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제6부 깨어나는 가야 ①국내외 연구자들
‘國出鐵…’. 3세기대의 사실을 기록한 중국사서인 ‘삼국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라(가야)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이 말은, 김해지역에서 쏟아진 철기류와 함께 ‘철의 왕국’ 복원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
한자의 숲속에 숨어 있던 ‘國出鐵…’기사를 처음 찾아낸 이는 이병도 박사로 알려져 있다. 문헌자료의 실증을 통해 역사연구의 기초를 닦은 이 박사는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국역하면서 ‘가야’의 존재를 소개했다.
비슷한 시기에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활용의 길을 텄고, 부산출신 김정학 선생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문헌자료를 보완·검증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광복후 1세대 연구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가야’라는 미답의 경지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다. 그후 가야사 연구는 ‘젊은 피’를 만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최근 20년간 한국고대사의 성과를 되돌아보면 가야사 연구가 단연 선두에 놓인다.
#눈부신 연구성과
김해시가 운영하는 가야사 홈페이지(www.gayasa.net/gaya/) ‘역사자료실’을 노크하면 가야사 논저 목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별해 보니 연구 단행본이 43건, 논문이 977건(문헌사학 544, 고고인류학 433건), 발굴보고서가 286건이다.
이는 엄청난 숫자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된 발굴보고서가 각각 100건 정도라고 하니 가야사 연구가 어느 정도 활발했는지 짐작된다.
홍익대 역사교육과에서 운영하는 ‘한국역사 서지검색’ 사이트에는 고대 국가들, 즉 삼국과 가야의 연구성과물을 비교해 놓고 있어 흥미롭다. 1870~2000년 전반까지 나온 논저 수는 신라 2천3백19건, 백제 1천3백6건, 고구려 806건이고, 가야가 504건이다. 삼국과 달리 가야사 논저의 대부분이 1980년대 이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연구자 수에 있어서도 가야는 삼국에 뒤지지 않는다. 가야사 및 고대한일관계사로 국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만 약 20명. 고구려나 발해 연구자가 각각 6~8명에 머물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가야 연구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타급 연구자들
가야사 연구자 중에는 시쳇말로 ‘골수’가 적지 않다. 본지 가야사 취재팀이 학계의 추천과 개별 연구자의 저서, 논문, 발굴조사 및 대외활동 등을 토대로 분석해 보니 ‘스타급 연구자’가 10여명에 달했다.
먼저 문헌사학 쪽에는 김태식(47·홍익대) 이영식(48·인제대) 백승충(45·부산대) 교수, 백승옥(41·함안군 학예연구사)씨 등이, 고고학 쪽에는 신경철(52·부산대) 조영제(50·경상대) 박천수(42·경북대) 교수 등이 꼽혔다.
김태식 교수는 전·후기 가야연맹체설의 이론적 실체적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다. 1993년 ‘가야연맹사’(일조각)에 이어 지난해 펴낸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전3권(푸른역사)은 국내외 가야사 연구의 결정판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장인 이영식 교수 역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1993년 일본에서 ‘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를 펴내 큰 반향을 불러모았고 가락국 성립, 전쟁, 가야불교, 정신세계 분야의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백승충 교수는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에, 백승옥씨는 가야 각국의 성장과 발전연구에 각각 의미있는 성과를 쌓고 있다.
이밖에도 문헌사학 쪽에는 권주현(계명대 강사)씨가 생활사 분야에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낸 바 있고, 주보돈(경북대) 이근우(부경대) 윤석효(한성대) 노중국(계명대) 교수 등의 연구가 눈에 띈다.
신경철 교수는 ‘가야 고고학’의 바탕을 마련했다 할 정도로 많은 발굴조사를 하고 그에 따른 연구성과를 냈다.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고분 등을 발굴했으며 금관가야 성립과 관련해 부여족 남하설을 제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조영제 교수는 합천 옥전고분의 발굴(1985~1991) 주역으로 ‘다라국’ 존재를 부각시켰고, 박천수 교수는 대가야의 토기편년과 영역을 정리했다.
고고학 쪽에는 이밖에 임효택(동의대) 심봉근(동아대) 김세기(경산대) 김두철(부산대) 교수, 송계현(복천박물관장) 홍보식(부산시립박물관)씨 등의 조사연구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외국 연구자 및 향토사학자
일본에도 ‘가야통’이 10명 정도 있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학자는 다나카 도시야키(田中俊明·51) 교수. 사가현립대에 재직중인 그는 5~6세기 대가야 중심의 연맹체를 상정, 외국인으로선 드물게 전론(全論)을 편다.
규슈대의 니시타니 다다니(西谷 正·66) 교수는 고대한일관계사를 주로 다루는데, 발표한 논문만 500여편에 이른다. 그가 펴낸 ‘동아시아 지석묘 종합연구’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국제문화재연구소 나가시마(永島 暉臣愼·62) 소장도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분야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는 고구려 벽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다.후쿠오카대의 다케스에 주니치(武末純一·53), 도쿄 국학원대학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60), 오카야마 리카대의 가메다 슈우이치(龜田修一·50) 교수 등도 가야에 깊은 관심을 갖는 학자들. 주로 가야와 왜, 철과 도래인
서양의 가야사 연구자로는 폴란드 바르샤바대의 요안나 루알레즈(여·30)씨와 영국 더람대학의 지나 리 반스(여·55) 교수가 꼽힌다. 요안나씨는 지난 2000년 인제대에서 수학한 뒤 자국에서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야 각 지역의 향토사 연구도 활발한 편이다. 김해의 허명철(58·금강병원장)씨, 창녕의 김세호(86)씨, 경북 고령의 김도윤(80)씨 등은 전문 연구자 못지 않은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허명철씨는 ‘허왕후 초행길’ ‘가야불교의 고찰’ ‘가야와 초기 임나(任那)’ ‘아리랑 원류’ 등의 저서를 통해 학계에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김세호씨는 ‘가야사’와 ‘비화가야사 연구’라는 책을 통해 창녕지역 가야사의 줄기를 잡아냈고, 김도윤씨는 50여년간 가야사 연구에 매달려 ‘대가야의 철기문화’ 등 40여권의 책자를 묶어냈다.
국내외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가야사는 뒤늦게나마 긴잠에서 깨어나 한땀 한땀 조각보같은 역사를 복원해 가고 있다.
<31> 제6부 깨어나는 가야 '박노자 오슬로大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 재직중인 박노자(30·사진) 교수가 모처럼 자신의 전공인 ‘가야사’에 대해 입을 열었다. 러시아 태생으로 지난 99년 한국에 귀화한 박 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등의 책을 통해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젊은 사학자. 오슬로에 있는 그를 e메일을 통해 인터뷰했다.
-가야사를 전공했는데 요즘엔 근현대사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근현대사에 빠져 가야사 논문을 안쓴지 3~4년이 된다. 이렇게 가야사 이야기를 들으니 양심의 가책이랄까 약간 미안한 느낌이 든다.”
-가야사는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공부했나.
“1992년부터 러시아에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번역했다. 흥미가 있어 그것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박사과정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야사를 시작했다. 당시 지도교수인 모스크바 국립대 미하일 박 선생님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파악해 보라 해서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같은 일본자료까지 섭렵했다.”
-임나일본부설을 어떻게 보나.
“그건 당대의 명칭이 아니다. 5세기에 일본에서는 ‘일본’이란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난 백제의 일본계 관료와 연관이 깊은 일종의 무역기구라고 생각한다.”
-박사학위 논문은 어떤 내용인가.
“1996년 10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받은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 초기국가의 역사’라는 논문이다. 가락국기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남가야를 분석하고, 일본 문헌자료에 의거해 대가야 및 안라(함안), 그리고 왜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앞으로 가야사 연구계획이 있는가.
“있다. 근대 일본 사학에서 임나일본부라는 허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식민지 때 그곳 학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조작, 이용했는지 밝혀내고 싶다.
-국내외 가야사 연구현실에 대해 촌평한다면.
“김태식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발굴작업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예산이 늘어나고 발굴기술도 보완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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