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1) 증병조참의행사재감소윤(贈兵曹參議行司宰監少尹)을 지낸 박경(朴景)이 여말선초(麗末鮮初) 우곡면 도진(桃津)에 입향(入鄕)후 향직(鄕職)을 세습하다가 세조(世祖)때 증손(曾孫)인 박형(朴炯)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이 되므로서 그 후손은 재지사족(在地士族)이 되었다. (2) 그후 부창정공(副倉正公) 휘 박환(朴還)의 8세손인 소윤공(少尹公) 휘 박경(朴景) 후손은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에서 분파(分派)하여 소위 “고령박씨 소윤공파(少尹公派)”라는 별도의 일문(一門)을 형성하고 도진(桃津)에 세거(世居)하면서 영남지방의 재지사족(在地士族)들과의 혼맥(婚脈), 학맥(學脈)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영도(領導)하였다. (3) 세조 원년(1455년) 12월 박형(朴炯)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어 재지사족으로 기틀을 마련한 후 광해군때 대북파(大北派)의 영수(領袖)이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門人)이었던 박광선(朴光先)과 아들 박종주(朴宗冑), 박종윤(朴宗胤) 등이 문과에 급제후 박광선(朴光先)은 보덕(輔德), 박종주(朴宗冑)는 도승지(都承旨), 박종윤(朴宗胤)은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라 가문의 위세(威勢)를 떨쳤다. (4) 따라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봉되어 실직사족(實職士族)으로서 지위를 가졌던 박형(朴炯)으로부터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년)으로 권문세족(權門勢族)의 지위를 잃었던 박광선(朴光先)과 아들 박종주(朴宗冑)•박종윤(朴宗胤)대까지 약 170년간 융성기(隆盛期)에 배출한 인물과 통혼관계를 고찰하기로 한다. (5) 필자는 여주이씨 문순공파 안동장군 휘 미숭(美崇)의 후예이며 고령박씨 소윤공파(少尹公派)는 나의 중시조(中始祖) 문순공(文順公) 휘 이규보(李奎報)의 사위로서 금오위산원동정(金吾衛散員同正)을 지낸 휘 박세영(朴世英)의 후손이 되어 우리 집안의 외손(外孫)이 되므로 족보, 논문 및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을 참고하여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하였음을 첨언(添言)한다. 2. 인물 및 통혼관계 (1) 17세 박형(朴炯) ① 아버지는 증정헌대부병조판서겸행통정대부울산군수(贈正憲大夫兵曹判書兼行通政大夫蔚山郡守)를 지낸 박승로(朴承老)이며 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1455년(세조 1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상호군(上護軍)이 되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록(冊錄)되었으며 1457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2년 후 행첨지중추원사겸경상우도도절제사(行僉知中樞院事兼慶尙右道都節制使)가 되었고 1460년 야인(野人)들을 북정(北征)한 군공(軍功)으로 정2품의 정헌대부(正憲大夫)에 녹훈(錄勳)되었으며 함길도절제사(咸吉道節制使)를 지냈다. ② 세조실록(世祖實錄) 기록 - 조선 세조 원년(1455년) 9월 5일에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물러난 후,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모계(謀計)를 미리 알린 공로로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44명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정하였다. - 세조가 같은 해 12월 27일에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여 행상호군(行上護軍) 박형(朴炯)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錄)하였다. 세조 6년(1460년) 10월 18일 북정(北征)한 군공(軍功)으로 녹훈(錄勳)되어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뛰어 올려 함길도절제사(咸吉道節制使)의 관직을 제수(除授)하였다. ※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一等) 특혜 - 한 자급⌜資級 : 벼슬아치의 직품(職品)과 관계(官階⌟을 올려주고 - 아들과 손자에게 음서(蔭敍)의 혜택을 부여하며 ◉ 음서(蔭敍) :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敍用 : 임용)하는 제도 - 후세(後世)에 까지 유죄(宥罪 : 죄를 너그러히 용서함)하고 - 부모에게 봉작(封爵 : 관작(官爵)을 책봉하여 주는 것)하며 - 아들과 손자중에서 자원에 따라 한사람에 산관(散官) 한 자급(資級)을 가산한다. ◉ 산관(散官) : 관리가 될 자격은 있으나 실직(實職)이 없는 사람 ③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수성나씨(壽城羅氏)이며 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홍배(洪培)이며 할아버지는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내고 참판(參判)을 증직받았던 형지(衡之)이며 수성나씨(壽城羅氏) 사암공파(思巖公派)에 속한다. (2) 18세 박계조(朴繼祖) ① 아버지는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봉된 박형(朴炯)이며 세조(世祖)가 자(字)를 언윤(彦閏) 휘(諱)를 계조(繼祖)라고 지어 주었다. 족보의 기록을 살펴 보면 “父正憲公在職休告時(부정헌공재직휴고시) 아버지 정헌공 박형(朴炯)이 관직에 있으면서 한동안 쉴 것을 고하였을 때 上問故對曰臣家世單孤(상문고대왈신가세단고) 임금이 연고를 묻기에 대답하기를 신의 집안은 의지함이 없이 홀로 인데 尙無子姓婦方有(상무자성부방유) 오히려 자식이 없는 부인이 도처에 있어 有娠是以請由(유신시이청유) 임신을 하였을 경우 이것으로써 청을 올립니다. 上曰卿之父子盡職邦家(상왈경지부자진직방가) 임금이 가로되 그대 부자(휘 승로 및 휘 형)는 국가의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 나라에 있는 힘을 다했다고 말씀하였다. 若生子名以繼祖(약생자명이계조) 만약 아들을 낳으면 계조(繼祖)라 이름하라. 以濟其美及生公因名焉事載興覽(이제기미급생공인명언사재흥람)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그 아름다움과 공이 태어나서 이에 이름한 것으로 인한 사실이 흥람에 실려질 것이다.” ② 공은 진주판관, 경산현령을 할 당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토벌한 공을 세워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승차(陞差)하였다 ③ 초배(初配)는 광주노씨(光州盧氏)로 아버지 노선경(盧善卿)은 1435년(세종 17년) 식년정시(式年庭試)에 병과로 급제, 사간(司諫)이 되었고, 이듬해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함양군수, 고령현감을 지냈다. ④ 계배(繼配)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아버지는 종삼품(從三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보공장군(保功將軍)의 품계를 받은 유승연(柳承演)이며 증조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낸 유극서(柳克恕)이다. 전주유씨(全州柳氏)가 윤(潤),일(溢),택(澤),흡(洽) 등 4남과 명종(明宗) 11년(155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오른 야성인(冶城人) 사위 송현(宋鉉)와 얼자(孼子) 심(深)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작성한 허여문기(許與文記)를 보면 영남사림의 대표적인 사림(士林)과 비교하여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며 친정에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⑤ 정헌대부(正憲大夫) 박형(朴炯)과 아들 박계조(朴繼祖) 부부의 묘(墓)는 조선전기(朝鮮前期) 묘 형식과 석물 배치, 조각 수법의 시기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인정되어 2012년 7월 19일 고령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 19세 박윤(朴潤) ① 자는 덕부(德夫), 호는 죽연(竹淵)이며 아버지는 양산군수를 지낸 박계조(朴繼祖)이다. 공은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에 있었던 뇌룡정(雷龍亭)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으며, 남명선생도 죽연정(竹淵亭)으로 가서 “有多君諸子出於藍(유다군제자출어람 : 많은 것을 가진 그대는 모든 아들들이 스승보다 더뛰어난 제자가 될 것이란 말로 덕담을 하였다)”시를 남겼다. 그는 죽연정(竹淵亭)을 지어놓고 3형제와 그 위에서 놀며 심성을 도야하기도 하였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낙천(洛川) 배신(裵紳) 등이 찾아와서 강학논도(講學論道)하였다. 1576년(선조 9년)에 효자로 정려복호(呈閭復戶) 되었으며, 효행에 관한 사실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렸으며 1700년(숙종 27년) 문연서원(文淵書院)에 배향되었다. ② 배위는 진양하씨(晋陽河氏)로 아버지 하결(河潔)은 1411년(태종 11년) 치도봉책광연전등문과(治道封策廣延殿登文科)에서 급제후 호조좌랑, 인천군사, 사헌부 장령, 대사간(大司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등을 지냈으며 외조부장호공(莊胡公) 조윤손(曺潤孫)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지냈 다. (4) 19세 박일(朴溢) ① 자는 경부(敬夫)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종성판관(鐘城判官)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양산군수를 지낸 박계조(朴繼祖)이다. 무후(無后)하여 동생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의 아들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을 양자(養子)로 맞이하였다. ② 배위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아버지 민종건(閔宗騫)은 인조(仁祖) 5년(1627년) 정묘(丁卯)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동서(同壻) 김확(金擴)은 중종21년(1526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첨지사(僉知事)를 지냈다. (5) 19세 박택(朴澤) ① 자는 공부(恭夫)이고 호는 낙낙당(樂樂堂)이며, 중종 16년(1521년)에 아버지 계조(繼祖)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박윤(朴潤), 박일(朴溢)의 아우이다. ② 덕행을 겸비하고 효우가 뛰어난 천출효자(天出孝子)이었으며 학문이 정수(精粹)하여 세인들이 존경하였다. ③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남명선생은 그가 지은 「극기잠(克己箴)」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고 하며 낙천(洛川) 배신(裵紳)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었으며 공의 행장(行狀)과 비문(碑文)을 지었다. ④ 1566년(명종 21년)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 ⑤ 배위는 양천최씨(陽川崔氏)로 아버지 최필손(崔弼孫)은 세조때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지낸 최숙형(崔淑亨)의 후손이며 생원(生員)과 참봉(參奉)을 지내고 벼슬이 종오품(從五品) 도사(都事)에 이르렀고 만석꾼의 거부(巨富)이었다고 전해지며 맏사위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손자인 김유(金維)이며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이 둘째사위이다. (6) 19세 박흡(朴洽) ① 아버지는 양산군수를 지낸 박계조(朴繼祖)이며 자는 윤부(允夫)이며 동반 6품 이상•서반 4품 이상 그리고 문•무과 출신•생원(生員)•진사(進士)•유음자손(有蔭子孫) 등이 소속되는 병종(兵種)인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충순위(忠順衛)는 1445년(세종 27년)에 병조(兵曹)에 설치 및 소속되어 시험 없이 1월 ·4월 ·7월 등 1년에 3회 선발하여 2개월씩 7번 교대로 복무하게 하였으며 정원은 없고 일정 기간 복무 후 벼슬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그 부당성이 지적되어 1459년(세조 5년) 폐지되었는데 공의 출생연도가 1520년 후반이므로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고 하는 족보의 기록은 사실이 아닌 군직(軍職)의 기록이다. ② 배위는 분성김씨(盆城金氏)로 아버지 김취명(金就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종삼품(從三品) 서반 무관(武官)인 평신진(平薪鎭)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김취명 영세불망비(金就明永世不忘碑)가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의 반곡마을에 세워져 있다. (7) 20세 박정벽(朴廷璧) ① 죽연(竹淵) 박윤(朴潤)의 아들로서 자는 군명(君明)이고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으며 선조조(宣祖朝)에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으며 도진충효관에는 박윤(朴潤)이 아들인 박정벽(朴廷璧)이 자신의 병을 잘 간호해 준 것을 고맙게 여겨 노비와 토지 등을 특별히 상속한 내용인 박윤별급문기(朴潤別給文記)가 전한다. ※ 성균생원(成均生員) 생원시(生員試)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入學)하여 수학(修學)한 경력(經歷)이 있는 사람을 족보(族譜)나 비문(碑文)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수록된 생원시 합격자가 아니다. ※ 별급문기(別給文記) 조선시대 재주(財主)가 특별한 사유로 주로 친인척에게 재산을 증여할 때 작성한 분재문서(分財文書)로서 재주가 살았을 때 재산을 자녀에게 나누어주는 문서인 분급문기(分給文記), 재주가 죽은 뒤에 형제자매의 합의에 의하여 재산을 분집(分執)하는 화회문기(和會文記) 등과 같이 원칙적으로 자손에게만 재산을 상속한 것과는 구별된다. ② 배위는 광주노씨(光州盧氏)로 아버지의 자는 공신(公愼), 호는 입재(立齋) 인 노흠(盧欽)으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낙향하여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고향인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한 공로로, 별제(別提) ·찰방(察訪)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8) 20세 박정번(朴廷璠) ① 자는 군신(君信), 호는 학암(鶴巖)이고 아버지는 박일(朴溢)이며,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이 생부(生父)이다. ②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䞭),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낙천(洛川) 배신(裴紳)의 강학(講學)을 따라 동문수학(同門修學) 하였다. 공의 학문의 연원(淵源)과 사승(師承)에 관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로 단정(斷定)하는 일부 학자가 있으나 그의 조카 박광선(朴光先)이 남긴 그 비망록(備忘錄)인 계부주행록(季父主行錄)에서 “……일배선생지후(一拜先生之後) 진기구습(盡棄舊習) ……한 번 선생께 인사드린후로 옛날 습관을 모두 버렸으며”라는 기록 및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향리의 지인(知人)들에게 남긴 “……지일(只日) 恨不得更拜先生而已(한부득갱배선생이이) ……이제 다시는 선생께 인사드릴 수 없게 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는 기록을 감안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경상우도(慶尙右道)의 문인(文人)들이 불이익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학문의 연원을 퇴계(退溪), 한강(寒岡), 여헌(旅軒) 등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은페(隱蔽)한 경향 및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내암집(萊庵集) 제14권에 “주부박군묘지명(主簿朴君墓誌銘)을 수록한 것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공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門人)으로 결론짓는 것이 타당(妥當)하다. 또한 7살 연상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도 수학하였으며 특히 을사주행(乙巳舟行)때에는 출범처(出帆處)인 어목정(漁牧亭)에서 사문(師門)을 배종(陪從)하였고 공의 죽음을 애도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다음과 같이 만시(挽詩)를 짓는 등 두분의 관계가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一生全向江湖樂(일생전향강호락) 일생토록 강호에서 즐거움을 누렸고 半世相從士友遊(반세상종사우유) 반생토록 사우들과 종유했었지 鶴墅梅園多共酌(학서매원다공작) 학암정과 백매원에서 함께 술잔 기울였고 桃津洛水幾同舟(도진낙수기동주) 도진과 낙수 사이를 뱃놀이한 것은 얼마던가” 그리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었으며 공의 사후에 만사(輓詞)와 제문(祭文) 등 만뇌문(挽誄文)을 지었다. ③ 임진왜란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송암(松庵) 김면(金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양진영을 오가면서 많은 주획(籌劃)을 내어 놓았다. 백씨인 참판공 박정완(朴廷琬)과 가동(家童) 50여명을 이끌고 해질녁에 개산포(開山浦)에서 불을 질러 적(敵) 수십명을 참살하고 왜선 5척을 빼았다. 다음날 아침해가 뜨자 곧 노획한 물품을 진열하니 어정일족(御幀一簇)과 내탕(內帑)의 제물(諸物)과 금안(金鞍 : 안장) 등 보물을 송암(松庵) 김면(金沔) 의병진(義兵陳)에 보내었다는 사실이 맏사위 조경담(趙慶覃)의 산서지(山西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후 노획물(鹵獲物)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어 선조(宣祖)께서 궁을 떠나 멀리 거동할 때 임시적으로 머물렀던 별궁(別宮)인 행재소(行在所)에 보내려고 남원부(南原府)의 곳간에 보관했으나 일실(逸失)되어 공의 전공(戰功)을 장계(狀啓)로 즉시 보고하지 못하였다. ④ 왜란이 끝나고 공(功)을 논할 때, 자신의 공적은 드러내지 않고 형(兄)만을 내세우는 덕성(德性)이 있어 인근의 선비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⑤ 산수승처(山水勝處)에 학암정(鶴巖亭)과 부래정(浮來亭)을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스승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을 초청하여 시문(詩文)을 주고 받았다. 학암집(鶴巖集) 권1에 차한강선생재등학정유감운(차한강선생재등학정유감운) 즉 ⌜한강(寒岡) 선생이 학암정(鶴巖亭)에 다시 올라 감회를 느껴지은 작품에 차운하여 지음⌟이란 제목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文淵勝會如何日(문연승회여하일) 문연의 성대한 모임 언제였던가 屈指如今二十年(굴지여금이십년) 손꼽아 헤어보니 어느 덧 20년이 흘렀네 淸江此冬重承誨(청강차동중승회) 맑은 강가 이 겨울에 거듭 가르침을 받으니 經亂餘生幸獨全(경난여생행독전) 난리를 겪고도 살아남아 요행히 홀로 목숨을 보전했네
憶昔鶴巖簪盍日(억석학암잠합일) 학암에서 의관을 갖추었던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如今一十九回年(여금일십구회년) 이제 열아홉 번째 돌아오는 해이네 高儀更奉風塵後(고의갱봉풍진후) 전쟁이 끝나 고상한 모습을 다시 받들게 되니 何辛餘生得苟全(하신여생득구전) 구차한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文淵洛水渾依舊(문연낙수혼의구) 문연의 낙동강 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人世悲歎二十年(인세비탄이십년) 인간 세상 슬픔을 탄식한 지 이십년이네 此夕從遊悽感處(차석종유처감처) 슬픔이 깃든 곳을 이저녁에 되짚어 노닐어 보지만 松庵物色已無全(송암물색이무전) 송암의 모습이 깃든 곳은 이미옛날과 같은 것이 없네.”
⑥ 선조조(宣祖朝)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강학지소(講學之所)로 건립된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牛谷面)의 문연서원(文淵書院)에 배향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⑦ 퇴계학맥(退溪學脈)의 적통(嫡統)을 이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유성룡(柳成龍)의 8대손으로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매산(梅山) 유휴조(柳厚祚)가 행장(行狀)을 찬(撰)하였던 것으로 보아 공의 학행과 덕업이 영남 유림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 능히 알 수 있다. ⑧ 배위는 현풍곽씨(玄風郭氏)로 아버지는 만담재(晩蕁齋) 곽규(郭赳)이며 참의공파(參議公派) 파조(派祖)로서 명종(明宗) 10년(155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현풍 이양서원(尼陽書院)에 배향되었다. ⑨ 아들은 창선(昌先)으로 초휘(初諱)은 효선(孝先)이고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1녀는 조경담(趙慶覃)에게, 2녀는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요청시,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겸 부원수(副元帥)로서 출전했던 김경서(金景瑞)에게, 3녀는 문과에 급제후 한림취재(翰林取才)에 선발되었고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한 조몽길(曺夢吉)의 손자인 조정생(曺挺生)에게 시집을 갔다. (9) 20세 박정완(朴廷琬) ① 자는 군실(君實), 호는 양죽당(養竹堂)이며 아버지는 낙낙당(樂樂當) 박택(朴澤)이다. ②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박정번(朴廷璠)과 가동(家童)을 이끌고 개산포 전투, 무계 전투에서 군공(軍功)을 세웠으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추천으로 거창현감(居昌縣監),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하였으며 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晋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령박씨 대동보의 기록을 살펴보면 “築亭于洛江上扁曰(축정우낙강상편왈) 낙동강가에 정자를 짓고 정자위의 편액에 漁牧有明督飼使孟養志記(어목유명독사사맹양지기) 어목정에는 명나라 제독 사사 맹양지에 관한 기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후에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고 광해군 10년(1618년)에 아들 박광선(朴光先)이, 광해군 7년(1615년)에 두 손자 박종주(朴宗冑), 박종윤(朴宗胤)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③ 사위는 고창인(高敞人)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장남인 오여은(吳汝檼)으로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 검열(檢閱), 전한(典翰),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 등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오익환(吳益煥)도 문과에 급제후 통덕랑(通德郞) 행예문관검열(行藝文館檢閱) 겸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지냈다. ④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아버지는 조몽길(曺夢吉)이며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고 밀양의 대유학자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의 외손(外孫)이다. (10) 21세 박원갑(朴元甲) ① 자는 인백(仁伯), 호는 도원(桃源)이며 효자로 정려(旌閭)된 죽연(竹淵) 박윤(朴潤)의 손자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낸 박정벽(朴廷璧)의 아들이다. ② 임진왜란 때 송암(松庵) 김면(金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용사록(龍巳綠)에 등재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에 망우당 곽재우와 화왕산에 입성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학문과 충효를 겸비하였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었으며 무후(無后)하여 재종(再從) 동생 박광선(朴光先)의 아들 박종윤(朴宗胤)을 입양(入養)하였다. ③ 배위는 팔계정씨(八溪鄭氏)로 아버지 정여겸(鄭汝謙)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합부(合祔)된 묘비명(墓碑銘)은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院長)에 두차례나 천임(薦任)되는 등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통달하여 일세(一世)의 사표(師表)로서 추앙(推仰)을 받았던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찬(撰)하였다. (11) 박창선(朴昌先) ① 초휘는 박효선(朴孝先). 자는 극술(克述), 호는 매헌(梅軒)이며 조부는 종성판관(鐘城判官) 박일(朴溢), 부친은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이고, 외조부는 민종건(閔宗鶱)이며, 처부는 이광윤(李光胤)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으며 선조(宣祖) 때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때 아버지 학암 박정번을 따라 창의(倡義)를 하였으며 17세때 곽재우(郭再祐) 진영(陣營)에서 장무서기(掌務書記)로 활동했다. 이 사실이 《창의록(倡義錄)》에 기재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務原從功臣) 2등에 녹권(錄券)되었으나 임진왜란후 일찍 돌아가시어(早逝) 관직에 서용(敍用)되지 못했다. 슬하에 처사(處士) 남고(南皐) 응형(應衡)과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응항(應恒) 등 2남을 두었다. ② 배위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아버지는 이광윤(李光胤)으로 1585년(선조 18년)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부제학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2) 21세 박광선(朴光先) ① 자는 극무(克懋). 호는 소고(笑皐)이며 할아버지는 택(澤)이고, 아버지는 정완(廷琬)이며, 어머니는 조몽길(曺夢吉)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사서(司書)·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필선(弼善)·보덕(輔德)으로 왕세자를 모시다가 인조반정으로 은진(恩津)에 안치된 후 1631년(인조9년) 2월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다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② 배위는 진양강씨(晋陽姜氏)로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강이(姜儞) 이며 할아버지는 강현(姜顯)으로 형조판서·한성부좌윤을 거쳐 1551년(명종6년)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혜평(惠平)이다. (13) 22세 박종윤(朴宗胤) ① 생부(生父)는 박광선(朴光先)이며 부(父)는 박원갑(朴元甲)이고 형(兄)은 박종주(朴宗胄)이며 자는 언장(彦長), 호는 남애(南厓)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사사(師事)받았고 상례간목(喪禮間目) 10조(十條)가 전하여 진다. 광해군(光海君) 7년(1615년)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이조좌랑겸지제교(吏曹佐郞兼知製敎)를 지냈다. ② 초배는 숙인(淑人) 철성이씨(鐵城李氏 : 고성이씨)로 아버지는 이성길(李成吉)이며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4년 병조좌랑에서 면직되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이 되었으며 1596년 북청판관에서 함흥판관으로 옮겼으며, 1601년 여산군수를 거쳐, 1604년 합천군수·사헌부지평을 지내고 판결사와 분조(分朝)의 병조참판에 올랐다. 2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그림에도 뛰어나서 진중에서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그렸다. 계배(繼配)는 숙인(淑人)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아버지는 망도재(望道齋) 성흘(成屹)이다. ③ 아들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서전(瑞全)과 2남 사전(思全)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3남은 양전(良全), 4남은 내전(迺全)이다. (14) 22세 박응형(朴應衡) ① 자는 첨백(詹伯) 호는 남고(南皐)이며 부친은 매헌(梅軒) 박창선(朴昌先)이다. 김성진(金聲振),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수암(修巖) 유진(柳袗) 등에게 수학(修學)하였다.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을 뿐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는데, 행실이 의롭고 고결하였다. 북인을 등용하는 것을 기피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들어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적인 항복에 두문자정(杜門自靖)하고 의분강개(義憤慷慨)하며 충분시(忠憤詩)를 남겼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숭정력(崇禎曆)과 숭정년호(崇禎年號)를 쓰며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칭하였으므로 존주록(尊周錄)에 수록되어 있다. 남고 선생은 생애에 429제(題) 522수의 시를 남겼으며 400여년전의 무관처사(無官處士)의 작품으로는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다. 유고(遺稿)로 《남고집(南皐集)》 3권이 있으며 공의 학문과 충절을 기려 사림(士林)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우곡면 도진리(挑津里) 173번지에 남고정(南皐亭)을 두었다가 다시 1963년 현위치에서 신축한 건물이다. 묘갈명(墓碣銘)은 당대 영남 제일의 인물로 추앙받던 입제(立齊) 정종로(鄭宗魯)가 찬(撰)하였고 행장(行狀)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매산(梅山) 유후조(柳厚祚)가 찬(撰)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자로서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가히 알 수 있다. 후사(後嗣)가 없어 동생 응항(應恒)의 장자 망지(望之)를 입양하였는데 그는 연풍현감(延豊縣監)을 지냈다. ② 배위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매오(梅塢) 정영준(鄭榮俊)으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 되었으며 고조부는 응교(應敎)를 지낸 정환(鄭渙)으로 연산군때 직간(直諫)하다가 귀양지 상주(尙州)에서 죽었다. ③ 공은 부친 박창선(朴昌先)의 유언에 따라 정인홍(鄭仁弘)과의 절교를 위하여 한동안 처가인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憂忘里)에서 거주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한 내용이 남고선생연보(南皐先生年譜)에 다음과 같이 전하여 진다. “생원공병혁(生員公病革) 어선생왈(語先生曰) 생원공 즉 박창선의 병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인혹권오과환(人或勸吾科宦) 이고불위자(而故不爲者) 실유의야(實有意也) 사람들이 혹시 너에게 과거에 벼슬하기를 권하였는데 실제로 하지 않은 까닭은 뜻에 있었다. 왕년매호조우인래언절야지사(往年梅湖曺友仁來言絶倻之事) 옛날 매호공 조우인이 와서 정인홍과 절교(絶交)한 일을 말한 것은 정합오의(政合吾意) 나의 뜻이 정사(政事)를 합하자는 것이었다. 시유이가왕종지약(時有移家往從之約) 때에 맞추어 집을 옮기서 그를 따라 갈 것을 약속하였다. 금병이의오한야(今病已矣吾恨也) 이제 이미 나의 병이 깊어 한스럽구나. 여능수오약부(汝能遂吾約否) 너가 나를 따라 약속하지 않겠느냐? 차여외향상근(且汝外鄕相近) 또 너의 외갓집과 서로 가까이 있으니 ◉ 매호공 조우인의 집은 예천군 서쪽 노포리(蘆浦里)이고 박창선의 처가인 경주이씨 이광윤(李光胤)의 사재(私齋)는 예천군 용궁면 상금곡리 금당곡 (金唐谷)에 있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필이위귀선생(必以爲歸先生) 반드시 선생에게 돌아갈 것을 생각해라. 읍이수지(泣而受之)” 울면서 이를 받아들었다. ◉ 매호공(梅湖公) 조우인(曺友仁) 공은 명종 16년(1561년) 예천군(醴泉郡) 노포리(蘆浦里)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아버지 조몽신(曺夢臣)과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1588년(선조 21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년)에는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된 고궁(古宮)이 황량 적막한 것을 보고 ‘감회(感懷)’라는 시(詩)를 한 장(章) 지었는데, 그 시에 “蕭條物色(소조물색) 陟降英靈(척강영령) 물색은 은 쓸쓸하고 영령만 오르내리네.”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諷刺)했다고 하여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혔다.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사벌면 매호리(梅湖里)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④ 1728년 3월 무신사태 때 기병(起兵)한 조성좌(曺聖佐)가 남고 박응형(南皐 朴應衡) 둘째 사위인 조하현(曺夏賢)의 종손(從孫)이므로 고령박씨 가문도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일정 부분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 22세 박종주(朴宗冑) ① 자는 언중(彦仲). 호는 이우헌(二憂軒)이며 박택(朴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정완(朴廷琬)이고, 아버지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박광선(朴光先)이다. 1615년(광해군 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617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문학(文學)을 겸하였다. 후에 직제학(直提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도진리에 있는 충효관에는 박종주(朴宗冑)의 문과급제 교지가 전시되어 있다. 아들은 경전(敬全)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② 광해군 때 대북(大北) 정권에 적극 참여하여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의 심복(心腹)으로 활약하였으며, 폐모론(廢母論)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승지로 있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영남에 파견된 의금부도사에 의해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③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아버지는 선조 36년(1603년)계묘년(癸卯年)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합격후 인조반정 후, 성균관직강·사예(司藝)·내자시정(內資寺正)·사헌부장령을 거쳐 1625년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그 뒤 밀양목사·청주목사·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언영(李彦英)이며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이었다. 3. 광해군복위모의사건으로 고령박씨 대동보에서 누락 또는 개명된 3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정권(大北政權) 몰락 후 정인홍(鄭仁弘)과의 연관성을 은페하려고 그와 관련된 인물을 족보에서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윤색(潤色)하는 경향이 많았고 는 추세가 있어 그 사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1) 박종주(朴宗冑)의 아들 ① 박희집(朴禧輯) - 이언영(李彦英)의 외손 박희집(朴禧集)이 역모로 벌을 받은 뒤에 이언영(李彦英)의 첩자(첩자) 이명진(李名鎭)에게 말하기를 ‘희집(禧集)의 역모(逆謀)를 너희 부자(父子)는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고 했다. 이로써 혐의를 맺어 불측한 말을 만들어냈다.”고 하였으며, 변탄(卞䋎)·변소(卞紹)·조성(曺成)·유여성·유성하·김자건·정덕승 등의 공초(供招)가 명진의 공초와 서로 맞지 않았다. 출전 : 인조실록(仁祖實錄) 37권 16년 12월 18일 - 박희집(朴禧輯)이 이언영(李彦英)의 외손(外孫)이고 박종주(朴宗冑)가 이언영(李彦英)의 사위이므로 박희집(朴禧輯)은 박종주(朴宗冑)의 아들이나 고령박씨 대동보에서 누락되어 있었다. -1631년(인조 9년) 3월 11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② 박경집(朴慶集) - 유지수(柳之燧)는 공초(供招)하기를, 박희집(朴禧輯)의 동생 박경집(朴慶集)은 ‘허완(許完)·정여린(鄭汝麟)·김신국(金藎國) 형제들은 유효립(柳孝立)과 같이 일했는데 법망에서 빠졌다.’ 하였습니다.” 출전 : 인조실록(仁祖實錄) 24권 9년(1631년) 2월 3일 - 박희집(朴禧輯)이 박종주(朴宗冑)의 아들이고 박경집(朴慶集)은 박희집(朴禧輯)의 동생이므로 박종주(朴宗冑)의 아들이나 후에 경전(敬全)으로 개명(改名)하여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의 주손(冑孫)이 되었다. (2) 박종주(朴宗冑)의 사촌 ① 성지도(成至道)는 공초하기를, “기사년 겨울에 희집(禧集)의 집엘 갔더니 희집(禧集)의 5촌 숙부(叔父)인 종형(宗衡)과 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라고 고변하였으나 인조가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와 다름이 없으니, 묻지 말도록 하라고 하며 방면(放免)하여 신원(伸寃)되었다. - 박종형(朴宗衡)을 박희집(朴禧輯)의 5촌 숙부라고 하였으므로 박종형(朴宗衡)은 박종주(朴宗冑)의 사촌으로 그후 개명(改名)하여 응형(應衡)으로 하니 곧 학암(鶴岩) 박정번(朴廷墦)의 주손(冑孫)인 남고(南皐) 박응형(朴應衡)이다. 출전 : 인조실록(仁祖實錄) 24권, 9년(1631년) 2월 3일 4. 결어 (1) 17세 박형(朴炯)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이 되어 무반(武班)으로 출사(出仕)하여 유력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이 된 이래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던 박정완, 박정번, 박원갑, 박창선, 박광선 등은 선대(先代)가 상경종사(上京從仕)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으로서 받았던 많은 전토(田土)와 노비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기반과 의(義)를 중시하는 상무정신(尙武精神)이 토대가 되어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므로써 전공(戰功)을 세워 향촌사회에서 영도적(領導的) 지위를 구축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光海君) 때 대북파(大北派)가 집권하자 정인홍(鄭仁弘)이 대북파(大北派)의 영수(領袖)가 되어 국정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자 그 문하생인 박광선(朴光先), 박종윤(朴宗胤), 박종주(朴宗冑) 등 부자(父子)가 핵심요직(核心要職)에 등용(登用)되어 소윤공파(少尹公派)의 융성기(隆盛期)를 구가(謳歌)하면서 향반(鄕班)에서 벗어나 경반(京班)으로 신분상승을 도모하였으며 영남일대의 명문가(名門家)와 통혼을 통하여 족세(族勢)를 급속히 확대하였다. (2) 그러나 1623년(인조 1년)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박종윤(朴宗胤)의 형님으로 정언(正言)․승지(承旨) 등을 역임한 박종주(朴宗冑) 참형되었고 박종윤(朴宗胤)이 극변(極邊)으로 귀양을 가게 되므로써 향촌사회에서 지위도 위축되었으며 대북파(大北派)의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를 기도한 사건인 광해군복위모의(光海君復位謀議)사건에 연루(連累)되었던 박광선(朴光先)과 손자 박희집(朴禧集)이 1631년(인조 9년) 3월에 참형되므로써 향촌(鄕村)에서 입지(立地)도 약화(弱化)되었다. 특히 고령박씨 소윤공파(少尹公派)중 도진문중(桃津門中)은 1605년부터 1658년까지 27회에 걸쳐 고령현(高靈顯)의 향안입록(鄕案立錄)이 108명이 이루어 졌지만 고령박씨 입록자는 단 5명에 불과하여 고령의 다른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문중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배제(排除)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3) 박형(朴炯)이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자 고령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의 통혼(通婚)은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이 고령군 쌍림면 학동(鶴洞 : 현재 하거리)에 거주하면서 생원(生員)과 참봉(參奉)을 지냈던 양천최씨(陽川崔氏) 최필손(崔弼孫) 둘째사위가 된 것이 유일(唯一)하며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장남으로 양죽당(養竹堂) 박정완(朴廷琬)의 사위가 된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장남 고창인(高敞人) 오여은(吳汝檼)은 혼인 당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기에 영남의 명문가이었던 합천의 창녕조씨(昌寧曺氏), 초계정씨(草溪鄭氏), 현풍의 현풍곽씨(玄風郭氏), 창녕의 광주노씨(光州盧氏), 칠곡의 벽진이씨(碧珍李氏), 상주의 전주유씨(全州柳氏), 예천 풍양의 동래정씨(東萊鄭氏), 진주의 진주하씨(晋州河氏) 등과의 혼맥을 통하여 학문과 권력면에서 향촌사회를 영도(領導)하는 강력한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4)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년)과 광해군(光海君) 복위모의사건(復位謀議事件)에 연루(連累)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향촌에서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지위(地位)가 위축되었지만 고령박씨 소윤공파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종 향안(鄕案) 참여, 문연서원(文淵書院) 건립 등 향촌의 사회활동과 종계(宗契)를 조직하여 재실, 서당 건립, 족보 및 문집 발간 등 문중활동을 통하여 여전히 재지사족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힘썼으며 현재도 향교(鄕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수백년간 이어진 지역 유림(儒林)과의 모임을 갖고 선대의 사적(史蹟)을 체계적으로 보관, 관리, 기록하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명망(名望)이 높았던 고령박씨 소윤공파의 명맥(命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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