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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마누엘 문헌과 이를 감싸는 여러 테두리(5,1-10,4)
이 단락의 중앙에 ‘임마누엘 문헌’(6,1-8,18)이 서 있고, 프롤로그(5,1-7)와 에필로그(8,19-10,4)가 이 문헌을 감싸준다. 임마누엘 문헌에는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사화(6,1-13), 표징으로서의 임마누엘(7,1-25), 증언 문서의 봉인(8,1-18) 내용이 담겨 있다. 프롤로그와 임마누엘 문헌 사이에 여섯 가지 재앙을 선포하는 기사가 들어 있다(5,8-30).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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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 포도밭의 노래(5,1-7)
포도밭 노래는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1ㄱ절을 제외하고 네 개의 연으로 구성된다. 이 노래의 본문은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이 노래가 누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포도밭에 대해 설명한 뒤(1ㄴ-2절), 포도밭의 소유주가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과 시비를 가리고자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3-4절). 이어서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겠다는 주인의 결심이 드러나고(5-6절), 이어서 하느님께서 포도밭의 소유자이며, 이스라엘은 포도밭, 유다 사람은 나무라는 해석과 함께 하느님의 실망이 표현된다(7절). 이 노래는 일종의 우화 형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실망을 들려준다. 노래에 등장하는 수신자들이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3절)에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사람’(7절)으로 확장되면서, 과거와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느님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아울러 포도밭은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하나의 은유로 나타난다. 포도밭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졌는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며 열린 결말의 형식으로 마무리된다.
포도밭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한다(시편 80,9). 이를 바탕으로 포도밭 노래는,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기대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 이스라엘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27,2-5에서 다시 등장하는 포도밭 노래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아닌 구원의 그림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으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두 차례 등장하는 포도밭 노래는 비난과 심판에서 구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제1부에서도 주제로 다뤄지고 있음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2) 불행 선언(5,8-30)
5,8-30은 이사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불행 선언이다. 이 단락은 여섯 부류의 불행을 선포하는 부분(8-23절)과 ‘하느님의 분노’ 및 ‘그분의 뻗은 손’을 선포하는 부분(24-30절) 둘로 구성된다. 포도밭의 노래는 공정과 정의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피 흘림과 울부짖음으로 응답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비판했다(5,7). 그러한 이유로 불행 선언은 포도밭 노래가 남긴 열린 결말을 심판의 예고로 이어간다. 하느님의 분노와 그분의 뻗은 손은 임마누엘 문헌을 감싸는 에필로그를 연결하며 임마누엘 문헌의 테두리 역할을 수행한다(9,7-20 ; 10,1-4). 포도밭 노래가 공정과 정의의 결핍에 대한 탄식이었다면, 불행 선언은 구체적인 잘못과 백성의 죄악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3) 임금이신 하느님을 통한 이사야의 소명과 완고함의 사명(6,1-13)
이사야의 소명 사화는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언제 받았는지 알려주며(“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 : 1ㄱ절), 시각적인 부분(1ㄴ-7절)과 청각적인 부분(8-11절)으로 구성된다. 또한, 소명 사화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자연이 반응하는 현상과 함께 등장하시는 하느님(1-3절), 성전에 울리는 진동(4절), 예언자의 고백(5절), 죄로 가득한 백성 사이에서 살아가는 예언자의 정화(6-7절), 하느님과 예언자의 대화와 파견(8-13절).
소명 사화는 시작과 함께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은 높이 솟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1절). 이사야는 이미 하느님만이 홀로 높으신 분이시며, 인간의 교만은 심판의 대상임을 알려주었다(2,6-22). 이에 부합하여,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높이 솟은 어좌”(6,1)에 앉으셨다는 표현으로 하느님 홀로 높으신 분이라는 신학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이어서 사랍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등장은 단순한 무대 장치를 넘어서 하느님의 고유한 특성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그들은 세 번에 걸쳐 “거룩하시다”고 외치면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강조한다(6,3). 최상급 표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히브리어에서, 세 번에 걸친 “거룩하시다”의 외침은 가장 거룩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조된 하느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고유한 본질을 나타내고 이사야서 전체의 기본 주제를 구성한다(1,4 ; 5,19.24 ; 10,20 ; 12,6 ; 17,7 ; 29,19 ; 30,11-12.15 ; 31,1 ; 37,23 ; 41,14.16.20 ; 43,3.14-15 ; 45,11 ; 47,4 ; 48,17 ; 49,7 ; 54,5 ; 55,5 ; 60,9.14). 이어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임금님으로 고백한다(5절). 가톨릭 ≪성경≫에는 표기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임금이라는 호칭 앞에 정관사를 함께 사용하면서 “그 임금님(함멜렉 המלך)”으로 표기한다. 이는 1절이 제시하는 연대기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임금 우찌야가 죽던 해는 기원전 736년이다. 우찌야는 나병이 걸려 임금으로 통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아들 요탐이 통치하였으나 아버지 우찌야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기원전 741년), 우찌야의 손자 아하즈가 임금의 신분이 아닌 왕자의 신분으로 대리 통치하였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라는 연대기로 소명 사화가 시작된 것은 아하즈가 임금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시간을 의미하며, 이것은 예루살렘에 다윗 왕조의 통치 공백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사야서는 의도적으로 정관사를 사용하여 유일하고 참된 임금은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사야의 소명 사화에서 드러나는 야훼 하느님의 왕정 사상은 시온 신학과 함께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에 앞서 언급되는, 높은 곳에 앉아 계신 분, 거룩하신 분, 성전에 가득 찬 그분의 영광, 임금이신 하느님은 하느님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조되는 하느님의 고유성은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이 지닌 의미를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과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을 보도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고유성이 나열된다.
소명 사화는 이사야 예언자가 정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느님을 마주한 이사야는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6,5). 이어 사랍이 그를 정화하고(6,6-7) 이사야는 파견된다(6,8-13). 주목할 점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해야 하는 사명이다. 예언서에서 그 사명의 방향은 백성을 향해 있다. 곧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10절). 사명이 내용을 표면적으로만 살펴보면 이사야의 사명은 구원이 아닌 심판에 가깝다. 그 사명이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완고함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사명을 부여받은 이사야는 “언제까지입니까?”라고 기한을 하느님께 묻는다. 그러자 그 기간은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다”(11절)라는 말씀을 듣는다. 성읍의 황폐화와 백성의 쫓겨남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12-13절은 심판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그렇지만 이사야가 부여받은 완고함의 사명이 비록 부정적인 언급이지만, 이 말씀에서 긍정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소명 사화가 예고하는 성읍의 황폐화와 백성의 쫓겨남은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킬까? 심판의 의미에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 그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기원전 722년)과 이보다 후대에 벌어진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략(기원전 701년 : 36-37장)을 의미할 수 있다. 거기에 다음 요소들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우선, 소명 사화가 ‘그루터기’와 ‘거룩한 씨앗’으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이다. ‘그루터기’는 이사야서의 시작과 함께 언급된 ‘남은 자’(1,8-9 ; 4,2-3)를 연상시키며, ‘거룩한 씨앗’은 유배 이후의 귀환 공동체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에즈 9,2).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하면, 황폐화와 백성의 쫓겨남은 거시적 관점에서 바빌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멸망(기원전 587년)까지 연관해서 볼 수 있다.
4) 임마누엘 탄생 예고(7,1-25)
임마누엘 탄생 예고를 담고 있는 7장은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본문이다. 7장은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위협한 ‘시리아-에프라임 전쟁’(기원전 734-732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1절), 두 개의 에피소드(2-9절/10-17절)와 심판에 관한 세 개의 신탁(18-20절/21-22절/23-25절)을 담고 있다. 7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침략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두 개의 에피소드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2-9절)는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위협에 대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해준다. 약속에 대한 전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 하리라”(9절).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10-17절)는 유명한 임마누엘 탄생 예고를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하즈 임금에게 믿음을 바탕으로 표징을 청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아하즈 임금은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그럴듯한 변명으로 표징의 청원을 거부한다. 아하즈의 모습은 기적과 표징을 청하지 않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비춰진다. 그가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7,12)하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신앙의 성숙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표현이다. 아하즈가 하느님과의 대화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강대국 아시리아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그 믿음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2역대 28,16-21).
이러한 맥락에서 이사야는 아하즈 임금을 질책하며 임마누엘의 탄생을 예고한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다윗 왕조에게 임마누엘 탄생 예고는 희망과 구원의 말씀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들을 향한 심판의 의미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임마누엘”은 긍정의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이 단어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뜻하므로 긍정적이다. 둘째, 구약성경에서 아이의 탄생 예고는 언제나 하느님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창세 18,14 ; 25,21 참조)
그러나 임마누엘 탄생이 예고되는 맥락과, 이후에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18.21.23절)라는 후렴과 함께 선포되는 세 번의 예고는 심판을 선포한다. 곧 아시리아의 침입(18-20절), 재난의 체험(21-22절), 땅의 황폐화(23-25절)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 임마누엘을 구원의 표징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아울러 임마누엘이 탄생하여 “엉긴 젖과 꿀”(15절)을 먹는다는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이 농경민의 음식이 아닌 유목민의 음식을 먹게 된다는 해석에 기초하면,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22절 참조).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탄생 예고는 다윗 왕조가 하느님을 온전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에(9절 참조) 받게 되는 심판의 예고이며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예고하는 구원의 예고이기도 하다. 임마누엘은 믿지 않는 이에게는 심판이며, 믿는 이에게는 구원의 의미를 담은 양면적 표징이다.
▶임마누엘의 신원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 7,14의 임마누엘 탄생 예고를 자신의 복음서 1,23에서 인용하면서 임마누엘 탄생 예고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다고 밝힌다. 마태오는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으로 묘사하면서 복음서의 시작과 마지막에 임마누엘을 강조한다(1,23 ; 28,20). 마태오의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이사 7,14은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되었다. 마태오가 제시한 ‘임마누엘=예수님’의 정식은 19세기까지 견고한 지지를 받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임마누엘은 누구를 지칭하였을까?’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임마누엘이 사실 예수님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는 데 있지 않다. 단지 “표징”(7,11)으로 제시된 임마누엘을 이사야 예언서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지 묻는 데 있다. 이에 이사야서가 제시하는 임마누엘의 신원을 밝히고자 했던 연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임마누엘의 신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임마누엘을 낳게 될 여인, 곧 “(그) 젊은 여인”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젊은 여인(알마 עלמה)”에 정관사(하 ה)를 붙였다. 그러므로 “젊은 여인”은 예언자 이사야와 예언을 청취하는 아하즈 임금이 모두 아는 인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그 여인이 아하즈 임금의 부인이라면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임마누엘은 히즈키야로 볼 수 있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이사야서에서 아하즈와 히즈키야 임금의 모습은 강한 대비를 이룬다. 우선, 아하즈 임금은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 나무가 바람 앞에 떠는 것처럼 마음을 떨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아하즈를 찾아가서 안심하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7,2-3). 반면에 히즈키야 임금은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보다 더 강력한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두려워 떨기보다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두르고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고 대신들을 이사야 예언자에게 보낸다(37,1-2). 아하즈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아시리아라는 외부의 힘을 믿었지만,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린다. 이처럼 아하즈와 히즈키야의 대조되는 모습에서 히즈키야를 구원의 표징인 임마누엘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만약 아시리아의 침공 이야기가 38장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임마누엘의 신원은 히즈키야로 밝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39장에 묘사된 히즈키야는 임마누엘과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가 자신을 방문한 바빌론 사절단에게 교만한 모습으로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히즈키야를 바빌론 유배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한다(39,1-8).
임마누엘의 신원에 관해 상징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앞서 “그 젊은 여인”의 표기는 이사야와 아하즈 임금이 아는 여인이 될 수 있다고 해석해 보았다. 이제 그 범위를 넓혀 바라보면 이사야와 아하즈 외에 언급되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독자이다.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 젊은 여인”으로 접근해보면 여인의 신원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이사야서의 시작 부분에 여인으로 표기되어 등장한 존재가 있는데, 그는 바로 시온이다(1,8). 시온은 “딸 시온”으로 언급되면서 여인의 모습으로 이사야서에 등장한다(1,8 ; 10,32 ; 16,1 ; 37,22 ; 52,2 ; 62,11). 아울러 시온은 하느님의 배우자(49,14 ; 62,4-5), 어머니의 모습을 지니며(50,1 ; 54,1), 출산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66,7-9). 그러므로 7,14의 “그 젊은 여인”을 시온의 상징적 표현으로 바라본다면 이사야 예언서가 지향하는 시온 신학에도 부합한다. 그 관점에서 임마누엘은 시온의 첫 자녀이며, 임마누엘이 의미하는 복수형 ‘우리’는 시온의 자녀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 한 명의 개인을 의미하기보다 이사야서가 기획하는 새로운 공동체, ‘우리’라는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이사야서 전체에서 확장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임마누엘 공동체는 1-39장에서 이사야와 그의 자녀와 제자들(8,16-18), 그리고 남은 자(1,9), 그루터기(6,13 참조 11,1)로 나타나고, 40장 이후에서 종과 종의 공동체로 확장되는 가운데 회복된 시온을 구성하는 의로운 이들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전개된다.
5) 이사야와 그의 자녀와 제자들(8,1-18)
8장은 이스라엘 전체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예고로 구성된다. 1-4절은 이사야와 그의 둘째 아들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다마스쿠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한다. 이어지는 5-10절은 아시리아의 침공을, 11-18절은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는 하느님의 말씀(11-15절)과 예언자 개인에 관한 이야기(16-18절)를 전한다.
첫 번째 단락(1-4절)은 하느님의 명령과 이사야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사야의 맏아들은 ‘스아르 야숩’으로 이미 7,3에서 등장했다. 둘째 아들은 ‘마하르 살랄 하스 바즈’로 ‘약탈물은 재빨리, 노략물은 날래게’로 직역된다. 7장의 배경인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에서 등장하는 스아르 야숩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지니면 남은 자가 되어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면, 재빠른 약탈과 노략의 의미를 담은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는 다마스쿠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두 번째 단락(5-10절)은 7장에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은 유다 왕국을 향한 심판이 내린다(7,9 참조). 유다 왕국은 이제 아시리아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 예고된다. 하지만 이방 민족의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선포된다. 여기서 임마누엘의 이름이 선포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10절)
세 번째 단락(11-18절)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유다의 백성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방 민족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들이 걷는 길을 걷지 말고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이방 민족이 아닌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11-15절). 그리고 이사야에게는 백성의 편에 서지 말고 하느님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신다(12-13절). 이어서 예언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6절은 이사야가 자신의 선포 내용을 적어 문서로 만들었다는 흔적을 제시한다. 그가 “증언 문서를 묶고” “제자들 앞에서 이 가르침을 봉인”(8,16)하는 행위는, 자신이 선포한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용되지 못하고 거부되었음을 암시한다. 아울러 이 사실로 그가 받은 완고함의 사명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준다(6,9-10 참조). 그리하여 그는 말씀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 앞에서 증언 문서를 묶고 봉인한 뒤 주님을 고대하면서 기다린다(17절). 증언 문서는 봉인되고, 이제 이사야, 그의 자녀와 제자들은 이스라엘에 세우신 하느님의 표징이 된다.
6) 에필로그(8,19-10,4)
이 단락은 임마누엘 문헌을 감싸면서 에필로그의 역할을 한다. 에필로그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8,19-23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역경의 때를 묘사하며, 9,1-6은 이상적 통치자의 탄생과 즉위를 통해 구원의 그림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9,7-10,4은 에프라임과 유다의 지도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들려주면서 에필로그를 마무리한다.
8,19-23 하느님의 가르침과 역경의 때에 대한 묘사
19절은 “너희”라는 2인칭 복수 형태로 시작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로, 이사야 예언자와 그의 자녀와 제자들을 지칭한다(8,16-18참조). 20절은 가르침과 증언을 다시 언급하며(8,16참조), 잘못된 백성의 태도를 질책한다. 이어서 위험한 시기가 묘사되는데, 역경의 시대가 오더라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임금과 하느님을 저주한다. 백성 스스로 행한 잘못 때문에 역경의 시대를 맞았건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을 향해 저주를 내뱉는다(8,21). 백성은 이미 하느님과의 관계를 훼손하였고, 역경이 오면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암흑을 맞이할 뿐이다(8,22). 하지만 역경은 어둠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희망으로 예고된다(8,23).
9,1-6 이상적인 통치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하느님 구원의 그림을 보여주는 9,1-6은 하느님을 향한 감사 노래를 담은 1-4절과 이상적 통치자에 관하여 들려주는 5-6절로 구성된다. 8,21-23에 예고된 역경 속에 가득했던 어둠은 큰 빛이 등장하면서 사라진다. 빛으로 바꿔주시고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노래가 울려 퍼진다(9,1-2). 이어서 폭력의 수단이며 도구인 멍에, 장대, 몽둥이, 군화와 군복이 화염에 타버린다(9,3-4). 이처럼 역경에서 구원을 향한 움직임은 빛의 등장과 폭력 수단의 무력화로 드러난다. 그리고 정점에서 이상적 통치자의 탄생이 보도된다. 이어서 그 아이에게 네 가지 이름 –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 –이 부여되는데, 이는 통치자의 즉위식 장면을 연상시킨다(9,5). 뒤이어 통치자에게 신탁이 주어지는데, 그와 다윗 가문에 영원한 평화와 정의가 약속된다(9,6).
이상적 통치자, 곧 메시아의 탄생과 즉위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는 9,1-6은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 왕조에게 하신 약속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연관성을 드러내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아들”(9,5 ; 2사무 7,14) ; ‘왕좌의 지속성’(9,6 ; 2사무 7,16) ; “이름”(9,5 ; 2사무 7,9) ; ‘판관 시대에 대한 암시’(9,3 ; 2사무 7,11). 그러나 통치자의 탄생 보도는 태어난 아기의 ‘생물학적 신원’이 아닌 통차자로서의 ‘정당성’을 밝혀준다. 탄생 보도 이후에 그에게 주어지는 네 가지 이름은 ‘왕좌의 이름’으로 통치자의 역할을 설명하고, 태어난 아기가 통치자로 즉위하는 장면을 암시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통치자의 탄생과 즉위 장면을 한 문장에 담아내는 본문은 9,5이 유일하다. 네 가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로 히브리어로는 ‘펠레 요에츠(פלא יועץ)’이다. 펠레(פלא)는 기적 또는 하느님의 업적을 의미한다(탈출 15,11 ; 시편 77,12.15 ; 78,11-12 ; 88,13 ; 89,6). 그러므로 “놀라운 경륜가”는 ‘계획자’라는 의미를 지닌 요에츠(יועץ)와 함께, 하느님의 업적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획자를 가리킨다.
두 번째 이름은 “용맹한 하느님”이다. 이는 강한 하느님을 뜻하며, 하느님의 강함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세 번째 이름은 “영원한 아버지”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임금에게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백성을 돌보시고 염려하시는 하느님의 역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자에게 부여하는 이름에 들어 있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통치자의 신원이 아닌,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의미한다.
네 번째 이름은 “평화의 군왕”이다. 여기서 사용된 군왕의 의미는 주의해서 바라봐야 한다. 우리말 “군왕”으로 번역된 ‘싸르(שׂר)’는 임금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멜렉(םלך)’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야훼 하느님만이 유일하고 참된 임금이시다(6,5 ; 24,23 ; 33,22 ; 41,12 ; 43,15 ; 44,6 ; 52,7 참조). 메시아적 인물은 참된 임금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따라서 이 인물에게 임금이라는 호칭은 의도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축복 아래 이르는 평화의 상태, 곧 샬롬(שׁלום)으로 이끌 평화의 통치자이다.
여기서 언급된 이름 네 가지 가운데 세 가지는 인간 임금에게 사용된 호칭이 아니며, 하느님께 드리던 호칭이다. 그러므로 인간 임금에게 이 호칭을 부여하였다는 것은 인간 통치자의 통치를 통해 하느님의 통치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울러 여기서 등장한 이름은 개인의 이름과 구별되는 기능적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에게 적용되는 이름을 인간에게 적용하시면서, 인간 통치자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제시하신다.
9,7-10,4 에프라임을 향한 분노와 불행 선언
이 단락의 구조는 반복되는 후렴구로 쉽게 파악된다. 즉, 후렴구 “그분의 손은 여전히 뻗쳐 있다”(9,11.16.20 ; 10,4)가 네 번 반복되면서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단락은 9,7-11로 이사야는 야곱을 거스르는 말씀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적들을 부추기며 북 왕국 이스라엘을 위협하도록 이끄신다. 이는 에프라임과 사마리아 주민들의 오만함 때문이다(9,8-9). 두 번째 단락은 9,12-16이다.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 백성의 모습이 질타를 받는다. 세 번째 단락은 9,17-20이다. 만군의 주님의 분노로 땅이 타버리는 모습이 묘사된다. 네 번째 단락은 10,1-4이다. 10,1은 5,8-30에서 선포된 ‘불행 선언’과 대칭을 이루면서 “불행하여라”라는 외침과 함께 시작된다. 죄악을 저지르며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에게 불행이 선언된다. 불행 선언 이후에 그들이 맞이할 불행한 운명을 예고하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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