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세가지 보물=부처님(佛)
이해와 사랑은 둘이 아니며 하나입니다. 가령 당신 아들이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꽤 늦었습니다. 그는 누이동생이 학교 가기 전에 아침을 먹을 시간이 충분하도록 하기위해 깨웠습니다. 그런데 누이동생이 툴툴거리며 “깨워줘서 고마워요”하는 대신 “입 닥쳐, 내버려 둬요”라고 말하며 그를 때립니다.
그때 그는 ‘내가 좋게 깨웠는데 왜 나를 때리지?’라고 생각하면서 화를 낼 것입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당신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거나 그 누이동생을 때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전날 그 누이동생이 기침을 많이 한 것을, 그때 기억하고는 그 누이동생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감기가 들어서 그렇게 못되게 굴었다는 생각이 그를 그 이상 화가 나지 않게 합니다.
그 순간 그 안에 붓다가 있습니다. 그는 이해하며 그리고 깨닫습니다. 당신이 이해할 때 당신은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당신은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이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모든 생물을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는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이해하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을 베풀 때 당신은 자연적으로 사람의 고통을 풀어주려는 방법을 찾고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깨어 있는 사람, 아는 사람 그리고 이해하는 사람을 부처라고 부릅니다. 부처는 우리들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깨우치고 이해하고, 그리고 또한 사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가끔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부모님이 매우 이해심이 깊고 사랑이 있으며 일하고 가족을 돌보며 웃음을 띄우며 꽃처럼 아름다울 때 ‘엄마(혹은 아빠)는 오늘 하루 내 부처님이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천오백년 전에 완벽한 수행을 통해 이해와 사랑을 완성하고, 세계의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확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싯달타였습니다. 싯달타가 어렸을 적에 그는 사람들이 서로 지극히 사랑하지도 않고 서로 이해하지 않아서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숲속으로 가서 명상과 호흡과 웃음을 수행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승려가 되었으며, 그의 깨우침과 이해와 사랑을 가장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승려인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수년간 좌선과 걷기 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성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매일 그것이 망고이든 구아버든 스타후릇이든 과일 하나만 먹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과장하여 싯달타가 하루에 오직 깨 한 톨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내가 인도에 가서 그가 수행했던 숲에 가 보니 그곳에는 깨가 없었습니다. 나는 또한 그가 여러번 목욕을 했던 아노마 강과 그가 않아서 부처가 된 보리수도 보았습니다. 내가 보았던 보리수는 그 보리수가 아니고 첫 번 보리수의 증-증-증-증손의 보리수였습니다.
어느 날 싯달타는 너무 기운이 없어서, 수행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명한 젊은이였으므로 마을로 내려가 바나나건 떡이건 무엇이건 얻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네다섯 걸음을 걷자마자 쓰러져서 기절을 했습니다. 그는 의식을 잃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을로 우유를 가지고 가던 젖짜는 여인이 그를 보고 달려가서 그가 아직도 살아서 약하게 숨을 쉬는 것을 보고 그릇에 우유를 담아 그 입 안으로 넣어주었습니다. 처음에 싯달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그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그는 우유를 마시기 시작하여 한 사발을 마셨습니다.
그런 후에 기운이 나서 천천히 앉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워 보였는데 왜냐하면 싯달타는 매우 잘 생겼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만드는 그의 상은 그렇게 잘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불상들은 신비한 미소나 웃음도 보여주지 않는 오히려 침울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붓다 석가모니는 매우 잘 생겼으므로 그 젖짜는 여인은 그를 산신으로 여겼습니다. 그 여인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려고 하자 그는 팔을 뻗어 그렇게 하는 것을 중지시킨 후에 그 여인에게 “나에게 우유 한 사발을 더 주십시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유가 경이로운 일을 하는 것을 보았으며, 우리의 몸이 튼튼하면 우리가 명상에 성공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처녀는 너무 기뻐서 그에게 또 한 사발의 우유를 드렸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승려이며 자비와 지혜를 최상의 단계로 올려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게 되도록 명상하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가 도와드릴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적에 싯달타는 “매일 정오에 작은 밥 한 그릇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여인은 바나나 잎으로 싼 밥과 어떤 때는 우유를 그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싯달타와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승려들은 그를 경멸하고 그가 수행의 길에서 멀어졌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서, 수행을 합시다. 그는 우유를 마시고 밥을 먹습니다. 그는 인내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싯달타는 매우 잘한 것입니다. 건강을 회복한 뒤 밤낮으로 명상함으로써 그는 통찰력과 지혜와 자비를 신속히 발달시켰습니다. 어느 날 아노마 강에서 목욕한 뒤 그는 절대적인 각성, 즉 완전히 깨달은 이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만 더 명상하면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걷기 선을 수행하면서 그가 앉으려고 하는 참에 들소치는 소년이 지나갔습니다.
이천오백년 전에 인도에서는 들소가 쟁기를 끌었으므로 들소치는 소년의 일은 그들을 지키고 목욕시키고 돌봐주며 그들이 먹을 풀을 자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들소치는 소년은 싯달타가 매우 평화스럽게 걷는 것을 보고 그가 즉시 좋아졌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유를 모른채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는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너무 수줍어서 싯달타 곁을 서너 차례 지나간 후에 “훌륭하신 이여, 나는 당신이 참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싯달타가 그를 바라본 후에 “나도 네가 참 좋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에 용기를 얻은 그 소년은 “나는 참으로 당신에게 무얼 드리고 싶으나 당신에게 드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구나. 네게는 방금 자른 풀이 있는데, 괜찮다면 그걸 한 아름 주려무나”라고 싯달타가 말을 했습니다.
그 소년은 그에게 드릴 무엇이 있어서 너무 기뻤으며, 싯달타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 들소치는 소년이 떠난 후 싯달타는 그 풀로 그가 앉을 방석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않으면서 굳센 서약을 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깨닫기 전에는 나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라고요. 이런 굳센 결심으로 그는 온 밤을 명상하였으며, 하늘에 새벽 별이 나타났을 때 마침내 그는 지혜와 사랑에 대한 최상의 능력을 지닌 부처, 즉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