후의 묵상은 묵상이 될 수 없다.
묵상 프로세스에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 못된 이해에 근거하여 묵상이 진행될 경우 아주 위험한 상황으로도 갈 수 있다. 이단에 빠지는 자들.. 그들의 성경에 대한 열심을 보라.
그러므로 묵상자는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에 대해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정리하면 묵상의 input이 내가 읽는 성경말씀이라면 묵상 프로세스는
1)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주신 말씀을 관찰함과 동시에
2)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함으로써 깨닫는 것이다.
3) 깨달았다면.. 이 것이 현재의 내 삶이나 생각과 다른 경우가 많다.
묵상은 나의 생각과 삶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꾸겠다는 전제하에서 시작하므로 나를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97
프로세스는 나 자신의 지식,정서,의지와 행동 속에서 나보다 먼저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싫고, 귀찮고, 억울하고, 아니다라는 생각도 들지라도, 이런 생각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 내 삶이 되게 하는 작업이 묵상이다. 이 과정이 나의 힘으로 불가능하므로 내가 이해하고 동의하며 따르겠다 결단할 수 있을 때까지 싸우며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떼를 쓰기도 하고, 못하겠다고 버티기도 하지만 말씀이 옳으며, 말씀이 나에게 능력을 줄 것이라는 신뢰를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묵상의 과정은 그렇게 즐겁지 않을 수 있다. 무척 괴롭고, 화가 나서 묵상집을 던져버리고 싶은. 실제로 던져버리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버렸더니, 억지로, 거의 죽지 못해 순종했는데..그 결과.. 내 삶이 변했고 마침내 달고 오묘한 말씀의 맛을 느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묵상인 것이다.
깨우침에 대한 반응
98. 묵상 하면 깨우침이 온다.
Case 1
새롭게 아는 것..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그 아는 것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면 된다.
Case 2
전에는 몰랐었는데 새롭게 알고 보니, 과거에 내가 잘 못한 것이 드러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과거 청산은 간단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끝난다.
그러나 사람과 사회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받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피해자가 이 문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찾아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상대가 용서를 하고 하지 않고는 둘째 문제이다. 나의 도리, 나의 최선을 해야 한다.
Case 3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또 말씀하시면...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또 기회를 주신 것이다.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이 번 마저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
용기를 내야 한다. 끈질겨야 한다.
성령님이 감당할 능력을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
결단해야 하고 살아내기로 작정한다면.. 내 앞의 세상은 확~ 달라진다.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상황이 언제 그런 문제가 있었느냐는 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걱정마라.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99. Case 4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것만은 따르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성경의 말씀도 그렇게 하라 하고, 믿음의 선배와 동료들도 그렇게 하라 한다, 이제는 나도 그만 버티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여전히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깨우침 앞에 나는 소리친다.
난 못해..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저 친구를 손보는 게 마땅하고, 간단한데, 왜 착하게 살아 온 그 동안 손해만 봐 온 나만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세요?
이 것 만은 못해요.
참 난감한 경우이다. 내가 봐도 내가 미련하다는 것 안다. 그냥 항복하고 툴툴 털어버리면 될텐데.. 알면서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숨어버리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과 끈질기게 따져봐야 한다. 내가 옳고 하나님이 틀렸잖아요.. 물고 늘어져야 한다. 내 속에 있는 응어리, 불만, 한숨 모든 것 다 하나님께 토해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치유해 주실 것이다.
새로운 계기를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