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백비에 금이 가도록, 꿩꿩
ㅡ 오승철 시집 오키나와의 화살표
류미야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중
누가 눈물을 약함의 징표라 했던가. 거대한 고통의 심연에 진실로 내려가 본 자만이 흘릴 수 있는 어떤 눈물도 있다. 지극한 슬픔과 아픔, 분노와 절망을 앞에 두고 눈물로 항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비겁과 나약에 등을 내주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통곡이든 참는 울음이든, 스스로 상처를 헤집으며 복기하는 일에는 생의 어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망각의 그늘아래 애써 상흔을 묻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톺아보는 일은 그러므로 삶이라는 근원적 고통에 맞서는 인간의 거룩한 분투요 의식(儀式)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오승철 시인의 시집 오키나와의 화살표는 상처를 울음으로 극복하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미학적 전범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미학적’이라는 것은 단지 이 시집이 가닿은 ‘언어예술’로서의 성취만이 아닌, 한 권의 맥락 속에서 드러내고 이룬 두터운 인간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일은 야만적”이라고 한 아도르노의 경우를 빌리자면(여기서 장르 개념인‘시(Gedicht)’는 흔히‘서정시’로 오역되어 통용되고 있다), 후에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읽고 “고문당한 사람이 울부짖듯” 해를 거듭할수록 증폭되는 고통은 “표현의 권리를 갖는”다며 자신의 말을 정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언은 단순히 시에 대한 폄하나 비난이라기보다는 아우슈비츠 참상 이후의 언어와 예술을 향해 손을 모은 그의 뼈저린 고언이자 소망이라 보아야 옳다. 즉 미학적 관습으로서의 시의 폐기 주장이 아닌, 야만에 찬 세계를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그려내고 견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픈 성찰과 제시를 하였던 셈이다.
첫 순간부터 울음을 안고 태어나 비탄과 영탄 속에서 한 생 살다가는 인간이다. 좋아서, 아파서, 억울하고 분하고 간절해서 누구는 노래하고, 누구는 춤을 춘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대신 우는 자’로 태어난 시인은 그래서 더 깊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울음을 받아 적지 않을 수가 없다.
푸른 허기
시집 속 “허랑방탕 봄 한철 꿩 소리 흘려놓고/여름 가을 겨울을 묵언수행 중이다/날더러 푸른 이 허길/또 버티란 것이냐”는 「다시, 봄」 시편에서 우리는 전체를 관통하는 그런 울음의 정조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사연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오는 푸른 봄은 상처를 간직한 자들에겐 늘 엘리엇의 말처럼 두렵도록 ‘잔인한 사월’일 수밖에 없다. 천지간 거짓말처럼 물오르며 되살아오는 것들 사이에서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들의 빈자리는 언제나 반복적으로 아프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푸른 허기”인 것이다. 시인은 이 푸르다 못해 시퍼렇게 날선 공복 내지 공백(空白)의 징후를 시집 곳곳에 “흘려놓”았다. “그리움의 형장 같은 봄 들판”에서 “금삼의 피 토하듯”(「꿩」)부려놓기도 하고,또 때로는 “칠십 년 입술에 묻은 이름 털듯”(「3일 평화」)이 그리기도 하며, “술 끊고/담배 끊고/사람마저 끊”어보지만 그럼에도 “시끄러워 못 살겠”(「꿩꿩,푸드덕」)다 하소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시편들에서 이 허기의 병통을 집요하게 드러내는데 그 주요한 심상은 바로 청각, 꿩의 울음소리다.
불을 끈 지 사흘 만에 다시 번진 산불처럼
다시 번진 산불처럼, 그렇게 꿩은 울어, 전투중지 무장해제 숨바꼭질 꿩꿩, 오라리 연미마을 보리밭에 꿩꿩, 너븐숭이 섯알오름 <4 ‧ 3 평화공원> 양지꽃 흔들며 꿩꿩, 그 소리 무명천 할머니 턱 밑에 와 꿔- 엉 꿩
- 「3일 평화」 부분
“무명천 할머니 턱 밑에 와”서 울지 말라 “꿔- 엉 꿩” 우는 그 소리, “가난한 뒤뜰/장독대나 흔들”며 “꿩꿩” 울다 가는 소리의 주인공 “장서방”은, 푸르게 봄물 드는 지천의 오름과 골짝에 누워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가슴 아픈 이름들의 분신이다. 또한 이는 그 영령들의 울음에 피토하듯 “꿩꿩” 메아리로 화답하는 화자의 분신이기도 하며, 나아가 먼 데서 “괭괭 우는 굿판”처럼 소리내어 대신 우는 자,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세상을 대신해 우는 시인은 곡비(哭婢)다. 그 울음은 수동적 체념의 하릴없는 표지가 아니라, 기다림의 약속과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다짐을 온 영혼이 떨림을 안고 침묵 또는 언어로써 표출하는 선언 같은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은 눈물에 씻김으로 치유에 이르며, 그 울음은 상흔으로 어두워져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구원의 동아줄 같은 것이 된다. 눈물과 울음 없이 지상은 야만성과 푸른 허기 난만한 불모의 땅이 되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오승철 시인은 이 “푸른 허기” 속 자신의 눈물과 울음을 가두어 두려 하며, 그것이 그의 시를 ‘모은 손’처럼 정갈하고 깊은 시의식, 미의식 속에서 내내 출렁거리게 하고 있다.
이승이야 화투 한 모
한편생의 근원성은 슬픔, 낙망 같은 비감 근처에 있는 것만이 아닌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여실해지기도 한다. 마치 어둠 곁에서 더 잘 드러나는 빛처럼.
봄바람이 났는지 어머니 안 계시다
도둑 고양이처럼 이집 저집 기웃대다
경로당 타작 소리에
응수하듯 터진 벚꽃
점당 십 원짜리 그 판도 판이라서
무슨 영문인지
비닐봉지 쓰셨다
선이 또 헷갈릴까 봐
두건 쓰듯 쓰셨단다
봄바람이 났는지 어머니 안계시다
피박 한 번 썼다 치고
연둣빛 타는 꿩소리, 이승이야 화투 한 모
- 「꽃타작」 전문
오승철 시인은 서로 다른 낙차를 지닌 언어의 이항(二項)혹은 이항(異項)들을 시적으로 대비하고 혼융하여 현실 언어로서 숨을 불어넣는 데 탁월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서정/서사, 묘사/서정, 이상(이념)/현실(구체), 대화/독백, 비극성/희극성, 삶(봄)/죽음(겨울), 진중함/우스꽝스러움 등처럼 구분되거나 사뭇 다른 것들을 결속하는 것으로써, 거친 항목화긴 하지만 어쨌거나 위에서처럼 사뭇 구분되는 대상과 개념을 각 시편들 속에서 충돌과 어울림의 교직을 통해 능숙하게 그려낸다. 그럴 때 시적 의미는 보다 강렬해지며 정서적 울림은 동종(銅鐘)처럼 깊어진다.
위 시편에서도 “터진 벚꽃”과 경로당에서 펼쳐진 “화투”놀이 장면이 병치되어 있는데, 순환하는 자연의 유장한 시간과 덧없는 인간적 시간의 한순간을 심상하게 대비해 그려 보여주면서, 묵직한 주제가 결코 제 무게에 질식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 환하고도 묵직한 풍경을 들여다보노라면 일순 놀라운 마술이 펼쳐진다. 어머니를 찾아 이집 저집 기웃대는 화자의 눈도, 그것을 따라가던 독자의 눈도 한순간 화면의 바깥으로 훅 빠져나와 그곳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왁자지껄한 풍경인데 웬일인지 소리는 지워지고, 화투짝 한판 뒤집히듯 모든 것이 머리 위 쓰인 검은 봉지에 실려 어디론가 훅 날아갈 것만 같다. 그 풍경 뒤편에서 울려오는 봄을 앓는 꿩 울음소리……. 이런 절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힘은 단순한 언어적 공교함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꽃빛처럼 터져 으깨지며 때로 피박을 쓰면서도 오래도록 자신이 발 디딘 땅과 사람들을 생각하며 걸어온 사람에게 시가, 이 생이 허여하는 선물인 것이다.
오키나와, 화살표, 그리고 다시 봄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관통한 상처는 영혼에 새겨진 화인(火印) 같아서 어쩔 수 없게도 그것을 공유한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끌고 간다. 어둠과 빛을 교대로 던져주며 상처를 종용하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발끝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을까.
상처 없는 삶은 없고 살수록 삶은 비극이지만 그 고통에 침윤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생의 방향성을 지녀야 한다.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오키나와의 화살표」는 그래서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제주의 4‧3비극과 칠십여 년 전 오키나와의 비극, 분단으로 얼룩진 이 시대의 고통은 다른 시간 속에 새겨진 하나의 얼굴이다.
오키나와의 바다엔 아리랑이 부서진다
칠십여 년 잠 못 든 반도
그 건너
그 섬에는
조선의 학도병들과 떼창하는 후지키쇼겐
마지막 격전의 땅 가을 끝물 쑥부쟁이
“풀을 먹든 흙을 파먹든
살아서 돌아가라”
그때 그 전우애마저 다 묻힌 마부니 언덕
그러나 못다 묻힌 아리랑은 남아서
굽이굽이 끌려온 길
갈 길 또한 아리랑 길
잠 깨면 그 길 모를까 그려놓은 화살표
어느 과녁으로 날아가는 중일까
나를 뺏긴 반도라도
동강 난 반도라도
물 건너 조국의 산하, 그 품에 꽂히고 싶다
- 「오키나와의 화살표」 전문
누군가에게 “살아서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은 그리움으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인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비극도 때로는 힘이 된다. 하루아침 영문 모르게 “끌려온” 그 길을 “잠 깨면 그 길 모를까” 곳곳에 화살표를 그려두는 이의 저린 마음은 생이라는 난바다의 고통 속에서 늘 조난되는 우리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늘 되풀이되는 생의 비극 속 길 잃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물의 말을 통해 시인은 말한다. “살아서 돌아가라”고. “나를 뺏기”고 “동강 난” 허물 많은 그 땅일지라도 반드시 돌아가라고. 그 땅을 과녁 삼아 화살로 가 꽂히라고.
삶이 비극인 건 종결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떠나도 아무것 변하는 건 없고, 아무렇지도 않게 봄은 다시 오고 그 봄이 누군가에겐 여전한 고통과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살아있음으로 생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하여 죽도록 슬픔을 살아서 이겨내고 죽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슬픔으로 슬픔을 깨는 방식이다.
시인은 다시 말한다.
“어차피 못 가져갈/벚꽃은 그냥 두고//목청이 푸른 장끼/푸르게 그냥 두고//4‧3 땅/백비와 같이/건너가는/봄/한 철”(「어느 봄」 전문).
어차피 이 생은 생에게 맡겨야 한다. 그렇게 살다 다 두고 떠날 뿐이지만 이 땅의 시간을 사는 동안은 그냥 푸른 봄의 허기 느끼며 건너자고. 이름 채 다 새기지 못한 “백비”의 슬픔을 껴안고 건너갈 뿐이라고. 그리고 시인은 끝내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 땅에서 우리 겪은 슬픔과 한 다 풀리고 신원되는 그날, 우리 손으로 단단한 슬픔의 백비를 쩡, 깨뜨리자고.
류미야
경남 진주 출생.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2015년 유심 시조 등단. 시집 눈먼 말의 해변.
제4회 공간시낭독회문학상, 제7회 올해의시조집상 등 수상.
서울디지털대학교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