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추대된 이후 줄곧 북한이 3대 세습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당시엔 농담조가 짙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이를 합리적인 가설로 정립되기 시작했고, 2000년엔 전문가도 북한 주민들도 김정일이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울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제 문제는 ‘누구냐’로 넘어갔다. 김정남, 김정철 그리고 김정은 중 누가 독재권력을 차지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2000년엔 ‘북한 후계자가 누구냐’는 주제는 북한 쪽 연구자들의 주요 쟁점 사항 중 하나였다.
물론 김 씨 일가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김정남이 후계자로 임명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등나무집’이라는 2000년에 출판한 김정남 이모 성혜랑의 회고록을 보면 김정남은 부친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는 ‘김정철이냐, 아니면 혹은 김정은이냐’로 좁아졌던 것이다.
김정은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처음 예측한 사람은 아마도 김정일의 일본인 요리사였을 것이다.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라는 가명을 알려져 있는 그는 좀 이상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후지모토 씨는 본인이 직접 말했듯 돈을 받고 인터뷰를 한다. 때문에 그가 말한 정보가 사실도 있고, 허위인 것도 있을 것이다.
현재 알려진 김 씨 일가와 관련한 정보를 분석해보면, 북한 입장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었던 셈이다. 일단 김정남은 부친과 관계가 복잡하였고 할아버지인 김일성을 만난 적도 없다. 권력 야심이 없는 김정철은 새로운 북한 군주가 될 의지도 없었다. 사실 김정은뿐이었던 것이다.
후지모토의 예측 1년 전, 즉 2002년 북한 당국은 갑자기 고용희 찬양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 사실만 알면 김정남이 후계자가 될 희망이 없다고 확인할 수 있다. 만일 그랬다면, ‘선군 조선의 존경하는 어머님’은 고용희보다 김정남의 모친인 성혜림이었다.
2009년까지 한국 매체에서 김정은을 ‘김정운’이라고 불렀다. 한자 표현 ‘金正雲’까지 등장하였다.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를 ‘고영희’라고 불렀던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이야기다.
이 오보의 출처는 아마도 후지모토 겐지였던 것 같다. 일본 카타카나로 쓰면 ‘김정은’도 ‘김정운’도 ‘キム・ジョンウン’ (키무 죵웅)이다. 후지모토는 ‘키무 죵웅’은 ‘김정운’이라고 생각했고, 몇 년 동안 온 세상은 그를 따라서 이같이 불렀다.
이런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2009년 9월 18일, 대만 관광객 후앙 한밍씨가 북한 선전 포스터 사진을 인터넷을 업로드하였는데, 포스터에 ‘김정은’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적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매체에서 ‘김정운’이 사라졌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부분을 지적한 사람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최현준 군은 국가정보원, 정보사령부나 미국 중앙정보국보다 빠르게 김정은의 본명을 밝힌 셈이다.
필자는 이후 최 씨를 만난 적이 있다. 고려대학교 학부생인 그는 현재 군 복무 중이다. 최 씨는 북한 학자라는 꿈을 품고 있었고, 필자는 관련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세습 캠페인의 출발점은 2008년 김정일의 뇌졸중이었던 것 같다. 바로 그 때에 ‘위대한 장군님’은 자신도 가까운 미래에 죽을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김정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원래 3대 세습에 대한 의문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김일성이 간 길로 갔다.
관련 보도를 종합해 보면, 세습 캠페인이 시작된 날은 2009년 1월 8일이다. 이날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리제강에게 전화를 했고,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은을 임명한다고 알려 주었다. 리제강은 나중에 2010년 6월에 교통사고에 죽었고,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보지는 못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웠으니 말이다. 당시 외국에 유출된 김정철과 김정남 사진은 있었지만, 김정은은 없었다. 2009년 1월 기준으로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한 후에 김일성종합군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 정도만 보도하는 정도였다.
이후 김정은을 찬양하는 첫번째 노래가 나왔다. 노래 제목은 ‘발걸음’이었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척척척 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이월의 정기 뿌리며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 번 구르면
온 나라 강산이
반기며 척척척
얼마 후 ‘청년대장’이라는 호칭도, ‘대장복’(大將福)이라는 구호도 나왔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의 부하들이 김정은이 어렸을 때 그에게 이 노래를 불러 준 적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재미있게도 세습 캠페인은 2009년 1월에 시작했지만, 같은 해 3월 진행한 최고인민회의 선거 대의원 중에 김정은은 없었다. 당국이 아직 세습 캠페인을 공개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김정은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고, 각국의 매체는 이를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하였다. 결국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먼저 터트렸다.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 현지지도를 한 김정일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바로 후계자 김정은이라고 선포하였다. 아래 사진을 보면 이 남자는 김정은보다도 김정일과 묘하게 닮아 보인다.
당연히 한국 국가정보원은 이 보도를 주목하였다. 이에 북한 중앙방송 아카이브(archive)를 검토하기를 시작하였고, 결국 2008년 12월 30일 나온 보도에서 이 남자의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공장의 기사장 김광남이었다.
김광남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이 사람은 후에 남북한 매체에서 언급되었다. 그가 근무한 공장에서 숙청이 있었고, 당 비서과 지배인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김광남 자신도 1달 동안 수감되었지만, 석방되었고 나중에 지배인까지 올랐다. 2015년 그는 러시아에 방문하였고, 2017년 기준으로도 지배인 자리에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그도 이 같은 오보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작 김정은의 얼굴은 2010년 당 제3차 대표자 회의 때 등장한다. 북한이 1966년부터 2010년까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 제3차 대표자회의는 2010년 6월 선포되었다. 원래 북한 당국은 9월 초순 개최를 선포하였지만, 정작 아무런 행사도 열리지 않았다.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김정일 건강 이상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대표자회의는 연기되었고 9월 28일에 개막되었다. 그리고 회의 전날 27일 김정일은 군사 칭호 (계급) 수여 명령을 하달하였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6명 중 단연 김정은이 눈에 띄었다. 로동신문에서 ‘김정은’이라는 단어의 첫 언급이었다.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은 당 중앙위 위원이 되었고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중 한 명이 되었다. 김정은의 당시 공식 직위를 보면 그는 형식상 이인자가 아니었다. 김정은 대장 위에 차수도 10명 이상 있었고 리을설 인민군 원수도 있었다. 당에서도 정치국 위원과 후보 위원들은 김정은 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김정은은 이미 후계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회의에서 김정은 사진이 첫 공개되었다. 김정은과 김정일 사이 리영호 차수가 앉아 있었다. 이는 1980년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에 오진우 대장이 앉았던 것과 오버랩되는 장면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북한 당국은 ‘청년 대장’이라는 호칭을 없앴다. 이후 김정은은 ‘존경하는 김정은 군사위 부위원장’ 또는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정치적 행보도 시작됐다. 김정은이 부친과 함께 현지 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노동신문은 그를 이인자로 보여주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김정일-정치국 상무위원-김정은’ 순이었다. 어느 정도 1980년 말기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당시에도 노동신문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아마 김정일이 좀 더 살아 있었더라면, 김정은의 직위 상승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버이 장군님’은 2011년 12월 17일 급사했고, 김정은은 바로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직위를 확보하였다. 아래 노동신문을 보면, 김정은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주체100(2011)년 10월 8일 유훈’에 따라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 ‘10·8 유훈’은 대체 무엇인가?
2011년 당시 북한은 이 유훈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었다. 다만 2016년 ‘김정일 선집(증보판)’의 마지막권에 등장하는데, 연설의 제목은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하여야 한다’이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김정일이 이 연설을 한 날짜는 10월 8일과 12월 15일로 나온다는 점이다. 북한이 역사 사변의 날짜를 자주 바꾸는 것과 연관있어 보인다. 예컨대, 9.9 건국절이나 10.10 당 창건일도 조작한 날짜다. 북한 당국은 이 연설이 김정일 평생의 마지막 연설로 보이도록 ‘12월 15일’을 붙였고, ‘10월 8일’ 날짜는 이미 공개돼 어쩔 수 없이 같이 붙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연설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김정일은 부친 김일성과 할아버지 김형직에 대해 말하였다. 적들이 아무리 책동해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한 후 김정일은 바로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에 따르면, 전체 북한 사회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김정은의 지략에 대해 수많은 보고를 받았다. 게다가 김정일은 1990년대 김정은이 인민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견뎠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김정은이 당시 스위스에 있었던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김정일은 김정은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매우 충실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김정일은 김정은이 최고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정일은 2009년 4월 김정은이 외세들이 ‘광명성 2호’ 위성을 추락시키지 못 하도록 조치를 취했고, 결국 성공했다고 하였다. 물론 이 위성이 ‘외세’의 개입과는 무관하게 바다에 추락했다는 부분은 생략했다.
또한 김정일은 김정은의 모친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지만, 그의 이름 ‘고용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2010년부터 김정일 사망 전까지 북한에서 고용희 찬양 캠페인이 있었지만, 김정은이 지도자가 되자 중단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이 연설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인 입장에서 김정은의 등장은 어색하게 보였다. 하루 아침에 그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 ‘찬양 속도전’을 분석해보면 2009년과 2011년 사이에 북한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캠페인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북한 주민들에게 2011년 12월의 전환은 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떠오를 것이다. ‘김정은은 마지막 계승자일까, 아니면 김정은도 자기 아들이나 딸에게 권력을 넘겨 줄까?’
혹자는 북한은 예측불가능한 나라라고 말한다. 어느 날 아침에 뉴스에서 ‘북한 군대가 정변을 일으켰고, 김정은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반대로, 2059년 조선노동당 제13차 대회에서 ‘탁월한 전략가이신 경애하는 김주애 동지를 위대한 김정은 대원수님의 후계자로 높이 추대’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일, 이에 주력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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