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 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 乃奉立之
흘해 이사금(訖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내해왕(奈解王)의 손자로, 아버지는 각간 우로(于老)다.
어머니는 명원부인(命元夫人)인데 조분왕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김에 공로가 있어 여러 번 승진하여 서불한이 되었는데, 흘해의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이 강직하고 총명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서 제후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다.”
이때에 기림왕(基臨王)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 많은 자처럼 덕망이 있다.”
그리고는 흘해를 받들어 임금으로 세웠다.
■ 311년 二年 春正月 以急利爲阿飡 委以政要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親祀始祖廟
2년 봄 정월,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삼아 정사의 중요한 일을 맡기고 겸하여 중앙과 지방의 병마 일을 맡겼다.
2월, 몸소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 312년 三年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飡急利女送之
3년(서기 312) 봄 3월, 왜국의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혼인을 청하기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흘해집단을 석우로의 아들이라 내세운 것은 왜와는 적대세력. 반면 급리 집단은 왜와 연계성이 깊은 집단.
주) 흘해 집단이 새로이 신라에 유입된 김씨 세력이라는 가설은?
다음대에 김씨 왕조가 세워짐. 석씨 왕조를 찬탈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흘해를 세우고 흘해로 부터 양위받는 다는 식의 정통성 확보
■ 313년 四年 秋七月 旱 蝗 民飢 發使救恤之
4년 가을 7월, 가뭄이 들었고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었다.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사자(使者)를 각지로 보내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가뭄 >황(메뚜기떼) >백성이 굶주렸다 >구제했다는 논리 전개가 가지는 실제상황은
■ 314년 五年 春正月 拜阿飡急利爲伊飡. 二月 重修宮闕 不雨乃止.
5년 봄 정월, 아찬 급리를 이찬으로 삼았다.
2월,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으나, 비가 내리지 않아 중지하였다.
*전해의 가뭄등의 재해에도 궁궐을 다시 수리해야 하는 이유는?
■ 317년 八年 春夏旱. 王親錄囚 多原之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임금이 몸소 죄수의 사정을 살펴 많이 풀어주었다.
■ 318년 九年 春二月 下令 向以旱災 年不順成. 今則土膏脉起 農事方始 凡所勞民之事 皆停之
9년 봄 2월, 명령을 내리기를 "지난 해에 가뭄과 재해로 농사가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이제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돌아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모두 중지하라." 고 하였다.
■ 330년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21년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신라가 중심 세력권과 멀리 떨어진 김제 지방에 벽골제를 축조하는 배경과 가능성은?
①삼국사기 기록의 오류설 ②벽골제의 축조 지역이 현 김제가 아니라, 신라영토내의 다른 지역이다는 설 ③김제 지역으로 사민된 신라인이 축조 설
주) 신라에 유입된 김씨 세력이 구세력(급리 등)을 제거하고 이들을 김제 지역으로 사민시켜 벽골제를 축조하게 하여 백제와 우호관계 형성.
■ 337년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聘百濟. 三月 雨雹. 夏四月 隕霜
28년 봄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3월, 우박이 떨어졌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는 이유는?
주) 백제 >후한말기 북방에서 새로이 이주해온 다양한 집단을 관리하는 우두머리(이주 전 지역에서 고위급)로 보는 가설에서
왜 >진한교체지에 한반도에 유입된 선주민. 신라에 새로이 유입된 김씨 집단이 백제에 예방하고 왜와는 갈등관계가 형성됨.
■ 344년 三十五年 春二月 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夏四月 暴風拔宮南大樹
35년 봄 2월,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시집갔다는 이유로 사절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궁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
*궁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는 것은 그 후계세력이 없이 지배권이 완전히 교체 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
> 잔여 세력이 뒤에 나타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경우에는 見龍이라는 표현을 사용
■ 345년 三十六年 春正月 拜康世爲伊伐飡. 二月 倭王移書絶交
36년 봄 정월, 강세(康世)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2월,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자고 하였다.
*344년 지배권 획득에 대한 조치.
■ 346년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飡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走之
37년 왜의 병사가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그렇다고 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도록 하여 쫓아버렸다.
*변방의 풍도에 침입 >금성으로 진군(멀리서 왔다는 표현) >피로와 군량부족 후퇴 >경기병으로 공격
풍도(風島): 신라본기 실성이사금 14년(415) 8월조에도 나오는 지명으로, 두 기사에서 풍도는 왜인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풍도는 왜가 신라를 침략할 때 오는 경로 중에 있던 섬으로 추정되지만, 그 위치를 알 수는 없다.
■ 348년 三十九年 宮井水暴溢
39년 궁궐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우물이 넘쳤다는 것은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는 은유적 표현
■ 350년 四十一年 春三月 鸛巢月城隅 夏四月 大雨浹旬 平地水深三四尺 漂沒官私屋舍 山崩十三所
41년(서기 350) 봄 3월, 황새가 월성(月城) 귀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여름 4월, 큰비가 열흘 동안 내려 평지에 물이 서너 자나 고이고,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갔으며, 산이 13군데 무너졌다.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는 것은 황새와 외관이 비슷한(투르크계) 집단이 유입하여 월성가에 정착하였다는 은유적 표현
■ 356년 四十七年 夏四月 王薨
47년(서기 356) 여름 4월, 임금이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