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십경중 제10경인 식산주해食山周海
-천년 역사가 숨쉬는 아름다운 마을 오조리-
성산십경중에 제1경인 성산일출봉에서 한라산 쪽으로 800m 거리에 위치한 오조리 마을은
천년 역사가 숨쉬는 주위의 경치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다. 일출봉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제일 먼저 비춘다는 뜻의 오조吾照마을은 동쪽 바다 가까이 손짓하면 달려올듯한 위치에 우도섬이
있고 오소포(吾沼浦) 동남쪽에 바다로 뻗은 성산만灣과 일출봉이 웅장한 경관과 마주한다.
오소포 해변에 주저리 주저리 전설이 깃든 식산봉(해발45m)이 오롯이 누워 있어, 마을에서 보면
양어장(일제말기 축조된 보堡, 옛이름,오소포)에 식산봉 그림자가 드리워져 시시때때로 바닷물 색이 변하여
그 경관이 가히 일색이다. 식산봉 맞은편에 길게 뻗은 언덕을 '쌍월'이라 부르는데 언덕너머 수평선에서 떠오른
달이 언덕위와 오소포(양어장) 수면 양쪽에 떠있는 정경을 일컬음이다. 가히 아름답다고 아니할 수 없다.
오조리를 상징하는 식산봉은 그리 높진 않아도 오름으로 갖출건 다 갖춘 오름이다. 이 작은 오름엔 상록수의
보고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십 종류의 상록수가 오름을 덮었다. 특히 오름 주위에 희귀 염습 식물인
황근나무 자생지는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또한 식산봉은 오름 둘레에 산책 코스가 있으며
바다(보堡)를 가로 지르는
텍크시설이 잘되어 트레킹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텍크길 주위론 일출봉과 우도섬을 조망 할 수 있으며
시원스런 경치가 걷는이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오조리가 낳은 강중훈 시인(전 제주문인협회 회장)은 그의 첫시집<오조리,오조리,땀꽃마을 오조리야>에서
//내 고향 오조리 봄은/바당애기 혼자/집을 지킨다//얼마나 외로우면/소라껍질에 뿔이 돋는가/그 뿔에/
송송/젖부른 어미의 숨비질이 뜨는가//왜,바당애기는/"아버지"란 소리 한번 못 해봤는지//(오조리의 노래,부분)
라고 하면서시인의 내면에 잠재된 한(제주 4.3)을 분출시킨다. 이렇듯 오조 마을은 주위의 아름다움과 함께 흘러간
아픈 역사도 깊숙하게 간직한 마을이다.
4.3의 아픔을 간직한 41년생 강중훈시인은 1948년 4.3학살 현장에서 두 누이를 비롯한 어머니와 함께 살아 남아
어렵사리 공무원으로 입문 후 국장을 역임하여 비교적 성공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강중훈시인의 가슴 한켠엔
4.3광풍이 휩쓸고간 생채기가 남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조리마을이 설촌 된 시점은 650년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안카름(성산고 주변)
에 있던 마을이 왜구 침입이 빈번하므로 지금의 오조리로 옮겨 취락을 형성 했다고 한다. 근래들어 귀농 귀촌
인구의 유입으로 인구가 갑자기 불어났다. 예전엔 성산읍 14개 마을 중 하위권 인구인데 반해 요즘은 상위권
인구가 형성되어 마을세가 한층 높아 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현재 성산고등학교 인근 경작지대를 속칭 '안카름'이라고 부른다. 안카름 북동쪽에 '오소포연대'가 있으며 식산봉과
성산고 주위 밭엔 기와 파편과 도자기 파편을 볼 수 있어 이 지대가 역사적인 뭔가가 묻혀 있음을 유추 할 수 있는
곳이다. 안카름 일대 지명을 보면 "절터" 창터왓" "연대밑" "마재포"등 사찰과 군사적인 시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향토사학자 오문복 선생은 오소포 인근에 수전소(水戰所 요즘의 해군부대)가 설치 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고 고증한다. 이에 안카름 일대를 조사 발굴하는 작업을 읍 또는 마을 차원에서 앞장 섰으면 는 바람이다.
서울에서 중등 교장으로 퇴직한 오조리 출신 현상길 시인은 첫시집 <바람의 장터>에서 //유채꽃 물결 솟구치는/
사월 어귀 부터 섣달 이슥토록/오조리吾照里는 샛바람의 장터였다//샛아방과 외하르방 처럼/제삿날 같은 집이
많았다/푸른 파도 마당에 들어서는 자정/찬 별빛은 두루마기 자락에 숨어 들어/분향의 연기 어루 만지며/
축문의 여음을 바다로 보낸다//음복으로 거나한 밤 휘청되는/앙카름 긴 그림자 따라가면/물기 어린 바람이
부르는 타령에/겨울을 이겨내고/도랑마다 아지랑이에 덮이며/왕벚나무 꽃비에 숨막히던/유년의 봄//(오조리,
바람의 장터에서,부분)이라고 노래하여 오조리 안카름과 오조마을 역사의 아픔을 동일시하여 시인의 아픈 내면을
풀어낸다. 이처럼 오조리 안카름은 치열하게 부디치며 삶을 이어온 마을 사람들의 지난한 삶의 장터라 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시를 쓴 문인들은 오조마을의 아픔과 한을 노래하여 문학적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오조리
안카름을 명시한 문헌이 전무하다시피하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다만 일제강점기때 쓰여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
소설 속에 "오소포"(지금의 식산봉 앞 양어장 )라고 명기한 문장이 나온다. 이로 미뤄보면 조선시대 활발하게 교역을
했던 포구가 아닐까 유추 해 본다.
소설은 허구의 문학이라 하지만 그래도 작가 나름대로 자료등을 수집하여 오소포의 역사적 상황을 기술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안카름에 묻혀 있을 옛시를 찾아내어 현대시와 접목하여 기록하는 행위도, 주변의 수려한 풍광과 더불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문학의 원천은 그 지역 주변의 시대적 역사적인 사유가 적당하게 혼합하여 만들어(창작)가는 과정이라 여길때
오조리 안카름은 매우 중요한 문학의 원천이란 생각이 든다. 어디 그뿐일까. 마을 주위로 잘 발달된 해안선이라든지
오밀조밀하게 모자이크한 경작지라든지 지천에 가득한 나무,풀,꽃 모두가 삶의 원천이며 심지어는 돌맹이 하나, 툭툭
쌓은 돌담마져도 민초들이 살아온 작은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오조리 마을 주변 바다는 무척 아름답다. 오래전에 바다였던 오소포를 위시하여 철새의 보고인 내수면(속칭,통밭알)
일대를 일컬어 식산주해食山周海라 이름 붙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