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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천동에서 병원을 개업중인 윤주홍 장로님은 봉천동의 슈
바이처로 불리고 있습니다. 봉천동의 빈민촌이던 시절부터 그의 도움
을 받지 않는 아이가 없었고, 장로님의 신세를 지지 않은 어른이 없
을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그 동네 사람들이 그를 슈바이처로 부르
며 친부모처럼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장로님은 처음부터 그런 삶을 살
았던 것은 아닙니다. 장로님은 사랑하는 자식을 교통 사고로 잃었습니
다. 아이를 친 택시기사가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뛰어든 병원이
공교롭게도 장로님의 병원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식
에게 사망 진단을 내린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장로님은 밤잠
을 설치면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은 마침내 일
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신의 자식을 데려가신 것은 자신
을 슬픔 속에 내버려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자
식처럼 돌보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하신 것을 통해서 하
나님이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하시
기 위함입니다. 자식을 희생하고서야 비로소 모든 어린 생명들을 사랑
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의 의술을 펼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뇌성마비 친구의 학교 생활을 5년째 그림자처럼 보살펴 주는 초등학
생이 있어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청주 용암 초
등학교(교장 김청일) 4학년 김금순(10살)양은 중증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같은 반 친구 홍성봉(11살) 군의 손을 잡고 5년째 등하교를 같
이 하고 있습니다. 점심 시간이면 구내 식당에서 홍군의 식사를 먼저
배식 받아 챙겨 준 뒤 밥과 반찬을 먹여 주기도 하고 흘린 음식물의
뒷정리까지 합니다. 김양은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고 다니며 홍군의 침
을 닦아주고 화장실을 출입할 때마다 부축해 주는 등 부모 형제도 하
기 어려운 일을 아무 거리낌없이 해내고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수업 준비물을 일일이 챙겨 줄 뿐 아니라 홍군의 수
준에 맞춰 덧셈, 뺄셈 등을 가르쳐 주는 일도 빼놓지 않습니다. 특히
김양은 홍군을 놀리는 친구들을 따끔하게 혼내주며 말을 제대로 못하
는 홍군의 의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등 항상 든든한 친구
로서 홍군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양은 학교에서 "꼬
마 천사"로 통합니다. 김양은 "아이들이 몸이 불편한 성봉이를 놀릴
때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내가 없으면 성봉이가 학교도 다니지 못
할 것 같아 선생님께 말씀드려 1학년부터 같은 반을 하고 있다."고 말
했습니다
우리가 목회할 초창기에는 우리 나라 목사님이 쓴 주석책이 두 권이었습니다. 하나는 박 윤선 주석이고, 다른 하나는 이 상근 목사님 주석입니다. 그런데 이 성근 목사님 아들 이 성희 목사님이 아버지 목사를 회고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내가 본 아버지>
이런 제목의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입니다.
이 상근 목사님이 16살 때였습니다. 발에 병이 나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구 달성 공원 느티나무에서 40일동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병은 낫지를 않고 더 심해졌습니다. 3년동안 출입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다닌 나이인데 움직일 수 없으니까 공부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한약을 붙인 것이 덧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 하니까 대학 진학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만 틀어 박혀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꼼짝 못 하고 앉아서 성경을 거의 다 외웠습니다. 성경박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는 드문 주석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성경 대학자가 되는 계기를 하나님이 마련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 60년동안 발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1993년 그가 은퇴하면서 존경하는 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으면서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발 뒤꿈치에서 1cm 가량되는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가 나온 것입니다. 어렸을 때 맨발로 다니다가 철사에 찔린 것이 속에 들어가서 그의 평생 가시가 된 것입니다. 그 것을 거의 60년만에 발견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그 철사를 깊이 보관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늘 이렇게 자랑삼아 회고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시를 보십시오. 내 발꿈치에 60 년동안 박혀 있던 가시입니다.
이 철사가 나의 가시가 되어 60년동안 나를 찔렀습니다. 내가 대성서 학자가 되게 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였습니다. 이 가시가 아니면 나는 주석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잘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일찍 발견하여 수술하였더라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상근 목사님은 평생 좋은 흔적으로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흔적이 있고, 갖지 말아야 할 흔적이 있습니다.
마귀의 팔복
1.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나의 가장 큰 일군이 될 것임이요.
2. 목사의 과오나 흠을 보고 트집을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백날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3. 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나오라고 통 사정을 해야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왕따가 될 것임이요.
4. 남의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5. 걸핏하면 삐죽거리고 트집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일년에 12번 교회를 옮겨 다닐 것이요.
6.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고 자기는 헌금하지 않으면서 누구 십일조안한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가장 큰 친구가 될 것이요.
7. 성경 읽고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요,
8.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와 이웃은 죽도록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니라.
우리나라에서 6·25 동란이 일어났던 1950년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만삭이 다 된 어떤 여인이 한밤중에 산기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자기를 돌보아 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 여인은 평소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던 선교사 부부에게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여인은 선교사 부부를 찾아 집을 나섰습니다. 길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다리를 지나갈 즈음에 그만 진통이 너무 심하게 왔습니다. 도무지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 악물고서 다리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여인은 널빤지 하나를 주어서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신음하면서 거기서 예쁜 여자아이를 순산했습니다. 날씨는 몹시도 추웠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덮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치마와 저고리를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갓난아기를 둘둘 말아 주었습니다. 그 뒤 옆에 버려져 있는 가마니를 끌어당겨서 바람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인은 기진맥진해서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만삭이 다 된 한국 친구의 안부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찾아 집을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깜짝 놀라서 얼른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갓난아기는 산모의 치마와 저고리에 둘둘 싸여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산모는 벌거벗은 채 마치 그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몸을 구부린 모습으로 이미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선교사 부부가 찾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그 여인을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잘 길렀습니다. 소녀는 커 나아가면서 자기의 모습과 선교사 부부의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종종 자기의 내력에 대해서 물어보고는 했습니다. 마침내 선교사 부부는 그 소녀가 12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그 아이의 과거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자기를 어머니의 무덤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소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했습니다. 그런 뒤에 소녀는 선교사 부부에게 잠시 자기 혼자만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소녀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벗은 옷으로 어머니의 차디찬 무덤을 정성스럽게 덮어주었습니다. 드디어 소녀는 어머니의 무덤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때 이보다 더 추우셨나요? 어머니, 그때 이보다 더 부끄러우셨나요?"
소녀는 어머니의 사랑에 목이 메어서 감격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서 죄인처럼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통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가운데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1862∼1935)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 번은 선데이 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어느 도시에서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열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먼저 그 마을의 시장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시장님, 우리는 시장님의 도시에서 놀라운 부흥집회를 열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장님께서 아시는 분들 가운데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명단을 좀 적어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심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하겠습니다."
몇 일 뒤에 요청대로 빌리 선데이 목사님에게 그 도시 시장이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장은 그 도시의 전화번호부 책을 보내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운 문제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히터는 말하기를 "사람이 아침에 일어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분이 예수님이라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히터는 말하기를 "사람이 아침에 일어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분이 예수님이라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번 달에 발간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특집기사는 "희망의 마라톤"이었습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은 테리 폭스라고 하는 분인데 캐나다의 청년입니다.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이유는 18세에 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캐나다, 넓은 땅, 대륙을 마라톤으로 횡단하였습니다. 무려 143일 동안 5,084㎞를 뛰어서 갔습니다. 그가 마라톤을 한 목적은 "의족을 한 장애자도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나와 같이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떤 길로든지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로 이렇게 마라톤을 하는 동안에 온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원을 했습니다. 2340만불을 모금하게 되었고 기네스북에 최고 기금 모금가로 기록될 만큼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해 내었고 이 돈을 암 연구센터에 기증했습니다. 그는 사실로 불행했습니다. 어쩌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서서 이것을 새로운 기회를 삼았습니다. 좌절 없이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는 그런 생을 살아서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만큼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돈을 벌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4기가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첫째는 기도.
둘째는 기다림
셋째는 기대
넷째는 기적
기도, 기다림, 기대, 기적.. 그런데 기도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면 곧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나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역사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다리기는 하면서도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도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에 가면 "공포의 집"이란 이름을 가진 한 집이 기념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16세기에 스페인이 침략해 옴으로 네덜란드 국민들이 이에 항거하며 싸웠습니다. 이 때 스페인의 악독한 왕, 빌립 2세가 알바공작의 지휘아래 많은 군대를 보내어 집집마다 뒤져서 사람들을 찾아 죽이곤 했는데 한 모퉁이 집에 남녀 여러 사람이 숨어서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몰려 오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 떨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염소를 한 마리 죽여서 피를 쏟아 빗자루로 그 집 문밑의 문턱과 현관에까지 뿌렸습니다. 군인들이 그 집에 도착해서는 "이미 다 죽여버렸군, 이 문턱에 묻은 피를 봐"하고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값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거룩하고 깨끗하신 피를 우리를 위해 다 쏟아 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값없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수도사 헬레마커스가 어느 날 기도중에 로마로 가라는 영적인 음성을 듣고 로마 원형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때 한창 인기종목인 검투가 벌어져 피비린내가 나는 잔인한 경기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헬레마커스는 이 비인간적인 잔악성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는 검투장으로 뛰어 내려가 그 경기를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경기를 만류하던 이 수도사는 관중들의 야유속에 경기자의 칼에 의해 무참히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조금전까지 야수처럼 함성을 지르던 군중들이 죽은 수도사의 온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이 야만적인 경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헬레마커스가 자신의 피를 많은 사람이 보는 경기장에 쏟음으로 경기를 종식시켰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보혈을 흘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어 주셨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의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옛날에 두 형제가 살았는데 형은 착한 반면 동생은 난폭했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얘야, 그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바로 살자” 했지만 동생은 형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점점 더 악해졌습니다. 어느 날 밤에 후닥닥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납니다. 형이 놀라서 보니까 옷에 피를 낭자하게 묻히고는 눈이 뒤집혀 동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동생이 형을 붙잡고는 “형님, 나를 좀 살려주세요.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데 경찰관이 나를 지금 따라오고 있어요. 나를 좀 숨겨 주세요. 형님이 좀 도와주세요.” 그때 형님이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야, 옷 바꿔 입자.” 그러니까 동생이 피묻은 옷을 훌렁 벗었습니다. 형은 자기 옷을 벗어 동생에게 입혔습니다. 피묻은 옷을 형이 입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피했습니다. 경찰관이 달려왔습니다. 피묻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물으나 마나 형을 끌고 갔습니다.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형이 사형 집행되는 그 날 마지막으로 간수가 찾아와서 소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형이 조그마한 종이쪽지 한 장을 간수에게 건네주며 이걸 꼭 내 동생에게 전해달라고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편지를 전해 받은 동생이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를 위하여 이렇게 죽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나는 네가 사람을 죽인 피묻은 옷을 입고 죽지만 너는 부디 내가 준 흰옷을 입고 제발 착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먼저 죽는 형이 절대로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겠다.” 이 편지를 읽고 난 동생이 놀래 가지고 형님을 살려야 한다고 형장으로 뛰어갔습니다만 형은 벌써 죽었습니다. 그 후 동생은 형이 입혀준 그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옛날에 함께 깡패 짓을 하던 친구들이 찾아와서 유혹할 때마다 “아니야. 나는 내 형의 옷을 입고 있어. 나는 절대 그럴 수가 없어.” 라고 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피묻은 옷을 예수님이 입으시고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의의 옷을 더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덴마크의 국기는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의 유래는 1219년도에 왈뎀카왕이 군대를 이끌고 적군과 싸우러 가는데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보이더랍니다. 여기서 전쟁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싸운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부터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국기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프로농구 원년 3점 슛의 참피언인 정인교선수는 3점 슛을 넣을 때마다 국제 기아구호단체인 유니세프에 성금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인교선수 개인적으로 시작했던 일인데 이 소식이 사람들 에게 전해지면서 정인교선수가 3점 슛을 넣을때마다 뜨거운 박수함성과 함께 정성어린 성금을 내는 손길들이 모아져서 그 다음해 프로농구 시즌에 천만원의 성금을 유니세프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선수가 이런일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정인교선수가 처음 농구에 발을 들여 놓았을때는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집에 태어나 제대로 먹지 못해서 항상 체력이 딸렸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열심히 뛰다가 빈혈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그의 몸에 피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피는 보통 피가 아닌 혈액형 ‘RH-A"형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방송국으로 연락하여 전파를 타게 되었고 같은 피를 가진 익명의 크리스천으로부터 긴급 수혈을 받고 살아나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 되었습니다. 정선수는 그 때 자기에게 피를 준 사람이 크리스천임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서부터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 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바로 그 일이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넣어주는 헌혈도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 좋은 일이 시작될 수 있었다면, 하물며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는 만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보혈이므로 우리에게 흘러 내릴 때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섬기며 살아가야 됩니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해변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저편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장면들이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었다. 각각의 장면마다 그는 모래 위에 새겨진 두 줄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발자국이었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 걸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때쯤 그는 문득 길 위에 있는
발자국들이 어떤 때는 단지 한 줄밖에 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 그것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슬픈 시기마다 그러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는 하나님에게 물었다. "주여, 당신은 내가 일단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한다면 언제나 나와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들을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발자국이 한 줄밖에 없었습니다. 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당신은 정작 필요할 때면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 소중한 사람아! 난 그대를 사랑하며 결코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마다 그대는 발자국이 한 줄밖에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럴 때마다 내가 그대를 두 팔에 안고 걸어갔기 때문이다."
평생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보낸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만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칼라하리 사막 근처의 마보차에서 사자의 공격을 받고 왼쪽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바람에 평생 왼팔을 머리 위로 들지 못하는 불구가 된 리빙스턴은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설명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어느 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그 힘겨운 아프리카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리빙스턴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내게는 별다른 비결이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여러번 아셀트 선교사를 잡아먹으려고 아셀트 선교사 집을 밤에 침입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 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에 가서 잡아먹으려 하면 그 사람이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도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는 퍼뜩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 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가장 약할 때는 자기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때는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을 때입니다.
조크를 하나 하고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자기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럽니다. "야! 너보다 더 잘 달리는건 아무개 집 개다." "그래?" 그래서 그 개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개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보다 못한 놈이네." 합니다. 또 열심히 연습을 해서 "여러분, 오십시오. 제가 이번엔 이길 수 있습니다." 열심히 달렸는데, 골인점에 같이 도착을 했습니다. 똑같이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같은 놈이네."합니다. 더 열심히 연습을 해서 이번엔 개보다 먼저 결승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보다 더 한 놈이네."그랬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들으면서 이상한 것 안 느낍니까? 여러분, 왜 웃으십니까? 기준이 잘못되었습니다. 누구를 기준에 삼느냐에 따라 내 실력에 따른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가 하면 우리 인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닮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겠습니다
조크 한마디합니다!
한 여행자가 미국 그랜드캐니언.. 높은 절벽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갔다가 그만 가장자리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굴렀습니다. 그러다가 가까
스로 천행 중에 다행으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꽉 붙잡고는 간신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
해줘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
이다." 그러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당신이 거기 계신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나 좀 구해 주십시요"
"내가 구해 주마.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주님,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 아니라 새벽기도회에도 나갑니다. 헌금도 몇 달러씩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다.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
"제가 얼마나 하나님을 많이 믿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하나님을 믿어요."
하고 계속해서 강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좋아! 그렇다면 네가 붙들고 있는 그 나뭇가지에서 이제 손을 떼거라."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더니, 그러다가 이렇게 절규하며 부르짖었다.
"거기 위에 하나님 말고 다른 이 없소!"
요즘 미국에 사는 우리 재미교포 청년들 사이에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어떻게 선택하느냐? 돈키호테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돈 - 돈많고
키 - 키크고
호 - 호탕하게 활발하고
테 - 21세기의 테크놀러지에 강한 사람
그런 사람을 원한다 그런 것입니다.
일본 가토릭 작가 엘도 슈사꾸가 쓴 소설 <침묵>은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물론 베스크 셀러입니다. 일본 기독교인들의 순교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소설속에 후미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예수님 얼굴을 동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거냥 지나가면 사형을 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교도 판별법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포르투갈 신부 로드리고도 후미에 앞에 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일그러진 예수님의 얼굴을 울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차마 예수님 얼굴을 밟을 수가 없어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 상이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나를 밟아라. 본래 나는 밟히기 위하여 이 땅에 온 몸이다"
로드리고가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언제까지나 결정적인 순간에도 침묵하셨기에 나는 괴로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다. 너화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가 예수님 상을 밟는 순간에 닭이 울었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들려 주었던 닭울음소리였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처럼 그는 통곡을 하면서 나중에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시골 마을을 순회하면서 손님들을 태워 나르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버스 안에 손님을 가득 태웠습니다. 그리고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산을 굽이굽이 내려올 때마다 가속도가 붙어 차는 손살같이 내리막길을 질주했습니다. 차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는 가운데, 손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스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버스기사는 손님들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내리막길은 무사히 다 내려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다리만 지나가면 곧 언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차가 멈추어 서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차가 마을 어귀에 있는 다리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버스기사는 너무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다리 한복판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클락션을 급히 울렸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다리 옆쪽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큼은 유독 겁을 먹지 않고, 그 자리에 머뭇거리면서 그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기사는 순간적으로 아찔했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차는 다리의 난간에 부딪혀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승객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질주하게 되면, 아이는 차에 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버스는 그대로 질주해 버렸습니다. 아이는 차에 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차는 언덕에 이르렀고 자동적으로 멈추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차에 치인 아이 곁으로 뛰어왔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기사는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하염없는 눈물만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하나 둘씩 운전사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한 마디씩 했습니다.
"어떻게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 정비되지도 않은 차를 왜 끌고 나왔느냐? 난폭 운전수! 살인마!"
이런 등등의 폭언과 욕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뒤늦게 현장에 이른 한 청년이 그 광경을 보고서 승객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제발 좀 그만 하세요! 그 분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승객들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 청년을 쳐다보았습니다. 청년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버스기사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그만 괴롭히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성탄절은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이 못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며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해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북미 일대에서 사는 고기 가운데 크기가 1미터가 넘는 King Salmon이라는 연어가 있습니다. 연어는 매년 2월을 전후해서 알을 낳고 부화하게 됩니다. 새끼가 부화하게 되면 어미 연어는 곧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어린 새끼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미 거미의 잔등에 달라붙어서 어미의 살을 파먹고 사는 새끼 거미들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물이지만 새끼를 위한 어미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로서 거룩한 희생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예수만이 진리입니까? 많은 종교가 있고 더 많은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독단이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옹졸하고 협소하다는 뜻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학생에게 "자네는 무엇이 전공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수학과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수학과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학생에게 "2+2=얼마지?"라고 물었습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나를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독촉하듯이,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2+2은 얼마냐고?"라고 물었습니다. 정색을 하고 묻는 목사에게 학생은 "4"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왜 하필이면 4야, 5나 6이면 안되나?"라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어리둥절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거야 간단하지. 왜냐하면 정답은 4밖에 없으니까! 마찬가질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거든. 그러니 예수만이 유일한 길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라고 하였습니다.
유일한 것은 언제나 유일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고 바꾸고 싶어도 유일한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 2+2=5라고 하자"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그것을 동의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애인이 "2+2=4라고 고집하지 말고 이왕에 넉넉하게 6이라고 하자"라고 말하면 그것을 그렇게 하자고 동의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정답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만이 인생이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전할 수 없고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였던 헨리 뉴웬은 현대인이 앓고 있는 병을 세 가지로 진단했다.
① 고독의 병이다. 오늘 많은 현대인들은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고 Care해 주지 않는다고 고독해 하고 있다. 그것은 영적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② 적대감이라는 병이다. 심한 경쟁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서로 믿을 수 없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가서는 서로 미워하고 적대시하며 살아간다.
③ 환상이라는 병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라 거짓된 환상 속에 사로 잡혀 거의 미친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라스베가스 뿐 아니라 마약을 먹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환상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헨리 뉴웬은 이런 고독과 적대감과 환상의 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 오직 기도와 사랑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이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네 개의 C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즉 캐럿(carat), 컷(cut), 컬러(color),클래리티(clarity)입니다. 미국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같은 순서인 것입니다. 캐럿은 크기니까 사람도 주머니의 크기로, 컷은 모양이니까 생김생김 옷, 자동차 등으로, 컬러는 색깔이니까 피부의 색깔로, 클래리티는 순결로 곧 흠을 따지는 것이니까 도덕적인 행실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면에서 사람들에게 그럴 듯한 평점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빛속에 먼지처럼 드러나는 인간을 볼떄 걸작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한 무명의 병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저에게 순종을 배
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
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
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민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비참하게 만
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넓은 마
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당신에게 삶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
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모든 것을 주셨습니
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진정 믿는 자의 기도입니다. 오직 예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요 조각가요 건축가요 과학자입니다. 그의 나이가 43세 되었을 때에 이태리 밀라노의 로드비코 공(公)이 예수님 최후의 만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최후의 만찬을 완성했습니다. 12제자가 세 사람씩 그룹을 지어 양쪽에 앉고 중앙에는 예수님이 손을 들어 오른 손에 잔을 들고 계시고 그 좌우에 여섯 명씩의 제자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작품이 완성되면 절친한 친구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림의 잘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어디 있는가 의견을 듣는 것이 화가의 관례였기 때문에 친구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림을 본 친구가 깜짝 놀랍니다. 최대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특별히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있는 은컵이 너무 섬세해서 그 컵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들어 컵을 지워버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눈길을 끌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지우고 말았습니다.
들어오라 지성소로/히10:19-22
하나님은 모든시대,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특별한 교제의 장소, 만남의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처음 장소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두번째는 광야 가운데 있었던 장막, 성막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를 지나오면서 세 번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특별한 만남과 교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천국에서 그 분은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실 것입니다. 에덴동산, 장막, 성전, 예수 그리스도, 천국 --- 하나님의 소망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시대 우리와 함께 만나시고 교제하시길 원하셨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만나는 장소는 휴전선, 자유의 다리 넘어, DMZ에 있는 공동경비구역안이었습니다. 아무데서나 만나는게 아닙니다. 그 규정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무장지대 (非武裝地帶, demilitarized zone) - 국제조약이나 협약에 의해서 무장이 금지된 지역 또는 지대에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도 규정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특별히 한 곳을 택하여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시기 위해 지정된 장소를 택하셨습니다. 그 한 곳은 바로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무장이 해제된 곳이 남북한 회담장소인 것처럼 우리의 죄가 해제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 장소가 바로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장소를 성별하여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거룩한 곳을 지으라" 바로 거룩한 장소가 말 그대로 성소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소는 곧 하늘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소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계시하는 모형입니다. 성소를 알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2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셔서 만들게 하신 세가지 건축물이 있습니다. 노아 방주와 모세로 하여금 만들게 하신 성막과 솔로몬으로 하여금 짓게 하신 성전입니다. 따라서 이 세가지는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신 것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상징성이 강하며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막은 바로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거룩한 성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겼던 성막과 그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지성소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성막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습니다.
성막은 크게 3부분으로 지어졌습니다. 성소 뜰, 성소, 그리고 성소안의 작은 방인 지성소입니다. 이 세가지는 상징하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먼저 보기원하는 것은 바로 성소의 바깥의 뜰입니다. 이 뜰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예비하는 곳입니다. 그곳 뜰에서는 예배의 거룩함이나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막의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성소와 관련하여 세종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이 뜰에 머물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그저 성전 뜰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막 뜰에 머무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신앙은 감격이 없으며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성막 뜰에 머무는 신앙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접촉해 보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한 단계 올라가야 합니다. 성소로 나아가야 하고 그리고 마침내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를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맛보아야 합니다.
2. 성소까지 나아가는 믿음이 있습니다.
성소 안에는 떡상과 금 촛대와 향단이 있습니다.
(1) 떡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이 놓여 있는 상입니다. 하나님께 전 이스라엘을 바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은혜와 인도해 주신 사랑에 대해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감사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금촛대는 성소 안을 밝히는 빛입니다. 정금으로 만들어져 7개의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사장은 날이 어두워갈 때 불을 켰다가 해가 뜨는 아침에 불을 껐습니다. 이는 아무리 어두움의 권세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빛은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3) 향단은 향기로운 향이 계속 타오르는 곳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향취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입니다. 성소 신앙은 헌신과 감사의 신앙입니다. 빛과 소금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의 신앙입니다.
3. 지성소 신앙이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모셔져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성막의 심장입니다. 성막 안의 모든 것은 지성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들어가서 전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 제사장의 제사를 받으시고 전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으며 20절에서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누구든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지성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고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이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성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용서함을 받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린 새 길/ 히10:19-25
옛날 구약시대의 성전은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휘장으로 성소와 구별되었고, 그 안에는 언약궤가 들어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중앙에 향단과 좌우에 진설병을 놓는 상과 일곱 촛대가 놓였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단은 성소 앞마당에 있어서 제사는 성소 안이 아닌 마당에서 드렸습니다.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는 뜻으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레위기 말씀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이 주 앞에 가까이 갔다가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론은 당시의 대제사장이었고, 그 아들들도 제사장인데 지성소에 접근하였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지를 자세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보통 때에는 휘장 안쪽 거룩한 곳 곧 법궤를 덮은 덮개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1년에 한 번만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때도 그냥 들어가지는 못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갖춘 다음에라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6장 3절부터 28절까지에 대제사장인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절차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대단히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차단된 인간
왜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앞에서 본 대로 그런 절차 없이 접근했다가는 곧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죽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그 거룩한 빛 앞에 서는 순간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가 하나님 앞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뜻합니다.
이런 죽음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벽이 가려져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고, 대제사장인 아론이 일년에 딱 한 번만 복잡한 의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약함을 아시고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고 그 이름만 성소에 두게 하셨는가 하면, 예언자들을 통하여서만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배려를 오해하고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 혹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을 소홀히 하였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없고 그의 이름만 있는 성소가 그들에게는 불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전쟁에서 이겨도 자기들의 군대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어떤 기적적인 역사도 우연이나 자연적 현상으로 생각하였지,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 하셨다고 믿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지만, 이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많은 범죄의 역사를 기록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이나 혹은 간접적인 역사로만 그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이 세계를 더욱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떨어진 인간은 그의 본질인 영혼은 죽어버리고, 잠시 머물 천막과 같은 육체가 주인이 되어 점점 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없는 집에 나그네가 주인 행세를 하면서 인간의 모습은 더욱 추하게, 더욱 욕되게 변모되어 왔습니다. 바울은 이런 인간의 모습을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실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 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갈 5:19-21a
주인인 영혼이 빠져버린 육체의 행실은 죄악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이런 육체를 제어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이후에는 육체는 단순히 이 땅에 머무는 천막으로서만 기능(機能)해야지 그것이 간직한 본능이나 모든 욕망은 억제하고 더 나아가 그것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은 자살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육체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다 없애버렸다는 뜻입니다.
육체가 건강하다든지 아름답다든지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를 더욱 죄에 깊이 빠지게 할 독소(毒素)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건강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자들은 어떻게 하면 날씬해지고 예뻐질까 전전긍긍하면서 얼굴 모양을 온통 뜯어고치는데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잠시일 뿐 곧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은 늙고 병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건강에 집착하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疏遠)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육체는 우리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잠시 걸치고 있는 옷이나 천막, 혹은 하늘의 보배를 담아둔 항아리에 불과합니다. 본질은 우리의 영입니다. 영혼이 살 때 내가 산 것이며, 그 영혼이 건강할 때 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그 영혼이 날로 새로워질 때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예수의 피로 열린 생명의 길
오늘 읽어 드린 히브리서 10장 19절 이하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지성소를 가린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열어놓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전에는 그 휘장 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들어가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길이 산 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들어가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일년에 한 번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를 고하고 대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 없는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시는 휘장을 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져서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도 죽지 않고 오히려 그 영광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더욱 풍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그 휘장은 예수의 육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하여 육체를 입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내어 주어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殞命)하실 때 예루살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예수님의 육체가 깨어질 때 휘장도 찢어졌다는 것은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육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판단력,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었더라면, 아무리 육체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예수의 그 육체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육체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그는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그는 온전한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되찾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생명의 담을 허시고 생명을 하나로 통일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죽어가던 인간의 생명이 하나로 통합되므로 죽어가던 우리의 생명이 변화되어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바로 이런 생명의 통일을 상징하였습니다.
깨어져야 할 육체
예수님의 육체가 깨어지면서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은, 우리가 스스로 갇혀 있는 육체의 삶을 깨트릴 때 우리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는 육체의 생명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생명 이상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갇혀 그 안에서만 생각하였고, 그 안에서 행동하였으며, 그 육체를 따라 이루어진 문명과 문화 속에서만 살았습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룩한 문명과 문화는 인간의 계속 비극의 세계로 몰고 갔을 뿐 아니라 지구를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갇힌 육체의 세계를 깨트려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알게 되면서 이제까지 우리가 갇혀 있던 이 세계가 너무 좁고 작은 세계임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넓고 큰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넓은 생명의 세계로부터 우리를 차단시켰던 죄의 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허물어지면서 찬란한 생명의 빛이 어두웠던 이 땅의 생명의 세계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두려워서 꼭꼭 닫아걸었던 마음의 문들을 활짝 열어야 하겠습니다. 찬란하게 비치는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우리 안에 받아 드려서 우리 속에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곰팡이들을 다 청소해 내야 하겠습니다. 이 땅의 이념에 갇혀 있던 우리의 생각을 활짝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려서 우리가 잡고 있던 이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만을 생각하며 거기에 매여 자유함이 없었던 우리의 삶에 위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하늘의 영광과 지혜와 그 풍성한 생명의 약속들을 받아드림으로 옹졸하고 편협하던 삶을 바꾸어 보다 크게 생각하고 보다 멀리 보며, 보다 너그럽게 받아드릴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땅의 삶에 매여 허덕이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하늘 나라의 풍성한 기업을 바라보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의 삶을 이룩해야 하겠습니다. 육체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가꾸기 위하여 쏟아 붓던 시간을 아껴서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찬송하며,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두가 육체를 깨트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질그릇 같은 육체가 깨어질 때 그 안에 담긴 참 생명의 보배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 사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고 하였습니다(갈 2:20).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한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던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삶의 방식, 그가 가졌던 모든 이념과 사상과 생각들을 버리고 새로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깨어질 때, 우리의 옛사람이 죽을 때, 우리의 이 땅에 매었던 모든 생각이 바뀔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큰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우리의 죄가 다 씻김을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옛것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으니 두려워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은 그의 생명의 세계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에 매어 허덕이지 말고 하나님의 넓고 큰 생명의 세계를 호흡하고 거기로부터 오는 생명의 기운을 받으며, 그 새로운 생명 문화를 배우고 익히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 생명을 받아드리는 호흡입니다. 따라서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세계를 보며, 그 음성을 들으면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직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예배가 지루하고 의미가 없지만, 열린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자리며, 감사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을 굳게 잡읍시다.
이 새로운 생명의 세계는 너무 크고 너무 넓으며 너무 놀라워 우리가 때로 믿지 못하고 의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명의 세계를 믿지 않고 여전히 육체의 삶에만 매어 그것을 위한 개발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틀림없는 것이며, 특히 성령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심을 통하여 보증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린 생명의 새 길은 확실하며 변경되지 않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고난이나 역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난이 올수록 우리가 고백한 그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할 것이며, 어려울 때일수록 이 땅의 미련을 끊고 더욱 하나님의 생명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영원한 생명의 빛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여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 이 땅에서 얻은 관습과 문화, 이 육체의 생명만을 소중히 여기던 어리석은 집념, 본능적인 육체의 욕망을 따라 떠내려가던 생각 없는 삶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에서 체험한 생명의 힘과 사랑으로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바르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죽음을 뜻하던 지성소의 휘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찢어지면서 생명의 새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제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이 휘장 사이로 열린 생명의 길로 나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하신 온갖 생명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창녀가 병에 걸려 배가 불룩하여 지고 복수가 차며 대소변을 잘 보지 못 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이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한 전도인이 전도지를 주고 갔습니다.『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런 말씀들이 눈에 띄게 들어왔습니다. 그는 멀리 지나가는 전도인을 다시 불렀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나 같은 것도 예수 믿을 수 있나요?"
「누구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무슨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지요」
"지금 용서 받을 수 있나요?"
「지금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나 믿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그 여인의 눈에는 눈물이 뒤범벅이 되었답니다. 펑펑 흘리는 눈물이 요를 완전히 적셨고.... 그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배 한 쪽이 펑하고 터졌습니다. 피가 천장과 온 벽에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순간적으로 병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니 병뿐만 아니라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로 그를 살리시고 치료하신 것입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선교를 하여 한 노파가 예수를 믿게되었다고 합니다. 그 노파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같은 동네 친구들이 이 노파에게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을까요? 따지고 설득하기 위해서 찾아왔겠지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그 노파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니?" 그러자 이 노인이 아주 멋있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믿던 많은 남신과 여신들 가운데는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어!"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죄인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입니다.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메트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주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마11:2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