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르갈의 아리랑
이 홍사
이제는 아내를 주어야 한다.
내 아내를.......
십구 년간 같이 살아온 아내를 주어야 한다.
짬만 나면 내 고뇌의 좌향, 그 나침반 바늘은 아내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흡스굴 호수를 향해 초원을 달리는 차 안에서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듭 다짐하고 있었다. 창밖, 진하고 다시 못 볼 풍경마저도 그냥 내 눈길을 밟고 주마간산 흘러가버린다. 아내라는 꼬리표가 달린 인격체를 인수인계하는 방법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더 골똘히 생각한다. 인간성과 됨됨이의 이미지로 먹고 사는 장사인데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무난해야한다. 남의 말을 좋아하는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비아냥거림이 아닌, 실로 인간답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갔다, 는 긍정적인 소문이 나도록 자연스럽게 아내를 주는 방법에 대해서 심도를 더하고 있다.
생각이 깊어지면 몸이 느슨해지는 법, 그런 생각에 골똘할 때 달리던 차가 갑자기 덜컹, 작은 도랑을 건너뛰었다. 그 바람에 내 몸이 의자에서 한 뼘이나 붕 솟아 차량 천정에 머리를 부딪치고 내려앉으면서 또 급브레이크를 잡는 통에 앞 유리에 이마를 부딪쳤다. 난폭하게 차를 몰던 운전사가 나를 돌아보며 미안한 투로 쭈그루? 하면서 괜찮으냐? 고 물었다. 나는 한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억지로 미소를 짓고는 쭈그레! 하고 대답했다. 유리에 금이 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박은 것이다. 나는 주섬주섬 무릎에서 떨어진 가방을 챙기고 귀에서 빠져 꼬인 이어폰 줄을 바르게 펴고 있었다.
뒷좌석에 돌아앉아 있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몽고여자, 볼이 통통하고 몽고인답지 않게 피부가 뽀얀 여자가 몸을 돌려 이어폰을 가리키며 밉지 않게 손을 내밀었다. 빠진 이어폰 중에서 하나를 보자는 시늉이다. 엠피쓰리에는 회심곡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다.
한쪽 이어폰을 그녀의 귀에 꽂아주고 한쪽은 내 왼쪽 귀에 꽂았다. 그녀의 머리통과 네 귀는 한 뼘 가까이로 좁혀졌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회심곡이 무슨 노래인지 알 턱이 없다. 그러면서도 가락을 맞추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주머니에 든 엠피쓰리를 꺼내 곡을 바꾸었다. 회심곡은 그 내용을 모르는 몽고여자가 가락만으로 듣기에는 지겨운 노래다 싶어 장사익의 노래 연속듣기로 바꾸어 주었다. 몽고여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녀에게 물었다. 타니 네르 헴베? 이름이 뭐냐고, 그녀는 쟈르갈이라고 대답했다. 묻는 김에 내처 한 번 더 물었다. 타 히든 나스테 웨? 나이가 얼마냐고, 그녀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긴 손에 들고 있는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것을 외워서 물었으니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내 손을 끌어당기더니 손바닥에 33이라고 아라비아 숫자를 썼다. 서른셋이라는 말이다. 나는 돌아보며 살짝 웃어주는 것으로 답을 했다. 나와는 열두 살 차이가 난다. 조선말로 띠동갑이다. 말띠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몽고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을뿐더러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도 않았다. 띠동갑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이 차는 푸르공이라는 국방색 러시아제 승합차다. 사륜구동은 기본이요 바퀴가 크고 차 밑이 높아 길이 험한 흡스굴로 영업을 뛰는 차는 모두가 푸르공이란다. 승차감은 영 아니지만 이런 차가 아니면 달릴 수가 없는 길이다. 차안에는 운전사 두 명을 포함해서 열네 명이 타고 있다. 그 중에서 외국인은 나 혼자뿐이다. 넓은 초원과 흡스굴 호수 구경을 나선 나는 정작 동승한 몽고인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진태가 흡스굴로 가는 차를 잡아 표를 끊어 줄 적에 내가 환자라는 사실과 초행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운전석 옆자리를 타는 조건으로 자리를 잡아주었다. 몸도 불편한데 혼자 나서기에는 험한 길이고 이렇게 불편한 차를 스무 시간 넘게 타야하는 장거리라 무리일 거라며 기어이 동행하겠다는 진태를 뿌리치고 혼자서 나선 길이다. 내가 앉은 조수석은 말 그대로 스페어 기사가 타는 자리다. 결국 밤을 새워서 교대로 운전해야하는 기사의 자리와 내 자리가 바뀐 셈이다.
푸르공의 크기는 한국의 9인승 승합차 만한데 고무줄 정원이이라고 했다. 사람이 타는 대로 좁혀 앉아 언젠가 흡스굴을 갈 적에 이 좁아터진 차에 열여덟 명이 타고 간 적도 있다고 했다.
좌석을 예약한 것은 오전 열한 시쯤이었다. 운전석 옆자리, 즉 조수석이 아니면 그 불편함을 감당할 수가 없을 거라며 일찍 자리를 잡고 돈을 지불하고 언제 정원을 채워서 출발할지 모른다며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운전수에게 말하고는 우리는 간단사로 갔다.
몽고를 지켜 온 것이 간단사였다. 아니, 그 불심이었다. 간단사는 정통 티베트 양식으로 대형 입상불 둘레에 경전을 싼 보자기들이 도서관 책장처럼 생긴 진열대에 칸칸이 진열되어 있고 황동으로 만든 마니가 중생들의 손에 닿기 좋은 위치에 둘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마니를 돌리며 부처의 둘레를 돌고 있었다. 마니 한 바퀴를 돌리면 불경 한권을 읽는 것과 버금가는 가피를 얻는다고 믿고 있다. 그 불심으로 칠십년간 구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몽고어를 유지시키고 무지한 중생들 가슴속에 민족성을 얽어왔다.
간단사에 있는 목불 규모면에 있어서 속리산의 청동대불과 버금갈 정도였다. 그 절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버스터미널로 돌아온 시간은 네 시 반이었다. 혹시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냐며 조급해 했지만 진태는 쓸데없는 걱정 말라며 느긋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차는 절대 출발하지 않을 것이고 언제 출발을 하든지 내일 점심때가 넘어야 무릉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진태가 운영하고 있는 텐안먼에 가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텐안먼? 텐안먼은 내가 대구에서 아내와 꾸려가는 중국식당 이름이다. 진태는 몽고에서도 텐안먼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물론 중국 음식점이 아니다. 부대찌개와 된장찌개, 삼계탕을 파는 한국 식당인데 굳이 간판을 텐안먼이라고 내건 것은 녀석이 우리 식당 주방장으로 있을 적에 장사가 그런대로 되었기 때문에 더도 덜도 말고 그만큼만 되라고 텐안먼이라고 걸었다고 했다.
몽고 울란바트르에 천안문도 아니고 텐안먼이라고 한국어로 버젓이 걸어놓은 간판을 보니 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녀석의 고집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진태는 내가 운영하는 텐안먼(天安門)에서 육 년 동안 뼈가 굵었다. 배달원으로 들어와서 주방 보조를 거쳐 요리기술을 배워 주방장 삼 년을 채우고 한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식집에서 요리기술을 익히고 주방장으로 일을 하다가 결혼을 위해 몽고로 넘어온 것이다. 한국에서는 중학을 나온 식당의 주방장과 결혼을 해줄 처녀가 없었던 모양이다. ‘마땅한 년이 없어요’ 몽고로 떠나겠다고 인사차 들러서 했던 말이다. 녀석이 몽고로 날아온 것이 사년 전의 일이고 녀석은 몽고에 와서 한국식당을 차리고 서둘러 결혼을 한 것이다. 지금은 늘씬한 아내와 깔끔한 재롱둥이 세 살짜리 딸을 두고 있다.
녀석이 우리 식당에 배달원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나이가 고작 스무 살이었다. 녀석의 배달 솜씨는 묘기에 가까웠다. 오토바이가 타고 싶어서 중국집 배달원을 택했다는 녀석이다. 가끔 배달원을 구하다 보면 그날 수금한 돈을 가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종적을 감추는 놈들이 있는데 녀석은 달랐다. 심성이 곱고 잔정이 많은 녀석은 육년 간 우리와 한 식구였다. 말하자면 녀석에게 우리 집은 친정 같은 곳이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큰방을 쓰고 녀석은 주방에 딸린, 밀가루 포대가 쌓인 작은방에서 잤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나를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녀석이다. 그렇게 살아온 녀석이 종업원을 일곱 명이나 거느린 한국식당 사장이 되었고 이국땅이지만 결혼을 해서 살아가는 걸 보니 대견하고 뿌듯했다.
진태는 몽고인 주방장을 불러 삼계탕을 주문했다. 주문이 아니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잘라낸 위장의 팽만감 탓에 삼계탕 반을 비우지 못했다. 녀석이 뜨거운 삼계탕 뚝배기를 말끔히 비우고 담배를 한 대 다 피울 때까지 숟가락을 쥐고 있었지만.
식당에서 나와서 한인슈퍼로 갔다. 밤을 새워야 하는 여정에 먹을 간식거리, 초코파이, 땅콩 등속을 사서 배낭에 넣어야 했다. 만만히 볼 길이 아니라며 진태가 손수 챙겨 넣어주었다. 또 부근 카페에 들어가서 카푸치노 커피를 느긋하게 마시며 몽고인인 녀석의 아내 티기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티기는 늘씬하면서 상당히 미녀였다. 녀석이 몽고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며 현지인과 결혼생활, 외국에서의 장사를 하면서 어려운 점과 앞으로 전망 등에 대해서 내가 물었고 녀석이 대답하는 쪽이었다. 녀석은 조금 더 하다가 분점을 하나 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녀석의 희망이 부러웠다.
좌석을 예약하고 여석시간이 지나서야 터미널로 갔다. 말이 좋아 터미널이지 시골 우시장 같았다. 차가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운전수는 호객행위를 하고 요금을 흥정하느라 터미널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정원뿐만이 아니라 요금도 고무줄이라고 했다. 늦게까지 정원을 못 채운 차들은 싼 가격에 손님을 태운다고 했다. 원래 운임이 이만 투그럭인데 늦게 가서 이차 저차 기웃거리며 흥정을 하면 요금을 내려서 만 오천 투그럭에도 갈 수가 있는데 외국인은 예외라고 했다. 더 비싸면 비싸지 절대 외국인에게 내리는 법은 없다고 했다.
진태 말처럼 운전수는 우리를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라 안중에도 없었다. 아직도 정원을 못 채운 것이다. 흡스굴까지 가는 기름 값과 경비가 되어야 출발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얼마를 받고 다른 차로 손님을 몰아 태우든가 그 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그 날 출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운전수의 거동을 보니 진태 말이 실감났다.
차가 출발한 시간이 오후 여섯 시가 넘어서다. 나를 포함해서 차에는 아홉 명이 타고 있었다. 정원을 채운 것이다. 이정도면 복잡하지 않고 맘이 편하게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잘 다녀오라는 차창 밖 진태에게 손을 흔들었는데 웬걸, 차는 시내 구석구석 돌며 네 명을 더 태운 것이다. 집에 앉아서 전화로 좌석을 예약한 사람들인 모양이다. 사람만 타는 것이 아니라 그 추가 승객들이 지닌 짐도 만만치가 않았다. 추가로 사람이 탈적마다 기사와 조수가 내려서 짐을 다시 정리하고 사람들을 밀착 시키며 좌석 안배를 다시 했다. 작은 짐은 드렁크를 채우고 큰 보퉁이는 스페어타이어 두 개가 얹혀있는 지붕 위에 얹어서 묶었다. 푸르공이라는 차는 이렇게 이고 지고 초원을 달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남은 짐은 객석 의자 밑,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공간을 채우고 급기야 내 발 밑까지 빼곡히 채워졌다. 마음대로 다리조차 펼 수 없는 좌석이었다. 마지막으로 탄 사람이 쟈르갈이었다. 그녀의 자리는 바로 조수석 뒤, 그러니까 나와 등을 맞대고 앉은 것이다.
쟈르갈과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장사익의 노래를 나눠 듣고 있었다. 엠피쓰리의 이어폰 줄이 그리 길지 않은 까닭에 차가 덜컹일 때마다 그녀의 귀가 아니면 내 귀에서 이어폰이 빠지곤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서로의 머리통을 최대한 가까이 좁힐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길을 끝없이 달리는 좁은 차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어쩌다 이어폰이 빠져서 다시 끼울 적에 그녀의 긴 머리채가 내 코끝을 스치고 그때마다 맡아지는 그녀의 머릿결에서 살짝 살짝 맡아지는 샴푸향이 싫지는 않았다.
구월의 몽고 초원은 풀이 시들어가는 시기다. 나는 저 풀이 다시 돋을 때까지 살 수 있을지 의문을 품으며 내 생에서 마지막 해외여행이 분명한 이 여정에서 쟈르갈이 어떤 의미, 스쳐지나가는 평범한 사이가 아닌 존재로 자리매김 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지구상에서 가장 물이 맑다는 흡스굴 호수에 외로움을 벗 삼아 집시로 다녀오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글렀지 싶다.
초원의 어둠은 더디게 찾아 들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려 차가 라이트를 켠 시간이 열시를 넘겨서다. 날이 어두워지자 차안의 모든 사람들은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고개를 모로 꼬고 자는 중늙은이, 가방을 무릎에 놓고 그 가방에 엎드려 자는 아주머니, 그 덜컹이는 비포장도로와 불편한 좌석에 아랑곳 않고 모두가 잠이 들었다. 푸르공의 불편함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곤 운전사와 나, 그리고 쟈르갈뿐이다. 차가 경치 좋기로 소문난 아르항가이 아이막을 지날 적에 내 어깨너머로 쟈르갈의 손이 넘어왔다. 뭘 달라는 소리죽인 의태어였다. 그녀가 필요한 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피식 웃는 듯 담배를 받은 쟈르갈은 딱 한 모금 들이키더니 담배를 내 입술에 꽂아주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녀가 요구한 건 바로 내 손이었다. 그녀는 과감하게 내 손등으로 자신의 볼을 한번 문지르고 손등을 코로 가져가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 가벼운 키스의 한 방법이었다. 그리고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대담함에 기분이 썩 유쾌한 건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등을 돌려 앉은 사람끼리 어깨너머로 손을 잡고 가는 불편한 자세가 한동안 지속 되었다. 나는 만남의 어원을 헤아리며 그 의미를 짚어보았다.
인간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구나.
만남과 움트는 인간적인 관계, 그리고 외로움으로부터 비롯되는 친밀성의 상관을 생각할 때쯤 통증이 시작되었다. 통증은 언제나 배꼽 아랫부분에서 비롯되어 명치를 거쳐 목울대로 올라오는 것이다. 한번 발작하면 몸이 꼬이고 사지가 뻣뻣해질 정도로 참기 힘들다. 나는 그녀에게 주고 있던 손을 빼고 배낭을 더듬어 약을 찾았다. 두 번의 수술 후에 받은 약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일뿐이다. 남은 생에 통증을 느끼지 않고 살다가라고 인간 중에서 의료연구진이라 불리는 동물들이 골을 싸매고 몇 만 번의 임상실험을 거쳐 만들어낸 진통제를 두 알을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타 웁두유치 베나?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말일 것이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통증을 견디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는 애처롭다는 눈빛으로 돌아앉아 내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곳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통증은 오 분가량 지속되었다. 그 오 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통증이 좀 가라앉자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손을 찾았다. 통증이 지나가면 온 몸이 진땀으로 범벅이 되고 맥이 쭉 빠지며 살이 벌벌 떨릴 정도로 나른해 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전해오는 체온이 아니면 심신을 의지할 곳이 없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이 넓디넓은 세상의 한 모퉁이 어두운 곳을 혼자서 기어가고 있다는 두려움과 혼자 나선 길이 만용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는 엠피쓰리의 장사익 연속듣기를 끄고 회심곡으로 바꾸었다.
두 번째 수술 이후에 회심곡이 귀에 들어왔다. 위장을 두 번이나 잘라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장을 잘라내야 하는데 현대 의술로는 대동맥으로 전이된 암 세포를 두고 대장의 암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약이 있다면 바로 회심곡이나 백발가를 듣는 것이다.
백발가에는 천하명의 편작이도 백약이 무효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게 소문난 명의도 제 병은 어쩌지 못했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누구라도 죽는다는 존재의 유한성을 대변하는 구절이다. 회심곡은 가사에 생로병사를 담고 있다. 그 의미를 새기며 회심곡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해지는 것이다.
내 병을 고스란히 끌어안기로 작정했다. 물리치겠다고 버둥거릴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병인 것이다. 병원에서는 방사선 치료를 요구했지만 그런 구차스런 방법으로 명을 연장한다고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로 완치했다는 전례는 들은 바도 없거니와 고통만 추가 시키고 남은 시간만 조각조각 찢어져 정리할 시간이 빼앗긴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아내는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고 못마땅해 했지만 수술이 불가능한 병은 생로병사의 한 과정일 뿐이며 누구나 겪는 과정인데 좀 이를 뿐이라고 아내를 달랬다. 진통제 외에는 어떤 약도 쓰지 않았다. 약이라면 회심곡이다. 쟈르갈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회심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내는....... 지금 덕용 씨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 있을까?
또 아내를 향해 나침반 바늘이 좌향을 바꾼다. 나의 부재로 인한 공간을 매끈하고 깔끔하게 메워 줄 사람이 덕용 씨뿐이라고 맘을 굳힌 건 두 번째 수술을 받고 난 지난겨울이었다. 내 삶의 여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덕용 씨가 기거하는 일층의 주방에 붙은 방을 고기를 넣는 대형 냉동고와 밀가루로 가득 채워 창고로 만들었다. 그리고 덕용 씨에게 우리가 주택으로 쓰는 이층의 작은 방에 기거하도록 했다. 의도적으로 한집 살림을 차린 것이다. 말은 않고 있었지만 그것이 덕용 씨에게 아내를 인계하는 방법 중, 첫 번째 시도였다. 그러나 그런 과분한 생활이 바닥인생을 살아온 덕용 씨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화장실도 이층의 것을 쓰지 않고 오밤중이라도 일층으로 내려가고 빨래도 욕실 세탁기에 던져 넣지 않고 늦은 밤 일층 세면장에서 손수 손빨래를 하는 것이다. 부담 갖지 말고 한식구로 지내자고 누누이 말했건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항상 내 부재를 상상했다. 그것이 아버지로서의 책무고 남편으로서의 도리인 모양이다. 내가 덕용 씨에게 직접 내 자리를 메워 달라고 말을 한 것은 지난 십이 월 말 일, 아니 열두시가 넘었으니 올 초하루였다.
우리는 전에 없던 일을 감행했다. 동해안으로 해맞이를 간 것이다. 결혼하고, 식당을 열고부터는 망년회 손님으로 인해 북적거릴 식당 문을 닫고 해맞이를 간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올해는 과감히 식당 문을 닫았다. 물론 예약손님도 거절하고 동해안으로 떠났다.
아내를 인계하는 두 번째 시도가 되는 그 여행 계획은 치밀하게 세웠다. 인터넷으로 속초 바닷가 전망 좋은 모텔 방을 달랑 하나만 예약하고 송금을 했다. 아이 둘은 제 사촌들과 지내라며 사흘 전에 큰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나, 그리고 덕용 씨 셋이서 출발했다. 예상대로 덕용 씨는 두 분이 조용히 다녀오시라고, 자기는 식당을 지키겠다고 좀 머뭇거리는 눈치였지만 막무가내로 운전할 사람이 없다며 밀고 나갔다. 식당에서 일을 하는 숙희와 경화, 대포 녀석에게는 각각 십 만원씩 쥐어주고 이틀간 휴가를 주었다. 연말 회식 손님 때문에 죽을 각오를 했던 녀석들은 이게 웬 횡제냐는 듯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문을 닫기도 전에 제 갈 길로 갔다.
운전은 아내와 덕용 씨가 교대로 하라고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물론 조수석이 편하겠지만 눕고 싶을 때 눕겠다며 아내와 덕용 씨를 나란히 앉히고 나는 뒷좌석에 담요를 베고 누웠다. 영주 부석사를 둘러보고 불영 계곡을 넘어서 속초 바닷가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었다. 횟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보니 해수욕장 모래밭에 그 지방 무속인 협회에서 해맞이 해신굿을 벌이고 있었다. 굿판 구경을 가자고 제의한 건 아내였다. 그러나 조금 보다가 아내는 춥다며 먼저 모텔 방으로 들어가고, 굿 구경보다는 내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내 옆에 서있는 덕용 씨를 물가로 끌고 갔다. 등 뒤에선 늙은 무당과 젊은 무당, 박수무당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었지만 내 눈에 들어올 리 만무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드는 바닷가에 서서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덕용씨! 우리 집에 온지 칠 년이지? 내가 없더라도 저 사람과 아이들 식당을 잘 부탁해! 내가 어디 부탁할 데가 있어야지....... 덕용씨, 우리 아이들 불쌍하잖어? 덕용씨도 부모 없이 자라서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덕용씨가 내 대신 애들 애비가 되어주는 거야. 싸나이 대 싸나이로서 하는 이야기인데........ 내 자리를 좀 잘 지켜줘! 골키퍼가 있어도 골이 들어가는데 골키퍼가 없어봐....... 별 잡놈들이 다 설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덕용 씨는 고개를 숙이고 발로 모래만 긁적이며 할 말이 궁했던지 ‘오래 살아야죠. 곧 괜찮아지리라 믿어요.’ 엉성한 위로를 했다.
그는 아내보다 한 살이 어리고 나보다는 네 살이 적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고아원에서 자랐고 중학을 중퇴하고 중국집 배달원을 시작했단다. 맛깔스런 요리 맛을 내는 손보다는 심성이 무던해서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으로 점찍었고 무엇보다 딸린 식구가 없는 것이 맘에 들었다. 혼기를 놓친 마흔 살짜리 홀아비, 아니 노총각이다. 아내와 맺어주면 제대로 꾸려 갈 것이다. 바깥일은 대학물을 먹은 아내가 처리할 것이고 주방과 종업원 관리는 중국집에서 뼈가 굵은 덕용 씨가 챙길 것이다. 그의 통장에도 제법 들어있다. 월급을 주면 제가 자란 고아원에 얼마를 후원금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통장에 모으는 눈치다.
등 뒤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해수욕장 모래밭, 물가에서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선언과도 흡사한 말을 부탁으로 위장했다, 그리고 내일 운전하려면 피곤할 터이니 들어가서 자라며 아내가 홀로 자고 있을 모텔로 등 떠밀어 넣었다. 몸도 불편한데 같이 들어가자는 그에게 나는 굿판을 구경하고 아침 해돋이를 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는 모텔로 돌아가고 파도는 무심히 모래톱을 할퀴고 밀려나가곤 했다. 마실 수는 없지만 취하고 싶었다.
작년만하더라도 덕용 씨에 대한 호칭부터 달랐다. 덕용 씨가 아니라 ‘주방장 조씨’였다.
‘어이~ 조씨! 일루 좀 와 봐’ ‘어이! 주방장 깐풍기 둘에 쟁반짜장 둘!’
그런 반토막짜리 대화가 우리 사이의 일상 용어였다. 그러나 그를 아내의 남자로 점찍고부터 호칭이 달라졌다. 내가 먼저 ‘덕용 씨’라고 부르고 아내에게도 그런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고 일렀다.
해신굿은 시간이 갈수록 재미를 더해갔다. 용왕님 전에 풍어를 기원하는 굿인데 내가 여태 생각했던 굿의 개념과는 달랐다. 굿이라면 잡귀를 떨쳐버리는 근거 없는 무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당놀이와 흡사했다. 굿판 중간 중간에 현대판 유행가를 부르며 무당들과 구경꾼들이 어우러져 한바탕 노는 것이었다. 나도 그 중간에 끼어 막춤을 추며 한바탕 질펀하게 놀았다, 아니, 놀았다기보다는 환장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두운 초원의 외길을 방향을 잃지 않고 용케도 달려 아르항가이 아이막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휴게소라고 했지만 조그만 동네 가운데 나무판자로 만든 상점과 조그만 식당이 불을 밝히고 있고 마당에는 캐노피가 없는 맨바닥에 주유기 두 대가 있을 뿐이다. 오래된 서부 영화에 나오는 황폐한 지역의 바 같은 곳이었다. 흡스굴로 오가는 차는 이곳이 아니면 쉬고 주유할 곳이 없는 모양이다. 주유기 앞에 푸르공이 세대나 서서 기름을 넣고 있었다. 모두가 흡스굴로 올라가는 차가 아니라 내려오는 차량도 있었다.
휴게소에 차를 세우자 자고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깨어나서 식당으로 들어가고 더러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 사이 운전사는 연장통을 챙겨들고 내려서 차 밑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점검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차가 얼마나 쉬는지 그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물끄러미 서서 운전수가 정비하는 것을 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쟈르갈이었다. 그동안 손을 잡고 이어폰을 함께 듣고 온 것만으로 그녀는 내게 정이 듬뿍 든 모양이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이끌었다. 눈치로 미루어 여기서 무얼 먹고 가야하는 모양이다. 진태가 일러줄 적에도 가는 곳에 휴게소라곤 아르항가이 한군데 밖에 없으니 거기서 요기를 하라고 했다.
막상 식당에 들어서니 어떤 음식에서 나는 것인지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향료가 코를 찔렀다. 냄새만으로도 역한데 성하지 못한 반토막짜리 위장에 길들여지지 않은 음식을 마구 쑤셔 넣었다가는 험한 길에 어떤 변고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사람들이 시켜서 먹는 음식을 찬찬히 훑어보니 어느 것도 먹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배낭에 들어있는 초코파이를 생각하고 식당에 딸린 구멍가게에서 물을 한 병 달라고 가리켰다. 내가 가리킨 물은 받아들고 보니 ‘제주 삼다수’라는 상표가 붙은 한국산이었다.
‘조선 물이 참 멀리도 와 있군!’ 중얼거리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쟈르갈이 나를 불렀다. 이미 그녀는 밥을 시켜서 테이블에 놓고 있었다. 한 쟁반에 담긴 두 공기의 밥에 양고기를 썰어서 뽁은 반찬과 당근 샐러드가 담긴 접시위에 포크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인분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한 모양이다. 쟈르갈이 내가 먹을 수 있을 만한 음식을 고려해서 시킨 모양이다.
다른 식탁에 앉은 몽고인들은 거의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반주라고 봐주기에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보드카를 마셔대는 것이다. 저렇게 마셔대고는 술기운에 잠으로 무료한 시간을 떼우겠다는 것인가? 의아해 하는데 같은 차에 탔던 동승자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은근히 놀려대는 눈치다.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는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쟈르갈이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뭐라고 대꾸하는 것으로 미루어 잘 어울린다는 뭐 그런 말일 터이고 놀리지 마라는 대꾸인 듯했다.
밥과 샐러드를 조금 먹고 나와서 휴대폰을 켰다.
진태의 휴대폰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진태가 챙겨주고 녀석은 제 아내의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초원을 오는 동안은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르항가이에는 송신탑이 있어 전화가 되니 그곳에 도착하면 반드시 전화를 하라고 했다. 이 오밤중에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누르니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아르항가이에 도착했다는 말에 녀석은 내 몸부터 걱정했다. 괜찮으니 걱정마라며 곱상한 가이드 하나 만들었다고 했더니 녀석은 콘돔을 챙기고 갔냐고 농을 했다. 콘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명사였다.
야! 이 녀석아! 이 몸에 에이즈가 걸리면 어때? 형! 그게 아니라 애비 없는 불쌍한 자식 생산할까봐 그러는 거지 뭐, 몽고 인구도 적은데 그것도 보시 아니겠어? 형처럼 명줄 짧은 놈을 생산하면 그것도 죄악이라구! 근데 이뿌긴 해요? 그래 뭐 그런대로.......
그런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쟈르갈이 내게로 다가와서 팔짱을 끼었다.
야! 이 여자가 또 팔짱을 낀다. 아무래도 오늘 밤 온전하게 못 넘어갈 거 같다. 형 복상사하는 거 아니야? 그 여자 몇 살쯤 되어 보여? 서른셋이란다. 형 나이에 횡재했네. 그 휴게소 뒤에 초원이 좋아요. 거기로 끌고 가서 눕혀! 그랬다간 너 여기까지 복상사 주지 시신 수습하러 오는 꼴이 생긴다? 알았어. 형! 무릉에 도착하면 또 전화 해! 그래 알았다.
아르항가이 도착 보고를 마치고 나니 팔짱을 끼고서도 제 얘기인 줄 모르는 여자가 다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쟈르갈이 나를 끌고 간 곳은 휴게소 뒤편 판자촌이 듬성듬성 있는 초원이었다. 쟈르갈이 느긋한 것을 보니 차는 여기서 한참을 쉬어가는 모양이다. 휴게소 뒤에는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어두운 초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깔린 풀들은 발목을 덮을 만큼 자라 있었다.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걷던 그녀는 하늘을 가리키며 ‘오뜨’라고 했다. 별을 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초원을 보았지 별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킨 하늘에는 그야말로 별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마치 그녀의 손끝에 별이 매달려 있는 듯 했다. 온 하늘에 한 치의 빈틈없이 빼곡한 별, 이렇게 많은 별을 난생 처음 보았다. 낮은 하늘에 열려있는, 처음 보는 별에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쟈르갈은 몸을 돌려 내 입술을 훔쳐갔다. 그것 또한 난생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내 입술을 겁탈한 건 그녀가 아니라 별이라는 착각이 잠시 일었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생김새는 한국 사람과 같아도 노는 건 완전히 유럽이라구요, 얼마나 노출이 심한지....... 요염하게 옷 입는 거 좀 보라구요. 젖탱이 다 내놓고 다니죠. 그리고 남자가 맘에 들었다하면 얼마나 대담한지....... 진태 말이 떠올랐다.
입술을 훔치던 그녀의 혀가 과감하게 내 입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방금 식사를 마치고 양치도 하지 않은 그녀의 혀가 내 입 속에서 능숙하게 놀아났고 목덜미를 끌어안은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이 내 가슴에 밀착 되었다. 그녀는 목덜미에 감고 있던 한손을 풀고는 천천히 가슴을 더듬으며 내려와 내 몸 특정부위를 애무했다. 나는 감탄했다. 그녀의 대담함 보다는 아직 내 몸의 기능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사실, 발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새벽녘에 한 번의 통증이 더 있었다.
통증의 빈도가 서서히 잦아진다. 몸에 적신호가 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무릉에 도착한 건 다음날 오후 두 시가 넘어서였다
울란바트르에서 무릉까지 가이드북에 있는 지도를 보니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 근 스무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래도 무릉까지 오는 길을 좋은 편이라고 했다. 몽고의 남서쪽 수흐바트라 아이막이나 북동쪽의 울랑곰까지는 차로 사흘이나 나흘이 걸린다고 했다.
무릉에서 흡스굴 호수까지 비수기에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차는 없다. 러시아 짚을 맞춰 타야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오늘 가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진태가 가르쳐 준대로 어디 여관을 잡고 하루 여독을 풀고 가리라고 맘을 먹고 게스트하우스나 여관을 찾을 요량으로 쟈르갈에게 여관을 좀 잡아달라고 했는데 그녀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물론 쟈르갈과 언어로는 통하지 않는다. 바디랭귀지와 가이드북을 동원해서 소통된 것이다.
나는 가타부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길잡이는 쟈르갈이다. 싫어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또 그녀의 집을 구경하고 싶었다. 몽고 사람들이 이 작은 읍에서 무얼 먹고 사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무릉 읍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푸르공은 읍내를 돌아다니며 승객들을 집집마다 내려주었다. 하긴 터미널은 따로 있겠지만 짐이 많은 까닭일 게다. 가는 길에 몇 명과 짐을 내려주고 쟈르갈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배낭 하나와 손에 들고 있는 여행 가이드북이 전부였지만 쟈르갈의 짐은 만만찮았다. 드렁크와 큰 종이박스 하나에 작은 박스 둘, 어린이용자전거 바퀴, 어느 구석에서 그렇게 나오는지 내리는 짐이 웬만한 승용차에 한차 분량이었다. 차 소리를 듣고 먼저 쪼르르 달려 나온 녀석이 쟈르갈의 아들 바트라였다. 열두 살이라 했다. 제 엄마 서울 다녀오는 길에 마중을 나온 것이다.
집은 통나무로 벽을 쌓고 지붕은 붉은 색 양철을 맞배로 얹는데 벽면 통나무 사이사이에 방한을 위해서 양털을 촘촘히 박아놓은 원룸형이었다. 집안에는 관절이 나쁘다는 그녀의 어머니가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중절모를 쓴 칠십대로 보이는 그의 아버지가 근엄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족히 촌장쯤은 지냈을 법한 풍모였다. 그분은 이방인에 대한 거리낌 없이 정중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집안 분위기 어디를 보아도 쟈르갈에게 남편은 없다. 쟈르갈에겐 좀 미안스런 이야기지만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좀 편안하게 했다. 몽고에서는 이렇게 딸과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몽고에서는 당연히 딸을 선호한다. 생남발원기도 같은 것은 아예 없다. 한국에도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핵가족으로 변하면서 며느리의 남편을 내 아들로 착각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은가.
쟈르갈은 집에 도착하자 곧 바로 밥을 했다, 나는 자르걀 아버지가 권하는 담배를 받아 피우며 그녀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감자복음에 당근을 썰어 넣고 양고기를 볶아서 또 밥을 두 공기 넣고 무슨 기름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몇 숟갈 붓고는 다시 볶아서 쟁반에 담아내어 놓았다. 중화요리집의 볶음밥과 비슷했다. 오늘 먹은 것이라곤 쵸코파이 두 개와 당근주스 하나가 전부였다. 물론 쟈르갈도 먹은 게 없다. 내가 건네준 초코파이 하나뿐이다. 둘이서 식탁에 앉자 자르걀의 아버지는 많이 먹으라는 말인지, 맛있게 먹으라는 말이지 모를 인사를 하고 나갔다.
밥을 먹기 바쁘게 그녀는 핸드백과 작은 가방을 챙기더니 가자고 했다. 어디를 가자는 말인지 의아해 하면서 배낭을 챙겨서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바트라 녀석은 마당에서 자전거 바퀴를 고치느라 우리를 쳐다볼 여념도 없이 제 엄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모양이다. 그녀는 흡스굴이라고 했다.
흡스굴? 이 시간에? 오후 세시가 넘었는데 그 먼 길을?
반문한 건 나였다. 그러다가 이내 감을 잡았다. 해가 떨어지려면 밤 열시가 넘는다. 해 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도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그곳에서 쟈르갈과 함께 자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섰다. 우려라기보다는 죽는 날까지 내 가슴에 묻어야 할 추억 하나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설렘이었다. 오늘은 무릉의 여관에서 혼자 자고 내일 쟈르갈이 차만 잡아주면 혼자 가서 사나흘 머물겠다는 계획이었다. 뭔가 꼬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나선 길이고 솔직히 그녀의 안내가 싫지는 않았다.
택시 승강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서 오 분정도 가니 러시아 짚과 한국산 엑셀이 와글거리는 택시 승강장이었다. 그녀는 이차 저차 기웃거리며 흥정을 하더니, 러시아 짚을 택했다. 가는데 두 시간이 걸리고 요금은 예상했던 대로 사 만 투그럭이란다. 쟈르갈과 나는 지프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차는 개울을 따라 생긴 비포장 자갈을, 못 가는 길이 없다는 러시아 짚답게 과감하게 속력을 내고 있었다. 차 꼬리를 따라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운전수는 오랜만에 횡재했다는 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핸들을 잡고 있었고 쟈르갈은 내 어깻죽지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운전수의 눈치를 봐가며 볼에 키스를 하곤 했다. 굶주린 야수가 따로 없었다. 근 두 시간 달리는 동안 우리는 뒷좌석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에게 모자라는 영어와 알 수 없는 러시아어 그리고 가이드북을 뒤적이는 몽고어, 그녀가 띄엄띄엄 하는 한국어로 종합해 보면 그녀는 러시아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마취학의사라는 것이다. 무릉에 마취를 할 만한 의료 기관이 의심스러웠다.
몽고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아마 경주의 금오산이나 삼척의 어느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발로 걸어 다닐 힘이 있을 적에 집을 자주 비워주는 게 집안을 살리는 길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아니, 내 몸이 명령한 행위였다. 이제부터는 나를 제외하고 덕용 씨와 아내가 함께 상의하고 중대결정을 내리는 일을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안다. 내 삶이 육 개월 남짓 남았다는 것을, 명줄이 더 연장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가는 자와 남아 있을 자가 공유하는 고통이지 삶이 아니다. 그런 여분이나 덤은 기꺼이 사양하고 싶다.
그 동안 어디든지 쏘다니고 싶었다.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경주 금오산,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지였다. 그곳은 벌써 십 년 저쪽에 딱 한 번 가보았는데 참 안락하고 좋았다. 진달래가 필 때쯤 한번 가야지가야지 했던 것이 차일피일 미루다 십 년이 훌쩍 넘었다. 두 번 수술 후에는 조급해졌다. 이상하게 그곳은 아늑하게 여겨졌다. 자다가 통증으로 깨어나 앉아 있어도 내 마음은 용장사지에 가 있었다.
몽고에서 돌아가면 그 곳으로 가 볼 계획이다. 그곳을 지나서 칠불암 계곡을 빠져 나가서 포항으로 들렀다가 모교에도 한 번 가보고, 그 교정에서 빛바랜 추억도 되새기고 연락이 닿는 동기 놈들도 좀 만난 뒤에, 동해선 열차를 타고 느긋하게 삼척으로 해서 중앙선으로 갈아타고 영동지역을 한 바퀴 돌아서 내려오고 싶다. 꼭 그렇게 한 바퀴 돌 것이다.
용장사지로 해서 한 열흘 정도 일정으로 돌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자장면 배달원에서 한식집 주인으로 변한 녀석으로부터 그 자장면집 주인에서 중화요리 레스토랑 사장으로 업그레이드된 작자에게 국제전화가 왔다. 물론 진태였다. 이 년 만에 걸려온 안부전화인데 나는 녀석을 잊고 있었다.
녀석은 전화 말미에 몽고에 놀러 한 번 오라는 지나가는 말을 했다. 나는 녀석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바로 다음날 몽고비자를 신청하고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몽고의 볼거리를 뒤적였다. 비자가 나온 다음에 아내에게 몽고를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디를 간다구요? 그 몸으로?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아내의 반대는 완강했다.
한번 죽지 두 번 죽느냐, 는 진부한 말로 아내에게 애원을 했다. 보내 달라고, 내 발로, 내 마음대로 걸을 힘이 있을 적에 좀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아내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항공권을 예약하고 녀석에게 국제전화를 해서 징기스칸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도록 했다.
녀석의 안부전화를 받은 지 딱 보름 만에 몽고행을 강행한 것이다.
녀석도 내가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고 국제전화를 받을 적에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녀석은 내가 불치라는 꼬리표가 달린 병을 지닌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항암제보다 혼자서 사유하고 삶의 진정성에 대해서 되짚어 볼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뒤져 몽고의 물정을 조금 알아보고 지체 없이 날아온 것이다.
여행 가방을 꾸리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러 가기 전에 나는 주방과 식당 종업원을 모두 불러 모았다. 물론 아내도 그 자리에 동참했다.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주방장 조씨’가 이젠 이 텐안먼의 어엿한 부사장이라고, 앞으로 ‘주방장님’이라 부르지 말고 ‘부사장님’이라 호칭을 바꾸라고 했다. 내가 수술하느라 진 빚이 있어 부사장에게 이 식당 반쪽을 팔았노라고 했다. 식당 아이들은 내 진지한 말에 수긍을 했고 덕용 씨와 아내만은 내 의중을 간과하고 있었다. 훌쩍거리는 아내의 등을 토닥여주고 식당 밖에서 기다리는 콜택시에 짐을 실었다.
사실이지 덕용 씨에게 일정 금액을 빌렸다.
질곡 없는 삶이 있으랴. 계속 지금처럼 장사가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이제 중학교 삼학년과 일학년인 진수와 진화가 자라 제 숟가락을 제 손으로 쥘 때까지 내리막을 타지 않으리라는 절대보장은 없다. 아내를 믿지만 차선책이 필요했다. 내 부재시 비상금의 적절한 안배가 필요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사흘 전에 덕용 씨에게 오천만원을 빌렸다. 그 금액은 덕용 씨의 발목을 잡는 덫이며 내가 살아서는 절대 갚지 않을 돈이다. 일테면 내 자리에 대한 권리금 같은 거였다. 그리고 적금을 중도 해약한 오천과 합쳐 일억을 만들어서 형님께 보관 시켰다. 만약에 아이들에게 큰일이 생기면 써달라고 했다. 형님은 돈더미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니가 이러지 않아도 내 조카는 내가 챙긴다. 니 뜻이 그렇고 맘이 편하다면 이 돈은 정기적금으로 보관하고 있겠노라, 고 말을 삼켰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늘 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형제만한 보험이 없는기라.’ 나는 콧물을 훌쩍이는 형님과 입술을 떨며 옆에 앉은 형수 앞에서 그 말을 인용했다. ‘형제만한 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끝에 덕용 씨와 아내의 관계가 진척시켜 부부의 연으로 맺어주겠다는 내 뜻을 밝혔다. 형님은 큼큼, 헛기침을 했고 형수는 자신의 시동생이 이렇게 속이 깊은 줄 몰랐다며 기어이 눈물을 찍어냈다. 나는 덕용 씨가 살아온 과정과 딸린 식솔이 없다는 것 그리고 마땅히 식당을 꾸려가고 식솔을 챙길 사람은 덕용 씨밖에 없다는 설명을 장황하게 했다.
제수씨의 사생활에 관한 일이라 입에 올리기 무안했던지 형님은 ‘그 사람은 나도 알지!, 라고 한마디만 하고 그 문제에 관한한 전적으로 나에게 맡긴다고 했다. 형수님은 내가 살아있을 적에 어디 조용한 데 절에 가서 식이라도 올려주는 게 어떠냐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것도 괜찮은 방법 중 하나다. 가까운 가족들을 초대해서 간단하게 식을 올려준다? 형수님의 말이 옳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형수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형님이 꽥 소리를 질렀다.
서방이 살아있는데 식을 올려? 제수씨가 그 자리에 옳다, 좋다구나, 하고 따라 나오겠어? 차라리 주례를 쟤보고 서라고 하지? 무슨 여자 소갈머리가 그래?
듣고 보니 형님 말도 옳다. 그렇게 하자고 아내에게 말했다간 겨우 육칠 개월 남은 명줄이 그날로 끝장 날 게다. 그리고 덕용 씨도 과연 그 자리에 과연 그 자리에 나타날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님 표현대로 말하자면, 소갈머리 없는 말을 입 밖에 뱉어놓고 무안해 하는 형수님께 화제를 돌려 말했다.
형수님! 저 다음 주에 몽고에 좀 다녀오려구요. 한 열흘 걸릴 겁니다. 그냥 좀 다니고 싶어서요. 옛날에 우리 집에 주방장 하던 진태라는 녀석이 그곳에서 한국식당을 하고 있는데 약보따리 챙겨서 좀 다녀오려구요.
고집 부리지 말고 병원을 좀 다니시지.......
형수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고 형님은 그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이 형님일 것이다. 내가 중국집가게를 임대로 시작해서 그 땅을 사고 일층짜리 적산가옥을 허물고 이층짜리 건물로 개축하여 중화요리레스토랑과 살림집을 꾸몄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내보다 형님이었다. 형님은 내가 등 비빌 언덕이었다. 나의 부재는 형님으로선 오른 팔을 잘라내는 것과 진배없겠지만 행정직 공무원으로 뼈가 굵은 형님은 내색하지 않았다.
형님에게 비상금 일억을 안배했다는 사실은 아내도 아이들도 모른다. 그 돈은 지금 형수의 이름으로 펀드가 되는 정기적금에 들어있다.
꼬리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린 러시아 짚은 한 시간 사십분 만에 흡스굴에 도착했다. 오후 네 시 반이었지만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휴양지라고 듣고 왔지만 철이 지나서 파장 분위기였다. 여름 캠프촌은 대부분은 문을 닫은 상태이고 상점 몇 군데만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여기에서 며칠 머문다는 건 실정을 모르고 잡았던 애당초 꿈이었다. 쟈르갈이 문을 열고 있는 캠프를 찾는다고 상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묻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켰다. 무릉에 도착하면 전화를 하라는 진태 말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켰으나 역시나 안테나 표시가 뜨지 않는 것이다. 한군데 문을 열고 있는 캠프를 찾아내고 그 곳까지 기다리는 짚을 타고 갔다. 대절한 짚의 기사는 친절했다. 십리가량 떨어진 그 캠프까지 군말 없이 태워다 주는 것이었다. 통나무로 만든 캠프는 유람선 선착장 부근에 있었다. 호수가 얼마나 큰지 우리나라 제주도 면적에 달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듯이 선착장에는 몇 천 톤은 될 법한 유람선이 두 대나 정박해 있었고 큰 배 사이에 작은 배들과 보트가 묶여있었다. 저 큰 배를 어떻게 여기까지 이동 시켰을까 궁금증이 일 정도였다.
내부 구조가 게르형으로 둥근 통나무 캠프 안에는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안락해 보여 다소 맘이 놓였다. 짐을 풀고 나오니 철늦은 관광객이 찾아온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열대여섯 남짓 되어 보이는 몽고 소년이 말 세 필을 끌고 왔다. 물론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영업용이다. 하나는 제가 타고 두 필은 고비를 잡고 끌고 온 것이다. 아무래도 상점에서 캠프를 찾을 적에 우리를 엿보고 따라 온 모양이다. 쟈르갈은 싫다고 했지만 이곳까지 따라온 성의를 생각해서 말을 타자고 하며 돈부터 지불했다.
쟈르갈은 말 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말과 마주보고 서서 고비를 잡고 한 쪽 발을 안장 발판에 끼워 넣더니 순식간에 몸을 휙 돌려 안장에 앉는 것이었다. 나는 소년의 부축을 받으며 억지로 말 등에 올라가긴 했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출발시켜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쟈르갈이 말을 돌려 다가오더니 내 말의 고비를 잡았다. 그리곤 안장의 손잡이를 잡고 등을 꼿꼿이 세우라고 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자 그녀는 말의 뱃가죽을 차며 호숫가로 이끌었다. 말에서 내린 소년은 캠프 앞에 서서 미더운 눈초리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내가 탄 말은 쟈르갈의 말이 달리면 같이 뛰고 천천히 걸으면 속도를 늦추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목동이 까만 점으로 보일 만큼 멀리 갔다. 쟈르갈은 말을 호숫가의 초원을 가로질러 얕은 물가에까지 끌고 들어갔다. 흡스굴 호수의 물은 맑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투명했다. 말 뱃가죽에 물이 닿을 깊이까지 들어갔는데도 물속의 바닥이 보였다. 흡스굴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염되지 않은 호수라고 알고 왔다.
차탕족이라고 했다.
이 호숫가 어디에 차탕족이 살고 있을 것이다. 사슴을 키우면 살아가는 소수 민족이다. 나는 인터넷을 뒤적이다 읽었다. '차'는 사슴을, '탕'은 민족을 의미한다. 따라서 차탕이라는 말은 사슴에 의존해 사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이제 숫자가 얼마 남지 않은 민족이지만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소수민족이다. 이들의 생활에서 사슴은 필수 불가결한 동물이다. 사슴이 생활의 모든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슴을 보살피는 것은 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과이며 이동할 때도 사슴을 타고 다닌다. 또 식량으로 사슴 고기와 젖을 먹고 사슴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사슴뿔은 말 그대로 녹용으로, 약으로 쓴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이들이 의존해 사는 사슴의 숫자가 최근 들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탕족은 원래 고산지대에 사는 사슴의 특성을 좇아 계절이 바뀌면 사슴을 따라 이동하며 살아간다. 여름에는 서늘한 산 위로 올라가는 사슴을 따라 고산지역으로 이동한다. 여름에 고산지역은 날씨가 서늘하고 파리도 적은 데다 이끼도 풍부해 사슴을 기르기에는 최적이기 때문이다.
내 짧은 지식으로 아는 차탕족을 생각하며 그들이 살고 있을 이 호수에 울창한 산을 훑어보며 그들을 찾아가 따라다니며 빌붙어 살다가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쟈르갈이 내가 탄 말의 고삐를 자기 말로 바짝 당겼다. 물은 말의 뱃가죽 바로 아래까지 차 있어 우리의 발이 물에 닿을 정도의 깊이였다.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배를 탄 기분이었다. 두 마리의 말 뱃가죽이 나란히 붙자 쟈르갈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우리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고 얌전하게 서 있었다. 물론 쟈르갈이 고삐를 단단히 쥐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까닭도 있지만,
쟈르갈은 내 입술을 한손으로 쓰다듬고는 가볍게 키스를 했다. 마상의 키스! 외설 잡지에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을 우리는 연출하고 있었다. 키스를 하며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는 남자가 그리웠던가 아니면 사랑에 굶주린 여자라는 동물이었다. 어제와는 달리 그녀의 입술은 매혹적이며 달콤했다.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도 사랑의 행위는 이렇게 소통된다, 호수 저 멀리 까만 점으로 보이는 목동은 우리의 키스를 알고 있을까? 말을 빌려 타는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아쉽지만 가볍게 키스를 하고 왔던 길을 되짚었다.
목동에게 말을 돌려주고 나니 이번에는 보트 영업을 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꼭 타야 하는 것처럼 막무가내였다. 쟈르갈이 싫다고 하자 그는 얼마를 깎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비수기라 그런지 정해진 값은 없고 모든 게 흥정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흥정을 하는 동안 나는 노란색 보트로 올라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다. 타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흡스굴에 온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맑고 넓은 호수 멀리 수평선 너머까지 가서 호수 중간에서 풍광 좋은 산천을 구경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세상을 향해 내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고함으로 뱉어내고 싶어 찾은 것인데 쟈르갈은 내 목적을 모를 것이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말 탄 놈과 고삐를 잡은 놈의 눈높이는 분명히 다른 법이거늘 그녀가 내 눈 높이, 아니 내 심정을 알 턱이 없다.
호수에서 수평선을 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흡스굴에서는 가능했다. 이 호수는 정확히 제주도 면적이 된다. 몽고 사람들은 흡스굴을 호수라고 부르지 않고 흡스굴 달라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달라이’는 바다라는 뜻이다. 그 정도의 규모이니 수평선이 존재할 수밖에,
내가 보트에 올라 구명조끼를 걸치는 것으로 흥정은 금방 끝이 났다. 모터보트를 한 시간 타는 것으로, 그녀도 흔들거리는 보트로 조심스레 올라와 구명조끼를 걸치고 내 옆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나는 허리띠에 차고 있던 카메라를 꺼내 연신 호숫가의 풍경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풍경이다. 물론 구명조끼를 입은 쟈르갈도 호수를 배경으로 몇 컷을 찍었다. 물살을 가르며 한 이십분 달렸을 때 키를 잡은 몽고 청년에게 보트를 세우라고 손짓을 했다. 한 바퀴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내려던 보트 주인은 무슨 영문인지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 보트를 세우고 원동기의 시동을 껐다. 달리던 관성에 의해서 잔잔히 밀려가는 보트 아래는 깊이가 이삼십 미터는 족할 터인데 바닥이 훤하게 보였다. 그 맑음을 온 몸으로 받고 싶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물속을 몇 컷 찍었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보트 주인에게 넘겨주고 구명조끼를 벗었다. 쟈르갈에게도 꼬질꼬질 때가 묻은 구명조끼를 벗기고 어깨동무를 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보트주인은 우리를 향해 앵글각도를 달리하며 몇 번의 셔터를 눌러댔다. 사진 찍기가 끝나자 쟈르갈이 말했다.
솔롱고스 도, 도다레!
솔롱고스가 한국이라는 말은 알아듣겠는데 그 다음 말이 무근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모르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썩하자. 그녀는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는 시늉을 하며 도다레! 아따땅 아따땅이라고 했다. 들어보니 아리랑 가락이었다. 지난밤 회심곡 뒤에 들은 아리랑, 그 가락을 기억한 모양이다. 그 아리랑을 부르라는 말이 틀림없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한 소절 불러보며 이 노래를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쟈르갈을 향해 모션을 잡아가며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아~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울컥 목이 메었다. 무엇을 향해 살아왔는가?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무슨 목적을 향해 끝없이 날개짓을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목을 가다듬고 아리랑을 다시 불렀다. ‘쟈르갈’은 몽고어로 ‘행복’이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쟈르갈의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부르고 또 불렀다. 내가 부르는 아리랑 가락에 스스로 도취되어 가고 있었다. 구성지게 아리랑을 고개를 넘어가는데 눈에서 뜨끈한 무엇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신고 있는 이 운동화가 다 닳을 때까지만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일었다. 느닷없는 게릴라성 욕구였다.
나는 그 욕망을 달래며 아리랑을 불렀다. 내가 이렇게 구성지게 아리랑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단 한 명의 청중을 향해 아리랑을, 아리랑을 부르는데 왜 아내가 떠오를까? 이제는 넘겨주어야 할 아내의 얼굴이 스쳐갔다, 내 볼은 더욱 뜨거워 졌다.
그치지 않고 반복해서 불렀다. 똑 같은 가락의 아리랑을, 쟈르갈은 턱을 괴고 뱃전에 앉아 묵묵히 노래를 듣고 있었다, 왜 울면서 부르는지 영문도 모르고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나비가 되고 있었다. 너울너울 나도 모르게 날개짓을, 아니,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 속으로, 그 구성진 가락 속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쟈르갈의 아리랑, 행복의 아리랑이었다. 날개짓을 하며 부르는 동안 눈물은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