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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창작과비평) ■
만월주의보
김지윤
담장 밑에 표정이 떨어져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추고 바람을 불어넣으니
달입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구름도 집을 떠납니다
두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씻어도 닦이지 않는 표정이 있습니다
혀를 입술에 대보지만 나는 맛이 없습니다
나는 내 맛을 알고 싶습니다
입을 벌리고 달콤한 생각을 하며 달콤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달을 보며 수박이라고 말하면 달에도 줄무늬가 생길까요
눈을 감고 손을 더듬거리며 이건 냉장고 이건 티브이 이건 의자
모서리에 등을 기대앉으면 불안도 지탱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춘 달이 언제 저곳까지 차올랐는지
봄이라고 말하는 동안 봄이 오고
지구의 모든 목련나무 꽃들이 달로 한데 모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나를 본다면 어떤 표정으로 보일까요
내가 다시 지붕이나 마당, 골목에 내려앉습니다
- 2015년 <창비> 신인상 당선작
■ 김지윤 시인
- 1985년 전남 나주 출생
- 대진대 국문과 졸업
《 심사평 》
... 중략
김지윤을 당선자로 뽑는다. 그의 시는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에 비해 소탈하다. 그래서 천천히 마음을 움직이는 개성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기계적으로 학습된 수사에 기대지 않고 문장의 흐름 위에 자신의 정념을 위치시키는 방법론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이것이 반복된 학습의 결과라면 그의 시는 시적 기술을 극복한 사례이며, 반대로 절실한 표현의 효과라면 그의 정서는 자체로 시적인 결을 이룬다고 할만하다. 요컨데 그의 시가 거대하거나 완벽하거나 새롭게 때문에 심사자들이 그의 시를 꼽은 것은 아니다. 시적 전략과 과잉의 포즈가 만연한 시단에 비추어, 그가 보여준 직정과 낮은 어조와 소박한 도달이 좋았다. 당선자는 이 점에 대한 반성과 자부를 함께 가져야 할 것이다.
독자가 없으면 시는 존재할 수 없다. 시를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의 속에서 가끔 잊게 되는 말이다. 심사자들은 첫 독자로서 작품에 감동하기를 원했다. 아쉽게 당선하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격려를,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 심사위원 : 김소연. 백상웅. 신용목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흥문학상) ■
빨간 장날
이여원
빨간 장날에는 슬쩍 훔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하늘이 맑아서 예비용 서답이 없는 처녀들은 불안합니다 음전이 할머니도 오늘만큼은 빨간 몸빼를 갈아입고 빨간 장미 무늬 양산을 쓰고 왔군요 빨간색에 민망한 파란꼭지를 단 파프리카가 파라솔 아래 담겨있고요
빨간 날은 빨강들이 옹기종기 건너오고 있습니다 그날은 기상예보처럼 빨간 게 무겁고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운수처럼. 장날은 빨간 쉼표 같은 날, 아랫배부터 살살 흥이 올라 파장까지 번져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되바라진 처녀들이 올 적마다 주머니가 불룩해져 가고 얼굴은 빨개집니다 초록색 지붕의 범수 아제도 하얀 삼베적삼에 빨간 목수건 걸치고 붉은 팥을 경운기에 싣고 왔군요 모두들 꽁꽁 숨는 빨간색과 드러내는 빨강이 숨바꼭질하듯 합니다
월요일의 빨간 수탉벼슬을 따라가면 빨간 일요일이 나오고 일요일 처녀 일요일 소녀 일요일 폐경들이 왁자한 장날입니다
모든 빨강은 식욕의 끝에서 자라고 있는데 흰 바지 밑에 빨간 양말 아저씨는 왜 나이가 들수록 빨간색을 묻히려고 할까요
구름의 한쪽 끝에서 빨간색이 터집니다
아슬아슬한 나이들이 모여들어 뭉게구름을 만듭니다 빨간 장날이 되면 사르르 아픈 배 챙겨 온 새털구름은 다 흘러 가버리고 발을 동동 구릅니다 빨간 고추잠자리 서너 마리가 날고 서쪽으로 뉘엿거리는 하늘빛이 붉습니다
- 2015년 <시흥문학상> 당선작
■ 이여원 시인
- 1957년 경남 진주 출생
-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집 <빨강>
《 심사평 》
요즘 몇 몇 심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사위원들의 중론은 ‘시 참 잘 쓴다’다. 잘 쓰는 데 막상 뽑자고 들면 선뜻 손에 잡히는 작품이 없이 망설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쓴 시들’의 공통점은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점이다. 잘 쓰긴 했으나 그 시들이 삶의 매듭 매듭에서 간절히 흘러나왔다기보다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을 잘 다루는 것이지 시의 본질, 삶의 본질에서 노래되어 나온 시가 아니란 얘기다. 공허한 말의 성찬이다. 제품화 혹은 규격화 되어간다고나 할까? 되려 서툴고 어눌한 시를 눈여겨보게 된다. 거기에서 따스함과 시의 본질을 보게 된다. 시의 울림 대신 기교가 차지한 셈이다.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빨간 장날>을 보내주신 이여원 씨의 시는 우선 독특한 색감에 초점을 맞춘 점이 참신했다. 우리네 삶의 낮은 자리요 소박한 욕망의 거리라고 할 수 있는 ‘장날’의 풍속을 ‘빨강’에 대비시키다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발상은 아니다. 그만큼 발랄한 시선으로 포착한 장날이지만 발랄한 세계만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 남녀노소, 희로애락이 여러 색채의 대비를 통해 스러져가는 청춘과 인생을 은유화해 들어간 점이 좋았다. 사랑스런 풍속화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워킹 데이> 의 김말희 씨의 시도 활달하다. 어느 날 문득 ‘걷는다’. 오랜 만에 걷게 된 감격인지 아니면 ‘걷는 것에 대한 의식’인지 알 수 없으나 새삼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처럼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으랴. 걸음걸이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모두 긍정의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삼 몸으로 만나고 표현된 시간과 공간의 실감이 좋았다.
시에 순위가 있다는 것처럼 난센스도 없다. 그러나 어쩌랴. 운이 부족한 여러 분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전하며 ‘순위’에 든 분들에게 우주적 축하를 보냅니다.
- 심사위원: 윤제림, 장석남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진주가을문예) ■
달과 목련과 거미의 가계
김미나
달 거미 한 마리 지붕을 밟고 목련나무로 걸어와요
거미의 집을 허무는 게 아니에요,
물웅덩이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솜 트는 기계 멈춰있는 집 앞의 목련나무
꽃송이 안으로부터 달이 솜털을 짜기 시작했나봐요
자동차 바퀴에 찍힌 고양이 울음소리도 되살아나요
솜이불을 짜는 소리 할머니의 귓바퀴에 감겨요
나는 벼락처럼 자라난 목련나무의 꽃과
달의 이빨들이 하나의 틀을 이루는 소리를 생각했어요
먹구름을 집어 삼킨 듯 검게 물드는 것들은
솜틀집 앞 배수구에 걸려있나봐요
그늘 쪽에 얼어있는 지난 봄눈 덩어리들이
아지랑이를 피워 올려요 아직 꽃샘추위는 발끝을
야금야금 베어 물고 있었죠
그러니까 목련들도 밤의 이불을 덮고 싶어
나뭇가지 침대에 꼭 맞는 그믐이 올 때까지
할머니의 꽃상여를 짜듯
깊은 어둠을 지우려고 달의 이불을 짜고 있나봐요
봄눈 녹자 귀신도 볼 수 있다는 물웅덩이엔
달과 목련과 거미가 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는
소문이 고여 있었어요 이불 한 채에 그려진 목련나무,
노란 나비들이 먼저 날아와서 날개를 풀고 있었어요
- 2015년 <진주가을문예> 당선작
* 당선 당시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천재시인의 탄생이라고 다들 감탄했다는데..
《 심사평 》
예심을 거쳐 열다섯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모두 나름대로의 발견과 인식은 있었으나 새로운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시 쓰기는 유행도 없고 왕도도 없다. 따라 쓰기도 흉내 내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한번 겨뤄볼만한 일이다. 가을문예는 바로 그 길을 가는 등용문이다.
시인에게 발견이 새로운 가치라면, 신인을 발견하는 일도 새로운 가치라 할 수 있다. 그 가치란 신인답게 참신하고 패기 있으며 앞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뽑는 일이다. 그래서 수많은 시들 중에서 골라야 하는 고충을 뽑는다고 말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시는 김성진의 '육분의 자리' 외 8편과 김미나의 '달과 목련과 거미의 가계'외 9편이다.
'육분의 자리' 외 8편은 사물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게 넓고 어떤 존재론적 고뇌와 성찰도 보였으나 시가 너무 직설적이어서 언어적 기량을 뛰어넘는 원초적 힘이 미흡한 점이 아쉬웠다. 그 점만 깊이 생각한다면 내적인 리듬이 묘한 울림을 주는 좋은 시를 쓰리라 믿는다. 반면에 '달과 목련과 거미의 가계' 외 9편은 우선 제목에서부터 개성이 묻어난다. 그 자체가 가볍게 자연과 하나의 지경을 이룬다. 발상이 참신하고 삶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섬세한 언어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돋보이면서 섬세하고 연연하다. 말에 정감이 있고 상상력의 발랄명랑함이 있다. 그럼에도 은은한 슬픔을 건네준다. 작위적이지 않고 상투적인 말도 없다. 그래선지 그의 시에는 현실 너머를 생각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독자를 느껴져서 알게할 뿐 따라서 납득시키려 하지않는 것이 그의 장점이다. 앞으로 생의 성찰과 내공이 쌓인다면 매우 넓은 시의 지평을 가질 것이다. 야생의 향기를 오래 간직하기 바란다.
- 심사위원: 천양희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문학사상) ■
봄의 대곡선
이필
목련이 양떼처럼 봄밤을 물고 가면,
목동은 별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별과 별을 이어보는 손끝, 차가운 너의 입김이 어둠의 곁을 환히 아프게 하겠다 새로 첫 잎이 돋고 백목련 가지는 봄의 대곡선을 지나 동쪽으로 조금씩 고개를 기울였지 여기는 잊힌 별 아크투루스, 별은 사람으로부터 돋아나고 어느 수도사의 필사본에 찍힌 새벽처럼 먼 곳에 닿을 안부 같은 것, 잎과 잎이 포개어져 봄의 한 생을 이룰 때
수 억 광년, 별들도 저무는 사이
북극성처럼 가지의 길을 알려주는 목련꽃도 없이
처녀자리 아래 발굴된 별의 화석
돌 속으로 스민 입맟춤을 누군가 긁어내면
낮선 온기를 가만 흐느낄 텐데
목련나무 한 그루
제 안의 꽃봉오리로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
- 2016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작
■ 이필 시인
- 1972년 경북 영주 출생
- 숙명여대 영문과 졸업
《 심사평 》
신인문학상 심사를 하면서 등단 신인의 조건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고유하고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음색과 음량의 경우와도 같아서 높거나 낮은 음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제각기 다른 느낌의 음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조건은 얼마간은 단련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한 편의 시에는 아주 정교하고 치밀한 수학적 계산이 들어 있다.”라고 말한 이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말은 상당한 정도의 설득력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수련을 통해서 시의 수준이 향상되는 것이고, 시의 수준이 고르게 유지되려면 한 편의 시가 보통으로 갖게 되는 운영의 규칙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들은 강주 씨의 <두뇌의 겨울은 생략이 가능한 정원> 외 9편, 유선영 씨의 <터널> 외 9편, 이필 씨의 <봄의 대곡선> 외 9편이었다.
강주 씨의 작품들은 독특했다. 행간의 이격이 컸지만 묘하게도 의미가 연결되고 있었다. 하나의 시어가 갖고 있는 파장을 연속하는 다른 시어와 고의적으로 충돌하게 하는 작법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고백적인 사색에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유선영 씨의 작품들은 정성을 들여 정밀하게 잘 만든 느낌을 주었다. 작품들의 수준도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나 사건의 속성을 단언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 단언의 내용이 신선하지만은 않았고, 이런 단언이 습관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아쉬웠다.
고심 끝에 <봄의 대곡선> 외 9편을 보내온 이필 씨를 신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필 씨의 작품들은 생명세계에 대한 연민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꽃송이를 “저 형형한 산소”라고 써서 꽃의 광채와 존귀함을 표현하거나, “목련이 양 떼처럼 봄밤을 몰고 가면”이라고 써서 하나의 생명이 갖고 있는 기운을 역동적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한 편의 시를 성심껏 완성하려는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이필 씨의 수상을 축하드리며 다소는 조금 늦게 신인으로 등단한 만큼 더 부지런히 정진해서 우리 시단을 새롭고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문정희, 문태준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경북일보 문학대전) ■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윤옥란
매미 허물이 상수리나무 허리를 움켜잡고 있다
속이 텅 빈 껍질은 한때 어둠에서 지냈던 몸이다
땅속에서 꿈틀거리며 말랑거리던 투명한 빈 몸,
수직 금 긋고 등가죽 찢고 나왔다
말랑거리던 몸이 햇빛에 닿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적들의 신호를 알려주는 은빛 날개의 보호막은 점점 두꺼워진다
비바람 몰아쳐도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천상의 소리 듣는다
상수리나무 빈집에서,
지금 나는 바람도 햇빛도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골방에서
가시 같은 눈초리와 습한 외로움을 등에 업고 있다
낮에 두고 온 무거운 짐들은 잠시 무게를 떠났다가
귀가 열리는 순간 다시 생의 관절을 앓는다
소리를 떠난 적 없는 귀는 듣는다
영영 아물지 않는 산고의 가로줄무늬 빈집을 내려다보며
종일 여름을 등에 업고 반짝이는 소리를,
환상이 숨 쉬던 집
제 살의 온기를 묻고 나오던 집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내 온몸의 뼈가 뜨끔하다
어둠을 털고 나온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매미의 미라는 시의 표본,
내 삶의 도감이다
- 2015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대상 수상작
■ 윤옥란 시인
- 1961년 홍천 출생
-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 2018년 <미네르바> 신인상 수상
《 심사평 》
"시 읽기의 즐거움과 경쾌함을 주는 시"
응모작 1,634편 중에서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화', '천국 가는 버스', '물의 혀', '버티기', '모래의 달' 등 6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숙고한 끝에 간추린 시편은 윤옥란의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항로의 '어화', 고정옥의 '천국 가는 버스', 이희섭의 '물의 혀' 제씨의 작품을 두고 고심을 했다.
심사를 맡아보고 있는 선자들이 기대하는 시각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언어를 다루는 노련함과 완숙미에 거는 기대로 모아진다. 세련되고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시풍보다 자기 목소리가 담긴 작품을 원한다.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와 '어화' 두 편을 놓고 선자들은 오랫동안 숙의했다.'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진지한 데가 있었다.
시를 끌고 가는 힘도 있고, 리듬감이 있고, 잘 다듬어진 잘 빠진 시로 볼 수 있다. 3연의 "말랑거리던 몸이 햇빛에 닿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적들의 신호를 알려주는 은빛 날개의 보호막은 점점 두꺼워진다"같은 표현은 환상적이다. 시 읽기의 즐거움과 경쾌함을 주는 시다.
'어화'는 자기 목소리를 갖춘 신선감이 돋보였다. 체험에서 나온 시다. 2연에 "집어등 제 몸 밝히는 순간 피어나는 어화 한 송이/ 어두운 바다 위 배 한 척 꽃이 피는 순간이다/ 실타래 풀어내듯 낚싯줄 내리는 사내들의 팔뚝 위로/ 지나온 시간들 불거진 심줄로 솟아나다"같은 표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연 "만선이라는 이름의 미래호/ 해안선 저 끝에서 어화둥둥 다가온다"는 표현은 고된 바다 생활 속에서도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 시에는 환상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그 깨달음의 끝에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고정옥의 '천국 가는 버스'는 발상에 선자들을 사로잡았으나 소박함 때문에 신뢰감을 끌어내지 못해 아쉬웠다. '물의 혀'는 시어를 다루는 솜씨와 서술력이 돋보였지만, 시는 없고 언어의 옷차림만 현란하게 펄럭이고 있고, 순진한 아포리즘(aphorism)이 화장을 하고 그럴듯한 시로 변모하고 있다. 아직은 글쓴이 자신의 입안에 든 소리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감을 준다.
결국 '어화'보다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가 보수주의 시풍의 기교와 기법을 흡수하고 그 위에 새로운 자기 목소리와 개성을 얹었다는 점에서 대상작의 영예를 획득한 것이다.
- 심사위원: 도광의, 조영일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김유정문학상) ■
고물상의 봄
어향숙
어린 날의 보물창고 필순이네 고물상
마당에는 꿈을 재던 커다란 저울이 있고, 그 옆 벽에는 깨진 거울이 걸려있어 곧잘 우리의 마음을 들키곤 했다 버려진 뾰족구두에 헐렁한 원피스를 걸치고 절뚝거리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볕이 잘 드는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배는 부르지 않아도 빈 깡통들이 차려주는 밥상을 소리 내어 맛있게 먹었다 가끔 엿을 고던 가마솥을 빡빡 긁어 입천장에 붙이고 그 달콤한 맛에 찐득이는 손으로 자주 솥뚜껑을 열었다
양손에 빈병 하나씩 들고 아이들이 코를 훌쩍이며 뛰어왔다 담 밑에서 별꽃들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려주었다 훌쩍 자란 우리 키 만큼 나팔꽃이 담벼락을 타고 올랐다
고철더미에 엉덩이를 걸친 금성흑백 텔레비 위에서 겉표지가 떨어져 나간 순정만화를 읽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던 캔디와 나의 첫사랑 테리우스를 만났다
마당가 민들레꽃은 자꾸 결말을 재촉했다
납작 엎드려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가슴이 부풀 때마다 푸른 하늘로 꽃씨를 날려 보냈다 그 꽃씨를 따라 우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 2016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당선작
■ 어향숙 시인
- 1967년 강원 속초 출생
- 경희사이버대학원 문창과 졸업
- 시집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
《 심사평 》
"사물들이 환기시켜주는 구체성 돋보여"
문학은 대체적으로 인간과 그 삶을 표현하고자 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서 사람의 체취와 삶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있다 하여도 피상적이거나 어설픈 수사에 불과할 뿐. 이를테면 살아가는 일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움은 보이지 않았다.
‘로댕의 의자’는 언어에 대한 단련이 상당했으나 여타 작품들이 그것을 도와주지 못했다.당선작인 ‘고물상의 봄’은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사물들이 환기시켜주는 삶의 구체성이 돋보였다. 다만 추억과 그리움에만 머문 생각을 좀 더 확장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 심사위원: 이상국 정현종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문학과 사회) ■
열 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강혜빈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는 편지를 써 오라고 했어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에게 내주는 특별 숙제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 연필 끝에 꾹꾹 뭉쳐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해야 더 무섭지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모르는 아이가 빳빳한 채로 상장을 받고
종례가 끝나면 답장이 왔어
아니, 너희가 아니라 너지,
안으로 접힌 귀 토끼의 가장 단순한 장점
만져보고 싶어 3분의 1로 나뉜 귀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어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
명치를 찌르면 실내화가 미끄러지는 미술
복도 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봐
부풀어 오른 선생님, 시리도록 하얀,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 2016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 당선작
■ 강혜빈 시인
- 1993년 성남 출생
- 서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시집 <밤의 팔레트>
《 심사평 》
힘들었고 부끄러웠고 이상했다. 6인용 책상 위에 가득 놓인 투고작들을 하나하나 책상 아래 종이 상자로 옮기는 일은, 쉽지도, 자랑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았다. 시를 계량화하는 노동이라니. 나는 비로소 빌라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심사에 참여한 소감을 쓰는 지금도, 이 이상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시를 쓰기 시작한 뒤로, 시는 나에게 목적이었을까, 수단이었을까.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시인데, 죽기 살기로 쓰는 시인들이 보낸 시들이 책상 위에서 상자 안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중 다섯 편의 시가 이 책에 실렸다. 상자 안의 시인들에게 용기를 내라는 말은 사치이고, 오늘도 이토록 진지하게 시를 대하는 문청들이 있다는 상찬은 공직선거용 구호와 같을뿐더러, 뽑힌 시인에게 축하를 건네는 건, 원조교제를 사랑이라 항변하는 아저씨들의 변론과 같을 것이라서, 모두 생략한다. 다만, 힘이 들었으니, 상자 속의 시인들에게 조금 덜 미안하고, 부끄러웠으니 '당신'을 몰라본 저를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고, 이 모든 것이 이상하고 이상했으나, 그럼에도 한 편, 또 한 편, 종이를 넘길 때마다, 문득문득 나를 아득한 곳으로 이끌어 눈물 나게 한 '당신'의 문장들에게, 두 눈 지그시 감고 안부를 전한다. - 최하연(시인)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예심 내내 다소 엄격한 잣대로 작품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응모자들의 이름을 바꾸어 읽는다 해도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편들. 그야말로 잘 만들어졌다고는 여겨지는, 그러나 텅 비어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써나갔는가, 자기만의 언어를 어디까지 밀고 나갔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선뜻 손을 들어줄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최종적으로 정화연, 베이지, 백선유르 강혜빈의 시편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갔다. 정화연은 내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쓴다는 점이 시인으로서 좋은 덕목으로 여겨졌으나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내면의 발화점이 사라진 자리에서 써 내려가게 될 무엇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 베이지는 이미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언어와 놀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곧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백선율은 담백한 어조가 인상적이었다. 허나 절제된 언어로 써 내려갈 때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감당해야 될 무게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강혜빈은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활달한 어법을 가지고 있었다. 시적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몇몇 안이한 문장들이 아쉽기도 했으나 다양한 이미지들을 조화롭게 불러와 한 편의 시로 구성해낼 줄 안다는 점에서 이후에 써 내려갈 시편들도 기대하게 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오랜 낙선의 날들을 떠올리며 당선되지 못한 다른 분들께도 몇 마디 전하고 싶다. 당선작과 낙선작의 차이는 실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심사는 그저 하나의 편견 정도로만 여기고 계속해서 자신만의 시의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고 싶다. 걸어가는 그 길이 어둡고 무겁다 해도, 걸어가는 내내 당신 혼자만이 아니라고. 당신의 시가 당신의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오늘의 이 어두운 눈을 비웃듯 번쩍이며 솟아오를 또 하나의 시의 얼굴을 기대해본다. - 이제니(시인)
총 507명이 응모한 올해의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양적으로 작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소위 '서정시'라고 광범위하게 지칭되는 전통적인 계열의 시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예년의 심사평에서도 유사한 소회를 밝힌 바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에 촉발된 다양한 시적 실험의 파장과 영향이 어느새 안정적인 방식으로 시 창작의 현장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 관계나 모방이라는 단순한 말로 충분히 아우를 수 없을 만큼 이러한 변화의 폭과 깊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인 이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에 대한 통념의 파괴가 역설적으로 시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통념을 낳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낯선 감각으로 능란하게 기록하는 응모작들이 많았지만, 응모자들이 구가하고 있는 자유가 시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생략하고 포기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이 매개되지 않은 날 선 언어들을 장황하게 전시하도록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며, 낯설고 특이한 이미지와 단어들을 조합하면 곧바로 시적인 문장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안이한 태도 역시 자주 목격되었던 것이다. 1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자들의 작품들을 좀더 단호하고 꼼꼼하게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인데, 그 결과 최종적으로 정솔아, 베이지, 백선율, 정화연, 강혜빈의 작품들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베이지는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기성의 의미를 파산시키고 새로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문하려는 의지로 충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험적인 의지가 시의 언어를 작위적으로 포박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솔아는 시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조성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으며 시적 긴장이 일어서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시적인 정황과 순간을 연출하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시의 전체적인 구조를 희생시키는 경우를 종종 발견했다. 백선율은 겉으로는 단아하고 미니멀해 보이지만, 현실과 꿈의 경계를 청신한 감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응모한 시편들만으로는 그의 시가 지닌 스펙트럼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전반적으로 시들의 색채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정화연과 강혜빈의 시였는데, 두 응모자의 작품들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색채가 서로 달랐다. 우선 정화연의 [유원지]외 9편에서는 응모자 자신이 체험이 시로서 강렬하게 육화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한 폭력과 고통을 소재로 자신의 일상과 육체를 낯설게 되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시적 언어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반면 강혜빈의 [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 9편은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산개해나가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독자를 유혹하듯, 매끄럽고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시들 사이에는 다소 편자가 있었으나 시적 진술들이 조성하는 리듬감도 매력적이었으며, 여기에 아이 화자 특유의 자유로운 화법이 더해져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와 같은 감각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듯하다. 오랜 습작을 통해 단련된 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숙성을 거치지 않은 가능성이야말로 한 시인의 장점을 더욱 만개시키는 창조의 원천이라는 생각 끝에 강혜빈을 당선자로 결정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응원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
27회 지용신인문학상 박청환 씨 ‘배웅’ 선정
“뜨거운 용광로 보다 따뜻한 화롯불 같은 시 쓰고파”
[동양일보 김미나 기자]●27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 박청환 씨
27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박청환(49·사진·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씨의 시 ‘배웅’이 선정됐다.
동양일보와 옥천문화원이 주관하고 옥천군이 후원하는 지용신인문학상은 충북 옥천이 낳은 한국 시문학사의 우뚝한 봉우리 정지용(鄭芝溶·1902년 5월 15일~1950년 9월 25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한국문단을 이끌어갈 역량 있는 시인 발굴을 위해 제정된 상이다.
이번 공모에는 해외를 비롯한 전국에서 316명이 2120편의 작품을 응모했다. 이 중 시 ‘배웅’은 “비백(飛白)과 약졸(若拙)의 솜씨가 긴 여운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당선작에 선정됐다.
응모작들은 유종호(이화여대 명예교수‧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문학평론가와 오탁번(고려대 명예교수‧원서문학관 관장) 시인이 심사했다. 시상식은 10월 14일 목요일 오전 11시 옥천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리며 당선자에게는 5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김미나 기자 kmn@dynews.co.kr

●당선소감
‘좋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늘 생각했습니다. 기술적으로 화려하거나 심오하게 어렵거나…. 이 둘은 일단 내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내게 남은 건 작고 쉽고 가난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좋았습니다. 작은 것일수록 진심을 꽉 채워 담을 수 있었고 가난할수록 따듯했습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거대한 용광로보다 고구마를 묻어 놓고 둘러 앉아 부젓가락 헤집으며 가래떡을 구워먹는 화롯불 같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등단이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옥천문화원, 동양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물에도 입이 있다는 것과 그 입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시인의 몫이라는 걸 알게 해 준 마경덕 시인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동료이자 선배이자 영원한 글쓰기 멘토인 이한주 시인, 아니 한주형! 고마워요. 오진엽 시인이 그랬던가요. 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내게도 그래요.
마지막으로 책 본다고, 글 쓴다고 툭하면 방문 닫고 처박히는 아빠와 남편을 그런대로 방치(?)해 준 두 아들과 마눌님, 고맙고 사랑합니다. 감사할 사람이 많은 나에게 또한 감사합니다.
●당선작
배웅 / 박청환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팅기며 목놓아 울어대는 통에
십 리 오솔길 급기야 어미가 동행했다
장날 마실 가듯
어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 냄새 맡다가
나비 좇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라 겅중겅중 뛰어와
마른 젖통 툭툭 치받던 길
아가, 주인 인상 좋아 뵈더라
외양간 북데기도 푸짐하더구나
말 잘 듣고… 잘 살거라
낯선 외양간에 울음 떼어 놓고
돌아선 울음
달빛 앞세워 새끼 발자국
되밟아 오는 길
큰 눈에 별 방울 뚝뚝
<약력>
1972년 충북 제천 출생
수원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KORAIL 1호선 전동열차 승무원
2017년 20회 공무원 문예대전 은상 수상 시부문 ‘가장자리’
●심사평/유종호 문학평론가·오탁번 시인
비백과 약졸의 솜씨가 빼어난 작품
27회 지용신인문학상은 316명의 응모자가 총 2120편의 작품을 보내와서 어느 해보다도 양적으로 풍성하였다. 이렇게 시인지망자가 폭발적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현상은 현대사회가 아무리 물질만능의 시대이고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정보만능의 시대이지만 인간이 지닌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는 오히려 더욱 소중한 정신적인 가치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현대시사의 드높은 봉우리인 정지용 시인의 시적 성취는 이미 우리 민족이 지닌 원형적 상징으로 만고불변의 역사적 사실이 된 지 오래다. ‘지용신인문학상’은 지용이 도달한 문학적 가치를 되새기면서 그가 이룬 모국어의 시적 성취 앞에 겸허히 경배 드리는 시인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메밀묵밥’(윤영규), ‘구름 수선소’(최영희), ‘버슨분홍빛 소풍을 마치며’(문예진), ‘저 오름으로 가’(김미경)와 ‘배웅’(박청환)이 최종까지 논의된 작품이다.
‘메밀묵밥’과 ‘구름 수선소’는 시창작의 전형적인 답안처럼 단정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개성적인 파격이 안 보여서 아쉬웠다. ‘버슨분홍빛 소풍을 마치며’와 ‘저 오름으로 가’는 개성적인 기교가 돋보였지만 그것이 시의 핵심과 만나 조응하는 시적 의미가 모호하고 평범하였다.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배웅’은 너무 쉽고 무덤덤한 작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잠깐 호흡을 멈추고 찬찬히 읽으면서, 어미 소와 송아지의 울음과 눈물이 행간에 숨어서 시의 영혼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알아채면 깜짝 놀라게 된다.
손끝의 기교만을 뽐내면서도 실상 시적인 알맹이가 부족한 작품들에 비하면,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 노래한 지용의 시세계를 지그시 눈을 감고 연필로 그려낸 원근법(遠近法)이 예사롭지 않다. 비백(飛白)과 약졸(若拙)의 솜씨가 긴 여운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이다.
오탁번 시인(왼쪽)·유종호 문학평론가
●역대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
김철순(1회), 윤승범(2회), 김순영(3회), 최금진(4회), 김남용(5회), 장재성(6회), 박옥실(7회), 김미영(8회), 김은정(9회), 김점순(10회), 현택훈(11회), 이향미(12회), 이수진(13회), 정영애(14회), 황인산(15회), 이기호(16회), 박재근(17회), 민슬기(18회), 김관민(19회), 이상은(20회), 배정훈(21회), 한진수(22회), 강성재(23회), 박한(24회), 김혜강(25회). 이선(26회)
그는 누구보다 슬퍼 보였다 / 송정원
미칠 노릇이었다. 엄중해야 할 순간에 폭소가 쏟아지는 그의 고질병이 터진 것이다. 하필 장례식장에서. 친한 친구의 급작스러운 부친상에서. 부의금을 낼 때부터 불길했는데 방명록에 적힌 자기 이름 석 자가 왜 그렇게 웃겼을까. 위험한 콧바람이 흥흥 나오더니 수척한 친구의 얼굴 보는 순간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싫다 정말 진짜 너무 싫다 죽고 싶다.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고 등까지 들썩이며 웃는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건 저주 받은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친구가 눈치 챘을까. 얼굴 가리고 뛰어나간 이유가 웃음 때문이라고는 생각 못하겠지. 내 아버지의 죽음이 저렇게나 슬퍼할 일인가 놀랐겠지. 이러나저러나 다 이상했다. 그러나저러나 이 웃음은 대체 언제 멈출까. 웃음에게 머리채를 잡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동안 그는 완전히 탈진했다. 비틀거리며 겨우 국화 한 송이를 바치고 두 번의 절을 했다. 휴화산인 웃음이 다시 터져 재앙이 될까 봐 상주가 권했지만 아무 음식도 들지 않았다. 육개장, 배추김치, 멸치볶음 같은 아주 보통의 일상이 상 위에 오른 것을 보면 다시 웃게 될 것 같았다. 폭소 후유증으로 횡격막에 통증을 느낀 그는 허리를 둥글게 말아 앉았는데 내보내지 못한 울음이 등에 그대로 고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또 사력을 다해 웃음을 봉쇄하느라 눈코입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는데 그 얼굴은 어느 비명보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장례식장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 되었다.
[ 2020 시인동네 신인상 당선작 ]
변방으로의 회귀
환유는/ 환생을/ 빙자한 사기극이다
정원선
근방에 병이 생기면 변방이 그리워질 거야
새처럼 걸어 다녀도
날개는 허공의 중심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애가 탈 거야
변방은 아름다운 병자들을 위한 구원의 땅
그곳에 종교는 없어
모두가 뿌리 깊은 성자가 되어가는 거지
변방은 인생의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어
꽃이 지고 잎만 살아남은 나무가 생각날 거야
잎은 얼마나 외로울까
살다 보면 미래에도 변방이 생겨나겠지
변방이라는 오래된 성곽에서
많은 사람이 선글라스를 쓰고 사진을 찍어
눈을 가린다고 눈동자까지 세력이 약해지지는 않아
선글라스는 표정의 중심에 있고 싶어 하지
성격이 다른 표정을
무늬라고 부를 날도 머지않았어
변방에서 병자들이 땅에 우물을 파고 있어
건강한 달을 키울 수 있는
작은 우물을 파고 있어
밑바닥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희망을 위해서
한 우물만 파고 있어
침묵의 버스를 타고
불치병을 치료하러 떠나는 길
차창 너머로
성에꽃처럼 변방이 피어나고 있어.
2019년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작
아가씨, 활짝 핀 꽃 / 김이응
엄마는 빨간약을 아까징끼라고 말했다
초경을 하지 않은 계집애들과 몽정 없는 사내애들이
숨바꼭질하던 무싯날,
하날 때, 두알 때, 사마중 날 때,
껌 씹는 언니들이 육낭거지 팔 때,
술래의 딸꾹질이 때맞춰 날 때,
고드래뽕이라며 한 마장쯤 내달리다
도깨비고비에서 넉장거리로 무너지던 저물녘
아카시아 단내가 이마를 스쳐올 때,
물음표를 떼어내며 첫사랑에 눈뜨던 초여름은
웅덩이마다 도롱뇽이 슬어놓은 알알이 몽글몽글해
무덤 많은 논틀밭틀로 질러가던 내 발소리에 놀라
오줌 지리고 돌아온 밤
담 없는 그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잉큼잉큼 뛰는 아랫배도 숨길 수 없어
너른 변두리로 쏘다닐 즈음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아까징끼로 가슴팍을 문대던 엄마
아가씨야 가시에 찔렸다며 말 더듬던 내 동생
딸꾹질이 뚝 멈췄을 때,
질겅질겅 씹던 껌을 삼켜버린 무싯날은
내 몸에서도 아가씨 꽃 지린내 나던 날이었다
ㅡ 2021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ㅡ 푸른시의방에서 옮김
미메시스 / 김후성
기차는 떠나지 않는다
안개와 곤충들도 움직이지 않는다
네 소식을 들었다
오늘은 관람이 없고
수염을 붙이고 꽤 걸어
나는 붉은 칠 한 문 앞에 앉아 있다
등에 줄을 매단 새들이
공중에 걸려 있다
수레 위에 플라스틱 과일이 쌓여 있다
거울을 떼 낸 자리에 네 얼굴 그려져 있다
우린 진짜가 아니고
너는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실내 같은 바깥이다
천장에서 폭우가 내려온다
엄청난 크기이지만 작은 나비인지도 모른다
하얀 잠의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폭우만이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오지 않고
네 잠 속의 나일론 수염에서 뚝 빗방울 떨어진다
2021〈시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자
농담 / 유은고
앵무샙니다 생선 한 토막으로 나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해요 말할 수 있지만 알아볼 수는 없겠습니다 오늘은
거위 한 마리와 개암나무의 이름을 짓습니다 오늘도
당신도 다음도 내 성적 취향입니다 최대한의 인간적 자세와 행위를 가르칩니다 옥수수 알을 던지며
당신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사소통 능력이 아니라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는 지구력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지구가 아름다워졌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구에서 떳떳하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선 한 토막이나 정자 3억 개로는 호소력이 희박한 시대에 나는 인간만큼 신뢰할 동물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무서운 무기인데 이론은 아름답군요
아름다운 세계는 없겠습니다 옥수수 알이 물맛이 개암나무의 기적이 있겠습니다 하나의 기적을 이루려면 사랑할 사람이 꼭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워할 사람이 없는 당신은
모르는 사람을 쓰다듬으며 앵무새를 앵무새로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다 말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먼저 꼬셨잖아요 그래요 새장과 세상이 같은 세계라서 나는 팬벨트나 돌리겠습니다
계간 시인수첩 《제9회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에서
블라디보스토크 / 신준영
우수리스크 호텔 방에서 가위에 눌렸다 거울이 없는 좁은 객실엔 낡은 싱글 침대가 둘, 침대에 눕자 튀어나온 스프링들이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가 되어 필사적으로 파닥였다 안내인은 배수 시설이 없는 욕실 바닥에 관하여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나는 밤새 물속에 잠긴 신발이 되어 언제 이 물을 다 걸어서 어항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나 생각했다
아이러니야 부동항 앞에서 얼어붙다니
저 바다는 배수 시설이 없어
채우기만 하고 쏟아낼 데가 없는
삶 같은 거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던 라즈돌리노예역 앞 벤치에 앉아 맨발을 주무르던 걸인과 눈이 마주쳤다 너희들이 온 곳을 알고 있다 갈 곳도 안다는 듯 동요가 없는 눈, 팔십 년 전에도 저 자리에서 우리를 주시하던 바로 그 눈이다 그때 나는 푸른 비늘을 가진 소년이었다 울컥함이 오려 할 때 비린 바람 냄새를 먼저 보내오듯 소금기를 앞세운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여기서부터 40일을 짐승인 채로 화물차에 실려가야 한다 살아서 혹은 죽어서 알 수 없는 곳에 하역되리라
해빙기의 얼음 속 박제된 전생을 보다니
그런데 이상하지
저 바다는 채우기만 하는데
넘친 적도 없다는 거
2020년 《실천문학》 신인상 시 당선작
푸른 시의 방에서 옮김
말의 뼈 / 이하(李下)
1.
어둔 숲. 외진 길에서 눈에 반짝거리는
인광燐光을 보았다
기척 없이 바닥위에 떠있다
잠 든
뼈 하나를 얻었다
말의 퇴적으로 오랜 풍화를 견디며 단단해진,
활자의 바다 심해를 꼬리치던, 작은 뼈에는
넝쿨처럼 촘촘한 핏줄이 붉게 감싸고 있었다
무덤 자취를 털어내고
부러진 뼈대를 가만히 들여 보았다
뼈에 숨은, 말이 있었다
행간의 뒤를 밟던 질주의 눈에 쫓겨, 든
미로의 숲을 벗어나지 못한 말이거나
풍경의 여백을 채우던 모음이거나
어둔 하늘을 날다, 비명에 얼개가 무너져 내려앉은 것인지
잔가지에 매달려 있던 낙과의 상흔을 삼키고
고요로 기운 침묵으로, 숨 멎어가는
말의 뼈가 분명했다
서늘한 음각의 문양을 품은, 인장印章의 편린片鱗이나
오래 쓰다 버려진 말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소란을 걷어내지 못하고
적의敵意 살아 있는, 비밀의 말 이었다
사구에서 사라진 바람의 결이, 뼈마디에 일렁이는 것도 보았다
거리를 떠돌던 말, 혀에 돋아있다 휩쓸린 연흔도 있었다
미라의 검은 입술에서 퇴화된 명징한 표현들,
정염 불타던 눈길의 떨림도 남아 있다
뼈대는 말을,
다시 이룰 수 없어 보였다
허기진 기억이 낙엽처럼 덮여 있고
눈 감지 못한 주검이 되고 있었다
2.
오래 귀담아 두었던 낱말 하나, 아둔한 머리를 지나갔다
몸 깊숙이 숨겨, 이미 사라진 말이다
풍장風葬에 남은 돌의 뼈대, 홍예虹蜺처럼
견고한 문체文體를 가진 말의 뼈대를…
가시 촘촘하고 심장 뛰는 문장하나를 갖고 싶다
가슴 구부러져 박히는 못. 아닌 말
죽음의 시편을 걷더라도, 거꾸로 읽을 수는 없는
그런 말. 하나를, 갖고 싶다
2021 웹진 『시인광장』 제 10회 신인상 당선작
2017년 하반기 <시와반시> 신인상
뿔의 자리 외 4편
홍계숙
1
싱크대 한켠,
요리에 쓰고 남은 무 반 토막
속살에 거뭇한 검버섯을 피우며
말라가는 대궁 끝에 푸른 뿔이 솟았다
뿔은 심장에서 먼 곳에 솟는다
무의 심장은 어디로 갔을까
무 끝에 돋아난 꼿꼿한 싹을 바라보며
내 심장을 더듬어본다
2
채널을 돌리니 들소와 사자의 격투가 한창이다
들소 무리 뒤를 공격한 사자, 순간
뒤돌아선 들소가 녀석을 뿔에 휘감아 내동댕이친다
간신히 다시 달려드는 사자를
맹렬한 뿔이 내던져버린다
저 뿔의 힘,
몸통에서 분리된 뿔의 당당함은
어느 뿌리에서 오는가
뿔의 각을 허물어 그 뿌리를 더듬는다
3
자신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뿔은 자란다
심장 근처에 모았던 손을 이마에 얹으니
내게도 들소의 뿔이 만져진다
뿔을 앞세운 성난 들소들이 내 이마 위를 내달린다
뿔로 인해 허물어진 수많은 꿈들이 이마에
실금을 풀어놓았다
4
메가케로스는 거대한 뿔을 가진 사슴,
위대한 뿔을 지녔지만 웅장하고 화려한 무게에 눌려
지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세상에는 제 지위만을 믿고 위용을 휘두르다 파멸한
메가케로스의 뿔이 얼마나 많은가
태양을 향한 뿔과 땅의 중심으로 뻗는 뿌리는
모두 불을 향해 달려간다
뿌리를 짓밟고 뿔을 쫓으며 달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5
말라가는 무에서 들소의 뿔이 만져진다
마지막 한 방울 제 안의 물을 끌어와 싹을 틔우고
죽어가는 뿌리가 몸에서 절망을 분리하고 있다
뿔의 각을 해체하면 뿌리로 돌아가는지
물을 소진한 이마 위로 초승달이 뜬다
미니멀 라이프
그녀는 가볍지 않아요
밥 대신 여백을 지어 허기를 채우는 그녀는 무거움을
버리려 해요
여백은 밥을 밀어내요
썰물 때 손가락 첫마디가 쓸려갔지만 싹이 돋고
고통은 금세 잊혀져요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가벼워져요
그녀의 허리는 개미처럼 가늘고 개미 등에 실린
짐은 무거워요 무거움을 덜기 위해
썰물이 그늘 뭉치를 서쪽으로 옮겨놓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빛나요
눈동자는 자꾸만 자라나요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밀어낼 것이 많아요 바다가 쥐고 있는 것을
놓기 위해 썰물은 서둘러야 해요
미술관에서 마릴린 먼로 얼굴을 보았어요 입가에 점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죠 눈과 코를 지우는 일은
쥐고 있던 것을 놓아주는 일이에요
뒤통수는 버려선 안 될 수만 가지 이유를 떠올려요
눈물 콧물 쏙 뺀 그녀, 모두들 채우려 할 때
비우려 몸부림을 치다 바다가 되어요
멀리서, 바람과 햇살이 바다를 골고루 나눠가질 때
비로소 그녀는 날개가 되어요
저녁이 있는 자리
이슬에 젖은 무릎으로
저녁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자리 앉아있지
짧은 봄볕의 꼬리까지 저금해 둔 나무들은
여름을 인출해
넉넉하게 그늘을 깔아두었지
산의 능선쯤에서
소리 없이 밀고 당기는 기운에 서쪽의 눈자위가 붉어지고
소멸되고 태어나는 빛과 어둠의 지루한 릴레이
그렇게 낮과 밤을 절반씩 나눠가지며
하루는 경계선을 넘어가고
알람을 켜고 끄며 우리도 조금씩 시들어가지
천년처럼 길고 하루처럼 짧은 시간을 목에 걸고
숲에서 걸어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퉁퉁 부은 저녁의 발등들
사람보다 질긴 나무는 교대식을 마친
밤의 옷자락을 나뭇가지에 걸어두지
하늘로 뻗친 가지 끝으로 새벽이 팔랑팔랑 피어오를 때까지
짧아지고 길어지는 그림자를 가늠하며
세상에 풀어놓은 빛을 거두어들일 시간,
한 그루 나무를 붙잡고 나이테를 새기고
계절을 돌아 나온 쓸쓸한 저녁의 낯빛들
아름드리 회화나무 그늘에는
밤이 오기 전 돌아가야 할 저녁이
늘 거기에 앉아있지
모과의 건축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 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
고목 혹은 골목
오래된 골목 한 그루,
변두리에 뿌리를 내리고 도시의 민낯을
줄기에 매달고 있다
뿌리를 따라 암각화 같은 집들이
좁은 하늘을 나누어 이고 앉아
막다른 허기에 불을 밝힌다
오르내릴수록 헐거워지는 시멘트 계단위로
뿌리의 맨살이 거뭇거뭇하다
변방에서 길어 올린 숱한 발자국들이
줄기를 타고 올라
푸른 언덕을 무성히 꽃피운다
이 골목에서 늙어버린 고목들
소슬바람이 불면 도시보다 먼저
단풍이 들고 무릎이 시리다
한 잎 한 잎 지고 있는
골목 한 그루,
떨어진 발자국들이
또다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당선소감
홍계숙
여름 첫 페이지의 기록이다.
매미 울음이 여물기 전 초여름 밤은 자두 빛으로 익어갔고 그때 고요함 속으로 간간이 소나기가 뛰어들었다.
밤새 빗소리가 지나간 뒤 허공에 문이 열렸다. 여름의 첨병인 한 마리 매미 울음이 축축한 땅의 문을 열었다. 그 첫울음을 출산한 여름밤이 지나고 매미들은 허공을 장악하였다.
한겨울을 가장 눈부시게 살다 가는 것이 눈사람이라면 여름을 가장 치열하게 살다 가는 것이 매미일 것이다. 수컷 매미의 울림판 위에 뜨겁던 8월이었다. 생일 바로 전날, 선물처럼 신인상 확정 소식을 들었다. 순간, 허물을 벗고 우화하는 매미처럼 내 등에 희망이라는 날개가 돋고 있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세상으로 향했던 시선을 자신에게 되돌릴 즈음 詩는 매미 노래처럼 내게 달려왔다. 이제 마음껏 노래할 수 있겠구나. 붙들고 울어야할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보였다. 세상에 모든 사물과 현상이 시제가 되어 나를 다시 재정립했다. 나는 아직 여름이고, 가슴이 이토록 뜨거운 것은 가을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 창작 수업 중 호된 합평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문우가 울먹울먹 문자를 보내왔다. “내가 왜 시를 쓰려 했을까요?” 그 물음이 가슴 한가운데 박혀있다. 뒤늦게 詩를 다시 시작하고 한순간도 그것을 후회한 적 없지만 시를 쓰는 동안 그 물음은 안고 가려한다.
부족한 글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 숙여 감사를 전한다. 시적詩的 인식 정립을 도와주신 마경덕 선생님, 책나무 출판사 임정일 선생님, 습작의 글을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카카오채널 문학세상 윤동렬 시인님, 시 창작교실 영등포 문우들과 카카오스토리 달빛글방 모든 가족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뒤늦게 시詩에 빠진 아내와 엄마를 이해해준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 등단을 계기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한 치열한 내적고투의 글을 쓰는 시인으로 거듭나고 싶다. 어렵게 주어진 기회인만큼 낮은 자세로 시제詩題의 자리마다 향기롭게 글밭을 일구리라 다짐해본다.
심사평
심사위원 강현국 ·엄원태(글)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백 편 남짓한 시들을 일독한 첫 느낌은, 여전히 많은 분이 좋은 시를 쓰고자 열정을 다하고 있다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느낌은, 참 시들이 고만고만한 말들에 머무른 듯해서 아쉽다는 것이었다. 시가 안 읽히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시인과 시들은 범람하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듯해 조금 씁쓸했다.
『시와반시』 신인상의 투고 성향이라 할 새로운 ‘전복적 상상력’의 실험적인 시편들이 이번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적지 않은 공부의 내공을 보여주는, 기본기를 잘 갖춘 수준급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시를 써야만 하는 절실한 진정성과 삶의 구체적 세목細目들을 놓치지 않는 감각과 사유의 깊이와 넓이, 자신만의 어법으로 참신한 언어의 결을 보여주는 괄목한 신인은, 아쉽게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릇 예술이 그러하듯 ‘기본기’를 통해서야 최소한의 표현 수단인 어법이나, 주법奏法/필법筆法 등이 비로소 발현된다. 그러나 예술은 기본기 ‘너머’의 그 무엇에 도달해야 하는 숙명이라 할 지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언어를 통해 언어 ‘너머’의 그 무엇의 이르고자 하는 자이다.
최종적으로 다섯 분의 작품들을 놓고 거듭 읽으며 숙고에 들었다. 멀리 호주에서 투고해 온 김수진 씨의 ‘Aequori 외 9편’은 사물을 새롭게 보려는 태도와 독특한 행간의 호흡이 참신하게 읽혔다. 그러나 생경하다 할 정도로 적실하지 못한 단어들의 어색한 조합이 거슬렸다. 이질적인 말들의 성긴 조합만으로는 좋은 시적 모호성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되새기며 정진하기 바란다.
강진영 씨의 ‘헬로우 스마일 외 9편’은 먼저 그만의 사변적이라 할 시적 언술 태도가 돋보였다. 실험적이라 할 만큼 개성적인 화법을 보여주는 것도 특장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일상의 가벼운 사변이나 아기자기한 감정들의 치장에 머무른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즐겨 쓰는 ‘가벼운 상상력’의 시편들을 답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오로지 자신만의 사유를 획득하기 바란다. 가벼움은 단순히 무거움을 외면하는 데서 생겨나선 안 될 것이다. 일상의 지리멸렬에 대한 응전방식으로서의 전략적 가벼움이라면 좋겠다. 기대해 보겠다.
박혜정 씨의 ‘일요일의 사람 외 9편’은 기본기의 교과서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언어들은 단정하면서도 발랄하고 세련되었으며 언어도단의 시적 아이러니마저 능숙하게 구사한다. 처음엔 당선을 염두에 두고 읽었으나, 고심 끝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자주 등장하는 죽음과 침실/지하실의 시적 세계가, 조금 더 고통스러운 의미의 자장을 잘 견뎌내며 통과해서 나름의 숙성과 진정성에 이르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그는 분명 좋은 시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다만 시간과 경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홍계숙 씨의 ‘뿔의 자리 외 9편’은 응모자 중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말의 결을 다룰 줄 아는 원숙한 어법을 보여준다. 문장은 단단하고 사유는 일정한 존재론적 깊이에 닿아있다. ‘뿔의 자리’, ‘미니멀 라이프’, ‘저녁이 있는 자리’ 같은 가편들은 놓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저력 같은 게 있다. 다만 때로 상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편들이 보여 염려되는 바 없지 않다.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에 대한 시적 인식의 깊이를 더해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박형민 씨의 ‘노량진에서 쓰는 일기 외 11편’은 응모자 중 가장 진솔하고 거침없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아직 젊어 보이는 연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직면하고 성찰하려는 태도에 있다. 그의 분방한 시적 언술은 자칫 치기만만한 방백에 그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주기도 한다.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선자들은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이런 치열한 현실 인식의 시적 태도를 귀하게 사고 싶은 것이다.
고심초사를 거듭한 끝에, 최종심에 선고된 분 중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준 두 분, 박형민 씨와 홍계숙 씨를 공동당선자로 천거하기로 한다. 두 분의 시는 상호보완의 모습으로 읽힌다. 이 상호보완의 조합은 결코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닐 게다. 오로지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나름의 뼈저린 성찰과 시적 인식의 거듭남을 통해 마침내 이르러야 할 그 ‘너머’의 무엇이다. 모쪼록 등단을 계기로 정진 또 정진하기 바란다. 이번에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격려를 전한다. 그들은 이미 좋은 시인들임이 분명하다.
상자적 시간
장미도
상자를 생각한다 모감주나무 아래에서
공간의 기분은 여섯 개의 면으로 만들어진다
암묵적으로
상자를 만든 최초의 인간이 존재했으리라 여겨지지만
일곱 번째 면을 상상한다고 해서 상상이 상자를 초과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믿지 못해 믿음이 없는 상자를 만들었듯이
상자는 고개를 들고 검게 익어가는
떨어질 듯 말 듯 바람에 흔들리는 씨앗을 기다린다
최초의 상자로부터 출발한 최대의 상자
를 생각한다 그 사이
작고 둥근 변수가 상자 속으로 불쑥 떨어지는데
상자가 씨앗을 의심할 때
씨앗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생긴다
멀리서 심장 소리처럼 기차가 지나가고
상자의 내부가 씨앗의 움직임을 느껴보려 몸을 뒤척이지만
그 기다림 때문에 씨앗은 움직이지 않는다
최초의 인간 없이도 상자를 만들 수 있으며
몇 번 죽었다 태어나도 만들어지지 않는 일곱 번째 면이 있다
몇 번의 꽃비가 내리고
씨앗은 가능성의 형태로
상자 속에 상자와 함께 있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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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도 / 1995년 출생.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2020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당선.
2021년 제 2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_차호지 / 창문(외 4편
창문 / 차호지
오전이 다 가도록 누워 있었다 몸을 뒤척이고 이불을 걷어내고 다시 덮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에서 열차가 들어오며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천장에 창문 무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방 안에는 필요한 것이 모두 있었지만 한번 사용하고 난 것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어서 새것을 가지려 누군가 나가야 했다 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와야 했고 돌아오면 다시 누워야 했다 누워서 창문을 보다가 창문을 창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 묻고 아직 그래도 되겠지요? 그래선 안 된다고 대답한 사람이 창문을 찾으러 나갔다가 바깥에는 창문이 여러 개 있어 어느 것을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며 무엇이 새것인 창문입니까? 창밖으로 보이는 창문을 가리키며 이것이다 저것이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말했던 사람이 창문을 향해 나가고 열차에서 내린 사람이 열차에 타기 위해 열차가 멈추는 동안 창문을 통과한 새가 방으로 들어오고 새것이었던 새를 찾으려 천장으로 걸어오는 사람이었던 이들과 천장에서 멀어지는 열차를 보며 침대에 누워 말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통과해온 창문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안은 너무 좁고 들어온 것들이 나가지 않고 있었다고
모험 / 차호지
친구는 떠났다. 내게 책을 맡기고 갔다.
나는 책과 함께 떠났다.
품에 안긴 책은 자꾸 흘러내린다. 나는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
친구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책을 데려갔으면 좋겠다.
집을 찾아갈 수 있겠니?
책을 안고 구부정하게 걷는다.
집에 가자. 책에 대고 말한다. 계속 말한다.
책이 말을 하면 친구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도망간다. 내가 왜 도망을 가고 있지?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책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서점 직원이 나타나 내가 책을 훔친다고 말한다.
차호지 / 1988년 여수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환경공학과 졸업.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 당선.
사냥꾼 / 홍일표
총에 맞은 꿩이 비로소 꿩으로 태어난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
꿩의 일생은 폭발할 위험이 없다
머리에 넣은 꿩의 무게만큼 몸이 무거워진다
총성이 울린다
짧고 또렷하게 한 획으로 갈라지는 밤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입안에 넣어주는 논리학자도 있다
총을 내려놓는다 다시 바다가 출렁이고
아이들과 고라니가 풀밭을 줄였다 늘렸다 한다 둥근 풀밭이 공처럼 굴러다닌다
꿩이 날아간다
수시로 폭발하고 수시로 사라지는
하늘 어디에도 꿩은 없다
갓 태어난 원시인이 하늘을 꿩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 <시와표현> 2012년 가을호
홍일표 / 1988년 《심상》 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
제19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애도 캠프 (외 4편)
김지연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아침에도
손을 뻗으면 허공에서는 손이 자라났다
그런 아침에도 이불을 떠나고
이것 좀 봐,
자꾸 옆을 돌아보며 걷게 될 때
손안에 들어와 갇히는 풍경이 많았다 손안의 세계를 움켜쥐고 걸었다 그것은 너무 가볍고 너무 작아서 작은 틈새로도 줄줄 흐르기 쉬워서 잡은 손에만 온 마음을 쏟아야 했다
언제였더라 우리는 서울숲을 함께 걷고 있었지
뿔도 없이 동그랗고 작은 머리를 가진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쫓아왔어
녀석의 등을 쓰다듬으면 얇은 가죽 아래 움직이는 가느다란 여러 개의 뼈가 느껴졌지
손가락에 닿는 손허리뼈를 어루만지며 걷는 동안
잘못 뭉친 눈송이처럼
손을 떠난 순간 바스러질 것 같던 그 등을 생각했다
러시아에서는 사슴을 만나면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래
손목의 끝에 달린 것이 그냥 사라진다면 함께 길을 걷기에 좋은 가볍고 따뜻한 손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잡은 손에만 온 마음을 쏟으며 옆을 돌아볼 수 없는 마음으로 걷다가 앞으로만 향하는 눈빛으로 걷다가 손목의 끝에 달린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피 흘리는 사슴 한 마리가 도로에 누워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나여야 했어
사슴을 껴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도는 등 뒤의 길을 지웠다
사슴의 굳어가는 몸이 풀을 쓰러뜨리고 있다 발보다 먼저 길을 만들고 있다 누운 풀 위로 발이 겹쳐지고 있다 사슴의 아직 따뜻한 피는 내 발자국으로 굳어간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닷가 별장에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둘러앉자
바닷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꽉 잡아
손을 잡으면 손목의 끝에 매달린 인간의 무게는 분명하고 묵직했다
<심사평>
김지연의 「애도 캠프」 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뚜렷함과 아름다움은 독보적이었다. 상한 세계의 속살을 만지고 있는 듯한 구체적인 감각, 인간이라는 형태를 지닌 우리가 공유하는 슬픈 아름다움, 이 지구의 수많은 너와 나들 사이에서 명멸하는 마음의 파편들을 쓰다듬는 손길과 목소리, 더없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호흡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투명한 눈물이 묻어나는 것 같다. 빛 가운데 있는 죽음과 시작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그의 중층의 시선은, 무엇이든 망가뜨리고야 마는 이곳의 시간들에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준다. 다시 새로 시작되는 빛 앞에 한 걸음 내딛는, 시인에게 축하를 보낸다. _하재연(시인)
<수상소감>
여름 한낮에 카페 앞에 혼자 엎드려 주인응 기다리는 검은 개를 봤다.그날 햇빛은 무엇이든 관통해버릴 것처럼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그 빛조차 개의 윤곽을 쓰다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한 등을 하고 있었던 검은 개.개의 검은 색은 너무 검어서 지금까지 검다고 말했던 모든 것을 다르게 말해야 할것 같았다.
(생략)
언어는 너무 넓어서 앞과 뒤가, 왼쪽과 오른쪽이, 천장과 바닥이 대기처럼 계속뒤바뀌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천국이 있다면 가장 필요한 느낌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곳, 아침에일어나면 믿음의 근거가 이불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긴 천국이 아니고 어떤 날에는 무자비하게 찾아오는 아침 속에서 눈을뜨고 이불ㄹ 떠나야 한다. 이곳에서 믿음의 근거는 끝에부딪히면 다시돌아오는 시선으로부터 눈 앞에 없으면 등 뒤에 있을 거라고 믿는 믿음으로부터 온다. 나에게 시를쓰는 일은 이런 시선을, 믿음과 마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생략)
애도 캠프의 마지막 연은 갑자기 밀려드는 물 속에서 친구들과 손을 잡고 떠오르던 꿈을 꾼 다음 썼다.
(생략)
늘 부족하겠지만 부족함과 싸우는 대신 부족하기에 강하고 아름다운 일에 대해 고민하겠습니다.믿음의 근거를 깨끗한 이불 속에 누이는 마음으로 질문에 답하는 질문으로 계속 쓰겠습니다.언어에 의해 생산되는 풍경을 믿고 믿음에 마음을 기대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믿음만이 유일한 믿음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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