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따뚜이>를 보고
- 재능과 편견에 대하여
강혜진 작성 / 2019년 2월
처음 <라따뚜이>가 우리나라에 상영했을 때 영화 포스터를 보고는 참으로 경이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부엌과 상극인 ‘생쥐가 요리를 하는’ 설정이라니, 이상하기도 했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표현되며 실제
우리가 보는 쥐보다 귀여운 그림체라 그런지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처음 볼 당시 요리비평가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과 이 사회에서 가지는 영향력 등도 당시의 한국 상황과는 좀 달랐던 터라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재능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다 다시 오랜만에 보게 된 영화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링귀니가 최고의 요리사 구스토의 첫사랑이 낳은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구스토의 첫사랑인 링귀니의 엄마가 죽고 이에 링귀니는 ‘구스토가 너의 친아빠이다.’라는 엄마의 유언장을 들고 구스토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그런데 구스토의 명성을 이용한 냉동식품 개발 및 유통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스키너와 갈등을
일으킨다. 여기까지 읽으면 링귀니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 천부적인 후각과 미각의 소유자이자 요리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레미가 링귀니의 요리모에 숨어 색다른
전개를 이어간다.
이 부분에서 나는 사실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구스토의
친아들이라면 누구나 기대할 법한 유전적으로 타고난 요리에 대한 재능과 열정, 절대 미각을 오히려 링귀니가
가지지 못한 것, 심지어 최고의 미각과 후각, 요리에 대한
열정을 지닌 레미의 아바타가 되면서도 그 능력이 개발되거나 발전되지 못하는 지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친아빠의
명성과 엄마 유언장의 도움에도 불구, 링귀니는 식당 청소부로 시작해서 여러 과정을 겪으며 결국 식당
서버 내지는 매니저 정도에 그친다. 오히려 요리와 관계가 없는, 인간이
버린 음식을 먹는 쥐 일 뿐인 레미는 그 열정을 쥐라서 음식이 상한 정도를 알아채고 구별하는 정도에 그쳐야만 하고, 미각을 활용해 그 이상의 요리를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주변과 종족의 말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열정과 신념과
노력을 이어가고 요리비평가도 감탄하게 하는 요리를 만들어낸다.
어떤 영화는 함께 살지 않았어도 멀리서 바이올린 연주
소리만 듣고도 그 연주자가 친아들임을 알아채는데 반해 링귀니의 이야기는 반드시 우월한 유전자만이 그것을 이어받아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생쥐’는
정말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 안 되는가
무엇보다 토론에 비중이 실린 것은 부엌과 상극인 ‘생쥐’를 왜 주인공 요리사로 설정했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쥐가 부엌에 있으면 안 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고, 또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주인공을 역발상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주제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게 하는 데 용이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때 토론 참석자 중 누군가 ‘레미는 안되고 미키마우스는 된다?’며 의문을 던졌다. 둘 다 생쥐임에도 우리는 분명 미키마우스라는 캐릭터가 하는 것에는 뭐든 관대하다. 조카에게 ‘너 쥐 띠야.’하니까
울어서 ‘너 미키(니)마우스
띠야.’하니 좋아했다는 말이 새삼 우리가 가진 편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쥐의 세계관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영화에서는 내내 ‘쥐는 인간의 음식을 훔친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리고 처음 링귀니가 레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다음날 아침 식재료가 냉장고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쥐는 어쩔 수 없는가?’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곧바로 링귀니의 생각은 ‘오해’였음이 밝혀졌지만). 그렇지만
이 표현들이 과연 맞는걸까?
이에 대해 영화 제작 뒷이야기가 실린 DVD에 디즈니는 원래 쥐는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먹고 살다가 시간이 흘러 인간에 기생하며 살게 되었다는 역사
스토리를 덧붙여 놓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면 평화로운 지구에 인간이 하나 둘
아파트를 세우고 도시를 만들어가고 그로 인해 영토와 영역을 잃어간 쥐들이 스스로 먹이를 찾기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남긴 음식 찌꺼기들을
먹으며 인간에 기생하여 생존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즉,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쥐의 생리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 놓은 행위들은 아닐지, 인간의 관점으로 쥐나 동물들을, 약자를 우리가 은연중에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DVD에
실렸다는 제작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영화를 만든 미국적 사고가 두렵게 연상되었다. 원주민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 아메리카 대륙에 침략한 유럽인들과 그 이후 어쩔 수 없이 그들 중심으로 재편된 세상에서 주체에서 객체로 전락해버린 원주민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라진 원주민 주체의 이야기들,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이 아닌 발견으로 세상에 알리고 설득하려는 그들의 사고와 권력이 도사리는 것 같아 순간 아찔했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에서 레미가 ‘인간은 위험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어.’라며 인간과 가까이 하지말라는 친척 생쥐의 경고에 레미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며 인간에 대해 따뜻하고 좋은 신뢰를
보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레미가 결국에는 인간 링귀니와 함께 멋진 협업을 선보이며 그
까다롭다는 요리비평가 안톤 이고도 맛으로 굴복시키고 장문의 칭찬 비평을 쓰게 만든다.(비록 그 비평으로
위생 문제로 문을 닫게 되고 요리비평가가 비평가로서 명성을 잃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마 이러한 점들
때문에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가 우리에게
점점 설득력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라따뚜이>는 흥행에 성공한 것은 우리가 가진 이 편견을 역으로 영리하게 이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이들과 함께 해보면 좋을 활동들
- 나만의 라따뚜이가 있다면? (그려보고 레시피 써보기, 혼자 혹은 부모와 함께)
- 생쥐를 주인공 요리사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 만약 요리사 주인공을 생쥐가 아닌 다른 동물로 한다면 어떤 동물로 하면 좋을까? 그 이유는?
- 재능은 타고나는 것일까? 환경에 의한 것일까? (금수저 vs. 흙수저)
- 요리비평가는 어떤 사람이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