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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정경 / 목화야 역사공부하고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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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꽃
무궁화
목화야 역사공부하고 놀자.
*️⃣ 문경현 교수의 지론에 의하면,
▪️ '고구려. 고려' 의 발음은 틀린 것이고,
▪️ '고구리, 고리' 라고 해야 맞다는 것이다.
그분의 논문에서는 시종일관 <고리> 이다.
▪️ 麗는 고울려, 빛날려/ 나라이름 리
▪️ 그러나 이미 통용되는 발음은 려로 굳어졌고, 뜻 또한 좋다, 고울려 빛날려~
목화꽃/ 棉 과 綿
▪️木花 木棉할 때 [목화 면(棉)] 자, 목화꽃 나무를 말할 때 쓰고,
▪️솜이나 솜으로 짠 직물을 말할 때는 [솜 면(綿) ] 자를 써서, 綿織物
목화꽃
*️⃣ 세계사를 봐도 목화로 인해서 큰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남부지방은 목화농장이 많아 노예노동이 많이 필요해 노예해방 반대, 북부는 공업발달해, 노예해방 찬성, 그래서 링컨대통령의 북군이 승리했다.
* 목화 꽃이 핀 후 열리는 다래 열매
* 딱딱하게 굳어져서 가을에 터져서 하얀 솜이 터쳐나온다.
* 아직 굳어지기 전에 속은 말랑말랑하고 달달해서 우리 어릴 때 따먹기도 했다.
배가 고파서 많이 따먹어버리면 목화농사 망치는 것이고~
산청군 단성 가월리 문익점 목화시배지에서
산청군 단성 가월리 문익점 목화시배지에서
산청군 단성 가월리 문익점 목화시배지에서 /2024.8.2
<목화꽃>
이재익
꽃중의 꽃, 가장 아름다운 꽃
산청 단성 사월리 한여름 뙤약볕에
목화꽃이 피었다 1)
공민왕대 원에 간 서장관 문익점 선생
진실 알고서야 강압에도 굴함 없이
머나 먼 강남 귀양 그 충절이 빛났다. 2)
부원배(附元輩) 덕흥군의 난이 쓸린 후 3)
간난신고로 목화씨앗 붓대롱에 숨겨와서
우리 백성 의복 따뜻하게 지어 입혔다
씨앗기, 고치말기, 무명매기 작업은 힘들었지만
무명베에 더 덮을 것 바이 없었다.
충선공(忠宣公) 부민후(富民侯) 4)
목화솜 같이 부풀은 '나라사랑 애민정신'
어찌 한오백년에 그치랴?
민족의 유전 형질로 면면 이어지리라
'뜰에 가득한 송죽은 깨끗하고 고요하기도하다' . 5)
ㅡㅡㅡㅡ
1) 영조 계비 정순왕후 간택시 물음에 했던 대답, 문익점 목화시배지
2) 반원자주정책에 반발하여 공민왕 제거 작전으로 '홍건적에게 공민왕이 시해됐다'는 거짓소문에 처음 문익점도 속아서 덕흥군(충선왕 3자) 편에 섰다가 진실 알고 의연히 공민왕에 충성하고, 뒷날 고려왕조에도 절의를 지킴.
3) 덕흥군은 원군사 15,000명 지원받아 고려 왕위 뺏으려 했으나 최영 이성계 장군에게 격퇴됨.
4) 문익점에 대하여, 태종때 강성군 봉하고 충선 시호, 세종때 영의정 추증, 부민후 봉함.
5) 장인 정천익이 문공을 칭송한 시구
🟫 목화야 역사공부하고 놀자 / 문익점 선생 사적
[참고 자료]
<文益漸의 使行과 木棉 傳來>
문경현 (경북대 명예교수) 논문
(慶北史學 제26집, 2003.8)
ㅡㅡㅡㅡㅡㅡ
▪️木花始培遺址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목화로 887(사월리 106ㅡ1).
▪️기념전시관, 마당에 문익점 선생 유허비와 면화시배사적비가 조촐하게 있고, 도로 건너편에 큰 목화밭이 있다.
🟦 삼우당(三憂堂) 文益漸 선생
▪️문익점 선생(1331~1400)은 충혜왕 원년 1331년에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에서 출생.
원에 서장관으로 사절따라갔을 때 친원파가 공민왕을 폐립하려는 모사를 꾸미고 있었다.
문익점 선생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날조된 문서를 불태우고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다 원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한동안 억류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조정의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하면서 당시 외부 유출이 엄격하였던 목화종자를 위협을 무릅쓰고 붓 대롱 속에 숨겨 가지고 오게 된다. (1364)
▪️그가 가져온 10여 개의 목화(木棉, 草棉) 씨앗은 고향 산청 땅에 장인 정천익과 함께 처음으로 심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전파하고, 의류혁신과 국가 경제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이러한 공로로 문익점은 1375년 전의주부에 임명되고 좌사의대부까지 이르게 된다. 60세에 종2품 경연동지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양왕에게 사직의 운영에 필요한 시무8조를 올리고 관직을 떠났다.
▪️1392년 섬기던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응하지 않고 고려 신하로서의 충절을 끝까지 지키다 70세인 1400년 2월 8일, 함박눈이 목화송이처럼 펄펄 내리던 날 돌아가셨다.
▪️태종대 ; 江城君 봉하고, 忠宣시호, 부조묘(不祧廟 ; 불천위사당)를 세우게 함. ※ 江城은 丹城현 옛이름
▪️세종대 ; 영의정 추증, 富民侯 封함.
▪️재배 보급 더불어 공로자는 장인 정천익(호승 弘願의 직조기술 도움 받음)
▪️남평문씨 족보에
ㅡ 문레< 문익점 손자 문래,
ㅡ 무명 < 문영이 짠베 > 문영베에서 유래
*️⃣ 정천익(장인)과 문익점(사위)이 주고받은 詩
▪️퇴헌 정천익이 이르기를
세상의 일 지저분하여 내 보려 하지 않거니와,
뜰에 가득한 송죽은 깨끗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삼우당 문익점이 화답하기를
산에 구름 끼고 시내에 물새 놀아 그윽한 흥취 감도는데,
그 누가 수풀 안에서 고요히 수양하심을 알겠소이까?
*️⃣ 문가학 역모와 가문의 풍비박산
▪️문익점은 4형제중 둘째이고 네째 망내 동생의 아들 文可學의 태종연간 역모사건이 있어서 문씨 일문이 풍비박산 몰락하고 단성 배양리에 살지 못하게 됐다.
* 풍비박산(風飛雹散) ;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진다.
▪️문가학은 처음 학문과 방술 선비였다. 예문관 직제학 정이오가 태종에 천거했다. 왕 앞에서 비를 내리게 하기도 했다. 서운관에 소속됐으나 이내 능력이 바닥이 나서 쫒겨나자, 앙심을 품고 天兵神兵을 부려 혁명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자만 오기를 부려 개성에서 거사하기로 모의했다가 임방의 고변으로 일망 타진됐다. 주모자 6명은 처형(환형)되고 집터도 저택됐다.
* 환형(轘刑) ; 거열할 환, 수레로 양쪽에서 찢어죽임.
* 저택(瀦宅), 웅덩이저.역모자 집 헐고 파서 웅덩이를 만듦.
▪️문익점 증손녀가 합천 이씨(부호군 이계통)家로 시집가서 96세에 몰락한 친정 문씨 가문을 쓸퍼하며, 감사에게 호소하여 문익점 묘 옆에 사우를 짓고 문부인 아들(이승문)이 참봉이 되어 외고조부의 묘와 효자비 유허(遺墟)를 지킬 수 있게 됐다. 문씨 토성에 합천 이씨가 거주하는 입향조가 됐다.
▪️1563년 명종18년 퇴계선생이 <효자비각기> 를 썼다.
▪️문익점 네째 막내동생 문익하의 손녀가 曺씨 가문에 시집감. 그 손녀(문부인)의 증손자가 南冥 曺植선생이며, 문익점 선생의 <墓祠記> 를 썼다.
*️⃣ 문익점 그의 시대 고려의 모습은?
몽고 원나라의 약 1세간 간섭기였다.
忠자 붙은 6왕 [25대~30대,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들은 원의 황제에게 충성해야한다는 수모의 왕 묘호이다.
1) 충열왕(25대)과 충선왕(26대) 부자
▪️忠烈王왕
ㅡ1275~1298(24년) 1차
ㅡ1298 이해 충선왕 잠간 재위
ㅡ1299 충렬왕이 복위 ~1308(34년)
ㅡ[중조 사유] 왕비는 원세조의 딸인데 병사하자 원에서 세조의 증손녀를 보내와서 다시 결혼했다. 원에 있던 세자는 모후가 죽자 귀국하여 투기때문에 병사했다고 단정하고 왕의 총희 무비 등 궁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충렬왕은 그 충격으로 원제에 전위를 요청 > 세자가 忠宣王으로 즉위
▪️忠宣王(26대)
ㅡ1298 잠깐 재위. 1차
ㅡ1309 복위~1313(5년)
ㅡ왕비 원공주가 조비를 질투해, 원사신이 와서 조비의 부모에 악행을 가하였다. 원이 왕과 공주의 입조를 강요하여 도중에 국왕인을 뺏고 충럴왕을 다시 복위시켰다.충선은 1년도 안되서 뺏기고父 충렬왕이 중조(重阼)
ㅡ충렬왕 사후 충선왕 재 등극
ㅡ충선왕 15년에 아들 충숙왕에게 전위하고 원도에 永住. 말로에 비참, 무고를 받아 절에 갇혔다가 티베트로 유배됨.
2) 忠肅王(27대)과 忠惠王(28대) 부자,
ㅡ1314~1330(17년), 충숙왕 1차
ㅡ1331 충혜왕 잠깐. 1차
ㅡ1332 충숙왕 복위~1339
ㅡ1340 충혜왕복위~1344
ㅡ충숙왕 17년에 세자에 전위 시키니 忠惠王, 1차
ㅡ충혜왕도 2년에 무고 받아 충숙왕 다시 복위(충숙왕 둘째 아들은 후일 공민왕)
ㅡ충혜는 원에 갔다가 부 충숙왕이 8년에 붕어, 북위운동으로 환국 다시 즉위했다.
ㅡ충혜왕 원년에 문익점 선생 탄생
ㅡ충혜왕의 비극 ; 사신이 왕을 포박, 칼부림, 원에 끌려가서 2만리 유배길 도중에 죽었다.
3) 忠穆王(29대)과 忠定王(30대)
형제, 충혜왕의 자. 유약하고 무능했다
ㅡ1344 충목왕~1348(4년) 사후 단절
ㅡ1348~1351 충정왕(3년) 죽임을 당하고 단절.
▪️충혜왕의 어린 아들 忠穆王이 즉위했으나 4년에 죽고, 원제가 충목 동생 忠定王을 세웠으나 인망은 강릉대군에 있었다. 원은 충정왕의 옥새를 빼앗아 가고, 강화로 옮겨 독살시키고 강릉대군을 즉위시겼다.(공민왕, 31대/ 충숙왕 2자)
4) 공민왕(31대,강릉대군)
재위기간 1352~1374(23년).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의 둘째 아들.
▪️왕비는 원의 위왕의 딸 보탑실리(노국대장공주)
즉위한 공민왕은 왕비와 함께 원에 갔다. 옥새를 받으러 간 듯.
▪️원은 고려국왕 폐립과 생살여탈권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英主로 자주정책, 원제 혁파, 실지 동녕부, 쌍성총관 회복, 기황후 오라비 기철, 노척, 권겸 친원파 숙청
▪️원이 공민왕을 폐하자, 왕 12년 3월 이공수 등 복위요청 계품사(啓稟使) 2차례 파견. 사신 이공수는 자신의 고종 누이인 원 황후께 기철사건 변명, 황제가 미는 덕흥군 추종을 거절함.
*️⃣ 문익점의 원에서의 행적
▪️공민왕 11년12월 성절하례사절 유인우의 서장관으로 연경 가서(연중 수차례 줄 잇듯 사행이 파견되어 어느때 갔는지 헷갈려하는 역사기록도 있음) 덕흥군의 난에 연루됐으나 자신의 지조 소신에 의해 이탈(귀양)하여, 강남지방을 유람하다 목화씨를 가지고 덕흥군의 난이 끝난후 공민왕 13년 10월에 귀국했다.(권근의 상서)
덕흥군을 추종했던 세력들은 모두 고려군사(최영 이성계 장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나, 문익점은 귀양가서 전화위복으로 살아남았다.
▪️처음 최유와 덕흥군은 '공민왕이 홍건적에 시해됐다' 고 선전. 이에 원에 사신 가 있던 유인우 문익점 등이 국내사정을 잘 모르고 따랐다.
▪️두 차려 계품사(공민왕이 자신을 변호하여 복위 청원하러 보낸 사신)가 왔는데, 계품사 이전인 전년도 성절사로 간 유인우의 서장관 문익점은 왕이 홍건적난에 崩御했다하고, ,자신이 억류당했고, 황제 칙령 강압적이라, 덕흥군에 가담( 留附德興君)
▪️그러나 계품사(복위청원 사절)이 오자 공민왕 건재 사실을 알고 태도를 바꿨다, 남방 강남으로 도망 혹은 귀양간것 같다.
*️⃣ 덕흥군의 난
▪️재원 친원파 최유, 박보화(기황후 향인)와, 고려의 김용(평장사)등이 결탁,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 3자 덕흥군을 추대하고 奇씨 族子 奇三寶奴를 元子로 삼으려고 획책.(고려는 기씨 왕이 등장할 뻔했다.)
▪️원은 공민왕 11년 12월 공민왕 폐하고 덕흥군 책봉
▪️흥왕사의 변 ;
홍건적난으로 복주(안동) 몽진후 궁궐수리 기다려, 성남 흥왕사 행궁에 있다가 당한 변.
▪️김용은 왕명을 거짓 참칭해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군들을 흉계로 죽이고, 김수 등 50인 거느리고 흥왕사 행궁 야습. 환관 안도치가 왕을 가장해 침실에 누워 대신 희생되고, 공민왕은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함. 1363,왕12
▪️獻捷, 賀正, 謝恩, 賀聖節, 賀千秋節의 연이은 사행 모두 원에서 억류, 정보소식이 끊겼다. 5월 譯語 이득춘이 귀국해 정보제공(원이 공민왕 펴위한 사실), 드디어 6월 원이 왕의 옥새를 거두어감.
▪️원에 억류된 이공수 이자송 등 충신들은 竹杖에 밀서 숨겨 보내 최유 덕흥군 동태를 아뢰고, 방비를 요청.
▪️왕 13년 정월 덕흥군은 15,000 원군사, 유인우 호종인 삼아 진군 > 최영 이성계, 안우경 장군이 섬멸하니, 겨우 17기 살아돌아갔다.1364
이때는 원명교체기라 원도 힘이 빠지고, 원 내부에서도 혼란이 생기고 있었다.
▪️문익점은 交址에 귀양중이라 화를 면했다. 가난신고(艱難辛苦) > 삼우당실기에 기록.
▪️드디어 원에서도 정변, 새 실권자가 간신 박보화 등 숙청하고 대고려 태도를바꿨다.
"고려왕(공민왕)은 공있고(홍건적 격퇴) 죄가 없는데 간신 모함" 으로 빚어진 사단이라며 공민왕을 복위시켜줬다.
▪️재원 친원 간신배 반역자 최유는 고려 압송 처형됨. 덕흥군은 원이 유배함. 이공수 임박, 이자송 등 돌아온 충절신들을 포상함.
*️⃣ 원은 왜 목화 전래를 엄격히 금지했을까?
▪️목면가공업이 국가의 전매사업으로 황실 수입원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 사신이 많았었는데, 왜 문익점에 와서 전래했을까?
▪️목화는 원산지가 인도라, 원에서도 강남지방에서 유행했을 뿐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고려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에는 목화를 볼 수 없었다. 있었다해도 목숨을 걸고 전래할 배짱있는 신하가 없었던 것이다. 문익점이 강남지방에 황제명으로 유배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리꽃
꽃무릇 / 늦여름 초가을에 핀다.
꽃누리장나무
부용화
해바라기 / 함안 강주
해바라기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해바라기 / 함안 강주
해바라기 / 함안 강주
배롱나무꽃
산청 대원사
산청 대원사 목백일홍
정돈이 잘 돼있고, 여름에 배롱나무 꽃이 좋고, 계곡이 좋다.
산청 대원사
산청 대원사
목백일홍 / 부산 양정동 동래정씨 시조묘원
매미
유학자가 말하는 매미의 5德
1. 선비같다. 머리에 홈처럼 파인줄, 갓끈 비슷
2. 염치(廉恥) ; 곡식을 해치지 않는다.
3. 검소(儉素); 집을 짓지 않고 욕심 .없다.
4. 신의(信義) ; 죽을 때를 스스로 지킨다.
5. 청렴(淸廉) ; 깨끗한 이슬과 수액만 먹는다.
▪️암컷 산란기관 발달 울지 못한다.
▪️수컷 발성기관 발달.
▪️유충 굼벵이 땅속 5년~7년, 네차례 변태, 허물 벗고 7일~20일 산다.
알은 나무줄기에 낳고 디응 해 6~7월 유충된다.
여름 夏雲多奇峰
지리산 장터목
지리산 천왕봉 방향 운무/ 함양 마천면
지리산 종주, 형제봉
사랑의뽀뽀
하동 최참판댁(세트건물)에서 바라본 초가지붕
여름의 물_ 계곡/ 호수/ 분수 / 폭포
양산 홍룡폭포
양산 홍룡폭포
양산 홍룡폭포 ⬆️
김해 연지공원 ⬇️
김해 연지공원
*️⃣ 2024.7.28. 일칠산우회, 김해 분성산 갔다가 경전철 타고 모두 돌아가고, 나는 홀로 연지공원에 가 보았다. 날씨가 몹씨 더운 날이었다.
'구름이 호수의 물을 빨대로 빨아들이고 있다' 고 허풍을 떨만하다.
김해시는 하고 많은 우리나라 위인 다 두고 왜 간디 동상인가? 물론 평화의 상징적 위인이긴 하지만??
계곡수
순창 강천산
거창 월성계곡
여름 물놀이
부산다대포.
온천장거리
수련
수련
연꽃
가시연
가시연
고추잠자리
연못 남생이가 일광욕한다.
비타민 D가 필요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