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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법사 영축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절로절로
불기2557년 동짓달 초이틀(수). 성지 순례 6일차
05:30분 기상 - 아침 공양 후 Lotus Nikko 호텔 출발(07:20) - 인도 네팔 국경 부근 도착(10:20) -국경 통과(12:30) - 점심 공양(13:10) - 카필리성 도착(14:30) - 쿠단 도착(15:10)- 룸비니 도착(16:20)- 대성 석가사 도착(17:10)- Crystai 호텔 도착(19:30)
쿠쉬나가르의 한국절 '대한사'(우리들이 하룻밤을 의탁한 Lotus Nikko 호텔 앞에 있었던 한국절)
대한사는 열반당에서 다비장으로 가는 길 좌우로 각국의 절들이 늘어선 그곳에 있었는데 주지 성관스님은 한국으로 가고 계시지 않는다고 했다. 대한사는(인도의 한국 절들이 그렇듯이) 개인이 자력으로 일구고 키워낸 곳인지라 우리가 보기에는 참 어설프고 초라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이야기 들어보면 참으로 힘들고 고생스러운 지난날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무엇이든 보태드리고 싶어진다. 1992년 성지순례 중 머물면서 절을 짓기 시작하여 맨땅에 파일을 박으면서 시작한 불사가 허름해 보이지만 그래도 절집을 완성하고 이제는 조계종 총무원에 사찰을 등록하여 통도사 말사로 있으면서 스님도 연중 몇 달은 한국에... 인도에... 교대로 머무른다. 원래는 몇 개의 방을 숙소로 제공하기도 했으나 배낭 객들의 결례와 무례한 행동으로 꾸려나가기도 참 힘들었던 이야기나(현재 수리 중이었다.) 인도 현지인을 가르쳐놓으면 한국관광객 가이드로 빠져나간다는 이야기는 참 실감나면서도 안타까운 것들이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유럽에서 63빌딩 크기에 버금가는 초대형 불상을 건립추진중이라고 한다.
태국 스님들 탁발(Lotus Nikko 호텔에서)
탁발은 어디에서 유래 되었나?
스님들이 저자거리의 집들을 방문하며 쌀이나 약간의 금품 따위를 동냥하는 것을 탁발(托鉢)이라고 합니다만, 이와 같은 탁발의 풍습은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입니다. 즉 인도의 출가 수행자들은 일체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대신 탁발을 통해서 식생활을 해결했는데, 불교 교단에서도 그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스님들의 생활방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걸인들의 구걸 행위와는 엄연히 다른 것으로, 오직 수행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는 수단이었던 만큼 거기에는 엄격한 규칙들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에 한번 오전 중의 정해진 시간에만 한다거나, 민폐를 줄이기 위해 하루에 일곱 집씩을 방문하여 조금씩 얻어서 모은다거나,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을 차별하지 않고 차례대로 방문한다거나, 탁발을 유도하는 어떠한 언행이나 태도도 내비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또 가르침이나 그 밖의 것을 베푼 대가로 공양을 받아서도 안 되고, 먹다 남은 것을 보관해 두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탁발은 그 자체가 수행자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잠재우는 수행의 하나였을 뿐 아니라 재가신자들에게는 출가자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상당한 공덕이었으므로 재가신자들의 복덕을 위한 출가자들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원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사원 안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게 된 이후에도 탁발은 일부 수행으로 일부 스님들 간에 꾸준히 행해져왔고,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오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조계종에서는 종헌종법으로 탁발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 사회 속에서 성직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 불교의 가장 큰 병폐가 이로 인한 것이라 생각 됩니다. 성직자는 품위가 필요치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의 위상일 뿐입니다. 탁발은 하심(下心) 낮추기 위해 행하는 수행인데 낮추지 않으니 그 볼상사나운게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불교의 원류인 미얀마 태국 등지에는 맨발로 행 하시는 그 장엄한 탁발 행렬이 가히 숙연하기 까지 합니다. 원래 승복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썩어 냄새가 나고 담아서는 안되기 주머니가 없답니다.
현대판 탁발(托鉢)이란?
탁발(托鉢)이란 범어 핀다파타의 음역이다. 이는 걸식(乞食) 또는 걸행(行乞)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탁발에는 엄격한 청규(淸規)가 정해져 있다. 탁발의 대상에는 빈부나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고 한집 한집을 방문하게 되어있다. 여기에는 평등의 의미가 있다. 또한 중생들에게 복 지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탁발은 자신의 오만을 꺾고 하심을 실천하는 수행이며 중생들에게는 복 짓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보시를 행하는 것 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종헌종법으로 탁발을 금지하고 사원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성직자들에게 공양을 대접하는데 이는 성직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현대판 탁발은 없을까?
현재의 사이버시대에 사는 우리네 집에는 어느 집이나 컴퓨터 하나쯤은 다 갖추고 있을 것이다. 경로당, 구청, 동사무소 등에서도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농촌을 포함한 모든 지역의 웬만한 노인 분들이나 아이들 전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어 사이버상의 모임인 카페접근도 쉽고 카페활동을 하는 데는 특별한 기능이 필요하지 않고 경제적요구나 자격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가 쉽게 접근하고 활동하며 참여할 수 있다. 카페 또한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24시간의 개방으로 언제든지 참여 할 수 있고 특히 종교적 성향을 뛴 카페에서는 일반인과 종교인을 대상으로 한 포교 사업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법 보시 공양을 실천하는 곳이며 수행도량이 되기도 한다. 참여가 인연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복 지을 기회를 제공하고 이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서로 도반이 되어 신행 심을 증진시키며 관욕을 하듯이 모든 아만과 탐욕을 씻어내는 수행처 역할을 한다.
신수대사님 말씀에 이러한 것이 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대와 같으니, 수시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 때가 끼지 않게 하라.”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매일 매일 티끌이 없도록 닦는 행위가 관욕이며 수행이다. 그래서 마음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아리야식 항아리는 점점 비워지게 되어 부처님 곁으로 한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글을 올리는 자는 보시를 행하는 자요, 보시할 기회를 부여한 자는 관욕하는 자요, 또한 보시할 마음을 새롭게 내는 자이다. 이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회전하며 불성이 살아 숨 쉬는 수행처요 도량이 된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수행이기에 현대판 탁발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불자들에게 불교 카페에 많이 가입하기를 자주 권한다. 닦지 않으면 더러워지고 때 묻기 때문이다. 불교카페에 자주 드나들며 마치 거울을 닦듯이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 닦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그 마음자리의 빛을 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한다. 드러내기 위해서는 닦아야 하는데 닦는 행위가 관욕이고 드러나는 것이 거울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의 사이버카페가 즉 현대의 법당이며 도량으로 탁발을 행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불교계에서는 사이버를 이용한 포교에 많은 열정과 힘을 쏟아 부었으면 한다. 살아있는 불심의 장이 사이버 법당이다. 그래서 나는 불교라는 사이버 카페를 좋아하며 사랑한다.
태국 스님들은 오렌지색이나 땅 색에 가까운 진홍색 가사를 입는다.‘마하니까이’파 승려는 오렌지색,‘담마유뜨’스님들은 진홍색 가사다. 두 파 사이에는 교리 상 차이는 없다. 모두 테라와다 라고 불리는 상좌부 전통의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차이점은‘마하니까이’파가 조금 더 대중적이고 오후 불식(不食)을 지키는 반면,‘담마유뜨’스님들은 수행 쪽에 더 관심이 많고 아침 식사 한 끼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소승’이라고 은근히 아래로 보지만 남방 스님들의 수행에 대한 열정과 지계(持戒)의 결심에는 견줄 바가 아니다.
사라수(沙羅樹) 숲
이곳의 임목업자가 사업차 키우는 숲으로 우리가 통과하는 뱡향으로 길이가 약 5km, 폭이 약10km에 달한다고 한다.
학명 : Shorea robusta
과명 : 이엽시과(Diperocarpaceae)
영명 : Common Sal, Indian Dammer, Sal Seeds, Sal Tree, Saltree, Yellow Balau
이명 : Ashvakarn, Chiraparna, Sal, Sala, Sarja(산스크리트), Jall, Sal, Salwa, Shal(힌디), akher, Sakhu, Sal, Salwa(뱅갈), Jall, Sal, Salwa, Shal(인디), Attam, Shalam(타밀), Sara Noki, Serangan Batsuu, Shara Noki(일본), Suo Lo Shuang, Suo Luo Shuang Shu(중국), 마이수(馬耳樹)
히말라야 산기슭부터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반 낙엽성의 나무로 높이는 3m에 달한다. 인도에서는 목질이 좋아 건축자재, 침목으로 쓰이는 등 주요 산림식물의 하나이며, 수지는 힌두교에서 향으로 사용하고, 기근 때는 열매를 빻아 밀가루에 섞어 먹기도 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모양의 타원형으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3월에 피며 연한 노란색으로 원추꽃차례가 달린다. 꽃잎은 5장이며 밑 부분이 붙어서 통처럼 되고 많은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다. 열매는 삭과로서 넓은 타원형이며 길이 13mm로 꽃받침이 자란 5개의 날개가 있다. 목재는 단단하고 수피에 상처를 내면 수지인 다마르(dammar)가 나온다. 이것은 래커와 리놀륨을 만드는 원료로 쓰고 열매는 식용으로 한다. 가로수로 심기도 한다.
경전 속의 사라수
사라는 산스크리트의 살라(sala)에서 나온 말이며 '단단한 나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구시나라의 사라나무 숲 속에서 열반하였는데 동서남북에 이 나무가 2개씩 서 있었으므로 사라쌍수라고 한다. 한 쌍씩 서 있었던 사라수(紗羅樹) 중 동쪽의 한 쌍은 상주(常住)와 무상(無常)을, 서쪽의 한 쌍은 진아(眞我)와 무아(無我)를, 남쪽의 한 쌍은 안락(安樂)과 무락(無樂)을, 북쪽의 한 쌍은 청정(淸淨)과 부정(不淨)을 상징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탄생에서 깨달음, 열반에 이를 때까지 나무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태어날 때는 룸비니 동산의 무수(無憂樹 : 아수가수) 아래서 태어났는데 마야 부인이 안산을 했다 하여 그 나무를 '무우수'라 했다고 한다. 또한 깨달음은 보리수 아래서 얻었다. 보리수의 원명은 핍팔라(일명 아슈바타인)인데 이 나무 아래서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음(보리)이라는 이름이 붙어 보통 '보리수'라 한다. 열반은 두 그루의 사라수(紗羅樹) 아래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이 세 나무를 3대 성수(聖樹)라고 부른다. 불교식 장례 때 제단에 지화(紙花)를 장식하는 것도 부처님 입적 때의 이 사라쌍수 꽃에서 유래한다. 또한 사라수는 석가모니 부처님에 있어서는 열반의 나무이지만 과거칠불 중 세 번째 부처님이신 비사바 부처님에게는 보리수가 되고 있다. 즉 비사바 부처님께서는 사라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히라냐띠 강을 건너서 꾸시나라의 말라족이 사는 사라수 숲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일러 말씀하셨다."나를 위해 나란히 늘어선 두 그루의 사라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침상을 준비해다오. 나는 몹시 피곤하구나. 옆으로 눕고 싶다. "아난다가 그대로 하자 부처님께서는 사라쌍수 아래서 머리를 북쪽으로,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향하도록 하신 후 발 위에 발을 겹쳐 올리고 조용하게 모로 누우셨다. 그때 사라수는 때 아니게 꽃이 활짝 피었다. 그리고 그 꽃들은 부처님의 몸에 내리덮이듯 흩날리며 쏟아졌다.
2) 아함경 - 제8권 3. 미증유법품(未曾有法品)
저는 들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어느 때, 비사리의 커다란 숲 속에서 노니셨습니다. 그때 여러 비구들은 발우를 맨 땅에 두었었습니다. 마침 세존의 발우도 또한 그 가운데 있었는데, 원숭이 한 마리가 부처님의 발우를 가지고 갔습니다. 비구들은 부처님의 발우를 깨뜨리지 않을까 걱정되어 꾸짖었으나,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꾸짖지 말라. 발우를 깨지 않을 것이다.' 그 원숭이는 부처님의 발우를 가지고 어떤 사라나무(紗羅樹)로 가더니, 천천히 나무 위로 올라가 벌꿀을 채취하여 발우에 가득 담은 다음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와 부처님께 나아가 꿀 발우를 세존께 바쳤습니다.
인도와 네팔 국경도시 소나울리(SONAULI)
인도 출입국 관리사무소 우리 일행의 출국 서류 작성 모습
인도에서 네팔로 넘어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소나울리를 통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쿠쉬나가르에서 고락뿌르를 거쳐 나우탄와를 지나면 소나울리까지 4시간 남짓 걸리며 소나울리에서 인도 측 출국 수속을 밟고 네팔 측 입국수속을 밟는데 평소에는 1시간가량이면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오늘따라 출입국 사무소에 고관대작(1명과 또 다른 수행원으로 보이는 1명)이 찾아와 이렇게 조그마한 곳에서도 감사를 한다고 . . . 평소보다 1시간가량을 더 보내고 인도에서 출국 수속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출국 심사를 받을 때 떡값을 지불하여야 한다는데 덕분에 떡값은 버렸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 되었네요.
그리고 룸비니까지는 불과 1시간, 전체적으로 7시간 정도 걸려 네팔로 넘어간 하루였다(보통때에는 평균 6시간가량 소요된다고 함).
인도 출국은 여권에 스탬프 도장을 받고 쉽게 그냥 통과.
네팔 입국은 비자를 현장에서 받아야 하기에 서류를 작성하고 사진을 첨부하여 25달러를 내야 한다.
네팔에서 바라본 인도국경 도시 소나울리 쪽
앞에 보이는 출입문과 뒤쪽으로 보이는 출입문 사이 약 20m 가량이 중립지역이라고 한다.
카필라성 출입구
길상초(吉祥草) - 카필라 성에서 -
학명 : Desmostachya bipinnata / Ergrostis bipinnata
과명 : 벼과(Gramineae)
영명 : Hala Grass, Big Cordgrass, Salt Reed-Grass
이명 : Kusa(산스크리트), 길상모(吉祥茅), 희생초(犧牲草)
인도와 미얀마에서 시리아와 아프리카 북서부에 걸쳐 분포하는 초본이며 반 지중 식물로 서식지는 사질토이다. 지중해 숲지대와 관목대, 스텝기후 지역의 관목대, 사막과 사막 극단에 분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비하르주의 가야 부근이나 뱅갈 지방 강가의 모래땅에 많다.
경전 속의 길상초
길상초는 불교에 전래된 만(卍)자의 유래와 관계가 깊다. (수행본기경)의 부처님의 성도설화에는,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도를 할 때, 지나가는 농부에게 한웅큼의 풀을 얻어 깔고 앉았는데, 그 풀의 끝이 卍자 모양의 길상초(吉祥草)였다고 하며, 그 이후, 만(卍)자는 부처님의 가슴, 손발, 머리, 허리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만자 덕상이 있다고 여겨 '만덕이 원만한 모양', '진리의 본체' 혹은 '부처님 신체에 있는 특이한 모습의 하나'로 불교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불상의 가슴이나 손발에 만(卍)자를 그려 넣게 되었고, 불교기가 제정되기 전까지 '만(卍)'자가 불교기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1) 법화경 제23 약왕보살본사품 - 제4장 이익의 수승함을 나타내다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 반드시 길상초를 깔고 도량에 앉아서 마구니를 깨뜨리고 법의 소라를 불며 큰 법의 북을 둥둥 쳐서 모든 중생을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내어 해탈하게 하리라.
길상초를 보시 받는 석가보살
6년간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혹독한 고행 을 했던 석가보살은 불현듯 농경제(農耕祭)에 참석했다가 무우수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들었을 때의 기쁨을 생각해 냈다.
고행이 성도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알고 과감하게 그간의 수행법인 고행을 포기하고 나란자라 강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 마침 수자타가 올리는 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그간 함께 고행을 했던 5명의 수행자는 고행을 그만둔 석가보살을 배신자라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나갔다.
기운을 차린 석가보살은 과거의 부처님들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에 이르렀을 때 어떤 자리에 앉았을까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풀로 된 자리였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풀로 된 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석가보살의 오른쪽에서 풀을 베고 있는 사나이가 눈에 들어왔다.
‘방광대장엄경’에 의하면 보살이 깨끗한 풀 위에 앉아서 정각을 이룰 풀을 줄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자, 제석천이 몸을 변화시켜 풀 베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보살의 오른편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자리에서, 풀을 지니고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 풀은 청정하고 아름다우며 공작새의 깃털처럼 또는 고급 양탄자처럼 부드럽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다. 더구나 그 풀은 모두 오른쪽으로 말려 있었다. 석가보살이 다가가서 그 사나이의 이름을 물으니 길상(吉祥)이라는 뜻의 솟띠야라고 했다. 그로부터 길상초를 받은 석가보살은 보리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다라의 불전도 가운데 ‘솟띠야로부터 길상초를 보시 받는 석가보살’의 구성은 아주 간단하다. 풀베는 솟띠야의 머리 뒤에는 나무가 있고 풀은 이미 석가보살의 손에 건네진 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솟띠야는 신분이 낮은 층이 입는 짧은 하의(下衣)를 걸치고 합장하고 있으며, 그의 허리춤에는 풀을 베는 도구가 꽂혀 있다.
그와 석가보살 사이에는 풀이 소복이 쌓여 있고, 보살의 뒤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손에 든 채 그를 호위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불전도이다. - 유근자.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 -
카필라성 터
637년경 카필라성을 방문한 현장 스님은 "카필라국의" 둘래는 4천여리(약 2,240㎞)이다 비어있는 성이 10여개 달하고 이미 심하게 황페되었다. 왕성도 이미 허물어져 그 둘래와 크기를 알 수가 없다 그 안의 궁성 은 둘레가 14 ~ 15리(약8㎞)이고 벽돌을 쌓아 만든 계단은 견고하다. 황폐하여 텅 빈지 오래되어 마을도 그의 없고 썰렁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없고 성마다 각자 성주를 내세우고 있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일은 때에 맞추어 파종하나, 기후는 순조로워 변덕이 없고 풍속은 온화하고 맑다. 가람의 옛터는 천여군데 있다. 궁성 옆에 가람이 하나 있는데 승려들이 3천여 명 살고 있고 그들은 모두 소승 정량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천사는 두 곳 있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궁성 안에 옛터가 있는데 정반왕의 정전이 있던 곳이다 그 터 위에 정사가 있고 그 안에 왕의 상이 있다 그 옆으로 멀지않은 곳에 옛터가 있는데 마야부인의 침전이던 곳이다. 그 위에 정사가 있고 그 안에 부인의 상이 있다. 그 옆의 정사는 석가보살이 모태에 든 곳이고 그 안에는 보살이 모태에 드는 상이 있다. 라고 대당 ‘서역기’에 남기고 있다.
카필라성은 싯다르타 태자가 학문과 무예를 익히며 성장한 곳이다. 석가보살이 어머니 태내에 들었던 곳이며 아시타 선인이 태자의 상을 보던 곳, 사촌 데바닷타와 씨름경기를 벌인 곳. 동생 난타와 코끼리를 치고 활을 쏘던 곳, 그 화살이 동남쪽 30리에 꽂혀 천수가 솟아나게 하던 곳 등 일생에 결부된 장소에 스투파가 세워졌다고 한다. 동북쪽에 왕의 밭이 있는데 일찍이 농경제에서 참석했던 태자는 쟁기에 잘려진 벌래와 그를 채가는 새들의 모습을 보고서 "삶의 무상"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후 사문유관을 통해서 동문을 나가서 늙은 노인을 남문에서 병든 사람을, 서문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출행에서는 출가 사문을 만나게 된 이후로 인간의 생 노 병 사에 대한 해탈을 얻기 위하여 야쇼다라 태자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유성출가(대출가)를 하게 된 곳이다. 성도한지 2년 후에 고향을 방문한 부처님은 니그로다 동산에 머물렀고 이곳에서 부왕과 금란가사를 보시한 양모 마하프라자파티를 친경하였다. 아들 라훌라와 동생 난타를 출가시켰고 ,궁중의 이발사 우발리(존자)와 아난다(존자) 데바닷타, 아니룻다를 비롯한 8명의 왕자를 출가, 석가족 청년 500명의 출가를 거두어 드리셨다. 그리고 코살라국의 비루다카 왕에 의해 석가족 9천9백90명이 죽음을 당한 곳에 수백 수천 개의 스투파가 세워져있었다고 전한다. 비루다카왕은 코살라국 프라세나짓트왕의 아들로서 그의 부왕이 석가족 공주와 혼인을 요구하자 석가족은 순수혈통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공주의 하녀중 한명을 공주라 속여서 사위성으로 시집을 보내었다. 왕자로 태어난 비루다카가 성장하여 외가인 카필라성을 방문한 후 자신이 천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돌아온 뒤, 석가족에게 피로서 복수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이윽고 부왕이 왕궁을 비운사이 왕위를 찬탈하여 군대를 일으켰다, 부왕과 왕비는 마가다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사망 하였다고 한다. 비루다카 왕이 카필라 성을 침공하기 위해 행군을 나서자 부처님은 나뭇잎 없는 마른 나무 그늘에 않아 3번 까지 군대를 돌려보내셨다. 비루다카가 세존에게 "무성한 나무 그늘에 앉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고목의 썩은 그루터기에 앉아 계십니까? 하며 묻자, 종족이란 나뭇가지와 잎과 같소. 가지와 잎이 위험에 빠져있는데 내 몸을 감출 곳이 어디에 있겠소. 하며 군대를 돌려보냈으나 4번째는 막지 않으셨다. <결국 비루다카는 카필라국을 멸망시켰으나, 그 역시 인과의 업을 피할 수 없었던지 어느 날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 불어온 돌풍에 휩싸여 익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부처님이 출가한 카필라 성의 동문에서
사문유관
어느 날 정반왕은 보살이 깊은 궁전에만 있으면서 사유의 폭만 늘리기에 <가볍게 돌아다니면서 구경이나 하여라.>하였다.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칙령을 내려 동산 숲을 쓸고 꾸미게 하여, 향수를 땅 위에 뿌리고 여러 가지 꽃을 장식하고 보배로운 나무 사이에는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달고 진주와 영락으로 장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으로부터 동산까지의 둘레를 빛이 나게 가꾸었으며, 길가에는 나쁠만한 것은 없게 조치하였다. 이에 보살도 성 밖의 동산으로 나가기 위해 마부에게 법다이 장엄한 수레를 채비할 것을 말하였다. 보살은 여러 관속들의 호위로 성의 동쪽 문으로 나갔다. 때에 정거천자가 늙은이로 변하여 머리카락은 희고 몸은 파리하며 피부색은 바짝 마른데다 지팡이를 붙잡고 꼬부라져서 헐떡거리며 머리까지 숙이고 살가죽과 뼈는 달라붙어 근육조차 없으며 어금니는 빠지고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면서 혹은 서기도 하고 가기도 하다가 잠깐 엎드리기도 하고 잠깐 쓰러지기도 하였다. 이 모습을 본 보살은 마부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찌하여 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느냐?”마부는 정거천의 신통력에 눌려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늙은이 입니다. 전에는 젊었으나 점점 쇠약해지고 원기를 잃어 몸은 가누기가 어렵고 모습은 추해져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노인의 여생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사람과 같이 늙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태자는 말하였다.“그렇다면 나도 저와 같이 늙을 것인가?”“무릇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늙는 괴로움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태자는 생각하였다.“내가 왕궁의 부귀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장차는 저같이 늙을 것이니, 이 세상의 무엇을 참으로 귀하다 하겠는가. 한번 태어난 사람에게 늙음과 쇠약함이 따른다는 것은 재앙이로구나.”이와 같이 생각하니 태자의 마음은 우울하고 슬퍼졌다. 태자는 곧 수레를 돌려 성으로 돌아와서는 또 근심하고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이 일을 안 정반왕은 태자가 탄생하였을 때 아시타 선인이 한 말이 떠올라 왕은 태자가 한층 더 쾌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강화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태자가 동산에 나아가려 하자 왕은 바깥 벼슬아치들에게 칙명하여 엄히 도로를 다스리고 모든 부정한 것을 치우게 하였다. 보살은 수레를 타고 남쪽 문으로 나아가다가 또 길의 중간에서 병든 사람을 만났다. 이것도 정거천자가 변장한 것이었다. 물이 든 배에 몸은 파리한데 길 곁에 누워서 숨은 입을 벌려서 쉬며 목숨은 곧 끊어지려 하였으므로 보살은 알면서도 짐짓 마부에게 물었다. 마부는“이 사람은 병든 자이며, 이미 죽을 경지에 이르러서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뼈마디가 쪼개지려 하고 남아 있는 목숨은 머리카락과 같나이다.”보살은 <만물은 무상하여 존재하면 모두 괴로운 것이다. 나면 다 이것이 있으니 어찌 면할 수 있으리요. 내 몸도 오래지 않아서 역시 그러하리라. 또한 애통한 일이 아니냐. 몸이 있으면 고통이 있고 몸이 없으면 즐거우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성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또 다른 날에 보살은 성의 서쪽 문으로 나갔다. 때에 정거천자는 변하여 죽은 사람이 되었는데, 상여 위에 눕히고 향과 꽃을 널리 뿌리며 식구들이 울부짖으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보살은“대저 죽음이란 애통한 것이며, 정신도 번거롭도다. 나면 당연히 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고통이 있어서 한곳으로 집중하여 들이닥치며 거기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으니 참 괴로운 일이다. 태자는 곧 수레를 돌려 돌아가서 시방의 중생을 건질 것을 생각하였다. 다시 다른 날에 왕에게 유람 나갈 것을 알리고는 보살은 성의 북쪽 문으로 나갔다. 때에 정거천자는 출가사문으로 변장하여 가사를 입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아 없앴으며, 손에 석장을 집고 엄숙하게 있었다. 또한 그 사문은 조용하고 편안하며 맑은 행을 깨끗이 닦아 모든 감관이 고요히 안정되었고, 위의와 예절이 도의 법에 어긋남도 없이 의복은 가지런하였으며 손에는 법기를 갖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보살은 <거룩하도다. 오직 이것만이 상쾌하구나. 이것은 내가 좋아 할 바로다. 마음과 뜻이 고요하여 저절로 가엾이 여겨져서 남을 건지며, 선한 일은 상쾌하고 이익되어 단 이슬의 열매를 이룩하는구나.> 태자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 고뇌하던 우울한 구름은 완전히 걷히고 온화하고 다정하며 밝은 빛으로 빛났으며 출가에 대한 결의는 한층 더 굳어져갔다. 성으로 돌아온 태자는 마음이 유쾌하였다. 한편, 정반왕은 마부 찬다를 불러 밖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았다. 이에 마부 차익은 태자가 경험하고 말하였던 것을 소상히 말하였다. 이에 정반왕은 예전에 관상보는 이가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반드시 전륜성왕이 되리라>고 한말을 상기하고 태자로 하여금 온갖 방편을 베풀어서 집 떠남을 막아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정반왕은 곧 담장과 벽을 높이고 또한 일곱겹의 참호를 짓고 성에는 철문을 두되 문의 위와 아래에는 방울을 두루 달아 두어서 만약 문을 열 때에는 방울소리가 40리 밖까지 들리게 해놓고, 용맹스런 신하들에게 조칙하여 모든 대궐안의 곳곳을 방위하게 하고 계속하여 네 가지 병사인 상병, 마병, 거병, 보병을 파견하여 성의 네 문에 배치하고 순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반왕은 동쪽성문을 지키었고, 세 명의 동생들도 각기 곡반왕은 남쪽성문을, 백반왕은 서쪽성문을, 감로반왕은 북쪽성문을 지켰으며, 그에 따른 신하들도 밤내 마음을 오로지 하여 성문을 지켰다. - <현대불교 미디어센터 ⓒ 2005> 출처-부다피아
카필라 성 입구의 유체 꽃
네팔 룸비니 "부처님 탄생하신 왕궁"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7곱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가 나 아님이 없구나 하고 게송을 읊으셨다. 불교4대 성지 중 하나인 룸비니로 향하면서‘해동 나그네’의 발길은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국경선이라는 선 하나로 카필라성은 인도 땅으로, 룸비니는 네팔 땅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싯다르타는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카필라는 큰 왕국이 아니었고, 그의 혈통도 인도 - 아리안계의 백인종이 아니라 몽고 로이드 계통이라는 것, 그리고 한역으로 정반왕(淨飯王)이라고 번역된 것으로 보아 슛도나다 왕족들은 밥 ‘반(飯)’자를 이름의 돌림자로 가진 벼농사를 위주로 한 농경민족이었다는 설이 요즈음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니까 카필라국은 강대한 코살라국의 영향을 받는 일개 소국이었다는 것이다. 태자는 이런 가계와, 역시 같은 샤카족의 마야 부인을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쉰 살이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던 왕과 왕비에게 태기가 있으면서 상서로운 조짐이 보이고 놀라운 예언과 함께 범상치 않은 관상을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온 나라는 그 아이가 당연히 왕국의 앞날을 빛낼 위대한 왕이 되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막상 본인은 자라면서 인생사 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하는‘햄릿 형’의 인간으로 변해갔다. 이에 부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맞아들여 결혼을 시키고 주위를 온통 환락적인 분위기로 만들었지만, 고타마는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 결국은 예언대로 출가를 강행하여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전파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런‘위대한 포기’의 땅인 카필라성은 그가 출가 전 태자로서 29년을 보낸 곳이지만 샤카족 특유의 동족혼(同族婚) 관습으로 인해 코살라국 왕자의 원한을 사는 일이 생겨 붓다의 생존 시에 초토화되고 샤카족도 모두 몰살되었는데, 이 때 붓다는 3번이나 이 전쟁을 만류했지만 인간의 증오심이 자비심을 능가하는 것인지 결국 샤카족과 카필라성은 멸족에 가까운 재앙을 받아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려 그 터 자체가 의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98년 고고학 발굴 시에 명문이 새겨진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어 카필라바스투 유적지로 확정되어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유적지는 사원 터인 피푸와라와 궁전 터인 간와리아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붉은 벽돌 잔해만 남아 있는 폐허에 불과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후인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이런 폐허화는 순례 승에 의해서도 목격되었는데 현장은,“카필라바스투국은 주위가 4천여 리이다. 빈 성이 많고 이미 황폐함이 심하다. 왕성도 퇴락하여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기초는 아직도 높고 견고하다. 황폐함이 오래되어 사람이 사는 곳도 드문드문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 룸비니 동산이여! 어느 날 마야 부인은 비몽사몽간에 천신들에게 이끌려 설산을 넘어 티벳 고원에 있는 아뇩달지, 즉 마나사로바 호수로 가서 목욕을 함으로써 신성을 얻어 붓다를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흰 코끼리를 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코끼리의 상징은 인도에서는 성인이 태어날 때의 일반적인 길조였으니, 이른바 태몽이었다. 산달이 되어 부인은 당시의 관습대로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다가 룸비니 동산에 도착했을 때 산기를 느껴 나뭇가지를 잡고 싯다르타를 출산했다. 바이샤카달의 8일(혹은 15일?)일이었다. 경전들은 당시의 광경을 신비롭게 표현하고 있는데, 태자는 모친의 오른 쪽 옆구리로 태어났으며 땅에 발을 딛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외쳤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마는, 경전 특유의 상징과 비유의 한 예로 해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협탄생(右挾誕生)은 당시 인도사회의 계급제도하의 크샤트리아 계급을 상징한 것이고 칠보 걸음과 외침은 평생을 계급 타파와 인간 평등을 부르짖은 한 개혁가의 첫걸음이 시작했다는 일종의‘인간선언’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고타마 사문이 80세를 일기로 입적하기 직전에 제자들이“어느 곳을 교단의 기념처로 삼아야 하느냐”고 묻자, 붓다는 태어난 곳을 비롯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 처음 법을 설한 곳, 열반할 곳 등의 네 곳을 꼽았다고 한다. 붓다도 역시 보통 사람처럼 태어남이 중요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룸비니는 위대한 탄생이 있었던 불교의 첫 번째 성지이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면서 망각의 강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룸비니의 폐허화는 법현·현장·혜초가 왔을 당시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로 이들에 의해 목격되고 있다. 우리의 혜초도 비록“숲이 거칠고 길에 도적이 많아”위험했다지만, 순례길에서 위대한 탄생지를 어찌 빼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여서 다음과 같이 중천축국 안에 네 개의 대탑을 꼽으며“셋째 탑은 가비야라국에 있으니, 이곳은 즉 부처가 본래 태어난 곳이다. 지금 무우수(無憂樹) 나무를 볼 수 있는데, 성은 다 허물어지고 없고, 탑은 있으나 승려는 없고 또 백성도 살지 않는다. 이 성이 세 탑 중에 가장 북쪽에 있는데 숲이 거칠게 우거져 길에 도적이 많아 가서 예배하려는 이들이 이르기가 매우 어렵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현장도 그때까지 남아 있는 유적인 돌기둥과 연못에 대하여“룸비니 숲에 이른다. 그 곳에 연못이 있다. 물은 맑아 거울과 같은데 갖가지 꽃이 다투어 피고 있다. 그 북쪽으로 스무 걸음 남짓 되는 곳에 무우화수(無憂花樹)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바로 세존이 태어난 곳이다. 동쪽으로 서 있는 수투파는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인데, 두 마리의 용이 태자를 목욕시킨 곳이다. 또 마상(馬像)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역시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 나중에 벼락에 맞아 가운데쯤에서 부러져 땅으로 넘어졌다”라고 세밀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405년 처음으로 찾아온 법현도“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연못이 있다”라고 하였다. 넓은 룸비니 동산은 역시 폐허의 냄새만 가득했다. 수많은 티베트식 오색 깃발이 펄럭이는 하늘 아래 중앙에 마야당이 서 있었다. 이 안에는 BC 2세기에 조성되었다는 유명한 모자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교도의 손에 파손되어 겨우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이 조각상은 그 옆에 새로 만들어진 복원상과 비교하면서 보면 마야부인이 무우수 가지를 잡고 서 있는 모습과 아기 싯다르타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다. 혼잡한 마야당을 나오면 멀리 대탑의 잔해와 늙은 보리수도 이천여 년의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고 있었고, 아쇼카 석주는 비록 부러진 상태이지만 철책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데 글자는 아직도 선명하여 그나마 나그네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곳에 쓰였으되,“나, 아쇼카는 즉위 20년 만에 몸소 이곳에 와서 예배하노라. 이곳은 붓다가 태어나신 곳이므로 돌을 다듬어 마상과 기둥을 세우게 하였노라.(중략)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므로 세금을 8/1 만을 부과할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해동의 나그네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한 것은 넓은 연못 가였다. 정말 순례승들의 기록과 똑같이 맑은 물이 여전히 고여 있었는데 그 수면 위로 티벳 불교도들이 걸어놓은 수많은 오색 깃발의 그림자가 거꾸로 투영되며 잔바람결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 밖과 안이, 나아가 진실과 허상이,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귀결되는 상태와 같았다. 한참을 수영삼매(水影三昧)에 들어 있다 깨어나서, 그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랑그람 - 빌려온 사진 -
이곳은 강 속에 탑이 세워있었다! 합니다. 아쇼카 왕이 진산사라 탑 전체를 헐 때도 헐지 못했다 합니다. 이곳의 사리탑은 용왕이 공양을 올리며 더 잘 지킬 수 있다하여 놔둔 곳이라 합니다. (이 성지는 순례객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라 하며 우리도 못 가본 곳이랍니다.)
붓다가 성도 후 12년 만에 카필라 성을 첫 방문 할 때 머물렀다는 쿠단 유적에는 사원은 허물어지고 유적지 꼭대기에는 힌두교의 링가가 세워져 있다.
쿠단(붓다가 성도 후 아버지 정반왕을 처음 재회했던 곳)
붓다가 탄생을 하여 29년 동안 살았던 카필라 성 방문은 네팔 불교 성지순례 중 매우 중요한 순례코스다. 흔히 바쁘다는 핑계로 룸비니 동산만 들리고 카필라성은 들리지 않는데, 이는 아주 잘못 된 순례이다. 적어도 부처님이 출생하여 출가하기까지 29년간 생활을 했던 카필라성과 과거7불 탄생지를 방문해야만 붓다의 채취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카필라 성으로 가는 길은 작은 농로로 된 길이었다. 테라이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에는 유체 꽃들이 노랗게 피어 있어 어느 봄날의 제주도나 창녕 남지의 유체 밭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2500년 전 해산을 앞 둔 마야부인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룸비니로 향했던 길이다. 쿠단은 타울리하와 서남쪽 약 1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쿠단은 붓다가 6년 고행 끝에 보드가야에서 성도 후 처음으로 아버지 정반왕을 만나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카필라투스를 찾아와서 머문 곳이다. 정반대왕은 아들 붓다가 카필라 성으로 들어오기를 권했지만 붓다는 수행자의 전통에 따라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머문다. 할 수 없이 정반대왕이 붓다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부자간의 만남이 얼마나 마음이 아렸을까? 출가 후 처음으로 만나는 부자간의 상봉이었을 텐데 말이다. 싯다르타는 카필라 성을 나온 후 6년이 지난 다음 성도를 하고, 그 후 다시 6년이 지나 고향 땅을 밟았다고 하니 실로 12년만의 만남이다. 붓다가 성도 후 방문한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붓다의 행적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정반왕은 성도를 한 아들이 금의환향하는 것에 매우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정반대였다. 붓다는 쿠단에 도착한 다음날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카필라성의 이집 저집을 돌면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싯다르타 태자가 걸식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붓다의 탁발 모습을 바라보았다. 붓다의 아내 야소다라도 그 모습을 보고 정반왕에게 말했다. 왕은 발우를 들고 걸식하는 아들을 보고 흥분하여 붓다에게 달려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왜 우리 가문을 부끄럽게 하시요." "왕이시여, 이것은 우리의 오랜 관습입니다." "세존이시여! 우리의 가계는 마하삼마따(Mahasammata)의 크샤트리아(kshatriya) 가계로 단 한 번도 걸식을 행한 적이 없소." "왕이시여! 그 왕계는 당신의 가계이지만, 나의 가계는 디빵가라(Dipamkara, 연등불)에서 전해 온 붓다의 가계입니다. 지금껏 수천의 붓다들은 걸식에 의해 삶을 유지해 왔소." 왕과 붓다 사이의 이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대화다. 붓다는 왕은 아들이 크샤트리아 왕계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붓다는 과거칠불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붓다의 아내 야소다라와의 재회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라훌라의 어머니 야소다라와 붓다와의 재회와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킨 사건이다. 붓다는 정반왕의 초대에 응하여 카필라 왕궁에서 공양을 하게 되었다. 붓다가 공양을 마치자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모든 여인들이 붓다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리에 참석을 했다. 그러나 라훌라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다. 만일 그녀에게 도덕적으로 어떠한 결함이 없다면 붓다께서 그녀에게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야소다라가 붓다께 인사도록 허락을 하고, 두 수제자와 함께 그녀에게로 갔다. 야소다라는 붓다의 발에 엎드려 손으로 발을 붙잡고 자신이 머리를 그곳에 댔다. 야소다라는 남편의 발에 머리를 댄체 눈물을 삼켰을까? 그러나 경전에는 그런 설명은 없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아내와 남편 사이는 사라지고, 출가 스승과 제자 사이만 남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반왕은 붓다가 출가를 한 후 야소다라는 스스로 모든 사치를 포기하고, 붓다가 가사를 걸치고 하루 한 끼만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똑 같은 방식으로 지냈다고 붓다께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붓다는 짠다긴나라 자따까(Candakinara Jataka)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과거 그녀 역시 충절이 대단했다는 내용이다.
라훌라의 출가
붓다가 이곳에 머물며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킨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유산을 달라고 한 라훌라를 붓다는 제자로 출가를 시키고 말았다. 정반왕의 아들 난다를 이미 출가시키고 다시 손자 라훌라 마져 출가사문이 되어버리자 정반왕은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대가 끊기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출가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율장(律藏)』「대품(大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라훌라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붓다께서 카빌라 성을 방문한지 칠일 째 되는 날이었다. 붓다가 왕궁에서 공양을 마치고 붓다께서 떠나려고 할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어린 라훌라에게 말했다.“라훌라야, 저 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가서 너의 유산을 달라고 해라.”라훌라는 세존께 다가가서 그 앞에 섰다.“사문이시여, 당신의 곁에 있으니 즐겁습니다.”그러자 세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라훌라는 세존의 뒤를 따라 가면서“사문이시여, 저의 유산을 주십시오. 사문이시여, 저의 유산을 주십시오.”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존자에게 말했다.“사리뿟다여, 그대가 라훌라를 출가(pabbajjā)시켜라.”“세존이시여, 라훌라는 어떻게 출가시켜야 합니까?”그러자 세존께서는 법을 설해 주고자 할 때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다. 그리고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비구들이여, 나는 사마네라(Sāmanera, 沙彌)의 출가는 삼귀의에 의해 허락한다. 하지만 출가는 이러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황색 가사를 몸에 걸치게 한다. 그리고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비구들의 발에 예배하게 한다. 무릎을 꿇게 하고, 두 손을 올려 합장 한 채, 삼귀의를 낭송하게 한다. 곧‘저는 붓다(Buddha, 佛)께 귀의합니다. 저는 담마(Dhamma, 法)에 귀의합니다. 저는 상가(Sangha, 僧)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상가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상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게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사미의 출가는 이와 같이 삼귀의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느니라.”그리하여 사리뿟따 장로는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그러자 숫도다나 왕이 세존을 찾아왔다. 그는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한쪽에 앉은 뒤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고따마시여, 여래는 은혜를 초월했습니다.”“세존이시여, 저의 부탁은 적절하며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고따마시여,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출가하실 때 저는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난다(Nanda) 출가할 때도 그러했는데, 이제 라훌라까지 출가하니 저는 너무나 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저의 피부를 도려냅니다. 피부를 도려낸 뒤 살갗을 도려내고, 살점을 도려내고, 힘줄을 끊고, 뼈를 자르고, 골수를 뽑아내는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원하건대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은 출가시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세존께서는 숫도다나 왕에게 법문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지니게 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하셨다. 세존의 법을 받아 지니고 기뻐한 숫도다나 왕은 세존께 공손히 절한 뒤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리고 떠났다. 이러한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모이게 한 뒤 법문을 베푸신 뒤 말씀하셨다.“비구들이여,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을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악작을 범하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숫도다나 왕의 마음을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는 붓다가 돌아온 후 아들 난다를 빼앗기고, 손자 라훌라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그 손자를 잃은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왕계(王系)가 단절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직접 붓다를 찾아가서 앞으로는 부모의 허락 없이는 자식을 출가시키지 못하도록 금해 주시기를 간정했던 것이다. 붓다는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붓다가 떠나 간 뒤 정반왕은 쿠단에서 붓다를 만난 기념으로 탑과 작은 성을 세웠다. 망고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쿠단은 평화로웠다. 1962년 데발 미트라(Debal Mitra)가 이곳을 발굴, 약 8세기경에 벽돌로 지은 사원 터를 발견해냈다. 유적의 왼쪽에는 싯다르타의 아들인 라훌라 존자가 공부를 했다는 터가 남아있다. 쿠단탑의 꼭대기에는 망고나무가 자라나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이 탑은 라훌라가 경행을 하면서 아버지 싯다르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곳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은 붓다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왕비가 붓다에게 금란 가사를 받친 곳이기도 하다. 사원터로 올라가는 길에는 염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사원 유적의 꼭대기에는 허물어진 벽돌탑만 남아있고, 힌두교의 링가가 세워져 있다. 성터에는 망고나무가 둘러싸여 있고 망고열매가 파랗게 열려있다. 아, 붓다는 없고 허물어진 성터와 고목만 남아 있데. 세월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진다.
쿠단!
붓다가 성도 후 고향 카필라 성을 처음으로 찾아 머문 곳
출가 후 12년 만에 정반왕과 재회를 했던 곳
아들 라훌라가 경행을 하며 아버지 붓다를 기다렸던 곳
유모 마하파자파티가 붓다에게 금란가사를 받친 곳
붓다는 보이지 않고
망고나무만이 성터를 지키고
허물어진 성터와 고목만 남아있네
아, 허물어진 성터에 선
해동의 나그네는
마음이 저리고
아프다
(카필라투스 쿠단에서)
룸비니유적
룸비니는 인간 석가의 출생지이며 성인 석가가 돌아가신 곳에서 200Km가 되지않는 가까운 거리로 불교도 들에게는 4대 성지여서 많은 불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경배하고 묵상한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은 간지스강의 상류의 하나인 룸강(Lum江)변의 여러 지류가 흐르고 있는 낮은 구릉성 평야 지대이다. 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거의 매일 안개가 일몰 후 다음날 오전까지 가득하고 거리에는 소, 염소, 마차, 우차, 수례 등이 뒤 엉켜있어 자동차로 다니는 데는 여간 불편 한 게 아니지만 인도 북부와 네팔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초록빛이 돋아있어 생기 있는 도시로 보인다. 룸비니 시내와 석가의 출생지는 약 20여Km정도 짧은 거리인데도 룸강의 지류를 따라 난 길로, 자동차로 20여분 걸린다. 룸비니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왕자 싵닷타의 탄생과 관련된 유적과 이곳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룸비니 성지에 불교권 여러 국가들이 자기나라의 전통방식의 사찰을 건립하여 이 성지를 순례하는 자국민의 편의도 제공하고 불타의 탄생지에 수행처를 운영하고 있는 국제 사원구역으로 나뉘어진다. 룸비니 부근에는 석가여래가 왕자시절 살았다고 하는‘카팔라바스투’구류손불이 살았다 전해지는‘고티하와’ 사카족이 망할 때 그 국왕이 죽었다고 하는‘사그리하와’석가여래가 정반왕을 만나러 왔을 때 묵었다는‘쿠단’그리고 석가의 어머니 마야 부인의 친정인‘데바다하’가 있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룸비니만을 거친다. 룸비니 유적은‘박물관’‘아쇼카왕의 석주’‘고대사원터’‘석가여래 탄생상’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박물관은 입장시간의 제한으로 우리 일행은 관람하지 못하였는데 유물의 대부분이 복제품이거나 사진 등으로 대부분의 전시관을 메우고 있어 크게 볼 만한 곳은 아니지만 룸비니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의 전파 등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전시 하였다고 한다. 설계는 일본인이, 시공은 한국 건설업체에서 하였다고 하는데 건물은 고대인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룸비니 유적지에 도착하면 입구 양편에 기념품을 팔고 있는 50여m의 거리를 지나면 힌색의 마야데비(Maya Devi. 힌두교적 의미로 자비의 어머니)사원이 눈에 들어온다. 사원은 서쪽 무수나무, 연못, 고대사원지, 아쇼카 석주를 거쳐 사원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편의상 사원부터 말 하고자 한다. 마야 데비사원은 고대의 유적지 위 2m 정도의 높이위에 정방형의 건물로 정상에는 네팔식 불탑 상륜부를 첨가하여 근대에 중건 하였는데 중앙에는 지하 2m 깊이에 고대 사원을 조성할 때 진흙에 성인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도 현재 이곳의 많은 맨발이나 조리를 신고 다니는 것처럼 벽돌을 쌓을 때 만발로 작업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발자국에서 3m쯤 위에 싯달타의 생모인 마야 부인이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옆에 있는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의 돌 조각이 있는데 이는 부처의 출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출산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이 형상을 어루만지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석가의 탄생상(誕生像)은 우리나라의 경우 탄생불이라 하여 한손을 들어 하늘을 다른 한손은 땅을 가리키는 형식으로 거의 공통되고 있는데 네팔의 경우 이 탄생상 이외에 마야부인이 나무 가지를 잡고 그 옆에서 여인이 아기를 받는 탄생 장면이나 우리나라의 탄생불을 중앙에 모시고 왼편에 두 여인과 나무를 두는 형식들 세 가지가 있다. 사원 서쪽에는 부처가 처음으로 정화의식(목욕)을 하였다는 연못이 있는데, 이 유적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작은 방을 가진 수도원 형식의 건물들이 넓게 퍼져있는데 인도의 나란다나 쿠시나가르의 경우 주변의 작은 방이 배치되고 중앙에 넓은 홀을 두면서 우물이 배치되고 있는데 비하여 이곳 룸비니의 경우 방들만 배치되어 있고 우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원래 이 못은 용수로 사용된 것이 후대에 내려 와 석가의 관정설화가 첨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룸비니 박물관 유물들을 기초로 추정하여보면 이 지역에 남아있던 많은 수의 수도원과 스투파는 기원후 7세기를 넘지 못하고 힌두교의 성립과 발전으로 황폐화 된 후 10세기를 전후하여 다시 중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BC 250년 인도 황제 아쇼카(Ashoka)가 붓다의 출생을 기념하여 커다란 돌기둥(석주)에 쓴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룸비니의 중요유적인의 하나이다.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여 84,000개의 석주를 세웠다고 전하지만 이 숫자는 인도의 무드라(수인)의 종류와 같으므로 그의 불교적 정열을 말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조사된 석주들이 모두 한 종류가 아니고 여러 종류인 것을 학자들은 인도가 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우리의 장승처럼 각 부족을 대표하는 석주를 세우는 전통으로 짐승을 조각하였는데 아쇼카 왕대에 와서 명문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룸비니는 순례성지로서의 발전과 복원을 위해 민간단체가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계획은 1978년 저명한 일본 건축가 겐조 탄지(Kenzo Tange)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3평방 마일의 땅을 정원, 연못, 건축물, 숲 등의 신성한 장소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또 룸비니 주변지역에서 가장 고고학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는 붓다가 수행의 시기이전에 살았던 카필버스투(Kapilvastu)가 있는데 고대 왕궁을 연상시키는 이곳에 흩어져 있는 유물은 다양하다. 최근에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BC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열세개의 고대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룸비니는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뿐 아니라 서부네팔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문화적 요소까지 지니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는 먼 지역에서부터 곡식, 향신료, 도자기, 보석류, 옷감 등을 사려는 사람들로 시장은 북새통을 이루며, 망고 향 가득한 나무 그늘 아래 둘러앉아 있는 각양각색의 상인들, 황소가 끄는 나무마차에 가득한 건초더미며, 사람들이 연료로 쓸 소똥을 말리는 모습과 또, 한쪽에서는 간이찻집에서 달콤한 밀크티를 파는 등 이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도 있다.
보리수가 드리워진 마야데비 연못
마야부인이 부다를 출산한 뒤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연못
5세기경 이곳을 찾은 법현은 부인이 목욕한 연못은 지금도 사람들이 항상 그물을 퍼 마신다라고 했고 현장 역시 물이 맑아 거울과 같은 게 갖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바라보는 연못의 모습은 과거의 기록이 무색할 만큼 더러워 민망하기까지 하다.
무우수(無憂樹)
학명 : Saraca indica
과명 : 콩과(Leguminosae)
영명 : Sorrowless Tree of India, Ashok, Ashoka Tree, Asoca, Asoka-Tree, Gandhapushpa, Jonesia Asoka, Asoka(인디), Asogam(타밀)
이명 : 사라목
무우수는 불교유적 각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중 하나로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원산으로 힌두교에서도 성스러운 나무로 여기며 사랑의 신 카마가 가진 5개의 화살 중 하나는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그 이름 같이 이 나무는 사람들의 슬픔을 없앤다고 믿어지고 있다. 무우수 꽃은 인도의 짧은 겨울이 끝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인도인 본래의 정기가 되살아나는 때 피어난다. 잎은 등나무 잎같이 생기고 깃꼴겹잎이다. 작은 잎은 타원형이고 6~12개이며 두껍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4~6월에 피고 황색에서 오렌지색을 거쳐 적색으로 변하며 커다란 원추꽃차례(圓錐花序)에 달리고 향긱 있고 암술과 수술이 꽃잎보다 길다 꼬투리는 길이 25cm이며 4~8개의 긴 타원형 종자가 들어 있으며 가로수, 방풍수 또는 관상수로 심고 있다.
경전 속의 무우수
무우수란 아소카라는 말에서 유래되며 산스크리트의 아(無)와 소카(憂)를 번역한 것이다. 경전에는 "꽃 색깔이 곱고 향기로우며 줄기와 잎이 넓게 뻗어 매우 무성한 나무라고 쓰여 있다. 아륜가수(阿輪伽樹), 아숙가(阿叔伽)로 음사되거나 무우수(無憂樹), 무우화(無憂花) 등으로 번역되는데, 말 그대로 "근심이나 슬픔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나무 밑에서 부처님이 탄생했다는 설화가 있어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되고 있는 나무로, 부처님 탄생기인 우협탄생설화(右脇誕生說話)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과거 오백생(五百生)의 수행(修行)을 성취(成就)하시고 호명보살(護明菩薩)의 이름을 받아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 계시다가 자기의 일대 사명을 수행할 시기가 온 것을 느끼시고 범천(梵天)왕과 제석천(帝釋天)왕 등과 의논하신 뒤 가비라성 석가족(釋迦族)의 주인인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탄생할 것을 결심하였다. 홀연히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와 후원에서 고이 잠든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태내(胎內)에 탁생(托生)하자 이와 같은 꿈을 꾸고 난 부인은 온몸이 저절로 영천(靈泉)에 씻은 것 같이 마음이 한없이 유쾌하였다. 태내오위(胎內五位)의 생육(生育)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여러 가지 서상(瑞祥)이 끊임없이 일어나 가비라국의 모든 재액(災厄)은 사라져 갔다. 혹은 하늘음악이 서로 화명하고 혹은 동개번채(瞳蓋幡綵)가 궁중에 나부끼고 농민은 풍년을 얻고 우인(愚人)은 기교(技巧)를 얻으며 병든 백성은 명의(名醫)와 영약(靈藥)을 얻어 스스로 낫게 되었다. 산달이 가까워짐에 따라 마야부인은 친정아버지 선각 장자의 청에 따라 대왕의 허락을 받고 친정인 구이성이 가까운 룸비니동산의 이궁(離宮)에 안주하게 되었다. 4월 8일 마야부인은 잠깐 산책길에 나왔다가 산기(産氣) 있음을 느끼고 북으로 이십 보를 걸어 아름다운 꽃송이가 달린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았다. 순간 태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트고 평안히 탄생하였다." 그런데, 무우수 나무 가지를 잡는 순간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탄생설화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즉, 고대 인도는 네 계급으로 이뤄진 계급사회여서, 바라문(婆羅門-승려, 학자, 제사장 계층), 찰제리(刹帝利-왕족, 관리), 폐사(吠舍-농상인), 수다라(首陀羅-노예) 등 네 계층이 있었고 이들은 브라만신(바라문신)의 네 가지 계급으로, 바라문은 브라만신의 머리(혹은 입)로 태어나고 찰제리는 옆구리로 태어났으며 폐사는 배로 수다라는 발뒤꿈치(혹 하체)로 태어난다고 여겨졌다. 즉 부처님은 왕족인 찰제리이니 브라만신의 옆구리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1) 불본행집경 제6, 7, 8권
꽃과 물이 서로 비추고 아름다운 새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었다. 벽에서는 무엇인가 물속으로부터 막 솟아나와 맑은 향기를 온 누리에 가득 채우는데 부인은 홀연히 산기(産氣) 있음을 느끼고 밖으로 나와 북으로 이십 보를 걸어 아름다운 꽃송이가 달린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았다. 순간 태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트고 평안히 탄생하였다
아쇼카 석주
기원전 249년 아쇼카 대왕이 부다의 유적지를 돌며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웠다.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연 인물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재위말년 성지를 순례하며 곳곳에 아쇼카 석주라고 불리 우는 돌기둥을 세웠다.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휴러가 발견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석주의 발견으로 인해 부다의 역사적 실존이 증명되었다. 돌기둥에는 아쇼카 왕이 친히 이곳을 참배하였고 위대한 분의 탄생지임을 기려 이지역의 조세를 면하고 생산물의 1/8만 징수한다는 구절이 적힌 다섯줄의 명문이 새겨져있다
네팔 부처님 탄생지 마야 사당(마야데비 사원 내부 모습)
카메라를 가지고 갈 수 없다기에 맨몸으로 들어 갔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촬영을 하였는지 -빌려온 사진 -
네팔 남부 테라이 지방의 룸비니에 있는 사원.
원래의 사원은 11세기에 세워졌고 현재의 사원은 1943년 재건된 것이다. 마야 부인상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상은 마야 부인이 감잎나무가지를 손으로 잡고 연화대 위에 똑바로 서서 갓 태어난 어린 석가모니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다. 2명의 인물이 천상에서 내려진 물과 연꽃을 끼얹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기원전 249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 이곳에 와 석가모니를 찬미하고 세운 석주도 있다. 7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현장 스님은 석주가 번개로 중간부터 꺾여져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석가의 어머니 마야의 사당 서측에 이 석주가 남아있으며, 사당 남측에는 그녀가 목욕했다고 전해지는 방형의 연못이 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오늘을 회향하는 도반님들
룸비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는 지금의 네팔에 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부처님을 낳으러 당시 풍습대로 친정으로 가다가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을 낳으신 곳이다. 현재 네팔 남부에 위치하며 석가족의 도읍이였던 카필라바스투(카빌라성)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불멸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으며 그 가운데 인도의 아소카왕은 이곳에 석가를 찬미하는 기념 석주를 세웠다. 1896년 포이러 박사가 아소카 석주(Asoka Pillar)를 발견할 때까지 불교 사원은 파괴되어 폐허로 있었다. '이곳에서 석가족의 성자(聖者) 불타가 탄생한 것에 연유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하고, 또 생산량의 1/8만을 납입한다.'라고 새겨져 있어서 룸비니임을 확인하였다. 부처님 탄생하신 곳으로 2003년에 재불사 된 이 법당은 아기부처님의 첫발자국을 모시고 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룸비니는 15세기까지 순례 성지였다. 룸비니의 초기 역사는 중국의 유명한 순례자들인 법현(法顯, 409년)과 현장(玄奘, 637년)의 글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방문한 사원과 불탑, 다른 건물들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14세기 초엔 리푸 말라(Ripu Malla) 왕도 자기의 순례기를 아소카 석주에 명문으로 추가하였지만, 14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파괴하고 매몰시켜 15세기 이후엔 룸비니 순례가 중단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 지역 사람들만 3세기~4세기의 마야데비 상을 힌두교의 어머니 신으로 숭배하였다.
대성석가사로 가는 길목에 부처님의 탄생불을 모신 모습을 촬영하였는데 밤이라 잘 나오지 않았네요.
네팔 룸비니 대성석가사(대성 석가사 법신 주지 스님)
부처님이 태어나신 땅 네팔 룸비니의 대성석가사는 일본, 중국, 독일,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사찰들이 모여 있는 국제사찰구역에서 가장 넓은 규모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당당한 위용의 가람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1995년에 공사를 시작한 이래 제1 요사채인 불탄무우수당이 1999년에 제2 요사채인 대성마야부인당이 완공된 후 대웅전은 아직도 공사가 진행되어 내년에나 완공될 예정이다. 도량에 들어서서 하늘을 떠받들 듯 당당하게 서있는 대웅전을 마주하면 그 씩씩한 기상과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차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땅, 그래 적어도 이 정도의 위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평소‘동양 최대,’‘세계 최대’ 이런 수식어에 고개 돌리던 중생도 이곳에서만은 비로소 어른께 합당한 예의를 치룬 듯 마음이 풍족하고,‘같은 민족이니까’같은 말에도 거부감을 느끼던 마음도 이 힘든 일을 치루면서 이렇듯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데 벅찬 자긍심을 느낀다. 우리나라의 우리 나라사람이 세우고 있는, 룸비니의 아름다운 한국절, 대성석가사.
대성석가사는 대선사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스님(1864-1940)의 유훈에서 시작되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뤘던 용성스님은 출옥 후 불교 정화에 주력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를 촉진했다. 용성스님의 이런 정신은 열반 직전 맏상좌인 동헌스님에게 남기신 유훈에 잘 나타나 있다 -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 경전 100만권 번역과 배포, 100만 명에게 계를 줄 것, 부처님 주요 성지에 한국사찰을 건립할 것 등 10가지. 유훈을 이루기 위한 사업은 동헌스님의 제자 불심 도문스님에게 이어졌다. 불심 도문스님은 백제 불교전래지인 서울 서초구 우면산의 대성사, 신라 불교 전래지인 경북 구미 도개면에 아도모례원 등의 사찰을 건립했다. 그러다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에 한국 사찰을 건립할 계기가 주어지자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네팔 룸비니 국제사찰구역은 아시아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이 된 버마 출신 우 탄트의 호소로 시작되었다. 불자였던 우 탄트 사무총장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가 폐허로 변한 것에 충격을 받고 세계 불교신도들에게 룸비니 동산을 복원할 것을 호소한다. 이에 여러 불교국가들이 동참할 것을 서약하고 룸비니 동산 성역화를 위한 사원 건립이 1993년부터 시작되었다. 불심 도문스님은 한국을 대표해서 제일 큰 땅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엄청난 불사기금을 마련할 수 없어 공사해 줄 회사를 찾을 수 없었다. 자칫 계약이 취소되어 룸비니의 한국사찰 건립의 꿈이 무산될지도 모르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도문스님의 제자 법신스님이 이 큰 일을 떠맡고 나섰다. 이렇게 네팔 룸비니 대성석가사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1995년 말, 법신스님은 룸비니로 왔다. 그리고 이렇다 할 기술도 없는 네팔 노동자들을 데리고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법신 스님 혼자 손수 구상 설계하여 현지인 기술자와 인부들들 지휘 감독했다. 스님도 노동자가 되었다. 돌을 옮기고 풀을 뽑고 시멘트를 부었다. 지금은 번듯한 곳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그곳은 황무지였다. 잡초가 우거지고 독사들도 우글거렸다. 밀림이라 낮에도 어두컴컴해서 현지인들조차 들어가기를 꺼리는 곳이었다. 나무가 베어지고 잡초를 뽑고 돌을 치우고, 그렇게 해서 조금 조금씩 절터가 닦였다. 그리고 요사채와 대웅전이 터를 잡았다. 한국 사찰의 전통대로 목재로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자꾸 화재가 나서 불타버리고 말았다. 잿더미만 남은 것이 몇 번, 알고 보니 네팔사람들은 불을 지르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목재만 고집한다면 본의 아니게 네팔 사람들의 업만 더 쌓게 하고 절도 지을 수 없을 것이었다. 결국 한국식의 절을 짓기보다는 현지에 맞는 절을 짓기로 했다. 철제로 골재를 만들고 도량 한쪽에서 시멘트를 만들어 양동이로 머리에 이어 날랐다. 언제 끝날 것인지 가늠이 안 되는 공사였다. 그저 쉼 없이 쌓고 올렸다. 국가 차원에서 지원을 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십시일반으로 모여지는 불사금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불사가 중단된 적이 없고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다. 2001년에는 법신스님이 일시 귀국하는 길에 건축을 맡고 있는 네팔인 엔지니어, 목수, 사무장 등을 동행해서 20여일 동안 서울 대각사,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등 한국의 고건축을 견학하고 고건축자에게 건축기술도 배우도록 했다. 이렇듯 큰 불사를 하면서도 대성석가사의 어느 한 곳에도 불사 동참을 호소하는 플래카드 하나 걸려있지 않다. 대성석가사의 수입은 석가탄신일 연등달기와 방문객들의 보시금이 전부이다. 모든 수입금을 12달로 나누어 매달 절에서 쓰고 남은 돈으로 공사를 한다. 돈이 부족할 때는 주변 정리, 나무심기, 내부 수리 등 부담 없는 일을 하고 그러다 여유가 되면 인부들을 더 고용해서 공사를 진행했다. 이러니 적자 공사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네팔인 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차관 등의 형태로 한 번에 원조금을 듬뿍 주는 일보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기술을 배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결핵과 문둥병 환자가 반이 넘는 열악하고 가난한 환경에 있던 현지인들은 지난 14년 동안 자신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고 공사 현장에서 손수 광주리에 돌을 담아 나르는 등 함께 막일을 하면서 절을 지어가는 법신스님을 성인으로 우러른다. 대성석가사는 세상 모든 여행자들에게 열려 있다. 인도 여행으로 지친 순례자나 배낭 여행자들은 이곳 대성석가사에 와서 심신을 쉰다. 숙식, 식사 등 모든 것이 무료로 제공되며 한 방에 4명 정도 기거한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와서 오랜만의 여유를 갖고 여행의 흔적이 묻어있는 옷들을 빨아 널고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으로 허약해진 몸을 추스린다. 국, 김치, 나물, 볶음, 쌈 외에도 칼국수, 수제비 등이 특식으로 제공되며 보리차나 결명자차도 원하는 대로 마실 수 있다. 외국인들이 밥과 김치를 먹는 모습도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니다. 또 커다란 통에 현미, 통밀, 보리, 콩 등을 갈아 만든 미수가루나 눌린 현미 튀김 등을 담아 놓아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가져가도록 하고 있다. 등반에 필요한 미수가루를 가지러 일부러 이곳에 들르는 사람도 있다. 이곳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만큼 보시함에 돈을 넣으면 된다. 돈을 받으러 지키는 사람도 없고 왜 그냥 가냐고 무언의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왔다가 자유롭게 머물고 그리고 자유롭게 떠난다. 이곳에서 모든 여행자들은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땅 룸비니에서 만큼은 우리 모두 부처로, 그 완전한 존재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사를 통해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 다 함께 성불인연 짓는 불교의 대중화를 염원했던 용성대종사의 뜻이기도 하리라. 불자라면 누구나, 아니 굳이 불자가 아니라도 마음에 큰 광명 하나 밝히며 살고 싶은 사람은 대성석가사에서의 하루 밤을 꿈꿀 일이다. 새벽 도량석을 꿈결처럼 들으며 잠자고 일어나 정성껏 준비된 아침 공양으로 배를 채운 뒤 공사현장을 기웃거리며 잔심부름도 하고 높고 푸르게 자란 보리수나무 밑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보통 건물로 치면 12층 높이가 된다는 대웅전 3층 테라스에 몸을 기대고 서서 넓은 평원을 물들이는 황혼을 마주할 일이다. 그러다 깡마른 체격의 법신스님을 만나면 합장인사 깍듯이 하고 세상사 힘든 중생들이 부처로 설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해줌을 감사할 일이다. 룸비니에 오가는 많은 나그네와 일꾼들의 잠자리이고 밥자리인 그곳에서 이 생이 다 하기 전 밥 한 끼라도 부처님께 해 올릴 수 있다면....
* 룸비니 국제사찰구역에서 부처님탄신일을 기해 연등을 다는 사찰은 대성석가사가 유일하다. 그래서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은 국내 신도들이 권선한 연등으로 환히 밝히고 국제사찰구역의 모든 스님들이 모여 합동 봉축행사를 거행한다.
인사말씀
대성석가사(大聖釋迦寺)를 찾아 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곳은 룸비니개발위원회(L.D.T) 소속 국제사원구역내에 있는 대한민국 사찰인 대성석가사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승려이신 불심 도문(佛心道文) 큰 스님께서 1995년 2월 27일 네팔정부와 99년 동안 부지사용 임차를 하셨습니다. 임대료는 현재 매년 840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현재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주지 법신스님은 불심 도문스님의 제자입니다. 공사는 한국에서 지원해 주신 지원금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한국의 전국 각지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한 등 한 등 십시일반으로 보시한 시주금에 의하여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사 착공일은 1995년 4월 8일이었으며 완공예정일은 공사가 모두 끝난 후 발표할 예정입니다. 국민의 성원에 따라 공사기간이 정해지겠습니다. 대웅전의 규모는 옛 신라의 서울인 경주 황룡사 대웅전의 규모와 거의 같습니다. (솔거의 소나무 벽화로 유명했던 황룡사 대웅전입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편안하게 쉬시고 불편한 사항이 있으시면 사무실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오시고 가실 때 일일이 인사드리지 못하더라도 서로 양해하시면서 값진 여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대성석가사 주지 법신(法信) 합장 -대성석가사 경내에 붙은 안내문 중에서 -
용성대종사 교화지침
1. 생활이 곧 부처님 법이요 부처님 법이 곧 생활인 불교의 생활화
2. 불사를 통하여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 다 함께 성불인연 짓는 불교의 대중화
3. 주력, 간경, 염불, 참선의 4대 수행으로 이성적 사유판단의 능력인 불교의 지성화
대성석가사
Nepal P.O. Box 37. (Korea Buddhist Mahabodhi Society Daesung Shakya Sa Temple) Siddhartha Nagar Rupandehi Lumbini Nepal
Tel : 977-71-580123 Fax: 977-71-580125
부처님의 생애
1. 부처님 당시 인도의 사상과 사회
1) 아리안족의 침략과 브라마니즘의 전개
- 베다 : 신을 찬양하는 성전(아리안족의 고유사상)
- 브라마니즘(바라문교) : 베다사상을 기본으로 범아일여를 추구하는 범신론적 우주관 브라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이고 우주의 본질이라고 믿음.
- 사성제 계급 확립(바라문-제사장, 크샤트리아-왕족, 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천민)
- 원주민의 윤회, 업 사상을 수용하여 그들의 통치 수단으로 삼음.
- 브라만 신을 찬양하는 의식을 집전하고 제사를 올릴 수 자격은 사회 최상위 계급인 바라문에게만 제한되어 있고 각 계급간의 차별이 심화.
2) 혁신사문의 등장
- 육사외도 : 바라문사상을 비판하는 새로운 사상(유물론, 회의론, 숙명론, 도덕부정론, 불멸론, 자이나교)
3) 불타시대 개막
- 정복전쟁이 심화되고 바라문 계급이 타락하면서 새로운 사상계가 등장
- 착취와 차별로 고통 받은 당대 인도 민중들의 희원 : 전륜성왕, 부처님
2. 부처님의 전생
- 본생담(자타카) -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책.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수한 과거세에서 온갖 선행과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하던 이야기를 실은 경.
3. 부처님의 생애
1) 고타마 싯타르타의 탄생
(1) 룸비니의 기쁜 소식
- 탄생 : 약 2,500여년 전에 인도 북쪽 지금의 네팔 남쪽의 카필라국 정반왕(숫도다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남
- 룸비니동산 : 부처님의 탄생지
- 태몽 :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옴(당시 크샤트리아 계급 반영)
- 탄생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니 삼계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마땅히 내가 이를 편안케 하리라
(*일곱 걸음- 육도윤회를 벗어남을 의미 , * 나-참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 인간의 존엄성)
- 고타마 싯타르타(부처님의 출가 전 이름) : '모든 것을 이룬다.' '모든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뜻. * 고타마: 최상의 소
- 마하프라자파티 : 7일 만에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에 의해 양육되었다. 후에 최초의 비구니가 됨.
- 아시타 선인(예언가) : "이 왕자(부처님)는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도를 닦으면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함.
(2) 남달랐던 어린 시절
- 농경제의 명상 : 부왕을 따라 농경제 참석,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음.
- 염부수 아래의 정관 : 농경제 때 처음 본 약육강식의 현상들에 대해 큰 나무아래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 것을 말함.
- 사문유관(四門遊觀) : 세상의 실상을 목격,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됨. 태자는 성장하면서 어느 날 네 성문으로 나가 여러 가지를 목격한다.
* 동문-노인, 남문-병자, 서문-죽은 사람, 북-수행자를 봄(출가 결심 동기)
* 사문(沙門 ) : 행복(니르바나)을 찾아서 집을 떠나 수행하고 있는 사람.
* 니르바나(열반): 불어서 ‘끄다’라는 뜻, 불이 꺼지듯 번뇌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말함. 늙음과 병듬, 죽음과 괴로움이 고요히 사라진 상태
2) 출가(2월 8일)와 고행
(1) 출가를 결심하다
- 결혼 : 17세에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
- 라훌라 : 라훌라<장애라는 의미>가 태어남. 최초의 사미
- 악마의 유혹 : 곧 전륜성왕이 될 수 있음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유혹함.
- 유성출가 : 29세 때 성을 넘어 출가함(2월 8일)
(2) 스승을 찾아서
- 수행자들과 만남 : 고행주의자인 박가바에게 고행을 배움.
수정주의자 알라라 칼라마에게 무소유처정을 배움. 수정주의자 웃다카 라마풋타에게 비상비비상처를 배워 부처님도 높은 선정에 단계에 이름. 교단에 남아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자는 요청을 거절함.
- 6년간의 고행 : '가야'의 네란자라강 근처 고행림에서 다섯비구와 6년간 고행. 당시의 수행법인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이 향상된다고 믿음, 그러나 고행이 진정한 열반단계로 나아가거나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싯달타는 포기.
3) 성도(부다가야 / 12월 8일)와 초전법륜
(1) 보리수 아래로 가다
- 중도(中道) : 6년간 고행을 포기. 수행에 고행과 향락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중도를 깨달음.
- 유미죽 : 네자란강에서 목욕을 한 후 '수자타'여인의 유미죽 공양을 받음 -> 다섯 수행자 타락했다며 떠나감.
- 붓다가야 핍팔라(보리수)나무 아래서 지나는 목동이 준 길상초에 결가부좌를 하고 깊은 명상에 잠김.
(2) 악마를 물리치다
- 수하항마(樹下降魔) : '마왕 파순'(마음속 번뇌를 상징)의 온갖 회유와 협박을 다 물리쳐 항복받음.
- 부처님의 지난생의 선업을 대지가 증명해줌 : 부처님의 수인 ->항마촉지인
(3) 부처가 되다
-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을 풀며 깨달음을 얻음, 생명들은 존재에 대한 무지, 무명이 있기에 나고 죽기를 반복함.
- 연기법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과 결과 되어 서로 의존하여 생겨난다)
-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 : 35세에 붓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이룸.
-성도절 : 음력 12월 8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불교가 시작된 매우 뜻 깊은 날.
(4)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다
- 범천의 권청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어떻게 중생이 이 심오한 경지를 이해할까'하며 망설일 당시 범천이 부처님께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것을 권청하여 중생교화에 나섬.
- 녹야원(사르나트) : 붓다가야를 떠나 바리나시 인근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비구 에게 처음으로 사성제, 중도 등 법문을 한 곳
- 초전법륜 : 불(佛) 법(法). 승(僧) 삼보를 형성
- 석가모니 : 석가족 출신의 성자, 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은 후 부처님의 이름
4) 제자들의 귀의
(1) 부처님의 십대제자
마하가섭 - 두타(頭陀)제일,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통해 부처님의 법을 이음.
아난다 - 다문(多聞)제일, 부처님의 사촌동생, 1차 결집 때 경(經)을 암송.
사리불 - 지혜(智慧)제일,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 상수제자로 교단 통솔.
목건련 - 신통(神通)제일,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 효성 지극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제.
수보리 - 해공(解空)제일,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空)도리를 가장 잘 이행함.
부루나 - 설법(說法)제일, 설법과 전법의 달인.
아나율 - 천안(天眼)제일, 설법 중 졸다가 야단맞고 정진 중 눈이 멈. 대신 천안을 얻음.
우바리 - 지계(持戒)제일, 왕궁의 이발사(천민), 계율을 잘 지켜 1차 결집 때 율장 암송.
가전연 - 논의(論議)제일, 교의에 대한 논의가 가장 뛰어남.
라훌라 - 밀행(密行)제일, 부처님의 아들, 남모르는 수행을 많이 함. 최초의 사미니.
(2) 야사 : 최초의 일반인 출가(친구 55인 집단 출가)
* 수행자가 아닌 욕망세계에 헤매는 중생들을 위하여 어떻게 그들을 교화 시킬 것인가에 대한 첫 성과 -> 대기설법
- 최초의 재가신도 : 야사의 아버지(최초의 우바새). 야사의 어머니(최초의 우바이)
(3) 전도선언 :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함. 포교의 중요성 역설함.
(4) 가섭 삼형제 귀의 : 우루벨라로 가는 중에 마가다국에서 신봉하는 가섭 형제 교화 카사파 형제가 귀의하자 마가다국의 백성과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확인하고 싶어함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죽림정사 희사
- 최초의 사찰 : 죽림정사
(5) 사리불과 목건련 : 육사외도중 산자야종파(회의론자)인 이들은 제자 500명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 후에 이들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나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함.
(6) 비구니교단 : 부처님이 고향을 방문하실시 여인들이 출가요청, 부처님께서 여덟 가지 조건을 내세우신 후 출가 허락
- 최초의 비구니: 마하프라자파티
- 사부대중이 완성됨
* 사부대중
비 구 : 20세 이상으로서 구족계(250계)를 받은 남자스님
비구니 : 20세 이상으로서 구족계(348계)를 받은 여자스님
우바새 : 5계 혹은 보살계를 받은 남자신도 = 거사, 청신남
우바이 : 5계 혹은 보살계를 받은 여자신도 = 보살, 청신녀
(7) 승가의 정신
- 승가 :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공통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이들의 수행 공동체
- 계율 : 엄격한 계율을 적용하면서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 개성과 특성을 존중
- 화합 : 무엇보다 화합을 중시, 의견을 수렴 시 만장일치제 선택
* 육화경-승려들의 수행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화합을 이루기 위한 여섯 가지 원칙. 불교의 오역죄(五逆罪)의 하나로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들고 있을 정도로 승가는 화합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불교교단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며, 사원 생활에서 생기는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을 승가(僧伽)라 하고 화합중(和合衆)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육화경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이다.
1. 신화공주(身和共住) : 몸으로 화합하라는 말, 대중이 한 장소에서 같이 살라는 말이며,
2. 구화무쟁(口和無諍) : 입으로 화합하라는 말,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라는 말이며,
3. 의화동사(意和同事) : 뜻으로 화합하라는 말, 서로 협력해 함께 일하라는 말이며,
4. 계화동수(戒和同修) : 계율로 화합하라는 말, 함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란 말이며,
5. 견화동해(見和同解) : 바른 견해로 화합하라는 말, 이해하며 의견을 나누라는 말이며,
6. 이화동균(利和同均) : 동등한 이익으로 화합하며, 이익를 균등히 나누는 것.
* 대중공사 : 승가의 대소사나 중요한 일을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하는 일
5) 길에서 만난 사람들
- 급고독장자 :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를 부처님께 기증
- 사섭법(四攝法) :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보살의 네가지 실천덕목
보시(布施)섭 : 재물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베품.
애어(愛語)섭 : 진실되고 사랑스런 말로 대하는 것.
이행(利行)섭 :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
동사(同事)섭 : 모든 중생들과 함께 일하며 즐거워하고 고통도 함께 나누는 것.
- 똥치기 니이다나 : 신분이 무엇이든 전생의 무엇을 하였던 현재의 생각과 행동이 가장 중시함을 보여줌.
-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주리반특 : 주리반특은 승단에서 쫓겨나게 되자 부처님은 '먼지를 털자'만 반복해 외라고 하자, 마음속의 번뇌를 털어내고 뛰어난 지혜를 얻게 되었다. 진리를 깨우칠 때는 주리반특처럼 머리의 좋고 나쁨이 중요치 않고 온 몸과 마음으로 절실하게 체험해야 성자의 길에 들어서는 것임.
-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마라 : 99명을 죽여 손가락을 잘라 염주을 만든 살인마. 부처님의 교화로 제자가 됨.
- 물 싸움을 조정하다 : 가뭄이 들자 카필라 부족과 콜리야 부족은 로히니강 소유권을 놓고 군대를 동원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부처님은 물보다 목숨이 소중하다 하시며 중재에 나서 두 부족의 소중한 식수원으로 만들었다.
- 부왕의 임종 : 부처님은 정반왕의 임종을 지키고 몸소 부왕의 관을 메고 화장터로 향함.
- 수바드라 :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 귀한 인연을 놓친 사람들 : 우파카
6) 위대한 최후 - 열반(쿠시나가라 / 2월 15)
(1) 부처님 말년의 슬픈 일 세가지
1. 코살라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
2. 사리불과 목건련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
3. 사촌동생인 데바닷다의 반역
(2) 마지막 여정
- 춘다 : 베살리성 대장장이 '춘다'의 독버섯이든 공양을 받고 '80세'에 열반에 듦
- 쿠시나가라 :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
- 스승의 주먹은 없다 : 자신의 권위를 심오한 경지를 제자들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청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설명함
(3) 부처님의 최후의 유훈 : 자등명 법등명
*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제행무상 불방일정진 :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내가 간 후에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 불교의 4대 성지(聖地) : 부처님의 '탄생, 성도, 초전법륜, 열반' 장소를 4대성지라 함.
- 탄생지 : 룸비니동산
- 성도지 : 붓다가야
- 초전법륜지 : 녹야원(사르나트)
- 열반지 : 쿠시나가라
▶ 불교의 4대 재일(齋日) : 부처님의 탄생일, 출가일, 성도일, 열반일을 4대재일이라 함.
- 탄생재일 : 음 4월 8일(BC624년경)
- 출가재일 : 음 2월 8일
- 성도재일 : 음 12월 8일
- 열반재일 : 음 2월 15일
※ 우란분재일(백중) : 음 7월 15일 --> 이 우란분재일을 합하면 '5대 기념일'
▶ 팔상성도(八相聖圖) :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가지 그림으로 나타낸 것.
(1) 도솔래의상 : 도솔천 내원궁에서 흰코끼리를 타고 마야궁으로 내려오는 모습.
(2) 비람강생상 : 마야부인이 룸비니동산에서 무우수 나무 가지를 잡고 아이를 낳는 모습.
(3) 사문유관상 : 동(노인), 남(병자), 서(죽음), 북(수행자)의 네 성문을 나가 살펴보는 모습.
(4) 유성출가상 : 태자의 나이 29세 2월 8일(음력)에 성 밖으로 나가 출가하는 모습.
(5) 설산수도상 : 깨달음을 위해서 6년간 설산(고행을 상징)에서 수도 고행하는 모습.
(6) 수하항마상 : 35세 되던 해 보리수아래서 모든 번뇌, 즉 마왕파순(갖가지 욕망, 애착 등)의 항복을 받고 결국 성도(成道)이루는 모습.
(7) 녹원전법상 :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같이 수행했던 녹야원의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는 모습, '초전법륜'이라고 함.
(8) 쌍림열반상 :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