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표(이산표석)와 수군통제영
[ 편집자 주 ] 지난 2021년 10월 <특별기획> ‘장산 이산표석을 바로세우다’를 통해 이산표석을 세운 시기와 목적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후 보충 기사를 몇 차례 게재하고도 미진한 부분이 많았다. 지난 호에 이어 이산표석 실체에 대해 추가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 ‘장산의 이산표석은 산림 관리 및 벌채용’이라 언급했다. 그러면서 근거를 <동하면 고문서>‘동하사동 절목 편’의 봉산인 장산 관리에 대한 대목에서 찾았다. ‘동하사동 절목편’에서는 ‘봉산에 종종 본부나 수영에서 소속 비장(裨將)과 장교(將校)를 시켜 적간할 때 차례가 된 동(洞)이 접대를 담당한다. 그리고 산임(산지기)의 잡다한 경비는 육4동(좌·우·중·재송동)이 담당한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본부와 수영이 어디인가? 수영은 당연히 경상좌수영이었을 것인데 본부를 잘 몰라 동래부일 것이라 기술했는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역사적으로 동래부는 장산 일원의 봉산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선재봉산인 장산 일원의 산림에 대한 관리 및 감독은 오로지 수영에 있었다. 따라서 본부란 수영의 본부로 바로 삼도수군통제영이다.
통제영은 1593년(선조 16)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통칭되며, 약칭은 ‘통영’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고, 전란이 끝난 뒤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1603년(선조 36)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 : 현 통영시 문화동)로 정한 이후, 이곳에다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605년(선조 38) 음력 7월 14일에는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인 세병관,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후 1678년(숙종 4)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높이 1장 반(약 4.6m), 둘레 1만 1730자(약 3.6㎞),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과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鋪樓)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 개의 관아가 있었다.
- 참조 : 민족문화대백과
한편 수군통제영에서 비장[조선시대 감사, 절도사 등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幕僚)]이나 수영에서 장교(조선시대 각 군영에 속해있던 군관)가 장산 일원의 산림을 봉표를 따라 적간할 때 이들의 접대를 육4동에서 차례로 담당하였다. 특히 통영 등 본부에서 비장이 올 때는 비장과 함께 온 일행들의 모든 숙식을 제공해야 하므로 육4동의 고충은 더욱 컸을 것이다.
/ 예성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