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기간 동안 계속 잠에 들었다.
하루에 3시간 정도만 깨어 있고 계속 수면상태였으니, 겉으로 보면 혼수상태 비스무레하게 며칠을 보냈다.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치 영화 <인셉션>의 ‘꿈 중독자’들마냥, 잠/꿈의 세상만이 살길인 것처럼, 비수면 상태가 아닌 수면상태 내에서의 의식의 활성화 가능성만을 찾고 있었다. 각성해 있는 세상은 가짜이고, 잠들어 있는 세상이 진짜인 것처럼, 마치 깨어있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정신을 차리면 화장실에 갔다가 물만 먹고 다시 잠에 빠져들어갔다. 수면제를 먹을 때도 이렇게 길고도 깊게 잠에 들었던 기억이 없었기에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의아한 마음이 들었고, 연휴가 끝날 무렵, 내 상태가 과다수면 상태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물론, 이 과다수면은 우울증의 초입에서 보이는 증상임도 자연스럽게 상기하게 되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니, ‘우울증’이라는 표현보다는 ‘무기’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있어(?)는 보이겠으나, 우울증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이런 증상들이 상기병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수행과정의 증상이 아니라, 과거에 겪었던 우울증의 재발임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더 효과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울타리>수행을 통해서 한동안 우울감이나 무력감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올 것이 또 왔다는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회사에 나가서 시무식을 마치자마자 오랜만에 정신과에 가서 우울증 약을 처방 받는 방향을 고민해 보았다가, 약을 처방 받기 전에 가볍게 생활을 환기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해볼 수 있는 일들(적절한 식사, 산책, 대면관계 등등)을 우선 해 보고, 그 모든 일에 막힘이 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때가서 병원에 가봐도 늦지 않으니 마음을 느슨하게 먹기로 했다.
지난 20여년간, 여러 증상들을 앓으면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스스로 알아차릴 정도의 힘은 생긴 것 같다. 특히, 20대 중반 30대 초반에 몹시 고생했던 거식증 증상은, 15년 정도 이어오던 채식을 작년말에 완전히 내려놓으면서 재발가능성이 없어졌음을 스스로 확인하기까지 했으니, 큰 변화라면 변화를 경험한 한 해였다. 이제 우울증의 경미한 흔적이 머리를 들고 나타났으니, 이 또한 어떤 식으로든 당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수행 이전과는 달리, 내 우울감의 인과를 더 면밀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기에, 조금 더 단단한 모습으로 내 상태를 파악해 보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나’라는 허구적 실체가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고 있음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사랑 받고 인정받는 딸’이라는 미신적인 캐릭터로 자아를 설정한 뒤 그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에 평생 목숨을 걸고 살았는데, 작년 말에 몇몇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이제는 누구 혹은 무엇의 ‘딸’로서 기동해 볼 수 있는 연한(이라고 쓴고, 유통기한이라고 해석한다)을 다 하였음을, 다시 말해, ‘완벽한 딸’이라는 미신을 이제는 어쩔 도리 없이 상실할 시점이 도래하였음을 너무도 뒤늦게 발견하였다. 나의 미신적 캐릭터가 스스로를 고박해 볼 수 있는 정위의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종의 정체성/자아 ‘상실’의 위기로서 발생하게 되자, “거부당한 리비도가 대상을 향하지 못하고 퇴행하여 자아를 파괴하려는” 에너지로 변형된 채 내 삶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그 혼돈스러운 에너지는 곧 이어 등장할 우울반추와 불안예기의 전조증상이나 다름없는 ‘과다수면’이라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내 생활에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유아기의 이상적 자아를 대상에게 투사시킨 대상이 연인이다. 이차적 나르시시즘 때문에 자아는 대상과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고 만약 대상에게 거부를 당하면 리비도가 자아를 향해 이동한다. 자아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면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학대한다. 애도는 대상 리비도이다. 즉 리비도는 잠깐 자아에 머물지만, 곧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대상에게 리비도를 투사한다. 그러나 우울증은 거부당한 리비도가 대상을 향하지 못하고 퇴행하여 자아를 파괴하려는 죽음충동이다. 자아비난, 타인공격, 방화, 혁명, 자살, 타살은 자아와 대상을 구별하지못하는 거울단계의 특성이다. 거울단계의 공격성이 나타나는 것이 우울증인데 이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소유와 상관이 없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이 나르시시즘이 강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 흔히 나타난다고 말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30480&cid=60657&categoryId=60657
‘완벽한 딸’이라는 미신적인 캐릭터와 이제는 결별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네가 더 유능하고, 더 똑똑하지 않으면, 너를 내 딸로 품어주지 않을 것"이라며,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일들"이라 엄포를 놓으면서 무의식 속에서마저 나를 감시하고 자극했던 모든 초자아로서의 아비들과 이제는 단호하게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라, 내 초자아로서의 물리적인 아비들은 이제 더러 고인이 되셨거나, 나의 도움이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금노인이 되셨건만, 내 무의식 속의 초자아-아비들은 여전히 젊고 강하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이제 내 의식 속 메타인지의 힘이, 왜곡된 무의식의 기억을 크게 놓아 줄 시점이 도래한 것 뿐이었다. ‘완벽한 딸’을 강요하는 아비들이 이 세상 안에도, 밖에도 더는 남아 있지 않음을, 내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증상이 이제 끝이 날 참이었다. 그런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완벽한 딸’이라는 미신의 굴레의 원재료와 동력이 되었던 모든 인연들 그리고 기억들과 막상 헤어지려니, 서러운 마음이 너무도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과 더불어 남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면, 나는 이 상실감을 잘 애도하여 ‘좋은 곳’으로 보내주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49재나 천도재의 목적이, 사라져버린 망자를 위함이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의 애도를 돕기 위함이듯, 나도 내 모든 초자아-아비들에 대한 상실감을 잘 갈무리해야 하는, 나름의 애도의 단계에 들어선 셈이었다.
초자아-아비들과, 그리고 그들의 '완벽한 딸' 노릇과 헤어질 결심을 하면서 2024년을 시작한다.
‘완벽한 딸’이라는 미신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아니, ‘누군가의 딸’이라는, 아니, ‘누군가의 무엇’이라는 미신에서 크게 풀려나기 위해서, 올 한해 차근차근 걸어가야 할 길들이 저만치서 보인다. 누구의 위로도 받을 수 없을 것이기에, 쓰린 가슴을 품은 채 쓸쓸히 걸어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허나, 더는 미신의 속박에 묶여 살 수가 없기에, 나는 이 헤어질 결심을 매섭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 모래 속으로 저 홀로 소리 없이 사라져간, 영화 <헤어질 결심> 속 서래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단단한 안도감의 기반 위해서 나만의 버전의 헤어질 결심을, 폴 발레리의 목소리를 빌어, 부러 이렇게 드러내 보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