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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시기의 재난시기 흥행사업 취로사업 토목사업과 시장경기 유지 방안 개발
2021년 1월 31일
옛날 전통사회의 사회과학에서는 국가의 가장 큰 책임은 재난 시기에 백성의 목숨을 얼마만큼 안전하게 구제하느냐이었습니다. 재난 시기에 기민(饑民)과 빈민의 구제는 국가의 행정 책임입니다. 책임을 민간의 사회단체와 기업에 떠넘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현재 코로나 19가 1년 넘게 지속되어 일반 자영업자와 뜨내기 노동자(비정규직, 알바생 등)들이 살기 어렵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돈을 나누어주는 방법도 해보고, 은행 대출을 풀어주는 방법도 해보고, 손해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법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방안은 전통사회에서 썼던 빈민과 기민을 직접 구제하는 구휼(救恤) 사업이며 사창(社倉)제도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다른 방안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의 상황이 일어나서 재난이 옛날처럼 3년 이상 지속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옛날에 개발된 구제방안의 정책 목표와 대상을 살펴보고 정책방안의 가치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지 현재 우리나라 정치가와 행정 관원들이 모두 좋은 장단기 정책 개발에 노력하니까 곧이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나누어 상설기관을 설치하고 기금을 만들고 대처하는 체계화된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것입니다.
중국의 전통사회에서는 재난 시기에 어떤 대처방안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대체로 두 가지 방안이 있었습니다. 첫째 방안은 직접 구제방안이며 가장 오래된 것인데 흉년에 국가의 쌀 창고를 열어 죽을 쑤어 기민(饑民)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또 전염병이 돌면 약재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둘째 방안은 북송시기 개혁가 범중암이 새롭게 개발한 방안인데 지방정부와 민간단체가 흥행사업과 취로사업 및 토목사업을 일으켜 소비를 유지하고 고용을 늘리는 시장경기 유지와 회복의 간접 방안입니다.
대체로 3년 이상 흉년이 들면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져서 굶어 죽거나 겨울에는 반드시 얼어 죽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창고에서 쌀을 꺼내서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런데 흉년 뒤에는 반드시 전염병이 따라오기에 굶주린 사람들이 죽을 먹고 겨우 목숨을 구하였더라도 곧바로 전염병에 걸려 죽습니다. 인구가 급감하여 국력도 쇠약해집니다. 따라서 흉년에 쌀 창고를 열고 죽을 쑤어주는 직접적인 빈민구제 방안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으나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송시기에 주자(1130-1200)가 빈민과 기민을 구제하는 방안을 정리하였는데, 주로 지방관청이 사창(社倉)을 운영하면서 흉년에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쳐서 받는 사창제도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이 주자학의 전통적 사회과학입니다. 그래서 조선시기 세종 연간에 사창제도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행정적 폐해와 역효과를 고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무튼지 조선 후기까지도 환곡제(還穀制) 때문에 논란이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도 장리(長利, 6개월에 이자 50%) 쌀을 놓았답니다.
흉년과 불경기가 지속되면 중간 농민들은 곧바로 큰 타격을 받아 농지를 헐값에 팔고 가난한 사람들은 빨리 유랑민이 됩니다. 이때 부자들은 좋은 농지를 헐값에 사들이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농산물 수확을 늘렸기에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었습니다. 물론 지나치면 농민반란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결국에는 왕조가 멸망합니다.
북송시기 1050년에 강남지역에서 극심한 흉년이 반복되어 굶주린 사람들이 몇십 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지방관 범중암은 쌀 창고를 열어 죽을 쑤어 기민에게 주는 직접적인 구제방안 이외에도 다른 방안을 실행하였습니다. 다른 방안의 경제적 효과가 컸기에 나중에는 법률로 정하여 지방 관원들이 쉽게 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흥행사업을 일으켜서 소비시장을 유지하였고, 정부 기관과 종교단체 및 부유한 농민의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빈민과 일반 농민 및 상인과 공인 모두에게 정당한 소득을 얻도록 시장경기를 유지하는 방안을 개발하였습니다.
송나라 시기에는 강남지역이 곡식 생산지이었으나(『宋詩紀事』:“謠諺雜語……‘蘇湖熟,天下足) 명나라 중후기부터는 강남지역이 인구 증가로 곡물 소비지역으로 바뀌고 호광 지역이 곡물 생산지역이 되었습니다.(『古謠諺、湖廣諺』:湖廣熟,天下足) 그래서 호광 지역의 재난 구제 방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나라 중기에 호광(湖廣) 지역에서 흉년에 홍수까지 겹쳐서 재난시기가 되었습니다. 장방기의 구제 방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방기는 왕양명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으나 공허하다고 여기고 개선된 수정 주자학으로 돌아섰습니다. 장방기는 지방행정에 밝았고 국가 재정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금 행정(鹽政)에도 좋은 개선방안도 제시하였습니다. 장방기가 제시한 재난시기 구제방안을 살펴보면 현대 행정에서도 참고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제방안은 긴급 실행, 일시 지급, 임시법 제정, 토목공사 등 네 가지입니다.
명나라 환관 유근(劉瑾)의 횡포는 당연히 황실의 사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각가지 방법으로 부민과 빈민을 가리지 않고 착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명나라 정부에 결정적인 쇠퇴를 초래하였다고 평가합니다. 까닭은 농민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왕양명이 만년을 보낸 가정 연간에도 많은 관원은 명나라의 쇠퇴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황제의 태만과 환관의 횡포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경세학 곧 전통적 사회과학이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만력 연간에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이 개혁을 주도하였는데 그 가운데 지방정부의 자치 재정(存留)을 처리하는 방안을 정착시켰습니다. 지방정부에서 필요한 토목사업과 물자 조달에서 백성을 직접 징발하여 노동을 시키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물론 일부 사업은 지방정부가 백성을 징발하여 직영하였으나, 일부 사업은 지방정부가 노동자와 기술자를 고용하여 임금을 지불하였습니다. 노동자와 기술자를 고용하여 임금을 지불하는 방법은 노동자와 기술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는데 임금이 시장에 흘러들어가서 시장경제를 활성화시켰습니다. 이것은 범중암의 구제방안을 더욱 개선한 개혁방안이었습니다. 개혁방안의 진전은 장방기의 제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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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송시기 범중암의 시장경기 유지 방안
출처 : 沈括(1031-1095),『夢溪筆談』:
북송시기 황우 2년(1050)에 현재 강소성과 절강성의 강남지역에서 큰 흉년(3년 동안 평년작의 1/4을 겨우 수확하는 것이 큰 흉년입니다.)이 들어 굶어 죽은 시신들이 길에 널려 있었습니다. 이때 범중암(范仲菴, 989-1052)이 항주 지역의 지방관이 되어 곡물을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또한 빈민을 모으고 양식을 모았는데 방법이 아주 좋았습니다.
강남지역 백성들은 여러 사람이 배를 타고 노 젓기 경주를 좋아하였고 불공드리는 것도 좋아하였습니다. 범중암은 백성들의 배 경주를 부추기려고 지방관들에게 날마다 호숫가에 나가서 잔치를 벌이도록 하였습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주민들은 집을 비워놓고 밖에 나와서 놀았습니다.
또 불교 사원의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흉년에는 인건비가 싸니까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좋습니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원마다 토목공사를 아주 많이 일으켰습니다.
또 지방정부는 양식 창고와 관청 청사를 새로 고쳤는데 날마다 1천 명 인부를 썼습니다.
그런데 당시 감찰기관은 항주(杭州) 지역에서는 관원들이 흉년의 빈민 구제사업을 하지 않고 날마다 놀러 다니고 쓸데없이 경비를 지출하며, 국가기관과 개인들이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재정을 소모한다고 탄핵하였습니다.
범중암은 흥행사업과 토목사업을 일으킨 이유를 조목조목 서술하여 보고하였습니다.
흥행 사업은 여력이 있는 부자들이 돈을 쓰도록 유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국가기관과 개인들의 토목공사는 장사하는 상인, 음식을 파는 식당, 기술자, 노동자 등이 토목공사에 참여하여 먹고 사는 데 하루에도 몇만 명이 참여하기에 흉년의 빈민 구제사업에는 이런 방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050년에 강남지역에서 항주 지역만이 평안하여 유랑민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모두 범문정의 창의적인 구제정책 혜택이었습니다.
해마다 기근이 들면 농림부에서는 곡물을 풀어 토목사업을 일으키는데 최근에서 아예 법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굶주린 빈민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고 경기 회복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송나라의 좋은 정책입니다.
출처 : 沈括(1031-1095),『夢溪筆談』:
皇祐二年(1050),吳中大饑,殍殣枕路。是時,范文正(范仲菴,989-1052)領浙西,發粟及募民存餉,為術甚備。吳人喜競渡,好為佛事,希文乃縱民競渡,太守日出宴於湖上,自春至夏,居民空巷出遊。又召諸佛寺主首,諭之曰:“飢歲工價至賤,可以大興土木之役。”於是諸寺工作鼎興。又新敖倉吏舍,日役千夫。
監司奏劾杭州不恤荒政,嬉遊不節,及公私興造,傷耗民力。文正乃自條敘所以宴遊及興造,皆欲以發有餘之財,以惠貧者。貿易飲食、工技服力之人仰食於公私者,日無慮數萬人。荒政之施,莫此為大。是歲,兩浙唯杭州晏然,民不流徙,皆文正之惠也。歲飢發司農之粟,募民興利,近歲遂著為令。既已恤飢,因之以成就民利,此先王之美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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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나라 장방기(1484-1544)의 재난시기 구제 방안
엄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가의 기본은 백성이고 백성의 생활자료는 식량입니다. 옛날 송나라 부필(富弼, 1004-1083)은 요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명성이 높았으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청주(靑州)에 굶주린 기민 수십 만 명을 살려낸 뒤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살려낸 것이 오히려 중앙정부에서 높은 중서령 직위를 20년간 지낸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민생을 중시하고 진휼 정책이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호광(湖廣) 지역은 토지가 척박한데 환관 유근(劉瑾, 1451-1510)이 권력을 휘두르면서부터 관원들도 덩달아 과도한 세금을 걷으면서 재산을 침탈하였기에 백성의 곤궁함이 가중되었습니다. 현재 해마다 홍수 재해에 10집 가운데 9집이 비었는데 겨울이 온 뒤에는 많은 눈이 내려 쌓이고 날씨가 몹시 추워 굶어 죽은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릴 만큼 백성의 경제생활이 요즘 가장 어렵습니다. 구제 행정에서 중요한 방법은 하위 지방정부가 적절한 사업계획을 짜서 열거하고 상위 지방정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번거롭더라도 상위 지방정부는 하위 지방정부에 하달하여 시행하여야 합니다.
첫째, 구제사업은 긴급하게 실행하여야 합니다.
대체로 호광(湖廣) 지역 농민들은 뜨문뜨문 초가집을 짓고 살아 이웃이 멀기에 양식이 부족하면 꾸어올 곳이 없고 양식이 떨어지면 며칠 안에 굶어 죽습니다. 이것이 긴급하게 실행하여야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호광 지역은 면적이 넓고 멀기에 시골에서 주(州)와 현(縣) 지방정부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수백 리가 됩니다. 곧 봄이 와서 땅을 갈아엎어야 하기에 구제사업이 조금만 늦어도 농사일에 방해가 됩니다. 이것이 긴급하게 실행하여야 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둘째, 구제사업에서 양식을 한꺼번에 지급하고 찔끔찔끔 지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광지역은 넓어서 거리가 멀기에 시골 백성들이 지방정부까지 며칠이 걸려 가기에 양식을 싸갖고 가서 양식을 받습니다. 따라서 몇 개월 양식을 한꺼번에 지급하더라도 멀리 사는 백성들은 들어간 경비와 받은 양식을 계산하면 겨우 비슷합니다. 만약에 달마다 지급하면 들어간 경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절약하는 것을 몰라서 아침에 양식을 받으면 다 먹고 저녁에는 떨어지니까 한꺼번에 지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침에 양식을 받아 다 먹고 저녁에는 떨어지는 백성은 파산한 폐민(弊民)입니다. 폐민에게는 날마다 양식을 지급하는 것이 좋고 달마다 지급하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농민들에게 달마다 또는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오히려 어렵게 만듭니다. 따라서 폐민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일반 농민에게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임시법을 만들어 백성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구제사업을 진행하면서 상황에 따라 부자와 세력가의 요구 또는 아전들의 법률 횡포를 상세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법률 행정에 밝았던 송나라 포증(包拯, 999-1062, 포청천)이나 두연(杜衍, 978-1057, 杜佑의 후손)도 이들에게 속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토지세를 감면한 것 이외에 왕부(王府)의 비용과 군사 군량처럼 징수를 멈출 수 없는 세금 가운데 일부 세액을 지방정부(縣)에 할당하여 구제 비용에 사용하도록 돌려서 징수를 독촉하지 않도록 합니다. 지방정부는 징수하는 데 힘들지 않고 백성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는 임시법입니다.
넷째, 토목사업 또는 취로사업을 실행하여 빈민을 구제하여야 합니다.
흉년에 토목사업이나 취로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송나라 범중암(范仲菴, 989-1052)이 강남지역에서 실행하였던 방법입니다. 강남지역(강소성, 절강성 지역)에는 경작지가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취로사업에 나가는 백성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면 곧바로 사업장에 가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광 지역에서 현재 추운 날씨에 수백 리 떨어진 사업장에 가서 취로사업에 참여하라고 하면 지방정부의 책임자들도 범중암처럼 똑똑하지 못하기에 취로사업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현재 호광 지역에서 가장 좋은 구제방안은 청렴하고 유능한 지방 관원들을 골라서 토목사업을 위임합니다. 지방 관원들은 농토 또는 마을에 홍수를 막는 둑(圩垸, 堤坊)을 현지 실사하여 몇 미터를 쌓아야 할지와 인부 몇 명이 들어갈지를 계산합니다. 둑마다 토지가 많고 부유한 백성 몇 사람에게 둑 쌓기 사업을 위임합니다. 부유한 백성 몇 사람이 책임지고 둑 안의 백성들을 모아서 협력하여 둑을 쌓도록 합니다. 농토가 많고 식량이 있는 사람들은 먹을 식량을 싸갖고 오도록 하고 농토가 적고 식량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쌀 1.5되를 지급하면 가난한 사람은 양식을 얻어서 좋고 부유한 사람은 자기 농토에 둑을 잘 쌓아 좋습니다. 사람마다 토목사업 또는 취로사업의 참가 동기를 갖게 되어 즐겁게 참여할 것이며 이런 사업이 유발하는 경제적 효과도 무한할 것입니다.
張邦奇,『張文定公環碧堂』,卷十三,「處置經費議」︰
切照,國本惟民,民資惟食。昔,富文忠公(富弼,1004-1083)使虜之功,與日月爭輝,而欿然恒不自滿。及活青州饑民數十萬,則每自言曰︰“過於作中書(令)二十四考(矣)。”蓋重民生而急荒政如此。湖廣地方,素號薄瘠,逆瑾用事之後,官吏並緣侵剋,而民困益甚。今又連年水潦,十室不止九空,入冬以來,積雪凝寒,饑殍相望,民生艱阨,莫甚今日。賑濟之舉,政務莫先今將合行事宜理,合開坐關報,煩為轉達施行。
一曰賑濟宜急。蓋湖廣鄉民,大率草屋翛然,旁無四鄰,空乏之時,無從假貸,民既絕糧,不數日死矣。是不可緩一也。湖廣,地里廣遠,由鄉村入州縣,或數百里。方春土膏將作,稍遲則東作有妨。是不可緩二也。
二曰給散宜併。蓋地里既遠,鄉村之民,裹糧求濟。故以數月所給,併散一時,則民居遠者,勞費之與所得,僅足相當。若月一給之,則不償所失矣。或曰:“愚民不知檢制,朝得暮盡,不宜併散。”夫朝得暮盡者弊民也,弊民必日給之而後可,月給之亦未見其為益,而良民且受困矣。是固不可以弊民之故妨良民也。
三曰便法以利民。蓋賑濟之法,勢不能詳富勢之請求、吏胥之賣法,嚴明如包孝肅(包拯,999-1062)賢達,如杜祁公(杜衍,978-1057)未免受其欺紿。今除一應稅糧,已蒙蠲免外,其王府祿米及軍士月糧,不可停止者,扣算某縣若干,即將賑濟銀兩,照數支給,免其徵催,而因以為賑濟之數,則上無督責之勞,而民得以坐受實惠,法之甚便者也。
四曰興利以救民。饑歲興工,希文(范仲菴,989-1052)舊法,但吳杭地窄民稠,就役之民,出門得利,故此法可行。今若以凝寒之日,役民於數百里外,而守令之賢,又未必如希文(范仲菴),則未知其可行與否。為今之計,莫若擇委廉幹官員踏看某圩院(圩垸)該修築若干丈,合用人夫若干工。每一院中,擇委田地最多富而力者數人,責令召集本院之民,併力修築。田多食充者自備工食,田少乏食者,每人日給米一升五合,則貧者利於得食,富者利於得田。人情樂趍而為利亦無窮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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