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과 토성산성(吐城山城)에서 일어났던 참상(慘狀)
1,머리말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에는 해발 108 m의 산위 정상에는 350m둘레의 옛 성터(城址)가 있다. 이 성(城)은 테뫼식으로 축조된 산성(山城)으로 내부에서는 고식(古式)의 무문조문계(無紋條文系)의 와편(瓦片)이 산재되어 있으며 백제(百濟)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부터 축조된 성(城)으로 추정 된다. 이 산성에서 백제 때에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어떠한 전투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고려때 이 지역으로 침입해온 왜구들을 남김없이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고 최근세인 1894년 갑오농민운동 당시에 이곳에서 수 많은 우리 주민들이 비참하게 생명을 잃는 참사(慘事)가 일어나는 비극이 있었기에 이러한 일은 다시는 없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글을 쓰는 것이다. 이글의 내용은 1894년 농민운동당시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바있는 『조석헌일기』『난사유고』『문장준일기』『순무선봉진등록』, 그리고『추담별집』과 전해오는 이야기 등을 기초로 해서 쓰는 것이다.
2, 1894년의 동학농민 혁명 당시 토성산성에서의 참상
① 태안지방에 동학의 전파
태안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90년이었다. 서산 지곡면(地谷面) 장현리(長賢里)에서 사는 최형순(崔亨淳)은 1890년 3월 16일에 동학 제2교조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을 방문하고 동학에 입도 하였다. 곧 바로 최형순은 충청도 전역을 무대로 하고, 주로 서산 태안지역을 중심으로 동학 교리를 포교하니 뜻밖에도 호응이 좋았다. 자기 집에서 건너다보이는 태안 이원면 포지리와 원북면 방갈리를 오가며 전교를 하여 동학의 뿌리를 내리는 토양을 마련하는 게기가 되었다. 이 무렵 1893년(癸巳) 2월 초순경에 상암(湘菴) 박희인(朴熙寅)이 그릇장수로 변장하여 가시내(開市浦)에 들어와서 조운삼(曺雲三)을 입도 시키고, 다시 갈머리 마을에 들어가서 문장준(文章竣)과 문장로(文章魯) 문구석(文龜錫) 부자를 입도 시켰다, 그리고 조석헌(曺錫憲)은 그 다음 해인 1894년에 박희인의 권유에 의하여 동학에 입도하고 그해 5월에 태안접주로 피임되었다.
태안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이래, 급성장한 교세는 대부분 농민들이 동학에 입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림을 받아 지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태안 지역의 동학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왕성했던 이유는 특히 태안 지역에서도 원북면 방갈리 및 근흥면 수룡리와 이원면 포지리가 교세가 강했다. 그 이유는 지리적 조건과 신망 있는 지도자 등 여러 가지 여건이 좌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이미 최형순에 의하여 입도한 동학교도와 이어 박희인에 의해 입도한 교도들이 합세하여 방갈리의 동학세력은 날로 확산되어갔다. 그리고 갈머리(葛頭里) 문구석의 집과 가시내 조문필(曺文必)의 집에서 교도들이 비밀리에 모여 동학 교리를 박희인으로 부터 직접 강의를 받았고, 또 수룡리 문동하(文東夏)집에서도 교육을 실시함으로서 그 효과가 더욱 커져서 나날이 그 세력이 확대 되어 군내 전역으로 그 교세가 불과 2. 3년 동안에 큰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조석헌, 문장준, 문동하의 역할이 돋보였다.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예포(禮包=에산지방의 포)와 덕포(德包=더산지방의 포) 소속 북접 동학교도들은 예산․덕산을 중심으로 당진․홍성․서산․태안 등지에서 동학도소(東學道所)를 설치하고 기세를 떨치자 이 지역의 수많은 민중들도 자진해서 다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합류하였다.
이 무렵 태안관아에서 일하던 김엽춘(金葉春) 이방(吏房)이 태안관아에서 10月 1日에 동학 지도자 처형 계획을 동학 접주에게 알렸다. 바로 이 소식을 접한 동학의 지도자는 곧 바로 예포대도소(禮包大都所)에 치보(馳報)하였다. 9월 29일 늦게 태안 동학교도들에게 법소로부터 훈시문이 당도하였다. 빨리 기포하여 살길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이 때 태안부사(泰安府使) 신백희(申百熙)와 별유사(別諭使) 김경제(金慶濟=태안출신으로 문과급제 후 홍문관교리로 있었음)는 동학교도들을 강제로 귀화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동학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고자 지도급 인사들을 모두 체포하여 처단하기로 하고 동학교도 지도자 30여 명의 접주와 간부들을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에 태안관아에서 모두 처형하기로 하였다. 이무렵 태안지역은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다른 지방보다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거의 모든 관직이 물건처럼 가격을 정하여 돈이나 재물을 받고 매관매직 하던 시대였다. 수령은 2∼3만 냥이었고 관찰사(觀察使)는 100만냥으로 사고 팔았다고 한다. 관직은 내직보다는 보다는 지역을 담당하는 목부군수인 수령이 더 비쌌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방의수령이 되면 백성들에게서 수탈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공공연하게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여 매관매직(賣官賣職)하고,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벼슬을 얻기 위하여 그 동안 상납했던 본전을 보충하기 위하여 양반들과 공모하여 무고한 농민들을 애매모호한 죄목을 씌워 옥에 가두고 토지와 재물을 갈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일년 농사지어야 겨우 소작료를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춘궁기에 비싼 장리쌀을 얻어다 먹으며, 지주들은 흉년이 들어도 소작료를 그대로 받고, 소작인과의 금전거래에도 고리대금으로 고혈을 빨아 먹었다. 이렇게 인권이 유린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하여 고통 받는 농민들의 참담한 현실은 참아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특히 1893년에는 태안부사 신백희는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과 공모 속전(贖錢)이라는 세목으로 태안관내의 동학교도들로부터 6만6천냥을 강제 징수하는 등 가진 횡포를 부렸다. 이와 같이 동학교도와 농민을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관리들의 수탈이 농민을 전면적 봉기로 몰아넣었다. 당시 고관대작이라는 권귀(權貴)들은 민중을 오직 착취대상으로 간주하여 치부에 눈이 먼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나 은퇴한 양반 및 양식 있는 선비들과 농민들은 관리들의 횡포와 특히 토호(土豪)들의 발호(跋扈)에 심한 굴욕감을 느끼고, 국정의 혼란과 극에 달한 지배세력의 부패를 보며 대응준비를 하고 기회만 있으면 후천개벽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를 걸고 있었다. 동학은 도처에서 전파되어 활동했으며 농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종지인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그러므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事人如天)”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 평등 사상이었다.
② 농민혁명군이 태안군아(泰安郡衙)의 접수
농민들은 이때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억압 받고 핍박을 받으며 살아온 민초들이 총궐기하여 잘못된 정치와 사회구조를 바로 잡으려 했던 순수한 농민혁명이었다.… 내포(內浦)지역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起包地)는 근흥면 수룡리에 있는 토성산성(吐城山城)과 원북면 방갈리 (현:태안화력발전소 부지), 그리고 남면과 안면도 등지이다. 동학농민군들이 1894년 9월 그믐날 토성산성에 거점을 두고 집결하였다. 화순(和順) 접주 문동하(文東夏)가 동경대전 교리강의를 하면서 살기 좋고 복된 나라를 만들어 자손만대에 물려주자고 역설하였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라는 주문을 선창하자, 이에 동학교도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주문을 복창하니 산천이 진동하고 사기가 충천했다. 그 다음 이순화(李順夏) 접주가 대중 앞에 나서더니 아래와 같은 격문을 읽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곳 까지 이른 것은 그 본의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나라를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놓자는 것이요.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를 축출하고, 밖으로는 광폭한 강적의 무리를 제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작은 벼슬아치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이렇게 격문을 읽자, 여기에 모인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징과 북을 치며 대나무 끝에 동학의 깃발을 꽂아 놓고 동학농민군들은 함성을 울렸다. 신석제(申錫濟)접주를 기수로 정하고 총지휘는 김양권(金良權)과 박성천(朴性天)이 맡았고, 문동하(文東夏)․김철제(金哲濟)․김환제(金煥濟)․김용근(金鎔根)․김용정(金容定)․박성묵(朴性黙)․김치근(金致根)․박봉래(朴奉來)․김한길(金漢吉)․이순하(李順夏)등 지도급 인사가 군량미와 무기관리의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이때 한용이(韓容履) 접주는 철마산(鐵馬山)에서 기포한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리고 토성산성에 도착하여 이곳 동학농민군과 합류하고, 근서면(近西面), 안흥면(安興面), 원일면(遠一面), 원이면(遠二面), 소근면(所斤面) 등지에서 출병한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작전계획을 세우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태안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 때 태안읍 삭선리(陣坪)에 도착하니 이미 원북면 방갈리에서 기포한 장성국(張聖國)․문장로(文章魯)․문장준(文章竣)․안인묵(安仁黙)․김군집(金君執)․조석헌(曺錫憲) 접주 등 수 많은 동학도들이 징과 북을 치며 장대 끝에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광제창생(廣濟蒼生)의 깃발을 꽂아 놓고 함성을 울렸다. 이곳에서 토성산성에서 출정한 병력과 합류하니 수만 여명이 큰 군사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여기서 작전계획을 세우고 대오를 편성하고, 태안관아를 향하여 전진했다. 날이 밝아올 여명 10월 1일 태안군아를 에워싼 동학농민군들은 태안군 관아에 투옥된 동학 두목 30여명을 처형 직전에 무사히 구출하고, 관아에서 태안부사 신백희와 별유사 김경제를 결박하여 경이정(憬夷亭) 아래에서 타살하였다. 이렇게 삽시간 운명이 바뀌고 그 동안 농민의 고혈을 빨고 가렴주구를 하던 포악한 관료의 학대에 그 원한이 쌓이고 누적되어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태안성이 함락되어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급보를 접한 홍주목(洪州牧)에서 영병(營兵) 5백여 명이 급파되어 태안성을 수복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폭정에 시달리고 기아선상에서 고통 받던 백성들의 민심을 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 후 관군과 일본군이 난리를 평정한다는 구실로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비인도적인 악행을 자행하였다. 또한 동학의 두목은 물론 일반 교도와 동학인의 가족들에게도 잔인한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고 심지어 집에 불을 지르고 동학과 무관한 농민까지도 가리지 않고 잡히는 대로 살해했다. 얼마나 가혹했던지 토성산성에서 다섯 사람을 한데 묶어 이엉으로 말아서 불을 지르는가 하면, 세 사람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③ 제2차 태안에서 농민군 기포(起包)
이 참혹한 수모를 참다못해 일반 동학인과 농민들은 다시 일어나 싸우지 않으면 살길이 없고, 또한 이 길만이 후회를 남기지 않은 길이니 다시 일어나자고 부르짖었다. 이에 동의한 동학농민군들은 경이정에 모여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드디어 10월 15일 태안에서 다시 기포하기에 이르렀다.… 10월 24일 당진 면천(沔川)의 승전곡(勝戰谷)전투와 10월 26일 예산 신례원(觀爵里)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10월 28日에 홍주성 전투까지 참전했다가 패전하고 11월7일 해미성 전투와 그 다음 날인 8일 최후의 매현(梅峴)전투에서 완전패퇴 하였다.
④ 토성산성에서 최종의 참극(慘劇)
할 수 없이 동학농민군들은 태안 백화산(白華山)에서 항전하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성(吐城山城)으로 숨어들었다. 이에 때를 놓칠세라 하고, 관군과 일본군들은 동학농민군의 뿌리를 뽑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자를 철저히 색출하는데 주력했다. 기진맥진한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붙잡아다가 총 개머리로 머리를 내리쳐 잔인하게 죽이고 머리를 잘라서 산 아래로 내던져 밑에서 머리를 주어다가 창에 꿰어 들고 다니거나, 집 추녀에 매달려 놓았다. 또는 산 사람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토성산성은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사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 ‘아이고 어머니 나 죽는다.’ 울부짖는 소리,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소리와 총소리가 요란하게 진동하고 화약 냄새와 죽은 시체에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글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이 참상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눈을 뜨고 차마 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이 토성산성에서 유회군과 관군의 첩자가 된 자의 밀고에 의하여 동학농민군들이 거의 체포되어 11월 16일 살을 에는 혹한 속에 화순리(和順里)김철제․김환제를 비롯하여 김용근․김용정 형제와 마금동(磨金洞) 박성천․박성묵 형제 등이 토성산성의 형장으로 끌려가 작두(斫刀)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섯 사람 모두가 ‘동짓달 보름날’에 제삿날이고, 김양권은 구사일생으로 가의도(賈誼島)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환제․김용근․박성천․신석제 등이 거주하던 가옥은 일본군과 관군들이 불태워 버리고 양곡과 가축을 잡아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날 아침에 일본군이 토성산성에서 근흥면 안기리(雲洞) 박봉래(朴奉來) 5형제를 함께 묶어 산채로 이엉으로 둘러 싸매고 불태워 화형(火刑)에 처하고 한구덩이에 매장했다고 하며, 오후에는 이곳에서 근흥면 안기리 김한길(金漢吉) 3형제를 한데 묵어 산채로 생매장했다고 한다. 이 토성산성에서 동학농민군이 얼마나 처형을 당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그 당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 했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적어도 수 천명의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백화산에서 숨어서 끝가지 항전하다가 이곳으로 피신한 동학농민군중 이 지역사람이 주로 많겠지만 당진․예산․홍성․서산 사람들도 많이 처형당했다고 전한다. 그 해 동짓달 중순경 김기훈(金基訓.重錫의父:근흥면 수룡리353번지) 사랑방에 관군과 일본군 10여명이 주둔하여 그 집 창고에 동학농민군을 구금하고 형의 경중에 따라 토성산성에서 모두 총살하거나 창으로 찔러 죽이고, 혹은 작두로 목을 자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목을 잘라다가 이집 추녀 끝에 나란히 매달기도 하고, 접장(接長) 백장호(白長好)는 화로(火爐)불에 달군 인두로 이마에 대고 낙인(烙印)을 찍는 형벌을 받았다. 이 때 동학농민군의 북부대장 이치봉(李致奉)은 토성산성에서 작두로 참수되여 효수경중(梟首警衆)이라는 형벌로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고 이곳에서 50여리나 되는 원북면 방갈리까지 행진했다고 한다.
이 토성산성에서 죽은 수많은 시체는 머리와 몸이 각각 분리되어 누구의 시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체가 썩어 악취가 나서 이 산 부근을 지나지 못했다 하며 해마다 봄이 되면 이 시체 덤이 사이에서 나오는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고 전한다. 관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유회군과 양반의 행패가 너무 심하여 겨우 살아남은 유족들은 남부여대하고 정든 고향을 떠났고, 일부 남아 있는 유족들은 심지어 교육 받을 기회 마자 박탈다고 한다. 그 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동학인들이 화순리 마을을 내왕하면서 활발하게 포교 활동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석헌일기(曺錫憲日記)에 의하면 “무신년(戊申年:1908年) 음 8월 24일(양 9월 19일) 토요일 날씨 오전 8시까지 가랑비가 내리고, 10시에 갬. 오전 11시에 김수암(金秀菴), 김용세(金容世)가 화변(禾邊)으로부터 내도하여 같이 점심을 먹고, 7인이 동행하여 태안군 흥인(興仁:仁坪里)마을 김상휘(金商暉)씨 집에 갔으나 저녁에 교인(敎人)이 별로 오지 않았다. 음 8월 25일(양 9월 20일) 일요일 날씨, 가는 가랑비가 계속 내리다가 오전 8시에 그치더라. 오전 7시에 교인(敎人) 4인이 왔기에 이야기하고 오전 9시에 경암장(慶菴長) 김수암(金秀菴), 이연암(李然菴) 4인이 태안읍 홍기춘(洪奇春) 집으로 출발하여, 근서면(近西面) 신동(新洞:斗也里) 이순하(李順夏)씨 집에서 점심을 먹고, 화순리(和順里:水龍里) 문동하(文東夏)집에 도착하여 저녁에 일반 교인 10 여명이 내회(來會)하여 이야기하며, 규모(規模)를 설명하고 조직하다.” ………… “10월 18일 일요일 날씨 맑음. 오전 10시에 일반인이 회집(會集)하여 강화회(降話會)를 설행(設行)하고, 점심식사 후 문상암(文庠菴)은 태안 북촌(北村)으로 들여보내고, 이연암(李然菴)과 함께 태안 신동(新洞) 이순하(李順夏)씨 집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 후 씨와 궁사리(弓射里:水龍里) 문동하(文東夏)씨 집에 도착하여 일반 교우(敎友) 10여인이 회집(會集)하여 공시(公示)와 규칙(規則)과 교리(敎理)를 설명하다.” 이 신동(新洞)이란 마을은 태안에 인접하여 관아(官衙)의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다하여 신동이라 하고, 화순리(和順里)는 기름진 옥토와 인심이 좋았다고 하여 화순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학 접주들이 태안군의 중심부인 태안읍을 거쳐 신동 이순하씨 집에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에는 화순리 문동하 집에 도착하여 저녁에 일반 교인을 모아 놓고 동학 교리도 설명하고, 교도들에게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는 등 조직을 했다고 한다. 이 문헌에 나타난 것만 봐도 화순리 문동하씨 집에 동학의 거점을 두고 활발하게 포교 활동한 것 같고, 그리고 이 마을 토성산성은 동학농민군이 많은 희생자를 내고 태안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집결했던 곳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영원한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옮겨가고 변해 간다. 마치 강물이 제자리에 고여 있지 않듯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만 봐도 세월이 무상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고 세월의 무상(無常)함과 인생이 덧없음을 탄식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 자연의 질서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세간의 현상 즉 일체사물이 모두 일종의 흐름이다. 모든 것은 영원한 흐름 속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물의 흐름이나 불이 타는 순간에도 변화하는 중에 있는 것과 같다. 자연계나 인간계나 간에 무상하고 변화가 끝이 없지만, 범부들은 무상한 면을 상주(常住)하는 것처럼 보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음으로, 본인도 모르게 고통과 죄악의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을 깨닫지 못하고 세속의 부귀영화 허상에 사로잡힌 부패한 집권세력이 나라와 백성들은 안중에 없었다. 그들의 주구가 된 관군은 침략자 일본군의 힘을 빌려 토성산성에서 천인공노할 참혹한 살인극을 벌렸다. 이 토성산은 글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벌어졌던 것이다. 살벌하고 피비린내 나던 옛 비극의 현장, 오랜 풍상을 거치면서 이 자리에는 소나무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참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토성산성은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和順)에 있고, 군사 요충지로 백제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산성에서 신화 같은 전설을 지닌 비극적인 옛 이야기들이 지금도 구전되어 동네사람들이 실화처럼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⑤ 현 토성산성의 정황과 중요 동학신도들의 삶의 개황
토성산의 전체 면적은 약 6萬여평이고 정상의 평탄지에 돌로 축조된 산성이 있다. 고려 말에 고려군과 왜구(倭寇)와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이 벌어져 수많은 왜구들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다. 이렇게 무주고혼이 된 왜구들의 원귀가 비오는 날 밤에는 괴성을 지른다하며 시산혈해가 되어 성벽의 돌에 피가 맺혀 있어 붉은 문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 토성산성에서 수많은 왜군(倭軍)을 상대로 7일 동안 혈투가 벌어졌는데, 이 토성산성 바로 아래 성골(城谷)에 왜군을 유인하여 많은 왜군을 일망타진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한 토막의 설화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토성산성 내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토기와 도기류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선조문 계통의 와편과 토기편은 유약이 발라져 있는 두꺼운 회청색 경질도기 경부편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도 토성산성의 봄은 여전히 아름답고 황홀하게 눈부시다. 그래서 토성춘초(吐城春草)라 한다. 이 토성산의 정경은 시인 묵객들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매화 같은 꽃이 먼저 피기는 하지만, 개화의 지표로 삼는 꽃은 대개 진달래와 개나리다. 이들 첫 꽃소식이 춘분이 지나면 피고 다음에 피는 산 벚꽃은 열흘 정도가 넘어 핀다. 토성산성 아래 동네 마을 화순리(水龍里)는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다. 이 마을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 대왕산(大旺山)이 있다. 마을 앞 맞은편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은 남쪽의 전막산(戰幕山)이 병풍처럼 감싸고, 대왕산맥 한 줄기가 의연히 침강했다. 다시 앞으로 솟아 이어진 아담하고 아늑한 토성산이 형성되었다. 이 토성산성에서 멀리 남서쪽으로 서해와 지령산(知靈山)을 조망할 수 있고, 서북쪽으로 멀리 철마산(鐵馬山)이 보인다. 이 화순리 마을은 경치가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거기에 농토가 비옥하고 인심 좋은 고장이다. 화순 마을을 노래한 詩가 있다. “산 이름은 대왕이니 높은 선비가 나고, 동네 이름은 화순이니 성정이 바르고, 복스러운 사람이 살더라.” (山號大旺高士出, 洞名和順吉人居) 이 시는 화순 마을에서 우거(寓居)하시던 시인이며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한 성리학자인 우송(又松) 이광복(李光馥:1875〜1951) 선생께서 이 산에 올라 대왕산을 바라보고, 동네를 내려 다 보면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시를 지금도 입춘 날에는 대문에 써 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수룡팔경(水龍八景: 大旺朝日. 弓射暮煙. 吐城春草. 東山秋月. 戰幕暮雲. 登垈漁火. 干瀉落雁. 鐵馬北嘶)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 산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울려 무성하게 자라고, 교목(喬木)으로는 소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와 같은 참나무 류가 현저하게 많고 관목(灌木)은 철쭉, 진달래 등이 혼생하고 있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이어 철축꽃과 연산홍이 피어 온통 산을 눈부시게 물 드릴 때, 서로 뒤질세라 꾀꼬리와 종달새가 부지런히 봄을 노래하고 또한 달 밝은 밤이면 두견새가 구슬피 운다. 이렇게 토성산성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대미문의 살인극이 벌어졌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118년 지난 지금도 아비규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당시 집권세력은 동족을 살생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불러 들였다.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나라에겐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아닌가, 일본군은 과거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를 괴롭히던 왜구(倭寇)의 후손이며, 조선 선조때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폐허가 되었던 역사도 까맣게 잊었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역사적으로 불공대천지 원수인 왜놈의 군대를 시켜 동족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게 하는가,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고 포악한 위정자들이였다. 자칭 동방예의지국이요 백의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외세를 불러들려 동족을 살생했다는 사실은 우리 배달민족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내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업설(業說)은 인과업보론(因果業報論)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란 행위의 선악(善惡)에 대한 결과를 후에 받게 된다는 말로 흔히 죄 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쓰이는 용어인데, 불교철학의 핵심사상 중 하나인 윤회(輪廻)의 작동원리이자 그것의 원동력이 되는 업보(業報)와 연관되어 있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은 전생(前生)에서 지은 죄에 따라 내생(來生)의 외모나 고난 등이 결정되는데 이것이 곧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인간은 자신을 철저하게 절제함과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하여야 하며 또한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인과응보는 불교윤리의 기본이 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등, 자세히 말하면 내 몸이나 나의 주위 환경이나 나의 성장과 함께 나타나는 온갖 생활 여건들은 그 일차적 원인이 자신의 업에 있다 할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일이 생기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일이 생긴다. 우리들 자신과 환경을 만든 주인공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리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행위의 끝남과 함께 없어지는 듯 보여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종자(種子)로서 성장하여 반드시 그 결과를 부르게 된다.…… 토성산성 부근에 고명한 유학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글을 조금 한다고 거드름을 피우고 농부나 상놈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전란 중에 무고한 양민을 고자질하여 많은 사람을 입으로 죽였다. 그는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에서 살생부를 만들어 참형할 자와 훈방할 자를 분류하여 관군과 유회군(儒會軍)에게 제공했다. 그의 악업(惡業)은 내생(來生)에 받지 않고 현생(現生)에 받는 순현업(順現業)을 받아 그의 말로는 비참하게 비명횡사했다. 이 관군 앞잡이는 마지막 황천 길 가는 동학농민군에게는 남바위를 쓰고 죽는 권리마저 박탈했다. 이 슬픈 일화 한 토막을 적어볼까 한다. 동학접주 김철제가 토성산성 형장으로 끌려갈 때, 동짓달 열엿새 날은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다. 김철제 접주는 그 동안 태안성 점령에 이어 홍주성전투에서 싸우다 패전하고 백화산에서 항전하다가 집에 숨어 있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기진맥진한 채로 사형장인 토성산성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집에서 잡혀 나올 때 날씨가 몹시 추워 남바위를 쓰고 있었다. 관군의 첩자(諜者)인 유학자가 말하기를「죽으러 가는 놈이 뭇은 남바위를 쓰고 가느냐,」며 앞을 가로 막고 손수 그 남바위를 뺏었다. 그 당시 그는 태안지방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모씨는 유학자로 참수당한 동학접주 김철제의 이종사촌(姨從四寸)형이었다. 이 유학자는 토성산성의 참극이 끝난 후 그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토성산성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의 목을 작두로 자르는 꿈을 꾸었다. 동학농민군들은 눈을 부릅뜨고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얼른거리고, 사형장으로 가던 이종 아우 김철제가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타나서 이 못된 놈 너의 밀고로 내가 억울하게 죽었다, 내 남바위를 돌려 달라, 이놈아 네 가족 한 놈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잡아먹겠다고 이를 부드득 갈며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여 유학자의 얼굴에 내 품는 것이었다. 이렇게 5년 동안이나 악몽에 시달리다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자가 되어 결국은 엄동설한 한 밤중에 나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며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밖으로 띄어 나가서 시궁창에 코를 박고 얼어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관군의 첩자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밀고하여 입으로 지은 구업(口業)으로 인한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그의 후손들도 한국전쟁 때 부역하더니 밤중에 해변에서 비참하게 죽고 패가망신하고 가족들은 풍비박산했다고 한다. 또 이런 일이 있는데, 토성산성 이웃 동네에 성품이 포악한 관군의 첩자가 한 사람 있었다. 동학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집을 일일이 탐방하여 그 첩보를 관군에게 제공하여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색출 하는데 협력했다. 그 뒤 3년 후에 전신이 썩어 들어가는 문둥병에 걸리고 5년 동안 신경쇠약으로 밤마다 저 놈의 동학농민군 잡아라, 소리를 지르고 괴상한 말을 하며 백주에도 벌거벗고 알몸으로 띄어 다니다가 무더운 여름철 냇가에서 익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일치인지는 몰라도 태안지방에서 관군으로 복무했거나 자진하여 유회군에 들어가 동학농민군 학살에 가담하거나, 앞잡이로 활약한 자들의 말로는 비참했고 그 후손까지도 참혹하게 죽거나 대부분 절손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인과 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 하여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고 한다.… 토성산성에서 참수 당한 동학농민군 중 네 사람의 행장과 일화를 적어 볼까 한다.
가) 김용근(金鎔根:1869〜1894) 접주는 아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하여 같은 또래 중에서도 항상 촉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일아 본다.’(將善之木,子葉可辨)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김용근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학문에 정진하더니 마침내 약관에 경서를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재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더욱 분발하였다. 바로 이때 은밀히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동학의 교리를 잘 살펴보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평등사상, 그리고 보국안민의 애국애족의 정신에 감화되었다. 이에 그는 동학이야말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기름길 임을 깨닫고, 즉시 동학에 입도하고 접주에 피임되었다. 그 후 근흥면과 소원면에 포교하여 많은 입도자를 확보하는 등 열렬히 포교활동을 하다 갑오년 9월 그믐날 이곳 토성산성에서 자기 동생인 김용정과 이웃 친구인 김철제 김환재 형제 그리고 김양권, 박성천, 이순하, 신석제 등 지도자와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을 모아 놓고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는 탄관오리를 몰아내고 국정을 바로 잡아서 백성들이 편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역설하니 여기 모인 대중들이 징과 북을 치며 앞 다투어 그 날 밤에 진벌(陣坪:삭선리)로 행진했다. 여기서 원북 방갈리와 안면도 등지에서 모인 많은 동학농민군과 합류하고 그 이튿날 아침 10월1일 태안성을 점령했다. 그 뒤 승전곡 전투와 신례원의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서 패전하고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와 신진도의 외가댁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16일 관군에 체포되어 이곳 토성산성에서 작두로 참수를 당했다. 이로써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꽃다운 나이 25세에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치고도 자기가 자는 침실에「金鎔根 神位」란 위패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궤연(几筵)에 상식(上食)을 올리며, 무려 40년 동안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인을 동네 사람들은「우는 할머니」라고 부르고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열녀문을 세우려다가 일제의 앞잡이의 밀고로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베일에 가려진 보기 드문 열녀(烈女)가 있었다고 하니 그 얼마나 원통하고 철천지한이기에 그토록 통곡했는지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리고 접주 김용근은 재산이 많았으나 관료와 양반들이 몰수하고 살던 집 마자 일본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어 지금까지 집터에 불탄 흔적과 검은 재(灰)가 있다고 한다.
나) 박성천(朴性天:1861〜1894)은 근흥면 마금리에서 살았는데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는 집안의 양반집 큰 아들로 태어났다. 박성천의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옥동자가 백학(白鶴)을 타고 내려오더니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나서, 한 해를 보내고 화창한 어느 봄날 아침에 남아를 분만했다고 한다. 이렇게 현몽하여 태어난 박성천은 훤칠한 키에 고아한 풍채와 인자한 모습이 돋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퍽 머리가 총명했다. 그의 집 사랑방에 독선생을 모시고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렇게 몇 해를 두고 학문을 배우는 동안 글에 대한 문리를 얻었다. 통감(通鑑)과 사략(史略)을 배우고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읽고, 열두 살에 서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고 통달하니 마금동 인근에서 신동이 출현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어려서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말 타기를 좋아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일찍 함박눈이 많이 내렸다. 그는 설중에도 아랑곳 않고 백마를 타고 소원 철마산으로 달려가다가 장재(令田里)에서 낙마하여 정신을 잃고 눈 속에 쓰러졌는데, 이 때 백마는 큰 소리로 울었다. 이 백마 울음소리에 이곳 장재 사람들이 몰려 와서 그를 눈 속에서 구했다고 하여 생명을 건진 명마(名馬)로 애지중지하게 사육했다고 한다. 그는 한번 마음먹고 공부에 전념하니 날이 갈수록 학문의 실력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불었다. 태안관아에서 통지가 왔는데, 며칠 뒤에 한양에서 과거시험이 있다하니 너 한번 과거시험이나 치러보라고 아들에게 권했다. 이에 박상천은 아버지 권고를 받고 곧 바로 노자(路資)를 마련하여 의관을 정제하고 백마를 타고 한양을 향하여 과거시험 길에 올랐다. 아산(牙山)과 평택(平澤)을 거치며 과천(果川)에 이르러 객사(客舍)에서 여독(旅毒)을 풀었다. 밤은 깊었는데, 옆방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났다. “…누가 의롭지 않은데 쓸 수 있으며 누가 착하지 않은데 가질 수 있겠는가, 나의 몸이 위태롭고 죽음에 처해도 나의 초심을 돌아보고 오히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도끼 구멍 헤아리지 않고 자루 맞추어 진실로 옛 현인은 저해(菹醢) 당했다. 거듭 흐느끼고 울적해하며 나는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한다. 부드러운 혜초(蕙草)를 가지고 눈물을 닦지만 눈물이 흘러 옷깃 젖네.” 자세히 들으니 이소경(離騷經)을 읽는 소리인데 나이가 든 노인 같은데, 이 노인도 아마 억울하게 누명으로 삭탈관직 당하고 이 글을 읽으며 울분을 삭이면서 자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소경은 중국의 초(楚)나라 사람인 굴원(屈原)이 지은 글인데, 간신의 모함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난 울분을 글로 지은 것으로 이소(離騷)는 근심을 만났다는 뜻으로 중국의 문학과 문장은 북쪽의 시경체(詩經體)와 남쪽의 초사체(楚辭體)가 중심이 되어 발달하는데 남쪽의 초사체의 원조가 바로 굴원의 이소경이다. 그러므로 이소경은 중국의 악부(樂府)문학과 문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글이다. 중국 최고의 충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굴원이 지은 이소경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읽고 스스로를 수양하는 지침서로 삼았다. 이 글귀를 음미하면서 나도 벼슬을 하면 언젠가는 모함에 걸려 초나라 굴원의 신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박성천은 서울로 올라가서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다음 해에 복시(覆試)에 합격하였다. 3년 뒤에 무과(武科) 벼슬시험에 급제 병마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가 초나라 굴원처럼 간신배들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놓고 훈학하였다. 한 두 해를 지나 태안부사로부터 박성천은 좌수(座首)로 임명되어 약자와 빈한한 사람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병마절제사를 지냈어도 동네 사람들은 박좌수라고 불었다. 그런데 박좌수의 이웃에 가난한 머슴살이 젊은 全서방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이웃동네에 사는 양반의 아들 崔라는 유생(儒生)이 全서방의 아내를 간음하여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全서방은 崔라는 유생을 태안관아에 고소했으나 태안관아에서는 오리려 全서방을 잡아다가 양반을 모함했다고 옥에 가두었다. 이 때 박좌수가 급히 태안관아에 가서 태안부사와 면담하고 구속된 全서방을 석방시켰다. 그 당시 못난 사람을 미모의 여인을 데리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이 유린되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의 횡포가 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임 관사(官仕)가 부임하면 여러 가지의 예물을 바치도록 하였고, 무고한 양민을 밀고하여 불효죄(不孝罪), 불목죄(不睦罪)또는 상피죄(相避罪) 등의 죄목으로 금전을 뜯어내고 또 농민들에게 가결전(加結錢)이니 가호전(加戶錢)이니 하며 여러 가지 세금명목으로 착취했다. 상놈이 토지가 많으면 양반들과 관리(官吏)와 짜고, 엉터리없는 죄명으로 옥에 가두고 주리(周牢)를 틀고 고문하여 강제로 자백을 받고 재산을 뺏어갔다. 이렇게 토색(討索)질을 당하고 보니 상놈은 많은 농토를 소유할 수 없고, 결국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소유권도 박탈당하고 가난에 시달려도 어디에 호소할 곳 없는 무법천지였다. 박좌수는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를 보면 자기가 손해를 보는 한 있더라도 약자의 편에서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었다. 박좌수의 아버지는 젊어서 초시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농사짓고 살았다. 박좌수는 집안 살림이 넉넉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여 제법 태안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집안이었다. 맹상군(孟嘗君)이 식객이 삼천이라는 고사가 있듯이 그의 집은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박좌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흉년이 들면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무상으로 양곡을 나누어 주고, 논밭이 헐값에 나오면 절대로 땅을 사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한다. 그 후 박좌수의 형제는 아버지 유언대로 빈곤한 사람을 돕고 흉년에 매물로 나오는 토지는 절대로 헐값에 사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토성산성에서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태안관아를 향하여 출정할 때 박좌수가 총지휘자가 되어 미리 군량미와 무기를 공급하고 태안관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가 결국은 홍주전투에서 패주하여 이곳 토성산상에서 작두로 참수 당하여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박좌수가 그렇게 사랑하던 백마도 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다가 닷새 만에 죽고 박좌수가 살던 집은 관군과 일본군들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 접주 김정제(金貞濟:1861〜1894)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또한 친구들과 놀 때에는 항상 대장노릇을 하며 질서정연하게 아이들을 잘 통솔함으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저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야, 앞날이 매우 촉망되는 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렇게 놀 때나 공부할 때나, 늘 남보다 앞서가는 행동을 보이더니 마침내 약관 이전에 경서에 능통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다. 이 무렵 동학이 전래되어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동학사상에 심취된 그는 마침내 동학에 입도하고 접주가 되었다. 이렇게 동학접주가 된 김정제는 은밀히 주변 마을을 순회하여 포교에 힘썼다. 드디어 1894년 10월 1일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김접주는 이 혁명군에 편입하여 각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으나 홍주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싸우다가 패전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천신만고 끝에 수룡리 집으로 돌아왔으나, 관군의 토벌이 심하여 집에서 견디지 못하고 신진도로 피신하였다. 이렇게 겨우 마음의 안정이 되는가, 했더니 호사다마라고 안기리에 사는 모씨의 밀고로 마침내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성에서 작두로 처형되니 나이 26세에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라) 신석제(申錫濟:1861〜1894)는 부자 집 아들로 태어나 사랑채에 독선생을 모시고 한학을 배웠다. 그런데, 그의 글공부는 날이 갈수록 괄목한 만큼 일취월장했다.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사대기서(四大奇書)를 섭렵하였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시문을 다 읽었다. 그는 자기 집 사랑방에 서당을 마련하고 인근 동네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놓고 8년 동안 훈학하고 있었는데, 마침 동네 친구인 이순하 접주가 말하기를 아이들을 훈학하는 것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잘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지금 이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국가존망지추 위기에 놓여 있으니 우선 나라를 구하고 난 뒤, 훈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신석제는 즉시 동학에 입도하고 신동(新洞)접주가 되어 주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학교리를 포교하였다. 갑오년 9월 그믐날 토성산성에서 태안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이 기포할 때, 그는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 그래서 선봉장인 기수대장으로 선발되어 10월 1일 날 태안성을 점령하는데 앞장을 서 탐관오리들을 몰아냈다. 10월 24일 당진 면천의 승전곡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우다가 총상을 입고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그 뒤 관군과 일본군이 그가 살던 집에 찾아 와서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하여 가옥이 전소되어 가족들은 엄동설한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한다.
⑥ 토성산 동학농민운동 유적 유물에 보존상황
이 토성산성은 1950년대 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성의 형체나마 볼 수 있었다 하는데, 몰지각한 근흥수리조합에서 성벽을 허물어 그 바위와 큰 돌을 모조리 운반해 다가 수룡리 저수지 제방공사에 사용했다 한다. 그래서 지금은 부분적으로 겨우 흔적만 남긴 채 윤곽만 남아 있다. 이 토성산성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마파지샘(靈泉)이 토성산성 아래에 있는데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토성산성에서 참수하던 작두는 10개가 있었다 하는데, 그 중 한 개 작두는 김중석(金重錫:근흥면 수룡리353번지)의 집에서 소를 먹이기 위하여 짚이나 사초를 썰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천도교 9대 태안교구장이던 원암(源菴) 문원덕(文源德)이 1964년 동학정신선양회(東學精神宣揚會)를 조직하고 1965년 동학농민혁명군 유족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적지와 유족을 찾아다니다가 1976년 7월 3일에 김중석으로 부터 참수작두를 기증받아 몇 년 동안 천도교 태안교구에 보관했다. 그 뒤 태안여자고등학교에 위탁하여 그 학교 민속자료관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천안독립기념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동학농민군. 참수 작두. 자료번호. 5-001779-000)
위에 거론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간략하게 결론을 짓자면, 1894년 이 땅의 동학농민군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초개처럼 버렸다. 참으로 위대한 희생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잡아 개인적으로 호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리려고 봉기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서 있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일념(一念)으로 몸을 던지고 산화(散華)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정세는 국정문란과 강대국의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는 내우외환으로 국가존망지추에 놓여 있었다. 동학농민군들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양반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고 분연히 궐기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는 집강소(執綱所)를 열고 민의를 수렴하는듯하다가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고 경복궁을 침입하자 이 때 동학농민군들은 또 다시 봉기하여 척양척왜의 깃발을 들고 재 기포하여 일본군의 침약에 대항하였다.… 특히 충청도 내포지역의 동학농민혁명운동은 7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8월에는 도소를 설치하고 활동에 들어갔으나 관아를 습격하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악질 양반과 토호들을 응징하는데 주력했으며 일반 민중들은 동학에 물밀 듯이 들어와 동학의 세력은 점점 커져 갔다. 충청도 내포지역에서 처음으로 10월 1일에 서산·태안 동학농민군이 기포하자 당진, 면천 예산 덕산 등지에서 마침내 무장봉기가 뒤따랐다. 맨 처음에는 동학도들은 서산시 운산면 여미벌에 모이게 됐고 비로소 본격적인 무장 항쟁으로 발전하게 됐다. 동학농민군은 10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호남에서는 전봉준(全琫準) 장군과 김개남(金開南) 장군이 일어났으며 북접에서는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명에 따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통령(統領)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출동하여 논산에서 호남 동학농민군과 합류하여 공주 공격에 나서고 있었다.… 충청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승전곡 전투에서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여지없이 무찔렀으며, 신례원에서 관군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나 10월 28일 홍주성 공격에서 실패하면서 역전되고 말았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동학농민군들은 태안 백화산(白華山)에서 항전하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병력은 후퇴하여 토성산성(吐城山城)에 숨어 있었으나, 또 이곳에서도 사로잡혀 참혹하게 처형을 당했다. 아직도 이 토성산성에서 얼마나 참형을 당했는지 그 숫자는 아직 알 수는 없지만 태안에서 동학농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이 토성산성이라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다.… 역사상 미증유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1년 동안에 걸쳐 약 50여만의 희생자를 내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주변 강대국들의 정세 판도를 바꿔 놓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 개혁 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고, 위대한 3․1 만세운동, 의병활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등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혁명이었다.
3, 맺는 말
우리가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전제국가인 왕정이라 하드라도 목표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게 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한 지역을 담당 주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잇는 사람들을 수령이라 하고 목민관(牧民官)이라 하였는데 다산정약용(茶山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지으면서 책의서두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목민관은 자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의 목민관(수령=군수)이 잘못하면 수많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모든 힘이 있는 위정자들이나 공직자들이 연일 부정부패되어 잇다는 보도를 접 할 때마다 118년 전에 있었던 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따른 토성산성 참사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 동학농민혁명을 우리 역사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가지고 제대로 바라보는 진정한 모습으로 역사 발전이 이룩될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정신은 오늘에도 진행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 계속 멈추지 말고 진행되어야한다. 동학농민혁명은 분명히 탐관오리의 횡포와 밀려오는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순수한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아 놓은 위대한 역사로 평가 하여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