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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일합방 100주년 되돌아본 일본>
1. 일본 문화와 일본인
2. 경계인, 자이니치의 삶과 꿈
3. 일본의 크리스천-일본 기독교의 역사와 현황, 소수지만 깊은 영성으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일본 크리스천들의 모습 등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3. 일본 기독교의 역사와 현황
들어가는 말 : 일본정신의 역사적 변천
임진왜란 전까지 한국과 일본은 사이 좋은 형제국이었다. 적어도 일본의 전국시대까지는 일본의 사무라이에게 충과 효와 자비와 정의라는 개념이 확고하였다.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신일본구상으로 일본의 기독교 부흥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는 불교세력을 탄압하고 기독교 선교사를 받아들여 일본개혁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교의 신앙으로 헌신한 초기 선교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불과 60여 년 만에 전 인구의 5%에 달하는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시의 사무라이의 충의의 정신과 기독교의 신앙이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정권을 장악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농민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사무라이들을 조선으로 방출하였다. 토요토미의 조선침략전쟁으로 인해 사무라이에게는 총과 칼의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 타락한 무력정신이 싹트게 되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에 실패하고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잔인한 복수전쟁 이후 사무라이 정신은 충을 바탕으로 하는 의(義)의 이념에서 이해타산을 바탕으로 하는 이(利)의 이념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이른바 충의를 존숭하는 사무라이 정신의 타락이었다.
이후 정권을 차지한 도쿠카와 막부는 봉건적 사회제도를 기반으로 사농공상의 사회적 신분제도를 활용하여 각 지역의 사무라이를 통제하는 독특한 국가체제를 구축하였다. 오랜 전란을 거쳐 봉건적 통일국가를 형성한 도쿠카와 막부는 일본이 또 다시 전란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무라이의 무력을 봉쇄하였는데 이것은 사무라이와 농민을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격리장치로서 사농공상의 사회적 신분가운데 가장 하층이었던 상인 계급으로 하여금 사무라이와 농민을 격리하도록 중간에 배치한 것이다. 이른바 죠닌이라는 것으로, 도시의 중심부에 사무라이계급을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손쉽게 감시하고 관리로 활용하여 통제하므로 무력을 박탈하고, 상인들로 하여금 이들 주변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사무라이가 농민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격리하였다. 이는 사무라이가 농민을 군대 삼아 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또한 봉건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외무역을 금지하였으며 이에 따라 남만무역을 바탕으로 선교하고 있던 기독교 선교사들을 퇴거시키고 기독교를 금지하며 탄압을 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상인계급이 득세하고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와 상인계급이 결탁하여 새로운 사회주도층을 형성하였다. 이렇듯 일본의 타락한 무력정신은 도쿠카와 막부의 에도시대에 들어와 대두하기 시작한 상인정신과 결탁하여 무력과 금력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무력적 상인정신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사무라이들은 엄격한 관리와 통제를 받아 점차 나약해지고 적은 봉급으로 억제 당하여 경제적 약자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검약과 절약정신을 강요당하여 사무라이가 재력을 모아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봉쇄당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상인들은 도시에서의 독점적인 상업활동을 통해 재력을 기르게 되었다. 또한 당시 이시다 바이간의 심학사상은 상업활동에 면죄부를 부여하였으며 이윽고 상인계급은 재력을 통해 사무라이들에게 세력을 과시하게 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막부말기의 열강침략의 시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막부에 반발하여 하급무사들을 중심으로 막부타도의 기운이 증대하였고, 무시할 수 없는 실력으로 성장한 상인계급이 상인신분에서 탈피하기 위해 가난한 하급무사들과 혼인을 맺어 신분상승을 노리게 되었다.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들과 부유한 상인계급의 결탁은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재력을 확보한 하급 사무라이계급은 막부를 타도하고 고급 사무라이를 몰아내고자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의 이념으로 궐기하게 되었다.
손노조이(왕정을 복고하고 외세를 배격함)의 구호아래 힘을 잃은 막부를 타도하고 명치정부를 세운 중심세력은 도자마(변방) 번의 하급무사층과 이들을 지원하는 상인세력이었다. 막부를 지탱하던 봉건제도가 붕괴하고 덴노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국가체제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국가통치의 이념이 태동하게 되었다. 에도 말기에 대두한 상인정신과 무력정신의 결합은 명치시대에 보다 국가적인 이념, 이른바 명치정신으로 확립되고 군국시대를 거쳐 아시아 침략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막부말기에 일어난 국가주의 이념이 명치정부 발생의 계기가 되었으므로 명치정부의 정책은 철저한 일본지상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이것은 덴노를 정점으로 하급무사들과 상인계급이 결탁한 새로운 사회의 주도층이 관료가 되어 일본의 정권을 담당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철저한 일본지상주의에 근거하여 국가주의 이념을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명치정신은 에도 말기의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를 거쳐 이토 히로부미에 이르러 명치 헌법을 통해 완성되었다. 특히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이러한 명치정신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으며, 오늘날 일본 지도층의 사상적 이념의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대동아 공영구상은 이러한 명치정신의 적극적 실천이었다.
결국 명치정부의 통치이념으로 확립된 일본정신은 텐노를 정점으로 하급무사 및 상인출신의 관료가 지배하는 일본지상주의의 이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일본지상주의는 일본의 종교적 신념으로 까지 발전하여 덴노를 정점으로 관료가 중심이 되는 일본의 내면적 국교화 하였다.
패전 후 일본에 민주주의가 이식되었으나 마츠시타 고노스케의 ‘일본정신의 회복’에서 보여지듯이 일본의 지도적 이념은 여전히 명치정신으로의 회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것이 현대의 일본 지도층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일본의 민주헌법은 특정한 국교가 없이 모든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고 있으나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적 이념인 일본정신은 무력적 상인정신을 바탕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지배하는 정신적 이념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정신은 일본과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가능하다고 하는 일본지상주의로 굳어져 버렸다. 이와 같이 일본의 지도적 이념은 현대에 들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150년 전의 명치정신이 아직도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지상주의는 이웃나라들과의 사이에 영토문제, 과거사문제, 무역불균형문제 등의 갈등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의 고립화를 가져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선교의 가장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말 동서냉전이 종식되고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아래 세계 모든 국가들이 서로 돕고 이해하는 국제협력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근대적인 무력적 상인정신의 이념을 유지한 채 이웃국가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일본 기독교의 역사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핍박을 피해 지하에 숨어들었던 기독교는 비로소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예루살렘의 감독에게는 ‘총감독(patriarch)’이라는 특별한 명예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및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콘스탄티노플에도 이슬람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로마 감독의 권위가 증가하게 되었고, 로마의 황제들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로마 감독의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광대한 로마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로마 감독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게 되었고, AD 451년 로마 감독이었던 레오 1세에 의해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황권의 강화는 로만 가톨릭에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오게 되어 점차 로만 가톨릭의 세속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정치 면에서 세속 군주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성상 숭배의 허용으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로 인해 절대시되던 로만 가톨릭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교황제도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에 따른 로만 가톨릭의 타락상으로 인하여 수도원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토양이 조성되었다. 또한 존 위클리프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을 통해 성경의 권위가 강조되고 교황과 로만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종교 개혁운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이 당시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유럽의 바다를 지배하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해외에 진출하여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되었다. 1492년 콜롬부스가 스페인의 후원으로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이후, 1498년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은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가 열리게 되었다. 마젤란 선단은 스페인의 후원으로 1519~1522년까지 남미대륙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 필리핀을 거쳐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오는 세계일주를 달성하였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한 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511년 말라카를 점령하고 이후 중국의 마카오를 근거지로 하여 동양의 국가들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1533년 남아메리카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뒤 태평양을 넘어 필리핀의 루손섬을 점령하여 동양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로만 가톨릭 내부의 개혁운동 즉 반 종교개혁운동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러한 로만 가톨릭 내부의 교회개혁운동은 세계선교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카회를 비롯한 탁발수도회에 의한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534년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중심으로 예수회가 조직되어 새로이 개척된 항로를 따라 새롭게 건설되는 식민지를 향해 세계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로만 가톨릭 내부의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시작된 세계선교의 열망 속에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선교사는 예수회의 창립멤버로서 포르투갈의 동방항로를 따라 인도와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동양선교에 헌신하던 중, 1547년 중국무역선에 승선하여 말라카를 출발한 뒤 2년만인 1549년 8월 15일 일본 큐슈 남부의 사츠마(카고시마)에 상륙하여 일본선교에 헌신하였다.
이 당시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로만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싸움이 아니라 신실한 크리스천과 타락한 크리스천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간직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기독교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타락한 로만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에 대해 벌인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운동은 로만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들의 타락에 반대하는 수많은 성직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로만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그들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마틴 루터를 파문에 처함에 따라 로만 가톨릭 밖에 새로운 개혁교회를 세우게 됨으로써 촉발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도 하위 성직자들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타락한 로만 가톨릭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것이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구체화 되었다. 교회 밖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내부적인 교회 개혁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로만 가톨릭 내부의 교회개혁운동은 세계선교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로만 가톨릭 내부의 개혁운동은 타락한 로만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의 타락으로부터 돌이켜 초대교회의 순교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순교의 신앙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한 신실한 선교사들을 통해 일본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 당시 포르투갈을 떠나 2년여의 험한 항해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이미 없었다. 또한 엄격한 박해의 시대에 일본에 잠입한 선교사들은 이미 순교의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위해 당당히 순교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일본 신자들에게 커다란 신앙의 확신을 심어 주었으며 에도 막부의 잔인한 260여 년의 박해시대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른바 남만무역으로 불리던 포르투갈 무역은 일본 각지의 봉건 영주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선사하였으며 각 영주들은 경쟁적으로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원하게 되었다. 이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선교를 무역의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각 영주들은 이를 수락함으로 남만무역은 일본의 기독교 선교를 위한 힘의 전략으로 작용하였다. 더군다나 막대한 무역이익의 십 분의 일을 선교비로 사용하게 됨으로 인해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더 힘을 얻게 되었다.
이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남만무역을 통한 선교의 힘과 순교의 신앙을 모두 소유하였다. 이러한 선교의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한 이들은 선교 개시 후 불과 60여 년 만에 일본 전 인구의 5%에 달하는 70여 만의 신자를 전도하는 놀라운 선교의 부흥시대를 경험하였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순교의 정신과 교역을 통한 선교전략의 결과였다. 그러나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한 이후 도쿠카와 막부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철저한 기독교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후 260여 년에 걸쳐 잔인한 기독교 말살정책이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페리 제독의 쿠로부네(군함)가 우라가만(동경 앞바다)에 나타난 이후,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명치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으나 에도 막부의 종교탄압정책을 계승하여 국가주의의 이념으로 기독교 선교를 탄압한 명치시대에 일본 개신교 교회는 국가의 시책에 순응하여 순교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본정신에 타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타협으로 인해 일본의 기독교는 국가주의 시대에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아시아 침략전쟁에 협력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하리스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조항에 미국인의 종교생활을 돕기 위한 교민선교사의 입국을 허용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일본인을 선교하기 위한 소망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상으로는 자국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민선교사의 신분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신분상의 제약과 함께 어려운 한자 등 언어상의 제약도 있어서 장차 일본인을 전도할 목적으로 일본의 역사와 문화 및 관습과 종교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하는 데에 소홀하였다.
결과적으로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일본의 역사 문화적 바탕 위에 일본정신을 대체할 새로운 일본 기독교의 정신적 기초를 쌓지 못하고 시대적 상황과 타협하여 명치정신의 바탕 위에 구미에서 수입된 교단 교회를 이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당시 명치정신의 바탕 위에 세워진 일본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국체에 순응하는 체질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한계로 인해 오늘날에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의 함포 외교로 시작된 개신교 선교사의 일본 입국은 단지 자국민들을 위한 교민 목회자의 신분이거나 영어교사 등의 비 종교인 신분으로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엄격한 명치정부의 반 기독교 정책하에서 선교사들은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일본인들을 위해 교회를 세워나가는 대신 명치정부의 국가시책에 순응하여 영어나 과학, 의학 등 교육을 통한 간접 선교의 영역에 집중하였다.
이 당시 나가사키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들 역시 영어교육 등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푸루벡키(페어벡)선교사는 후에 명치정부의 고문으로 발탁되어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 국가발전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 되었다. 교육과 의술 및 정치와 군사에 이르기 까지 선교사들의 협력으로 일본은 근대국가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성장한 근대 일본은 군국주의를 통해 아시아에 대한 식민정책을 확대하여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를 침탈하였으며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명치정부의 국가주의에 대해 순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적절한 선교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국가정책에 순응하고 타협한 결과 오늘의 일본 기독교가 침체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전 후 일본 기독교는 재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에 들어온 맥아더 장군은 신앙심이 투철한 크리스천으로 일본을 기독교 정신으로 개혁하려는 청사진을 갖고 일본인들에 대해 기독교의 전파를 간절히 소망하였으며 개신교 선교사들의 대거 입국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정책적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을 장려하고 성서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전쟁에 패망하여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는 의지할 만한 종교로 인식되었고 이 당시 활동하였던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많은 신자가 전도되었다.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함으로써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전도를 실천하였으며 고스펠 콘서트와 성탄절 및 부활절 행사 등의 기독교 활동을 통해 문화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복지 및 교육 선교 활동을 통해 기독교가 활발하게 보급되었으며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다수의 신자를 양산하는 열매를 맺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전쟁에 패한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였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일본 기독교의 토착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전국으로서의 우월감을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교단을 배경으로 단지 구미의 기독교를 수입하여 이를 보급하는 데에 힘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미의 기독교 수입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교회가 일본의 문화 역사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치 화분 속에 심어진 화초와 같이 일본 기독교로서의 자생적인 성장에 한계를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사회 문화전도의 능력은 발휘하였으나 일본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만한 순교적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데는 부족하였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동양에 대한 우월적 인식을 버리지 못하였고 특히 교리와 교단을 중시하는 구미 선교사의 위압적인 선교자세로 인해 우치무라 간조 등의 무교회 신자들이 생겨나게 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구미식 선교의 함정이었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기독교 탄압정책에 맞서 순교적 신앙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자세로 타협을 모색하였으며 일본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에 근거하여 일본인의 교회를 자생시키지 못하고 일본적인 기독교의 토착화를 이루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날 일본의 기독교회가 전도의 힘을 잃고 패배감에 빠지게 된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기독교의 현황
일본의 기독교 교세는 개신교 측이 약 8000여 교회에 54만 명의 신도가 등록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절반 정도인 27만 명이 매주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재일한국인교회는 80여 교회에 약 1만 명의 신도가 등록하고 있으며 이는 100만 명 정도되는 재일한국인의 1%를 차지하는 숫자이다. 로만 가톨릭 측은 16개 교구의 800여 성당에 47만 명의 신도가 등록하고 있는데, 개신교와 로만 가톨릭을 합친 일본의 전 기독교 인구는 일본 전체 인구 1억2천7백만 명의 0.8%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특히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개신교 신도는 2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2%에 불과한데 이것도 복음파와 성령파로 반분되어 전도에 소극적인 복음파를 제외하면 실제로 전도에 동참할 수 있는 개신교 신자의 수는 전 인구의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10만 여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또한 개신교 신도의 고령화와 더불어 목회자의 고령화가 진척되고 새로운 목회지원자가 감소함으로 인해 현재 1000여곳의 무목교회가 존재하며 이 수치는 앞으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장차 20년 이내에 8000여 일본 개신교 교회의 절반이상이 무목교회가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개신교 선교사는 약 3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중 미국이 절반 가까운 1500여명으로 가장 많고 한국이 500여명으로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한국인 선교사들은 교민과 유학생 등 재일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가 100여명, 그리고 각 교단선교부 및 일본의 각 교단 소속 그리고 초교파 교회와 신학교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가 400여명으로 추산되며 이외에도 평신도 선교사(자비량선교사 또는 전문인 선교사)가 200여명 정도 일본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선교사들은 재일한국인을 위한 교민목회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신학교의 교수사역을 비롯해서 일본 전국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일본교단의 무목교회를 섬기거나 무교회지역에 일본인교회를 세우는 등 열심히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일본선교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선교단체로는 OMF, YWAM, GMP, 인터콥, JEM, 바울선교회, CCC, JEM, UBF, 예수전도단 등 여러 선교단체를 통한 평신도 선교사 또는 전문인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하며 한국의 각 교회 및 선교단체에서 파송되는 단기봉사단의 활동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에 있다.
일본의 순교자에 대하여
사전적 의미의 순교는 ‘어느 종교에서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어 위키백과) 그러나 성경적 의미의 순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 6:9), 그리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35)의 성경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순교는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본의 로만 가톨릭 순교자는 26위 순교성인, 16위 순교성인, 205위 순교복자, 188위 순교복자로 합계 435인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히라토의 마리아 오센은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직후,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남편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또한 하라성에 농성하였던 2만7천여 명의 기독교 농민군의 대부분은 막부군에 포위되어 전원 몰살될 위험을 알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해당하였다. 이와 같이 로만 가톨릭 측의 공식적인 순교자로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이것은 1549년8월15일 프란치스코 자비에르에 의해 시작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불과 65년만인 1614년의 금교령이 발포될 시점까지 일본 전역에 거의 50만에서 70만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에도 막부 260여 년에 걸친 혹독한 박해를 통해 20여 만에 달하는 순교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비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일본의 개신교 순교자는 성결교 8인, 일본 자유교회 1인, 기독교형제단 2인으로 합계 11인으로 보고되고 있다. 1859년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가 시작된 이후에도 90여 년 동안 기독교 선교는 혹독한 방해와 핍박을 받아왔다. 명치정부의 교묘한 이중 종교정책과 이후 군국정부의 종교탄압으로 대부분의 일본 기독교회는 군국주의 시책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이름도 없이 순교한 믿음의 용사들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정확한 내용은 밝혀진 것이 없이 단지 위와 같이 11명의 순교자가 알려져 있다.
나가는 말 : 순교신앙의 회복
21세기를 맞이하여 한일간에 선교협력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시점에 우리는 일본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세계선교의 비전을 위해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방향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로만 가톨릭의 타락한 모습에 실망한 채 90도의 입사각을 가지고 정면으로 돌파하여 로만 가톨릭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모든 면에서 로만 가톨릭과 대립각을 세우려고만 하는 경향은 없었는지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460년 전에 일본에 전파된 기독교의 복음이 비록 로만 가톨릭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 즉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반 종교개혁운동)이 지구의 절반을 돌아 일본에서 실천되었다. 교회 밖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내부적인 교회 개혁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로만 가톨릭 내부의 교회개혁운동은 세계선교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은 초대교회의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순교신앙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한 로만 가톨릭의 신실한 선교사들을 통해 일본에서 실현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원형 기독교(The original Christianity)’의 모범을 실물로 배울 기회는 대단히 드물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단지 지리적으로) 일본의 나가사키 지역에 원형 기독교의 모범을 닮고 있는 순교 신앙의 역사가 실물로 다수 존재하고 또 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열려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축복이요 은혜라고 할만하다. 일본 나가사키 지역의 순교신앙의 역사를 배우면서 한국 기독교의 방향성을 재확인하고 아울러 새롭게 출발하는 한일선교협력의 방향성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가사키 순교기념교회 현승건목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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