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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南誌(교남지)
鄭源鎬(未詳 ~ 未詳)
嶠南誌卷之三
玄風郡
校院
...金宏弼配享文穆公鄭逑○ 別祠仁祖甲戌建享進士郭承華洛川裵紳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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校院 校院
鄕校 在郡北二里宣祖壬辰火辛丑縣監李詠▩重建光海辛亥縣監許佶重修英祖朝縣監金光泰重 創辛丑重修(小設位)
道東書院 在郡西烏舌里宣祖乙巳建丁未賜額享文敬公金宏弼配享文穆公鄭逑
○ 別祠仁祖甲戌建享進士郭承華洛川裵紳禮村郭馹參奉 元槪○金安國詩金先生學世推宗濂洛餘風振海東鄕邑 親薰應有得須將小學益硏窮
禮村書院 在郡東十五里肅宗甲寅建丁巳賜額享忠烈公郭䞭忠翼公郭再 祐
松潭書院 在烏舌里肅宗甲戌建享大庵朴惺
尼陽書院 在郡西率禮村肅宗丁亥建享淸白 吏郭安邦吏佐郭之雲
藍溪書院 哲宗丁未建享監司郭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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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湖閒錄 二
玄風
道東院萬曆乙巳建丁未額 원주, 寒暄金宏弼·寒崗鄭逑。
○院傍別祠癸酉建 원주, 進士郭承華·洛川裵紳·禮村郭昶·叅奉元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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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峰先生實記(설봉선생실기)
朴澯(1538 ~ 1581)
雪峯先生實紀
年譜
[年譜] 皇明世宗肅皇帝嘉靖七年 我中宗恭僖大王三十三年 戊 戌先生生于星州修倫里第○先生本貫 密城也中世居于靈山先考副尉公聘于 修倫里順天朴氏家因來居焉 八年己亥先生二歲 九年庚子先生三歲 十年辛丑先生四歲 十一年壬寅先生五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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姿稟明秀氣質淸雅容止言動超異於凡 兒 十二年癸卯先生六歲 始受學于大人公誦讀不轍句讀分明領 略文義見者莫不期以遠大 十三年甲辰先生七歲 讀孝經小學熟複不怠 十四年 我仁宗榮靖大王元年 乙巳先生八歲 十五年 我明宗恭憲大王元年 丙午先生九歲 十六年丁未先生十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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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戊申先生十一歲 讀羲經于淨心庵○庵在修倫里左壺谷 之陽谷深水駛人煙遠隔從古多讀書於 其中庵距家數堠而先生定省不廢 十八年己酉先生十二歲 天性孝友器局峻整專意學問居不好戱 十九年庚戌先生十三歲 二十年辛亥先生十四歲 二十一年壬子先生十五歲 二十二年癸丑先生十六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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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迎拜南冥曺先生于伽川路左○時 南冥先生將訪宋新淵師頤而路由伽川 公適風詠川邊見先生過之拱手納拜曰 先生倘非南冥先生乎先生笑曰相距數 百之地童子何以知之乎公對曰雖童子 無知見先生粹盎之儀令人敬服所以知 之先生大奇之及勝冠遂請贄于先生之 門多蒙奬詡○四月丁副尉公憂理喪持 服一遵禮制哀毁如成人奉葬于州南吐 谷卽先生外氏之先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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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年甲寅先坐十七歲 讀禮記 二十四年乙卯先生十八歲 夏服闋 二十五年丙辰先生十九歲 春聘夫人延日鄭氏生員彭齡女樞密院 事襲明之后也 二十六年丁巳先生二十歲 行束脩禮於南冥曺先生之門得聞敬義 之說服膺踐履大爲時賢所敬憚焉○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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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鄕解而不利於荊圍自是絶意名利與 鄭寒岡逑金東岡宇顒宋新淵師頤金松 庵沔李山澤堂驎李六一軒弘量李晴暉 承李玉山起春講學論道日以爲常 二十七年戊午先生二十一歲 春仲兄瀚中生員試聞喜之日榮不及於 先人在世之日故益不勝悲感 二十八年己未先生二十二歲 長子明佑生 二十九年庚申先生二十三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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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鄕子弟行士相見禮於家塾 三十年辛酉先生二十四歲 哭伯兄生員公澂先生友愛純篤事之甚 恭寢食每與同而及其葬甚悼傷不已 三十一年壬戌先生二十五歲 赴鹿峯書堂○時主倅黃錦溪俊良以興 學爲務創立鹿峯書堂薦先生主其學事 三十二年癸亥先生二十六歲 二月聞黃錦溪訃爲位哭之○時錦溪棄 官歸卒于道先生聞而哀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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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三年甲子先生二十七歲 春往拜退溪李先生于陶山書堂○時退 溪先生遊淸凉山先生陪從累日講質文 義動止以禮先生甚器重焉 三十四年乙丑先生二十八歲 秋鄭寒岡金東岡兩先生來訪相與講名 理數日而罷○子明彦生 三十五年丙寅先生二十九歲 春金松庵沔李玉山起春來訪講心經多 有相資之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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穆宗純皇帝隆慶元年丁卯先生三十歲 冬往賀金東岡擢科 二年 我宣祖昭敬大王元年 戊辰先生三十一歲 春與鄭寒岡稟定川谷院號於退溪先生 ○是時寒岡先生以其地有伊川雲谷之 號將臥龍故事與議先生遂稟于李先生 定號爲川谷奉享程朱二先生以寒暄堂 金先生從祀焉○夏往弔金東岡母憂討 論喪禮○冬鄭寒岡遭內艱賻弔如儀率 門生素帶躬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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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己巳先生三十二歲 季弟混中司馬
四年庚午
先生三十三歲 秋往省先楸於靈山回路入
雙溪書院謁 寒暄堂金先生廟
○冬聞退溪先生訃與 諸生會哭于川谷書院 五年辛未先生三十四歲 女子子生○後適士人東萊鄭頤龍 六年壬申先生三十五歲 子明善生○二月聞南冥先生寢疾往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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調藥及卒先生素服環經以盡事一之誠 至葬爲文祭之 神宗顯皇帝萬曆元年癸酉先生三十六歲 雪峯精舍成○是時先生自倫莊來卜雪峯山下而洞壑窈窕溪山明媚故先生愛其幽邃構數椽於其中爲藏修講學之所 鄕子弟亦多聞風來學焉
二年甲戌先生三十七歲 李晴暉來訪見屋宇蕭灑累日不返讀性理書以做同人之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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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乙亥先生三十八歲 長子明佑冠先生採冠儀行三加之禮邀 鄭寒岡爲賓李晴暉爲贊周旋靜肅觀者 興起 四年丙子先生三十九歲 閒居讀近思錄 五年丁丑先生四十歲 六年成寅先生四十一歲 築茅齋于考盤洞○洞在立巖數里許奇 峯列揷白石層鋪淸流激湍寬閒寥寂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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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爲盤桓遂與金東岡李晴暉共結茅齋 往來棲息 七年己卯先生四十二歲 九月居考盤洞茅齋時鄭寒岡與李梅堂 仁愷金松庵郭存齋䞭作伽倻山遊來到 茅齋先生團話樂甚○寒岡先生遊山錄 曰所謂考盤洞者寬閒寂寞亦自可愛肅 夫景淸善述諸友就原上縛得一間茅屋 借人守之可以寓宿實吾人幽居之所宜 也行到立巖列坐盤陁石爲作懷肅夫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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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二絶又曰黃昏到岡舍黑色未甚依俙 望見人有在於是軒者而猶未卞其形色 及聞其謦咳知其爲景淸則各欣然蘇倒 促步以進同聲之應自不能已也云 八年庚辰先生四十三歲 九年辛巳先生四十四歲 先生涉月違豫寒岡先生爲書以問之略 曰只祈世間萬事勿入病懷平安其心淸 淨調理也吾知吾友之必爾也云先生披 讀摩挲益加調理不脫冠帶日事潛心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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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九月二十一日考終而神精不亂平日 之定力亦可見也訃出里人如喪親戚是 年冬奉葬于州南楡峴子坐之原寒岡東 岡玉山六一軒諸賢俱以白巾隨紼以相 葬禮 墓碣銘乃桐溪鄭先生所撰而未遑鐫石 失於灰燼深爲慨恨 崇禎後九十九年 我英宗大王十二年 丙辰二月十三 日從享于柳溪書院忠翼公栢谷鄭先生 揭虔之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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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士呂公聘擧撰奉安文 正宗壬申行狀成 西原鄭公▼(土+業)撰 先生遺文 祭南冥先生文 嗚呼哀哉天之所以生夫子於東方者夫豈偶 然哉將非下土茫茫廉恥道喪偸靡浮薄日入 於夷狄禽獸之域而有不能自覺者故必挺此 千百世未有之豪傑欲令陶鑄千百世未有之 事業者耶然何天意之有不可必信而使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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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經綸濟世之蘊終世自守於山高水潔之中 悲嗟慷慨之懷但寓於詩歌嘯詠之間談論辭 說之際而宏略未施訏謨未用嗤嗤之氓終不 蒙惻惻之德庸庸之俗終不被肅肅之化萬古 長夜終不見一日之明則於先生之喪也寧不 歎息流涕而繼之以慟哭也哉先生資稟奇峻 人物灑落又濟以忠信敬義之學剛毅刻勵直 方和順周流充塞磅礴渾活屹屹而如臨泰山 億萬丈之層巒俯瞰九州之彈丸浩浩而如駕 滄海百千斛之風濤渺視人間之蟻聚如秋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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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曰之白輝澟澟如寒松痰竹之苦節貞貞其 盛德大業雖未震耀於當世而有以竦動乎百 代之下綱常倫彝賴以不墜有如高山大嶽雖 不運動而其功利之及於物者蓋不可以數計 焉然後可以的見其天之所以生先生之意果 不偶然而豈可以區區一時之用舍爲加損於 先生哉若然則於先生之喪也其亦小可以慰 釋夫小子無窮之懷而在先生亦可謂庶乎不 負其受命以降之責也小子不敏狂愚疏昧蓋 平生所以自用其力者不過場屋句讀之文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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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未知有古人所謂爲己之事者晩幸得操几 杖於門廡之下獲聞先生宏偉正大之論然後 靦然顙泚始覺向來用心之誤也而又愧夫纖 微劣弱之資不足以與聞於大方之家也然且 天與之衷終不可以自誣則請庶幾終身執帚 而有以變化其不肖之身心孰謂天之降割乃 至於此極而使先生忽有厭棄山林之心耶先 生之病也竊幸獲侍執燭之列仰見先生雖精 爽憊薾之甚而操存省察之意未嘗有一刻之 放過則於是益又知先生所存所養之又卓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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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如是也先生之病也遠近士子莫不奔走來 侍其喪也亦莫不奔走來哭智愚賢不肖無異 辭皆謂之靑天白日泰山喬嶽則先生澟然難 犯之威確然難動之德亦又可想矣日月不居 卽遠已迫柳車旣飾薤露將發一觴奉訣儀形 悲號莫及五內如煎先生不亡者在其尙有以 鑑小子之微誠也哉嗚乎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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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玄風)
도동서원(道東書院) 만력 정미년(1607,선조40)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 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 ㆍ원개(元凱) 참봉(參奉) 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 ㆍ곽율(郭𧺝)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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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선조 6년 계유 > 11월 28일 > 최종정보
선조실록 선조 6년 계유(1573) 11월 28일(갑진)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가 장계(狀啓)하기를,
“도내(道內) 현풍(玄風)에는 김굉필(金宏弼)의 서원(書院)을 설치하였고, 경주(慶州)에는 이언적(李彦迪)의 서원을 설치하였고, 영천(榮川)에는 이황(李滉)의 서원을 설치하였으니, 사액(賜額)하고 서적을 반강(頒降)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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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선조 39년 병오 > 12월 26일 > 최종정보
선조 39년 병오(1606) 12월 26일(경신)
39-12-26[02] 중건한 천곡ㆍ금오ㆍ쌍계ㆍ남계 등 서원에 사액하다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치계하기를,
“도내(道內) 여러 고을이 선현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그 곁에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지어 선비들의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은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주(星州)의 천곡 서원(川谷書院)은 그곳에 이천(伊川), 운곡(雲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인연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고, 선산(善山)의 금오 서원(金烏書院)은 야은 선생(冶隱先生) 길재(吉再)가 살던 곳이고, 현풍(玄風)의 쌍계 서원(雙溪書院)은 한훤 선생(寒暄先生) 김굉필(金宏弼)이 살던 곳이고, 함양(咸陽)의 남계 서원(藍溪書院)은 일두 선생(一蠹先生) 정여창(鄭汝昌)이 살던 곳이라 하여 평시에 온 도내의 선비들이 힘을 합쳐 세우고서 조정에 아뢰자, 특별히 편액(扁額)을 하사했었는데, 불행히도 병화(兵火)에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지금 선비들이 각기 재력(財力)을 염출하여 지방 관아에서도 힘을 합쳐 도와줌으로써 옛날 모습대로 중건(重建)하여 신주를 모실 곳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날 하사된 편액이 남아 있는 곳이 없어 중건하고서도 아직 서원만 있고 편액이 없으므로 국가에서 표장(表章)하여 높게 걸도록 한 뜻을 보여줄 수 없는 점이 매우 흠입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거듭 내리도록 하여 사문(斯文)을 빛나게 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그 중에 남명 선생(南溟先生) 조식(曺植)은 학행과 도덕이 전현(前賢)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흠모도 전현들에 못지 않습니다. 평소에 진주(晉州) 덕산(德山)의 옛날 거처하던 곳 부근에 서원을 세웠었는데 역시 방화에 불타버렸던 것을 지금 중건하였으니 다른 서원의 예처럼 아울러 사액(賜額)하여 조정에서 문헌을 숭상하고 도덕을 높이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의 계목에,
“계하(啓下)를 점련합니다. 천곡(川谷)ㆍ금오(金烏)ㆍ쌍계(雙溪)ㆍ남계(藍溪) 등 네 서원은 평소에 특별히 편액을 하사했었으니 편액 이름은 그것으로 쓰되, 본도로 하여금 고증해 계문하게 한 뒤에 특별히 거듭 하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식의 학행은 전현들의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을 뿐더러 지금 서원이 창설되었으니 다른 서원의 예대로 아울러 사액하도록 명하는 것이 문을 숭상하고 도를 높이는 뜻에 참으로 합당하나 은명(恩命)과 관계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일찍이 이미 사액되었던 곳은 사액하고 새로 세운 곳에 대한 사액은 천천히 하도록 하라.”
ⓒ 한국고전번역원 | 김재열 (역) | 1989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64 | 5월, 朔望通讀之規를 정하다. ○ 8월, 光州 牧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玄風의 道東書院을 배알하고 金宏弼 墓에 제사하다. ○ 11월, 三嘉의 龍巖書院을 배알하고, 晉州로 가서 德川書院을 배알하고 曺植 墓에 제사 지내고, 山陰의 吳健 墓에 제사 지내고, 咸陽의 濫溪書院을 배알하고 鄭汝昌 墓에 제사를 지내다. ○ 治亂提要를 짓다. |
○慶尙監司柳永詢馳啓曰: "道內列邑, 爲先賢立祠宇, 春秋香火, 傍建講堂齋舍, 以爲士子藏修之所者, 非止一二。 如星州之川谷書院, 因其地有伊川、雲谷之名, 奉安程、朱子位版; 善山之金烏書院, 因冶隱先生吉再所居之鄕; 玄風之雙溪書院, 因寒暄先生金宏弼所居之鄕; 咸陽之藍溪書院, 因一蠧先生鄭汝昌所居之鄕, 在平時, 一道士子, 同力建設, 聞于朝廷, 特賜扁額, 而不幸, 兵火竝被灰燼。 今者士子等, 各出財力, 地方之官竝力扶助, 依舊重建, 妥靈有所, 極可嘉尙。 前日賜額, 無有存者, 逮玆重建, 有院無額, 無以示國家表章昭揭之義, 殊爲欠闕。 朝廷特令申賜, 以光斯文, 不勝幸甚。
其中南溟先生曺植, 學行道德, 竝美於前賢; 士子之欽慕, 亦不減於前賢。 平時營建書院於晋州之德山舊居之傍, 而亦爲兵火所及, 今方重建, 依他書院例, 竝命賜額, 以示朝廷右文重道之意。 詮次善啓。" 啓下禮曹。 禮曹啓目: "粘連啓下。 川谷、金烏、雙溪、藍溪四書院, 平時特賜, 扁額額名以此書之, 令本道相考啓聞後, 特令申賜爲當。 曺植學行, 竝美於前賢, 今於書院之創設, 依他書院, 竝命賜額, 允合於右文重道之意, 係是恩命, 上裁施行何如?" "啓依允。 曾已賜額處則賜額; 新建處則賜額安徐。"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 | 丁酉再亂 때 불탄 남계서원을 중건하다.일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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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연보 제1권 / [연보(年譜)]
32년 우리나라 선조 37년 갑진(1604) 선생 62세
○ 현풍(玄風) 사류들과 의논하여 송림(松林)에 서원을 세웠다. - 현풍현 동쪽에 지난날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있었다. 이곳은 한훤당 김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었는데 임진년 전란에 불타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김 선생의 무덤 밑에 터를 잡아 서원을 옮겨 세웠다. 방백(方伯)이 계청(啓請)하여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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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庵先生文集(대암선생문집)
朴惺(1549 ~ 1606)
大菴先生文集目錄
[目錄]
大菴先生文集目錄
...雙溪書院見寒暄先生古屛其一 幅畵雲山千疊茅屋數間中有幅巾端坐...
昔余嘗遊雙溪書院見寒暄先生古屛其一幅畵雲山千疊茅屋數間中有幅巾端坐手閱芸篇者最愛翫久而不忘今適避兵入古松生一日朝開卷闢窓山中景物與昔畵裏所見宛然相似遂吟成四韻以遣興焉 曾見寒暄畵屛裏雲山蒼翠幾重深千巖淨界三間 屋一軸遺篇萬古心當日摩挲常愛翫今朝彷彿此 登臨老來喜得林泉勝竟夕開窓對碧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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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당집(荷塘集) 권두인(權斗寅)생년1643년(인조 21)몰년1719년(숙종 45)자춘경(春卿)호하당(荷塘), 설창(雪窓)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권벌(權橃)의 후손.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荷塘先生文集卷之六 / 丘墓文 墓表墓誌銘墓碣銘旌閭銘 / 高祖考通訓大夫行草溪郡守府君墓誌
公諱東輔。字震卿。姓權氏。安東人。自號靑巖。始祖諱幸。高麗侍中六代祖諱靷。嘉善大夫檢校漢城尹。五代祖諱厚。彰善校尉。鷹揚衛中領中郞將。高祖橫城縣監贈吏曹參判。諱啓經。曾祖副護軍贈吏曹判書。諱琨。祖成均生員贈領議政。諱士彬。考右贊成贈領議政諡忠定公。諱橃。妣和順崔氏貞敬夫人。直長世演之女。典翰漢公之孫。贊成文惠公善門之曾孫。公以正德戊寅生。少負逸氣。旣內承庭訓。從貳相李先生長坤學。其得於父師者。可知。已及年十七八。文詞已蔚然。筆法亦遒勁。弱冠。魁鄕試。遂有聲藝林間。以蔭。補獻陵參奉。年二十六。中癸卯司馬兩試。會乙巳禍作。忠定公謫西徼以卒。公扶櫬返葬。痛憤國家非常之變。遂絶意進取。及明廟末。國是乃定。公始仕。歷直長,主簿,佐郞,正郞。卒至草溪郡守。此其履官大略也。嘗除淸州判官。不赴。年七十五。以疾。終于家。實萬曆壬辰四月二十三日也。屬島兵大亂。權葬家後山。亂定。遷窆酉谷。從先兆也。公天資夷曠。氣韻蕭爽。早謝官家居。以自放於詩酒間。客至輒呼觴。酒酣。必發興吟詩。下筆翩翩千百言。其詩沖澹蕭散。讀之。鏗然有金石聲。所居洞門外。有溪壑之勝。結亭其上。扁曰石泉精舍。暇則策藜獨往。逍遙自適。晩節不能良行。肩輿以往返。家貲甚豐厚。時進醵。大會賓友。令吹笛撫琴彈筝鼓鳴瑟以爲樂。公莅職行事。雖遠而不得詳。然思庵朴相公淳。稱公有器量風裁。有以也。所著有靑巖亂稿數卷。藏于家。公配密陽朴氏。宣略將軍諱文琬之女。貳相好問之五世孫。先公歿。祔葬同原。公無嗣。取弟縣監公諱東美第二子來以後之。生三男五女。男長卽王考。諱尙忠。次世忠。次碩忠。女長適忠義衛李榮基,參判金榮祖,權鼈,金珌,別檢金煃。內外曾玄孫男女。多不能盡記。嗚呼。公下世距今已九十年。而尙未克誌其幽。是吾祖若考所嘗茹恨者。誠恐寢遠寢湮。無以徵于後。遂略記顚末如此。埋于壙前。用圖永久云。
公歷漢城判官,昌寧縣監,慶山縣令。未詳某年除拜。不載於墓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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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溪先生文集卷之六 / 書 書簡散失殆盡。而陶山往復十八張。亦遭火於蘆谷。 / 與道東書院儒生書
秋晩苞山。講候如何。不堪慕想之至。前賢旣往。師道無托。淸風尙襲。君子其鄕。諸君之所欲建院而依慕者。蓋將數十年。而得成於今日。實斯文之一大幸也。健之奉命南來。爲故相權某。而忠定其謚。昌寧守乃其主人。而感上之賜。榮父之寵。欲報莫大之恩。而推誠於使人。宜無所不用其極。至納其菱花紗段。以輸其忱。亦一俗例也。辭受之際。固不可不謹。而其交也以道。其接也以禮。亦不可不受。受之而嫌於己有。用之於無益之地。雖出於不獲已者。亦豈盡合於用財之義乎。況幣之未將之前。己有敬慕之心。而値此應俗之儀。則敢不將無益而供有用。許其誠而受其物乎。物之來也各有其誠。而心之所存者。必因此而著。則僕之將此幣而欲納於書院者。夫豈徒然哉。諸生若問其物之所自。則奬忠其謚。而感恩其幣也。察其心之所存。則鄙人向慕之誠。亦豈小君子之所許者乎。其誠可許。其物可受。則義利之分。固諸君所嘗講明而裁度者。何待鄙說而後能定其取與乎。然其遷就之間。或違其理。則未免有自失之悔。故敢以鄙見。稟質於左右者。庶聞講明之中。有所卓見而警拔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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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선조 3년 경오(1570) 5월 6일(계유)
03-05-06[01] 조광조를 문정으로, 이언적을 문원으로, 권벌을 충정으로 각각 시호를 내리다
조광조(趙光祖)의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이언적(李彦迪)의 시호를 문원(文元)으로, 권벌(權橃)의 시호를 충정(忠定)으로 내렸다.
○癸酉/贈趙光祖諡文正, 李彦迪諡文元, 權橃諡忠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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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집(德溪集) 오건(吳健)생년1521년(중종 16)몰년1574년(선조 7)자자강(子强)호덕계(德溪)본관함양(咸陽)특기사항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50 | 1월, 직강이 되다. ○ 2월, 이조 좌랑이 되다. ○ 8월, 御史 兼 災傷敬差官이 되어 湖南을 돌아보다. ○ 12월, 退溪先生을 哭하다. |
四年庚午 先生五十歲 正月。除直講。○二月。拜吏曹佐郞。上狀辭。不許。○奉命宣權忠定公 橃 諡。有與道東書院儒生書。略曰。健之奉命南來。爲故相權某。而忠定其諡。
權東輔 | 1518 | 1592 | 安東 | 震卿 | 靑巖 |
昌寧守。乃其主人。而感上之賜。榮父之寵。欲報莫大之恩。而推誠於使人。宜無不用其極。至納其菱花紗段。以輸其忱。亦一俗例也。辭受之際。固不可不謹。而其交也以道。其接也以禮。亦不可不受。受之而嫌於己有。用之於無益
之地。雖出於不獲已者。亦豈盡合於用財之義乎。況幣之未將之前。已有敬慕之心。而値此應俗之儀。則敢不將無益而供有用。許其誠而受其物乎。物之來也。各有其誠。而心之所存者。必因此而著。則僕之將此幣而欲納於書院者。夫豈徒然哉。諸生若問其物之所自。則奬忠其諡。而感恩其幣也。察其心之所存。則鄙人向慕之誠。亦豈非君子之所許者乎。其誠可許。其物可受。則義理之介。固諸君所嘗講明而裁度者。何待鄙說而後。能定其取與乎云云。觀此可知先生取與之義。故附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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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집(栢潭集) 구봉령(具鳳齡)생년1526년(중종 21)몰년1586년(선조 19)자경서(景瑞)호규봉(圭峯), 백담(栢潭)본관능성(綾城)시호문단(文端)특기사항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
栢潭先生文集卷之三 / 五言律詩 / 送吳正郞子强奉使向昌寧。因往家山。權忠定公撥賜諡官。時忠定子東輔。爲昌寧縣監。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51 | 1월, 이조 좌랑이 되다. 이후 부교리, 예조 정랑, 이조 정랑, 지평을 역임하다.덕계 |
舊日南遊計。輸君此一籌。風霜驚節峻。雨露荷恩稠。快割分千緖。高懸照百幽。平生服遺義。送子更悠悠。忠定公。乃齡外祖父之堂弟。乙巳取禍。丁卯歲始伸理贈職賜諡。齡忝天官時。欲奉諡以行而竟乖。故全篇屬意。
백담집 제3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정랑 오자강이 봉사가 되어 창녕으로 가다가 고향을 지나가기에 전송하다〔送吳正郞子强奉使向昌寧因往家山〕 충정공 권벌(權橃)의 사시관(賜諡官)이다. 당시 충정공의 아들 동보(東輔)가 창녕 현감이 되었다.
지난날 남쪽 유람을 계획하였는데 / 舊日南遊計
그대에게 오늘 한 수 졌다네 / 輸君此一籌
풍상 같은 높은 절개에 놀라고 / 風霜驚節峻
우로처럼 골고루 은혜를 입었네 / 雨露荷恩稠
시원하게 잘라 천 가닥을 나누었고 / 快割分千緖
높이 매달려 백 리 멀리를 비추네 / 高懸照百幽
평생에 전한 뜻을 따랐으니 / 平生服遺義
그대 보내니 다시 유유하네 / 送子更悠悠
- 충정공은 나의 외조부의 사촌 동생이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화를 입고 정묘년(1567, 명종22)에 비로소 신원되어 증직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내가 이조에 있을 때에 봉시관으로 가려하였으나 마침내 일이 어긋났기 때문에 전편에 생각을 붙였다. -
[주-D001]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 호는 덕계(德溪)이다.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572년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덕계집(德溪集)》,《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주-D002] 권벌(權橃) : 1478~1548.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이다. 1507년(중종2)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인종1) 5월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91년(선조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충재집(冲齋集)》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주-D003] 동보(東輔) : 권동보(權東輔, 1517~1591)로, 본관은 안동,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이다. 1542년(중종3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선조 때 아버지 권벌(權橃)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자, 다시 벼슬길에 나와 군수에 이르렀다.[주-D004] 을사년에 화를 입고 : 을사사화에 화를 당했다는 말이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ㆍ허자(許磁)ㆍ임백령(林百齡) 등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세력을 배척하자, 구봉령은 이에 반대하여 윤임ㆍ유인숙(柳仁淑)ㆍ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9월에 우의정 이기,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구봉령은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 후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 한국국학진흥원 | 장재호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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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潭先生續集卷之一 / 五言古詩 / 送權震卿文丈之任昌寧
永嘉權侍中。麗初奮奇迹。赫赫蓋當時。延延垂竹帛。相公嗣餘緖。早脫流輩百。許國忠膽大。愛君寸忱赤。誓死冀回天。甘心蹈刃白。卒被讒禍搆。陰荒褫精魄。乃有兩象賢。夫君實其伯。弱齡討儒術。瑤華射巖石。遂振場屋聲。一去掃勁敵。紅蓮騰步武。靑雲無咫尺。自從慘痛後。閉戶謝賓客。蕭蕭舊庭栢。風霜聳陰碧。萬事不掛懷。名途夢寐隔。雷雨霈天上。幽冤忽昭釋。白日照重冥。榮光動今昔。餘寵及子孫。顯擢蒙聖澤。感激淚成行。起肅天門闢。銘骨意罔極。庶得酬涓滴。矧玆殿名城。五馬輝鄕籍。分憂責非輕。共理恩彌赫。是誠竭報時。歸思尤競惕。親知簇車騎。竝設都門席。伊我添下流。追隨曾莫逆。齋沐阻出餞。一言當秦策。信斯語切至。賊子戒的皪。利害別盤錯。淸操厲氷蘖。絃歌有妙理。願言警昕夕。他時循吏傳。倘使留宏績。家聲益顯揚瞻聆咸動色。臨分更丁寧。擬續驪駒拍。
백담집 속집 제1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 권진경 어른이 창녕으로 부임해 가기에 전송하다〔送權震卿文丈之任昌寧〕
안동의 권 시중께서 / 永嘉權侍中
고려 초에 기적을 떨쳤네 / 麗初奮奇迹
빛나는 공적 당시에 자자했고 / 赫赫蓋當時
면면히 이어져 역사에 전하네 / 延延垂竹帛
상공(相公 권벌(權橃))께서 그 업적을 계승하여 / 相公嗣餘緖
일찍이 무리들 가운데 빼어났네 / 早脫流輩百
나라 위한 충심 위대하고 / 許國忠膽大
임금 사랑함은 일편단심이었네 / 愛君寸忱赤
죽기를 맹세하고 천자를 되돌리려 / 誓死冀回天
흰 칼날 밟는 것도 달갑게 여겼네 / 甘心蹈刃白
마침내 참소 입고 화가 얽히어 / 卒被讒禍搆
저승에 정신과 혼이 빼앗기었네 / 陰荒褫精魄
이에 두 분이 현인을 본받았으니 / 乃有兩象賢
그대는 실로 그 맏이라네 / 夫君實其伯
약관 나이에 유술을 토론하였고 / 弱齡討儒術
기이한 꽃빛이 바위를 쏘는 재주였네 / 瑤華射巖石
마침내 과거장에 명성 떨치고 / 遂振場屋聲
한 번에 강적을 쓸어버렸네 / 一去掃勁敵
붉은 연꽃에는 걸어 올랐으나 / 紅蓮騰步武
푸른 구름이 가까이에 없었네 / 靑雲無咫尺
비통함을 겪은 뒤로부터 / 自從慘痛後
문이 닫히고 빈객이 물러났네 / 閉戶謝賓客
옛 뜰의 잣나무 쓸쓸하고 / 蕭蕭舊庭栢
바람서리에 푸른 그늘 우뚝하네 / 風霜聳陰碧
모든 일 마음에 두지 않으니 / 萬事不掛懷
공명의 길은 꿈속에도 멀어졌네 / 名途夢寐隔
뇌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더니 / 雷雨霈天上
사무친 원통이 밝게 풀리었네 / 幽冤忽昭釋
밝은 해가 저승에도 비치고 / 白日照重冥
영광이 고금에 드러났네 / 榮光動今昔
넉넉한 은총 자손에 미치고 / 餘寵及子孫
높은 발탁의 성은을 입었네 / 顯擢蒙聖澤
감격하여 눈물 줄줄 흘리며 / 感激淚成行
일어나 숙배하고 대궐문을 열었다네 / 起肅天門闢
망극한 그 뜻 뼈에 새기고 / 銘骨意罔極
조금이라도 은혜 갚기를 바랐다네 / 庶得酬涓滴
더구나 이번에 이름 있는 성을 맡아 / 矧玆殿名城
수령되어 고향을 빛내었네 / 五馬輝鄕籍
걱정 나눈 책임 가볍지 않으니 / 分憂責非輕
함께 다스려 은혜 더욱 빛났네 / 共理恩彌赫
이 정성을 다해 보답하려는 때에 / 是誠竭報時
돌아갈 생각에 더욱더 두려웠네 / 歸思尤競惕
친한 벗들 수레와 말 타고 모여 / 親知簇車騎
함께 도성 문에 자리를 열었네 / 竝設都門席
나는야 아랫자리 차지하고서 / 伊我添下流
서로 따르며 일찍이 막역하였지 / 追隨曾莫逆
목욕재계하고 전별 나오지 못해 / 齋沐阻出餞
진책으로 한 마디 말씀 올린다네 / 一言當秦策
진실로 이 말은 지극히 간절하니 / 信斯語切至
사람 해친 아들의 경계 분명하다네 / 賊子戒的皪
이해는 반착을 자르듯 분별하고 / 利害別盤錯
맑은 지조 빙벽처럼 엄격했네 / 淸操厲氷蘗
현가에 묘한 이치가 있었으니 / 絃歌有妙理
아침저녁 경계하기를 원했다네 / 願言警昕夕
훗날 어진 관리로 전해져 / 他時循吏傳
큰 업적 남기게 하리라 / 倘使留宏績
집안 명성 더욱 드러내었으니 / 家聲益顯揚
보고 듣는 이 모두 안색이 변하리라 / 瞻聆咸動色
이별에 임해 더욱더 간절하여 / 臨分更丁寧
〈여구곡〉을 이어 지으려 하네 / 擬續驪駒拍
[주-D001] 권진경(權震卿) : 권동보(權東輔, 1518~1592)로, 진경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청암(靑巖)이다. 1542년(중종3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선조 때 아버지 벌(橃)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자, 다시 벼슬길에 나와 군수에 이르렀다.[주-D002] 권 시중(權侍中) :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을 말한다.[주-D003] 죽기를 …… 여겼네 : 이 두 구절은 권벌이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가서 노력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종계변무는 조선 건국 초기 왕실의 종계가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던 일이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조선은 명나라 측에 수없이 정정을 요청했고 선조 17년(1584)에 가서야 뜻을 이루게 된다.[주-D004] 붉은 …… 없었네 : 권동보가 사마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말이다.[주-D005] 걱정 나눈〔分憂〕 : 군주의 근심 걱정을 나누어 맡는다는 뜻으로, 지방관이 되어 백성을 다스림을 이른다.[주-D006] 함께 다스려〔共理〕 : 임금이 다스리는 곳을 나누어 함께 다스린다는 뜻으로 지방관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주-D007] 사람 …… 경계 : 증자(曾子)가 비(費)에 있을 적에 그 고을 사람 중에 증삼(曾參)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어떤 사람이 증자의 모친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라고 알려 주었으나 그럴 리가 없다면서 모친이 계속 베를 짰는데, 그 뒤에 세 차례나 다른 사람들이 와서 똑같이 그 이야기를 반복하자 모친이 담장을 넘어서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戰國策 卷4 秦策2》[주-D008] 반착(盤錯) :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준말이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비유한다.[주-D009] 빙벽(氷蘗) : 얼음과 황벽나무라는 뜻으로, 춥고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굳게 절조를 지키며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주-D010] 현가(絃歌) : 금슬(琴瑟)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으로, 역시 예악으로 교화함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이란 고을의 읍재(邑宰)로 있으면서 현가로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을 삼았다. 《論語 陽貨》[주-D011] 여구곡(驪駒曲) : 여구는 《대대례(大戴禮)》에만 나타나는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손님이 떠나려 하면서 이별의 정을 표시하는 노래이다. 손님이 “검정 망아지 문 밖에 있고 마부 모두 대기하오. 검정 망아지 길 위에 있고 마부 멍에 올리었소.〔驪驅在門, 僕夫具存. 驪驅在路, 僕夫整駕.〕”라고 노래를 부르면, 주인은 ‘손님이여 돌아가지 마오’라는 뜻의 〈객무용귀곡(客無庸歸曲)〉을 불렀다 한다. 《漢書 卷88 王式傳》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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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집(冲齋集) 권벌(權橃)생년1478년(성종 9)몰년1548년(명종 3)자중허(仲虛)호충재(冲齋), 송정(松亭)본관안동(安東)시호충정(忠定)특기사항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彥迪) 등과 교유
冲齋先生文集年譜 / [年譜] / 冲齋先生年譜
穆宗隆慶元年丁卯。宣祖因三公議啓。命復先生爵秩如初。○慶尙道觀察使朴啓賢狀啓。權橃忠義風節如此。請與李彥迪。俱賜追奬。上嘉歎。令大臣議處。咸謂兩臣學行。燁然可稱。允合追奬。用光繼述。使士氣益振。儒道增重。上允之。
二年 宣祖大王元年 戊辰二月。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 | 9월, ‘忠定’(事君盡節曰忠 純行不爽曰定)의 시호를 받다. |
五年辛未九月。贈諡忠定。事君盡節曰忠。純行不爽曰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