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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羅勳兒 | |
본명 | 최홍기 (崔弘基) |
출생 | 1947년 2월 11일 (73세)[2] |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동 415[3] (現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221번길 33[4]) | |
본관 | 해주 최씨 |
신체 | 175cm[5], 71kg, B형 |
가족 | 슬하 1남 1녀, 사촌동생 나진기[6] |
학력 | 부산 초량초등학교 (졸업) 부산 대동중학교 (졸업)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졸업) |
병역 | 공군 병장 만기전역 (231기)[7] |
데뷔 | 1968년 노래 "내 사랑"[8] |
1. 개요
1.1. 나이
4.1. 1970년대4.2. 1980년대4.3. 1990년대4.4. 2000년대4.5. 2010년대4.6. 2020년대
대한민국의 가수로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이다. 트로트 보컬로 주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데,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로트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1966년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다는데 데뷔년도를 빨리 올리기 위한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물 음반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실물 레코딩 노래는 1968년 8월 16일 내 사랑이 확인된다. 천리길은 1969년 5월 29일 발표되었다. 2020년 KBS에서 진행한 콘서트 준비를 하며 본인이 데뷔 54년 가수 생활이라고 언급 한 것을 보아 본인은 1966년 데뷔를 확실시 하는 듯.
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라고 한다.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년,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남진의 해당 발언이 담긴 최일구의 허리케인 라디오에 달린 나이 관련 내용을 조사한 댓글이 있다. 아래는 해당 댓글과 관련 증언들을 언급 기사들과 함께 정리한 것.
그냥 일반인 증언도 아니고 허구연, 이목일 등의 같은 시절 중학교를 다닌 사람, 고등학교 동창 그것도 같은 반 친구되는 양반들의 직접적인 증언과 조용필 등의 발언을 종합할 때 1951년생 말고는 달리 언급 할 방도가 없다. 특히 이희수 감독이 1948년생인데 도저히 1947년생이 맞을 수가 없다. 1945년생인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를 위해서라도 47년생까지는 끌어올리는 것이 당시엔 이득이었을 것이고.
다만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워낙에 높아 죽지 않고 2~3년 크는 거 보고나서 호적에 올리는 일도 흔해서 당장 부모님 세대에는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사람이 드물지 않다. 입학통지서도 당연히 호적에 등록한 날짜를 기준으로 오며, 학원스포츠에서는 나이도 굉장히 중요한데 결과적으로 프로가 되지 못한 나훈아가 빼어난 유격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나이 빨도 있었으리란 추측도 가능하고...
뭐 여튼, 실제 나이는 나훈아 본인만이 알 것이다.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트레이드마크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달리 나훈아의 노래는 가수가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노래로 유명한데,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보면 자칫하면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나훈아의 창법은 엄청나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9]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일례로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는데 이중에서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 (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 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당시 땡벌을 부르는 나훈아 방송 영상)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 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무대 연출능력을 꼽을 수 있다.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다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 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오빠부대, 요즘은 빠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많았던 인기 가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2010년대인 현재에도 트로트 가수 인기순위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다. 2008년 기자회견 후 잠적. 11년만에 복귀하여 2017년 하반기 본격적으로 공연을 시작하였다. 현재 다시 성인가요 시장의 불을 지폈다.
1966년 데뷔 이후에 7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1972년 6월4일 밤 서울 태평로 시민회관(현 서울시의회 건물) 공연에 나섰다 갑작스레 뛰어든 괴한으로부터 왼쪽 얼굴에 깨진 사이다병으로 테러를 당했다.# 70 바늘을 넘게 얼굴 왼쪽 뺨을 꿰메서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개인사 문단 참조. 본인도 방송이나 공연에서 자주 언급하는 큰 사건이다.22분 50초 증언
1973년 7월 비밀리에 공군 병사로 자원 입대, 군악대에서 복무하였다.
군 복무 당시의 모습
1980년 초반대에는 나훈아씨가 세번째 부인이었던 정수경 씨와 혼인하여 가정생활을 하였고.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노래를 작사작곡하였다. 그 후 87, 88, 89년도 무시로, 갈무리 등을 발표하며 히트를 쳤고 방송사에 얼굴을 가끔씩 비췄다,
1987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이 안타까워 망자의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노래 '엄니'를 직접 작사작곡했다. 나훈아는 곡을 쓴 다음 광주시 망월동 5.18 묘역(현재 구묘역)에 참배하고 '엄니' 테이프 2,000개를 광주 MBC 방송국을 통해 제작 후 5.18 유족들에게 배포하려고 했지만, 정권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 '엄니'는 결국 33년이 지난 2020년에야 발표되었다.[17]
1993년 당시 남진은 '내 영혼의 히로인' 등을 히트시키며 또 한번 주목을 받았으며, 나훈아는 '갈무리',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등 히트곡들을 내고 꾸준한 몸관리와 공연 등이 알려지면서 그 이후로도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게 꾸준히 어필이 된 듯. 방송 출연이 없어서 그렇지 어르신들 사이에서 나훈아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런 차이는 남진은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워낙에 많은 방송 출연과 공개 활동으로 이미지가 일찍 소비된 반면에, 나훈아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신비주의 전략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지상파 TV에선 매년 명절 때마다 나훈아를 모시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2000년대 이후로 또 다시 둘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는데, 남진의 경우 1999년 '둥지', 2005년 '저리가', 2008년 '나야 나'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면서 꾸준한 활동을 했다.
나훈아는 간헐적인 콘서트(나훈아 빅콘서트라는 명칭으로 전국 순회 공연)외에는 방송출연 등의 연예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생활을 반복했다. 이후 2006년의 순회 콘서트가 2007년 3월 예정된 단독 콘서트 취소로 마지막 공연이 되었고, 이후 유명한 인터뷰 사건 이후로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2008년 야쿠자 테러설 기자회견과 2013년 이혼 소송과 투병이 알려지면서 심경이 복잡한 듯. 나훈아가 2008년 이후 칩거에 들어간 반면 남진은 2008~2010년에 걸쳐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각종 방송에 출연하며 1970년대 당시의 라이벌 구도에 대한 증언 역시 남진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리되었고, 굳어지게 되었다. 나훈아는 계속 칩거하면서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덕분에 나훈아 팬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2008년 기자회견에서 격한 퍼포먼스가 세월이 지나서도 계속 패러디되고 있었다.
11년만의 공백기를 깨고 2017년 7월 16일 앨범 "Dream Again"으로 컴백했다. 그동안 나훈아 앨범은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번 신곡 앨범은 7월 17일 12시부터 온라인에서 노래를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튜브에서 타이틀곡인 “남자의 인생”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영상
2017년 11월 3일부터 11월 5일, 총 3일간 서울 올림픽공원 內 올림픽홀에서 단독(게스트無) 공연을 선보인다.
2017.12.15 ~ 2017.12.17 대구 EXCO 컨벤션홀, 2017.11.24 ~ 2017.11.26 부산 벡스코오디토리움에서 공연이 차례로 이어질 예정이다. 티켓예매는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고 전 티켓이 7~10분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사재기를 해서 되파는 사람들을 적발해 티켓을 회수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는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며 재판매를 하기도 했다.
공연시간은 120분. 서울 공연 첫 날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아무런 말 없이 10곡 넘게 노래만 부르던 나훈아는 ’에끼 이사람이’ 무대 뒤 비로소 관객들에게 직접 인삿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하다. 미안한 마음은 구석에 놔두고 얼굴을 두껍게 하고 공연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팬들이 환호로 위로를 하자 나훈아는 “노래를 11년 굶었다”며 “계속하자 하면 밤새도록 노래할 준비가 돼 있다” 고 전했다.
이어 “그동안 지구 다섯 바퀴를 돌았다. 미국에서는 한국 라디오에 ‘사나이 눈물’이 흘러나와 울기도 했다”고 밝혔다. 나훈아는 “우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나이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관련기사3
컴백과 동시에, 그동안 음원사이트에서 서비스되지 않았던 음반들[18]이 서비스되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발표한 인기곡인 "고장난 벽시계", "홍시", "모르고" 등의 곡들을 음원사이트에서 내려받을 수 있게 되어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2017년 서울, 대구, 부산 콘서트의 대흥행으로 2018년에는 20개도시 전국투어를 추가로 개최했다. 2019년엔 5월부터 투어를 돌게 되는데 이번에도 부모님을 위한 자식들의 예매 전쟁이 불꽃을 튀기며 전개되었고, 결국 5월 공연분 3만장이 8분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2017년 | |||||
날짜 | 도시 | 국가 | 장소 | 기타 | |
11월 3일 | 서울 | 대한민국 | 올림픽 홀 | ||
11월 4일 | |||||
11월 5일 | |||||
11월 24일 | 부산 | 벡스코 오디토리움 | |||
11월 25일 | |||||
11월 26일 | |||||
12월 15일 | 대구 | 엑스코 컨벤션 홀 | |||
12월 16일 | |||||
12월 17일 | |||||
2018년 | |||||
3월 23일 | 서울 | 대한민국 | 올림픽 홀 | ||
3월 24일 | |||||
3월 25일 | |||||
3월 31일 | 청주 | 청주대 석우문화체육관 | 1일 2회공연 | ||
4월 13일 | 부산 | 벡스코 오디토리움 | |||
4월 14일 | |||||
4월 15일 | |||||
4월 20일 | 대구 | 엑스코 컨벤션 홀 | |||
4월 21일 | |||||
4월 22일 | |||||
4월 28일 | 전주 | 전주 실내체육관 | 1일 2회공연 | ||
5월 5일 | 울산 | 동천체육관 | 1일 2회공연 | ||
5월 12일 | 인천 | 삼산월드체육관 | 1일 2회공연 | ||
5월 19일 | 원주 | 원주 종합체육관 | 1일 2회공연 | ||
5월 26일 | 대전 | 무역전시관 | 1일 2회공연 | ||
7월 7일 | 창원 | 창원체육관 | 1일 2회공연 | ||
7월 14일 | 천안 | 유관순체육관 | 1일 2회공연 | ||
7월 21일 | 고양 | 고양체육관 | 1일 2회공연 | ||
7월 28일 | 양산 | 양산종합운동장 | 1일 2회공연 | ||
10월 13일 | 광주 | 광주여대 유니버시아드 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0월 27일 | 강릉 | 강릉 아이스아레나 | 1일 2회공연 | ||
11월 10일 | 안동 | 안동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1월 24일 | 진주 | 진주실내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2월 8일 | 제주 | 국제컨벤션센터 | 1일 2회공연 | ||
2019년 | |||||
5월 17일 | 서울 | 대한민국 |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 ||
5월 18일 | |||||
5월 19일 | |||||
6월 8일 | 부산 | 벡스코 오디토리움 | 1일 2회공연 | ||
6월 9일 | |||||
6월 15일 | 대구 | 엑스코 컨벤션 홀 | |||
6월 16일 | |||||
6월 29일 | 청주 | 청주대 석우문화체육관 | 1일 2회공연 | ||
7월 6일 | 울산 | 동천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0월 12일 | 강릉 | 강릉아이스아레나 | 1일 2회공연 | ||
10월 19일 | 광주 | 광주여대 유니버시아드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1월 9일 | 천안 | 천안 유관순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1월 16일 | 안동 | 안동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1월 23일 | 창원 | 창원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1월 30일 | 제주 | 제주컨벤션센터 | 1일 2회공연 | ||
12월 1일 | |||||
12월 13일 | 서울 | 올림픽체조경기장 | |||
12월 14일 | |||||
12월 15일 | |||||
12월 21일 | 진주 | 진주실내체육관 | 1일 2회공연 | ||
12월 28일 | 인천 | 인천남동체육관 | 1일 2회공연 |
2019년 5월 3일에는 새로운 앨범 "벗2" 를 발표했다. 2005년 발표한 40주년 기념앨범인 "벗"의 후속 개념으로, 1곡을 제외하고 모두 다른 작곡가가 쓴 곡으로 채운 앨범이다.
2019년 5월 17일부터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3일 무대를 시작으로 전국투어 콘서트를 가진다.
여담으로 이 서울 콘서트의 둘째날인 5월 18일 공연의 진행이 후배이자 인기 아이돌 그룹인 여자친구의 콘서트 첫날 타임과 완전히 겹치며 귀갓길 올림픽공원역과 몽촌토성역, 그리고 일대 도로에 큰 혼잡이 벌어졌다. 그만큼 나훈아의 팬덤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2020년 8월 20일 새 앨범 ‘2020 나훈아의 아홉 이야기’를 발표했다. 신보 '나훈아 아홉이야기'에는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 '명자!', '테스형!'[19], '딱 한 번 인생', '웬수', '감사',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모란동백', '엄니'까지 총 9곡이 수록되었다.
MVㅣ나훈아 - 테스형!ㅣ2020 신곡 아홉 이야기 |
2020년 9월 23일 저녁 7시 30분에 인생 최초의 비대면 공연을 개최했다.[20]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마련된 콘서트로, 이 공연은 9월 30일 KBS 2TV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통해 전국으로 송출되면서 15년 만에 TV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과거 여러 언론 매체에서 잘못된 루머를 퍼뜨려 큰 홍역을 치른 적이 있어 언론사들을 매우 불신임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다시는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언급한 적도 있어서 그에게 있어서 큰 도전인 셈이다.[21] 게다가 KBS 측으로부터 출연료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과거 기자회견 이후 다소 안 좋아진 대중적인 이미지도 많이 회복할 듯하다.[22]
방송 당시 올레TV 점유율이 70%를 넘겼고 # 닐슨코리아 기준 실시간 순간 시청률 41.44%를 기록했다. #1 #2 #3 #4[23] 특히나 나훈아를 그냥 옛날 가수나 '5분간'으로만 알고 있던 젊은층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선사하며 온라인상에서 엄청난 화제에 올랐다. 이처럼 예상을 초월한 반응을 얻자 KBS는 재방송은 없을 것이라는 기존의 방침을 뒤집고 10월 3일에 8개월간의 공연 준비 과정과 공연 이후 KBS 제2본부장의 나훈아와의 인터뷰를 추가로 담아 재방송했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이 신비주의라는게 가당치도 않다고 일축했다. 예술적 창작력이 고갈되었다 느껴서 영감을 얻기 위해 11년 간 세계를 떠돈 것을 가지고 은둔한다 그러고, 또 신곡 앨범을 만드는 데 짧게는 반년 길면 1년은 걸리는데 작업한다고 안 보이면 잠적했다 그러고, 심지어 요새는 뇌경색이니 못걷는다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왔는데 자신이 건강해서 얼굴을 못들 정도라고 언론을 향한 불만을 익살맞게 표현했다.
공연 도중 IMF 외환위기, 코로나 사태 등을 언급하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력을 칭송하기도 했다.
그리고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동고동락했던 KBS에게 격려의 말을 남겼다.
한편 이 KBS도 이날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지, 화려한 CG 등 엄청나게 고퀄리티 연출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비싼 티켓값을 아깝게 만드는 발로 만든 CG를 선보이고 중간 광고까지 끼워넣은 <SBS 슈퍼콘서트 2020 SUPER ON:TACT>는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두 사람의 팬덤도 갈라져 있었다.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들이 여럿 있었다.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투박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노래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의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25]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어서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26] 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의 매우 부유한[27] 집안이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 치워라'라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80년대 칼럼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 작사를 한 나훈아는 가수,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 되어서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BTS, 이승환[28], 한국시리즈 7차전[29] 급으로 티켓 예매하기 어려우며, 아들 딸 전부 동원해서 예매를 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것은 활동노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30]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반면 남진은 가요프로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다.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가수로서의 각자의 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나훈아는 '저 하늘 위의 별'로서 본인을 포지셔닝한 반면 남진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친구'를 지향했다.[31] 누가 맞고 틀린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진 가수로서의 가치관이 다른 것.
기타[편집]
[1]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2] 프로필상의 생년월일이다. 그러나 실제 나이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나이 문단 참고.[3] 7통 3반[4] 이마트24 동구초량점이 있는 건물이다.[5] 1982년 동아일보 신상명세서 #[6] 가수로, 본명은 최진기다.[7] 공군본부 직할 군악대에서 복무했다.[8] 나이와 마찬가지로 1966년 '천리길' 데뷔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역시 아니다. 역시 후술.[9] 그리고 이 창법은 가수 본인의 동작도 한몫 하는데, 특정 동작에서 꺾기가 가장 잘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10] UDT/SEAL65기의 기수가로 사용되었다.[11] 손석우 작사, 유현석 작곡.[12] 손석우 작사, 유현석 작곡.[13] 지금은 남국인 작사·김영광 작곡으로 돼있지만 발표당시는 손석 작사·작곡이었다.[14] 최근 자신이 부른 노래 중 테스형의 후렴구 부분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테스형의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이 부분은 가라지의 후렴구인 "너 괴롭고 나 괴로운 것을! 넌 넌 왜 모르니" 이라 하는 부분과 유사하다.[15] 이 노래 역시 가라지처럼 신곡 테스형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테스형의 "어쩌다가 한번쯤 턱빠지게 웃었다" 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고향으로 가는 배의 도입부인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와 비슷하다.[16] '진기'와 '오서방'을 보디가드로 불렀는데, 진기는 사촌동생 나진기, 오서방은 오재미이다.[17] 2020년에 발매된 앨범 속지에 나훈아가 이에 대한 글을 직접 작성해놓았다[18] 주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중반에 발매된 음반들[19] '테스'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나훈아가 소크라테스를 친근하게 생각하면서 줄인 별칭이면서, 곡중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는 별칭이다. #.[20] 원래는 정상적인 콘서트였으나, 8월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어서 KBS홀에서 비대면 공연을 하는 것으로 급변경되었다.[21] 그 동안 큰 비난없이 가왕 대접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 언론에 의해 잘못된 루머가 퍼지고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조롱과 비난거리가 된 상황이었다. 당연히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 기자회견 이후 수 년 동안 방송 출연은커녕 공연조차도 하지 않았었다.[22] 나훈아의 팬들이 아닌 대부분에게는 기자회견과 부인과의 이혼 관련 문제가 이미지에 많이 남아있던 게 사실이다. 이혼의 경우 부인에게 미국 법원에서 승인한 이혼을 취소해와야 한국에서 이혼을 해 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이미지를 많이 깎아먹었다. "5분간 보여드리겠습니다." 로 대표되는 기자회견의 경우 회견 당시에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었을지 모르지만 이후 여러 곳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꽤 오랜 기간 조롱거리가 되었다. 물론 회복한 이후로는 공연 등으로 팬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면서 팬덤은 확실히 커지고 공고화되어 특별히 손해가 가지는 않았다.[23] 닐슨 전국 기준으로는 29.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 동시간대 방송한 KBS 1TV 드라마 '기막힌 유산'은 6% 가량 하락했고, SBS 트롯신이 떴다는 3.2%로 전주 대비 10% 가까이 크게 떨어졌다.[24] 유관순은 열사, 윤봉길과 안중근은 의사가 맞다. 열사부분의 자막은 의사로 표기되었다. 또, 예전에는 유관순 열사를 누나라고 배웠지만 올바른 명칭은 열사이다.[25] 이는 남진의 대표곡인 '님과 함께'가 도시보다 님과 함께하는 농촌이 더 좋다는 내용이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26] 사실 나훈아 집안도 이미지만큼 서민적인 집안은 아니었고 어느정도 사는 집안이었다. 다만 그래도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던 남진 집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27]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씨는 곡물 정미회사, 언론사 등을 경영한 기업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도 지냈던 인사였다. 남진의 회고에 따르면 한 때 전라남도 전체에 개인 자가용이 두 대 있었는데 하나는 전남도지사를 위한 전남도청 것, 하나는 김문옥씨 것이었다고.[28] 이승환, 공연 종합매출 순위 ‘5위’ 기록…“공연계 레전드”(스포츠한국)[29] PO 5차전 명승부가 불지핀 열풍, KS 7차전까지 매진(스포츠조선)[30] 물론 나훈아가 2020년 KBS 공연에서도 밝혔지만, 무작정 고의적으로 그렇게 가기보다는 신곡 하나 만드는데 상당한 공을 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31] 요즘 가요계 식으로 보자면 코어팬덤형 아이돌과 대중형 아이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32] 당시에는 LP판을 취입하는 데에 당시 돈으로 6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야 했다. 국민주택이 20만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 지금으로 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거액인 셈이다.[33] 일부 기레기들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김혜수 혹은 김선아라는 식으로 언질을 줬다. 이 때문에 나훈아는 후술할 기자회견에서 이 둘의 성명을 직접 언급하며 자살을 안 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늬앙스를 풍기는 일갈로써 기자들의 보도 작태를 강하게 질타했다.[34] 백은하, 차우진의 발언이 인용된 기사에서 나오듯 아이비(가수)도 이런 식으로 무대응하는 바람에 장기 활동 중단이 되기도 했다.[35]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보통 가수들은 이건희의 생일 때 초청되어 노래를 2~3곡 정도 부르고 3000만원 정도 받아간다고 한다. 이건희의 위상으로 봤을 때 오히려 불러준 연예인이 영광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나훈아가 엄청나게 대단한 거다. 사실 다른 가수들도 나훈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단지 자본과 언론, 방송 등 각종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우니 그런 것. 다른 가수들도 나훈아처럼 어마어마한 팬덤이 형성 되어 있고 경륜과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굳이 갈 필요는 없다. 유명 가수 기준(아무나 부르진 않을테니...) 3천만원 오히려 거의 거마비만 받는 수준이다. 쉽게 말해 아쉬울게 없으면 안가도 된다.[36] 조용필은 1991년 13집의 '꿈'을 끝으로 방송 출연을 하지 않아 신비주의 이미지가 있었지만,# 2018년 50주년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는 여러 이벤트를 열었다. 세대통합 조용필 VS 신비주의 나훈아 이런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37] '김혜수의 플러스 유'에서 나훈아 본인이 말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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