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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고승전(高僧傳) 제7권-석혜교
19)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소(邵)씨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抗)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면서 지조를 지키고, 힘써 수행함에 정성이 간절하였다. 풍모 있는 자태가 수려하고 반듯하여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처음 여산(廬山)에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지혜롭게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하상지(何尙之) 등이 모두 덕스런 풍모를 흠모하였다. 안연지는 늘 찬탄하였다.
“형산(荊山)의 구슬이라면 오직 혜정, 그 사람뿐이다.”
아들 안준(顔竣)이 나가 동주(東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동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천주산사(天柱山寺)에 깃들어 살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섬주(剡州) 법화대(法花臺)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동앙산(東仰山)에서 쉬었다. 곳곳에서 소요하며 노닐었다. 아울러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힘썼다. 나이가 50세를 넘자, 뜻과 절개가 더욱 굳건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58세이다. 지은 문한(文翰)과 문집(文集) 열 권이 있다.
20) 석법민(釋法愍)
법민은 북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여 뜻을 경전에 도탑게 가졌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였다. 곧 고을과 나라들을 밟아보고, 풍속을 구경하며 도를 음미하였다. 그는 『반야경』과 논리를 따지는 것과 경장과 율장을 모두 마음껏 요리하였다.
그 후 강하군(江夏郡)의 오층사(五層寺)에서 쉬었다. 당시 사문 승창(僧昌)이 강릉 성 안에 탑을 세웠다.
자사인 사회(謝晦)가 이를 허물고자 하였다. 법민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사회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법민은 이에 장사(長沙)의 녹산(麓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회는 곧 부하들을 거느리고 절에 이르러, 후하게 술과 고기를 두텁게 내려주었다. 엄중하게 북을 치고 위엄을 떨치면서,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부셔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과 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사회는 놀라고 무서워 달아났다.
그 후 그는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의 무리였던 정법성(丁法成)과 사승쌍(史僧雙)은 몸에 문둥병이 나타났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법을 범해 죽었다.
이에 법민은 『현험론(顯驗論)』을 지어서 인과를 밝히고, 아울러 『대도지경(大道地經)』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제자 승도(僧道)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ㆍ승종(僧宗)
당시 시흥군(始興郡) 영화사(靈化寺)의 승종이라는 비구도 경론을 널리 섭렵하였다. 『법성론(法性論)』과 『각성론(覺性論)』이라는 두 논을 지었다.
21) 석도량(釋道亮)
도량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서울의 북쪽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빼어난 깨달음이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렀다. 마침내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드러나자,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남월(南越) 지방으로 옮겨가는 벌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혹 그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조롱하였다. 이에 도량이 말하였다.
“업보의 이치로 가는 것이지, 특별히 사람이 시켜 된 일은 아니오.”
이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밤을 세워가며 남쪽 광주(廣州)로 떠났다. 제자인 지림(智林) 등 열두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남쪽에 머물면서 6년 동안 강설로 대중을 인도하였다. 영외(嶺外) 지방을 교화로써 도야하다가,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성대하게 법석을 열고,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9세이다.
ㆍ정림(靜林)ㆍ혜륭(慧隆)
당시 다보사에 또한 정림과 혜륭이 있었다. 정림은 『대열반경』에 빼어나, 전송의 효무황제로부터 큰 그릇으로 존중받았다.
혜륭도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신령하게 통하였다. 혜륭이 심기(心氣)병을 오래 앓았다. 밤에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나타나 탕약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말릉령(秣陵令)이 보낸 것이다.”
약그릇을 주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혜륭이 이것을 취하여 한 번 복용하자 고통 받던 것이 곧 치료되었다.
22) 석범민(釋梵敏)
범민의 성은 이(李)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릴 때 관중ㆍ농서(壟西)지방에서 유학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팽성(彭城)과 사수(泗水) 지방을 두루 다녔다. 내외의 경서 모두를 마음의 구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만년에는 단양(丹陽)에서 쉬면서 자주 강설하는 법회를 세웠다. 사장(謝莊)ㆍ장영(張永)ㆍ유규(劉虯)ㆍ여도혜(呂道慧)가 모두 그의 도풍을 이어받았다. 흔쾌히 기뻐하면서 서로 칭탄하며 존중하였다.
여러 번 『법화경』과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요의백과(要義百科)』에 서문을 써서, 간략하게 불교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그런 까닭에 글은 이 한 권에 그친다. 구사한 내용에서 생략된 점이 보이지만 당시에 존중받았다.
그 후 단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ㆍ승약(僧籥)
당시 승약은 본래 상당(上黨) 사람이다. 『열반경』에 빼어나 장창(張暢)의 존중을 받았다.
23) 석도온(釋道溫)
도온의 성은 황보(皇甫)씨며,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이다.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알려졌다.
열여섯 살 때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에게 의지하여 수학하였다. 그 후 장안에 노닐어 다시 동수(童壽: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돌아와 양양의 단계사(檀溪寺)에 머물렀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번주(樊州)와 등주(鄧州)의 학도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오(吳)나라의 장소(張邵)가 양양에 주둔하자, 그의 아들 장부(張敷)도 따라왔다. 장부가 도온의 강론을 듣고서 돌아오자, 장소가 그에게 물었다.
“도온은 어떻더냐?”
장부가 대답하였다.
“논리의 해석은 세세한 것까지 분석하는구나 느꼈지만, 도에 깃든 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장소가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비로소 그의 정신이 매우 빼어남에 고개 숙였다. 그 후 조용히 도온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만일 환속할 수만 있다면, 곧 별가(別駕) 벼슬로 대우하겠소.”
도온이 말하였다.
“시주께서는 형틀과 수갑으로 사람을 유인하시려 합니까?”
그 날로 그곳을 떠나 강릉으로 갔다. 장소가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한탄하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내려왔다.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칙명으로 서울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노소(路昭) 황태후가 대명(大明) 4년(460) 10월 8일에 보현보살의 상을 조성하였다. 상이 완성되자 중흥사의 선방에 재를 마련하였다. 초청한 승려가 모두 2백 명이다. 이름을 열거해서 함께 모이게 하여, 사람의 수효를 일찍이 정해놓았다.
그 당시 절은 새로 지어 호위가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늦게 와서 자리에 앉았다. 풍채와 용모가 모두 청아하였기에, 온 법당의 승려들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재주(齋主)와 함께 백여 마디의 말을 나누고는 문득 사라졌다. 문을 지키는 이들을 샅샅이 검문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출입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신인(神人)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도온은 이미 승주였으므로 말릉(秣陵)의 고사(故事)를 예로 들어 아뢰었다.
“황태후께서는 슬기롭게 비추어 보는 기운이 높고 밝으시어, 성스러운 상서로움이 그윽하게 적셨습니다. 청정한 도량에서 생각을 씻어내고, 지극한 경계에서 옷깃을 가다듬으셨습니다. 본래부터 궁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시고, 일마다 부처님의 경계 밖에 허통하십니다[事虛梵表].
마침내 처음으로 쇠를 녹이고 자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곧 신비하고 화려한 모습을 묘사하여, 보현보살이 오시는 모습의 성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주의 진귀한 보배를 기울여, 그 묘함은 하늘의 장식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련하신 재와 강론은 이 달 8일로 끝났습니다. 보시하신 모임에는 제한이 있고 명부도 본래부터 정해져 있어서, 차례대로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니, 수효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돌아가며 경을 읽는 것이 절반 가량 진행되려 할 즈음에, 시각은 사시(巳時)가 되었습니다. 홀연히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좌석 안에 참여하였습니다. 얼굴과 행동거지가 단엄하고 기개와 모습이 빼어나게 드러나, 온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재주(齋主)가 물었습니다.
‘상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혜명(慧明)이라 합니다.’
‘어느 절에 주석합니까?’
‘천안사(天安寺)에서 왔습니다.’
말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송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생각을 숙연히 하였습니다. 이는 밝은 상서로움의 드러남이며, 보이지 않는 감응이 펼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붉은 묏부리는 눈으로 볼 수 있고 화려한 누마루도 멀지 않습니다만, 대저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해[景]를 되돌려 놓고 달[緯]을 움직이며, 맑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기적은 바위를 일으키고 샘을 열게 한다.’
하물며 황제의 덕은 천운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공은 온 백성을 흡족하게 적셔줍니다. 어진 정치로 먼 하늘 끝까지 밝히고, 이치로서 어둠의 세계 밖까지 뻗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상왕 때의 번성하던 선비들은 크게 밝은 조정을 보여줄 수 있었고, 신께서는 발심을 권유하는 오묘한 몸으로 황제의 방으로 나투었습니다.
만약 때맞추어 폐하가 바다 구석까지 지혜로 비추신다면, 그 빛남이 일월보다도 밝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이름을 혜명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 천복을 일으켜 끝없는 곳까지 드리우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천안사(天安寺)라 칭하였습니다. 신(神)의 기반이 더욱 멀리 이어지고 도의 정치가 바야흐로 응결되어, 온 천하가 태평하고 만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삼가 소속된 고을에 이 사실을 줄지어 이야기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서상을 밝히고자 합니다.”
현에서는 이 사실을 군(郡)에 말하였다. 당시 경조윤(京兆尹)의 공령부(孔靈符)는 이 사실을 표를 지어 나라에 아뢰었다. 이어 조서가 내려와, 선방을 고쳐서 천안사(天安寺)라 하여 상서로움을 기렸다.
그 후 도온은 여러 번 강의를 맡았다. 듣고 음미하는 손님이 강당을 메우고, 서로 마음을 기울였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하게 여러 사람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자주 신비한 이적(異跡)에 감응하였다. 황제는 이를 기뻐하여 돈 50만 냥을 하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제왕은 재물을 하사하고 도온은 법칙을 이끌어서, 저 위의 하늘에서 감동을 느껴 신령(神靈)한 덕을 내리셨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9세이다.
ㆍ승경(僧慶)ㆍ혜정(慧定)ㆍ승숭(僧嵩)
당시 중흥사에 승경ㆍ혜정ㆍ승숭이 있었다. 모두 교리의 이해력으로 명성을 드러내었다. 승경은 3론(論)에 빼어나 당시 학도들의 종사가 되었다. 혜정(慧定)은 『열반경』과 아비담에 뛰어나서 역시 여러 번 으뜸가는 자리를 맡았다. 승숭도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그러나 말년에 편벽된 고집이 생겨 주장하였다.
“부처는 마땅히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다.”
임종하던 날 혀의 뿌리가 먼저 썩었다.
24) 석담빈(釋曇斌)
담빈의 성은 소(蘇)씨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도위(道褘)를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강릉의 신사(新寺)에 머물면서, 경론의 강의를 듣고 선도(禪道)를 배웠다. 깊이 있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정을 아직 다 통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담빈에게 말하였다.
“네가 의심하는 내용은 두루 떠돌아다니면 저절로 풀리리라.”
이에 지팡이를 떨치고 옷을 껴입고, 다른 나라에서 도를 묻기로 하였다. 처음 서울로 내려갔다가 이어 오군(吳郡)에 머물렀다. 때마침 승업(僧業)의 『십송률(十誦律)』 강의를 만나 음미하여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이 깊은 경지로 들어갔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정림(靜林) 법사에게 『열반경』을 자문 받았다. 다시 오흥(吳興) 소산사(小山寺)의 법진(法珍)을 찾아가 『열반경』ㆍ『승만경』을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에게서 『화엄경』과 『잡심론(雜心論)』의 강의를 받았다.
이미 두루 많은 스승들을 거쳐오면서 색다른 풀이들을 갖추어 들었다. 그러자 곧 오랫동안 사유한 것들이 그때마다 쌓였다. 게다가 그 묘함을 끝까지 추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녹여 다듬어서 모든 경전을 꿰뚫었다.
이에 다시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자리를 열어 강설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의 이름 있는 손님들이 책을 등에 지고 갖옷을 걸치고서 모두 이르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이르자 왕현모(王玄模)에게 조칙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면서 『소품경(小品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취지를 펼쳤다.
당시 마음속으로 경합하려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담빈의 언사가 이치에 맞고 이론에 밝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서, 담빈의 행실과 깨우침을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개(巢尙介)를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빈이 굴복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찬이 몸소 스스로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원찬은 늘 담빈에게 천자를 찾아가 보라고 자주 권하였다. 담빈이 그에게 말하였다.
“빈도는 세상 테두리 밖의 사람인데, 어찌 천자와 취향을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찬은 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청해서 그의 어머니의 스승이 되었다.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劉景素)도 그에게 계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물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장엄사(莊嚴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ㆍ담제(曇濟)ㆍ담종(曇宗)
당시 장엄사에는 담제ㆍ담종이 있었다. 모두 학업과 재주의 능력으로 한 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담제는 『칠종론(七宗論)』을 짓고, 담종은 경목(經目)및 『수림(數林)』을 지었다.
25) 석혜량(釋慧亮)
혜량의 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현량(顯亮)이다. 동아(東阿)의 도정(道靖)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맑은 명성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
“도정은 큰 스승이고, 혜량은 작은 스승이다.”
비록 나이와 명망에서는 도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풍과 규범은 그를 이어받았다.
그 후 임치(臨淄)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과 『대품경』ㆍ『소품경』ㆍ『십지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니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가마를 준비했다.
그 후 양자강을 건너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장서(張緖)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들은 늘 찬탄하였다.
도안(道安)과 법태(法汰)는
전 시대에 주옥같은 말씀을 토해내고
담빈과 혜량은
후세에 금 같은 소리를 떨치니
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
끊어지려 하다가 다시 일어났어라.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장엄사(莊嚴寺)에서 큰 모임을 열었다. 교학에 정통한 뛰어난 승려 천 명을 가려내어 교열하였다. 황제의 칙명으로 혜량과 담빈을 바꾸어가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당시의 종사로서 이들과 더불어 경합할 사람은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3세이다. 『현통론(玄通論)』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전한다.
26) 석승경(釋僧鏡)
승경의 성은 초(焦)씨이다. 본래는 농서(隴西) 사람으로, 오군(吳郡) 땅에 옮겨 살았다. 지극한 효도는 보통 사람을 넘었다.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죽자, 태수(太守)가 돈 5천 냥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간곡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곧 스스로 흙을 지고 와서 소나무ㆍ잣나무를 심었다. 묘소에서 움막살이를 하면서 3년간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3년 상을 마치고 출가하여 오현(吳縣)의 화산(華山)에 머물렀다. 후에 관중ㆍ농서 지방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법을 전수 받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크게 경론을 펼쳤다.
사공(司空) 벼슬에 있던 동해의 서담지(徐湛之)는 그의 소박한 풍모를 존중하여, 온 문중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 후 동쪽 고소(姑蘇)로 돌아가 다시 전념하여 종사의 자리를 맡았다. 대사(臺寺)의 사문(沙門)과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요청해서 1년 가량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동쪽 상우(上虞)의 서산(徐山)으로 가니, 따라간 학도들이 백여 명이었다. 교화가 삼오(三吳) 지방을 적셔 명성이 나라[上國]에까지 퍼졌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과도 편지로써 친교를 나누었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는 그의 소박한 도풍에 의지하였다. 칙명으로 서울로 나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자주 법회를 열자, 덕망 있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법화경』ㆍ『유마경』ㆍ「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와 아울러 『아비담현론(阿毘曇玄論)』을 지었다. 교리의 종류를 구별하여 일관된 조리가 있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ㆍ담륭(曇隆)
이에 앞서 상우의 서산(徐山)에 담륭 도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법석을 잘하였다. 만년에는 문득 고결한 절개가 보통을 넘었다. 역시 사령운의 존중을 받았다. 항상 함께 우승산(嶀嵊山)을 노닐었고, 죽은 후에는 사령운이 조문[誄]을 지었다.
27) 석승근(釋僧瑾)
승근의 성은 주(朱)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숨어사는 선비 주건(朱建)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노자』ㆍ『장자』와 『시경』ㆍ『예기(禮記)』를 잘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가 광릉(廣陵)에 이르러 담인(曇因) 법사를 만났다. 처음 만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도(道)를 위하여 조아려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두루 돌아다니며 내전(內典)을 배우고, 널리 삼장을 섭렵하였다.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 법사를 만났다. 다시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효무(孝武)황제가 칙명을 내려 상동왕(湘東王)의 스승이 되었다. 승근은 병을 이유로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끝내 면할 수는 없었다. 왕은 그를 따라 5계(戒)를 받기를 청하고, 매우 넉넉한 예우를 더하였다.
이에 앞서 지빈(智斌)이 초대 승정(僧正)인 담악(曇岳)과 교대하여 승정이 되었다. 지빈도 덕이 대중의 종사가 될 만 하였다. 삼론(三論)과 『유마경』ㆍ『사익경』ㆍ『모시』ㆍ『노자』와 『장자』 등에 빼어났다.
후에 의가(義嘉)가 음흉한 계획을 꾸몄을 때, 당시 사람들이 지빈을 참소하여 말하였다.
“지빈은 의가를 위하여 도를 행했다.”
마침내 교주(交州)로 쫓아냈다.
이때 상동왕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명제(明帝)이다. 승근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천하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법기(法伎) 일부와 친신자(親信者) 20명을 공급하고, 한 달에 돈 3만 냥씩을 지급하였다. 겨울과 여름 등 사계절에 하사품을 내렸다. 아울러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하사하였다. 모든 외진(外鎭)에 명령하여 모두들 공여하라고 하니 승근은 사양하였다. 사방에서 받들어 헌납하면서 모두들 말했다.
“승정의 마음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
그가 존중받았음이 이와 같았다.
승근은 돈을 감추어 두지 않는 성품이었다. 모두를 복 짓는 일에 채워 영근사(靈根寺)와 영기사(靈基寺) 두 절을 세워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명제의 말년에 이르러 황제가 자못 기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열반이나 멸도와 같은 번역은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모든 사망ㆍ환란ㆍ쇠약하고 머리가 희게 쇠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황제와 상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 법을 범하여서 황제의 마음을 거슬려 살육을 당한 사람이 열에 일곱ㆍ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승근이 늘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간언하니, 은혜와 예우도 엷어졌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황제의 장막에서 모셨다. 어느 날 승근은 주옹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요즘 행하시는 일은 절대로 임금다운 거동이 아닙니다. 속가의 일로써 풍자하고 간언하여도 도움되는 바가 없으니, 오묘한 진리의 깊은 이야기야 더욱 멀기만 합니다. 오직 삼세(三世)의 괴로운 과보만이 가장 인정에 가깝고 절실한 말이 될 것입니다. 시주께서 혹 기회를 엿볼 인연이 있으시면, 바로 이것만을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후 황제가 중풍을 앓아 자주 침과 뜸을 더하였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조금도 변함 없었다. 이에 곧 주옹과 은홍(殷洪) 등을 불러 귀신과 잡스런 일에 관한 것 등을 말하게 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고자 하였다.
주옹은 곧 『법구경(法句經)』과 『현우경(賢愚經)』 등 두 경을 익숙하도록 읽었다. 매양 알현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곧 말에 앞서 이 경들의 내용을 말하였다. 황제는 왕왕 놀라며 말하였다.
“응보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황제의 뜻에 거슬렸던 무리들이 여러 번 사면을 받았다. 이는 대개 승근이 인연이 되어 제대로 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승근은 송(宋)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ㆍ담도(曇度)
다시 담도가 승근의 뒤를 이어 승주가 되었다. 담도는 본래 낭야 사람으로 삼장과 『춘추』ㆍ『노자』ㆍ『장자』ㆍ『주역』에 빼어났다. 전송의 세조(世祖)ㆍ태종(太宗) 황제가 모두 흠모와 칭송을 더하였다.
그 후 젊은 황제가 예에 어긋나자, 담도도 행함과 감춤에 마땅한 바를 얻어, 거동이 황제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ㆍ현운(玄運)
같은 절에 또 현운이 있었다. 그도 대ㆍ소승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장영(張永)과 장융(張融)이 모두 승당 제자가 되어 도를 물었다.
28) 석도맹(釋道猛)
도맹은 본래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연(燕)ㆍ조(趙) 지방을 두루 떠돌아, 풍속과 교화를 모두 구경한 후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정력을 쏟아 부지런히 배우니, 삼장과 9부(部)의 대승ㆍ소승ㆍ논리를 따지는 것 등에 모두 생각이 깊고 미세한 경지에 들어갔다.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성실론』 하나만은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에 크게 강서 지방을 교화하니 학인들이 줄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26년(449)에 이르러 동쪽 서울로 노닐었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을 열어 이어갔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 깊이 숭앙하고 추천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갑절로 예우와 대접을 더하였다. 그리고 접대비로 돈 30만 냥을 하사하였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황제는 건양문(建陽門) 밖에 절을 창건하였다. 도맹에게 조칙을 내려 기강을 이끌게 하면서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도를 널리 펴고 도는 사람에 의거하여 넓혀지는 것이다. 지금 법사를 얻은 것은 오직 도가 창생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바람에도 광명이 있게 된 일이다. 절 이름을 흥황사(興皇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로 말미암아 흥황사가 이 절의 이름이 되었다.
절을 창건하는 공사가 끝나자 조칙을 내려, 도맹에게 절에서 『성실론』의 강론을 개강하게 하였다. 처음 개강하는 날에는 황제가 친히 거동하였다. 그러니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였고, 사방 먼 곳의 학자와 손님들이 책을 등에 업고 나란히 찾아왔다.
도맹의 고상한 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말이 소상하고 세밀하니, 황제는 오래도록 거룩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렸다.
“도맹 법사는 고상한 인격으로 중생 구제를 많이 하였다. 짐도 평소부터 손님 같은 벗으로 대해 왔다. 한 달에 돈 3만 냥, 관리 네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자 20명, 수레와 가마 각 한 대를 하사하여,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보게 하라.”
도맹은 얻는 것이 있으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모두 보시하거나, 절을 짓는 데 썼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동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ㆍ도견(道堅)ㆍ혜란(慧鸞)ㆍ혜부(慧敷)ㆍ혜훈(慧訓)ㆍ도명(導明)
그 후 도견ㆍ혜란ㆍ혜부ㆍ혜훈ㆍ도명 등이 모두 흥황사에 머물렀다. 교리를 이해하는 명성 또한 도맹에 버금갔다.
29) 석초진(釋超進)
초진의 성은 전욱(顓頊)씨며, 장안 사람이다. 확고한 지조가 있으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돈독하여, 대승ㆍ소승의 여러 경전을 모두 전체적으로 훑어보기를 더하였다. 정신과 성품이 온화하고 기민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명성을 관중 지방에 떨쳤다.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하고 어지러워져서 불법의 일도 피폐해졌다.
이때 초진은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더욱 경문의 뜻을 정밀하게 찾아보고 강설을 열었다. 얼마 후 초진은 고소(姑蘇)로 가서 다시 불법을 널리 폈다.
당시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그의 고상한 풍모에 깊이 의지하고자, 곧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여 산음(山陰)의 영가사(靈嘉寺)로 편안하게 모셨다. 이에 절동(浙東)에 머물면서 강론을 이어갔다. 그러니 고을과 외곽의 비구ㆍ비구니 및 청신도의 남녀들이 모두 보살의 인연을 맺고, 계율의 모범에 조아려 가슴에 새겼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부름을 받고 서울로 나아갔다. 『대법고경(大法鼓經)』을 강의하였다. 잠시 뒤 다시 회계로 돌아와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해 나아갔다.
『대열반경』이 궁극적인 진리의 가르침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생각에 남겨 두어 머뭇거리다가, 여러 번 강설을 더하였다.
무릇 재(齋) 모임을 결성하는 사람치고 반드시 초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다른 곳에 먼저 가기로 허락한 경우가 있으면, 곧 날짜를 옮겨서 재를 열었다. 그 후 노쇠하여 다리에 병이 생겼다. 외부로 찾아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음식을 방으로 보내서,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기를 바랐다.
초진은 성품 됨됨이가 경전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다. 보고 찾는 데 지극히 간절하였다. 늙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제자를 시켜 열흘에 한 번씩 『열반경』을 소리 높여 읽게 하였다. 그가 경전을 탐독하고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94세이다.
ㆍ담기(曇機)
당시에 또 담기 법사가 있었다. 본래 성은 조(趙)씨며, 역시 장안 사람이다. 관중에서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자, 그곳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산수를 두루 구경하면서 회계 고을에 이르렀다. 『법화경』과 아비담에 빼어났다. 당시 세상에서 종사로 받들어서 초진과 서로 버금갔다.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유곤(劉琨)이 초청하여, 고을 서쪽 가상사(嘉祥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본래 유곤의 조부인 유회(劉薈)가 창건한 절이다.
ㆍ도빙(道憑)
당시에 도빙도 세상에서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집착하는 성품이 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그를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0) 석법요(釋法瑤)
법요의 성은 양(楊)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만 리 밖이라도 찾아가 물었다.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에 연주(袞州)와 예주(豫州) 지방으로 와서, 많은 경전을 끝까지 꿰뚫었다. 한편으로는 불교 외의 다른 경전[異部]에도 뛰어났다.
그 후 동아(東阿)의 도정(道靜)이 그의 강론을 들었다. 대중들이 여러 번 다시 강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정은 한탄하였다.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 후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오흥(吳興)의 심연지(沈演之)가 특별히 깊이 그릇이라고 존중하였다. 초청해서 오흥(吳興) 무강(武康)의 소산사(小山寺)로 돌아왔다.
시종 19년 동안 기원하기를 요청하는 법사가 아니면,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강산에서 기거하였다. 그러면서 해마다 강론을 열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찾아오는 삼오(三吳)의 학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이에 『열반경』ㆍ『법화경』ㆍ『대품경』ㆍ『승만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대명(大明) 6년(462)에는 황제가 오흥군(吳興郡)에 칙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서울로 오르게 하였다. 도유(道猷)와 함께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두 깨달음의 내용에 관하여 각기 종사(宗師)가 되었다. 이르자마자 곧 강석에 나아갔다. 황제의 가마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들이 자리에 배석하였다.
법요는 나이가 비록 노년이 되어서도 거친 음식과 고난 속에서 굳건한 절개를 고치지 않았다. 계율을 지키는 절도가 청백하였기에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ㆍ담요(曇瑤)
당시 전송 희제(熙帝) 때에 담요가 있었다. 『유마경』ㆍ『십주론(十住論)』및 『노자』와 『장자』에 빼어났다. 또한 초서ㆍ예서에 솜씨가 있어, 전송의 건평(建平) 선간왕(宣簡王) 유굉(劉宏)의 존중을 받았다.
31) 석도유(釋道猷)
도유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생(道生)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여산(廬山)으로 갔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임천(臨川)의 군산(郡山)에 은거하였다. 이어 새로 번역한 『승만경』을 보자, 책을 펼쳐 탄식하였다.
“돌아가신 스승께서 내신 옛날의 이해는 어둡기가 옛날 번역한 경과 똑같았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경이 새로운 이해를 거친 뒤에야 새로 결집하여 번역하였으니, 자못 슬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승만경』에 주석을 달아 스승이 남긴 유훈을 거듭 베풀었다. 이 주석서는 모두 다섯 권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혜관(慧觀)에게 물었다.
“돈오(頓悟)의 내용을 다시 누가 익혔는가?”
혜관이 대답하였다.
“도생의 제자인 도유입니다.”
이에 곧 임천군에 조칙을 내려, 도유가 서울로 나왔다. 서울에 이르자 곧 맞아들여 궁중에 들게 하였다. 교리 이해를 공부하는 승려들을 크게 모아놓고, 도유에게 돈오에 관해서 진술하여 펼치게 하였다.
당시 말재주를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돈오에 관련된 질문이 바꾸어가며 일어났다. 도유는 이미 생각을 쌓아 현오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르침의 근원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서 날카로움을 꺾고,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칼날을 꺾었다. 이에 황제는 책상을 어루만지며 통쾌하다고 칭찬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더욱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곧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로 가서, 절의 법도를 다스리는 불법의 주인[鎭寺法主]이 되었다.
황제는 늘 찬탄하였다.
도생은 홀로 우뚝 솟아 빼어나게 비추었다면
도유는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홀로 올라탔다.
훌륭하게 스승을 밝혔다고 일컬을 만하니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도 덧붙일 것이 없구나.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ㆍ도자(道慈)
그 후 예주(豫州)에 도자가 있었다. 『유마경』과 『법화경』에 빼어나 도유의 논리를 이어갔다. 도유가 지은 『승만경』의 주석본을 간추려 정리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ㆍ혜정(慧整)ㆍ각세(覺世)
이 무렵 다보사(多寶寺)의 혜정과 장락사(長樂寺)의 각세도 모두 명성과 덕을 나란히 하였다. 혜정은 특히 3론(論)에 정밀하게 뛰어나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각세는 『대품경』과 『열반경』에 빼어나 불공가명(不空假名)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32) 석혜통(釋慧通)
혜통의 성은 유(劉)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뚝한 기개가 텅 비고 그윽하였다.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을 때 매양 털이개를 한 번 흔들면, 그때마다 높은 이들이 탄 가마가 거리를 메웠다.
동해의 서담지(徐湛之)와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스승과 벗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효무황제는 총애와 봉록(俸祿)을 도탑게 더하였다. 칙명으로 회릉(悔陵)과 소건평(小建平) 두 왕의 벗으로 삼았다.
원찬(袁粲)이 『거안론(蘧顔論)』이란 책을 지어 혜통에게 보여주었다. 혜통은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그는 『대품경』ㆍ『승만경』ㆍ『잡심론』ㆍ『아비담』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아울러 『박이하론(駮夷夏論)』ㆍ『현증론(顯證論)』ㆍ『법성론(法性論)』ㆍ『효상기(爻象記)』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전송의 승명(昇明) 연간(477~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3세이다.
주석
1 지둔이 말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고승전』 7권(ABC, K1074 v32, p.827a01-p.839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