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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遺集卷之三 / 附錄 / 行狀[從子希參] 公諱汝昌。字伯勖。河東人。曾大父諱之義。判宗簿寺事。大父諱復周。判典農寺事。父諱六乙。 贈漢城府左尹。公其長子也。左尹通判義州時。公八歲。天使張寧見之。歎異良久。作說名之。蓋以能昌其家也。公早失先考。不煩敎戒。勇於爲義。好讀書。務篤實。不爲崖岸斬絶之行。與金宏弼。遊畢齋門下。日講說道義。以相磨礱。然不以爲有得。入智異山三年。發憤勵志。明五經。究其歸趣。尤精於魯論。深探性理之源。遂窮體用之學。歲庚子。成廟論成均館。求經明行脩。館中擧公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公講經。公不就。癸卯。入上庠。同列以理學推尊之。嘗與群友寢。齋中鼾睡而獨不寐。人無知者。惟崔鎭國知之。播告諸友。館中以爲有思道之功。尤加敬焉。公居家。常以不及事先君爲恨。在母側如嬰兒。未嘗遠違。凡母之所爲。不至於不義。不敢忤焉。母之志。亦不欲以非義傷公之心。故母無過擧。子無苟順之失。人謂一家行義。丙午夏。母夫人病痢。公嘗糞。日號天請代。見聞者皆感泣下。及沒。祭如儀。葬用禮。期歠粥。不食蔬果。未嘗一日脫麻衣。三年不出山口。服闋。與二弟遊智異山。見晉山岳陽洞。愛之。率妻子築室于蟾津之口。種竹蒔梅。蓋將老焉。庚戌。寺正趙孝仝,參議尹兢。薦孝行學識士林無比。成廟特召爲昭格署參奉。公謂人子分內事。上書固辭。成廟題疏尾褒之曰。聞爾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不允。是年冬。登丙科。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不悅。甲寅。除安陰縣監。人謂理邑非其能。始至。知民疾苦在賦斂。遂作便宜數十條。行之期年。而政淸民悅。境內相戒莫以欺詐負公。方伯重之。凡獄事之盤錯未易解者。用律之未審精當者。必巡面質。然後乃行。由是。道之決疑者。遠近咸歸。辨而不得意者。皆不恨其敗。稱其神明。莅事之暇。選邑之聰明子弟。親加敎誘。日課講讀。學者聞之。自遠方來。春秋行養老禮。設內外廳。內則以夫人待之。有子女貧無資。久未婚嫁者。尤厚賙之。使不失時。一境大賴。然不樂居官。將有歸田之志。戊午。坐史禍配鍾城。七年甲子夏四月一日卒。返葬于咸陽昇安洞先公墓左。享年五十五。公性端重沈靜。不喜交遊。與金寒暄堂。許以爲知己。論道講書。未嘗相離。嘗爲近侍。出家輒遣乘迎致。告以所奏於上者何如。每引古今商確。以至達曙。與衆處則言語氣象如恒人。未嘗有異。而內實惺惺焉。中年。公與人飮酒過度。大夫人憂甚。遂終身不飮。鄕會。有殺牛者。以國禁訟于官。將抵罪。大夫人又驚惶如己事。復廢食牛肉。嘗爲縣時。所行數十科條。今至五十餘年。世守爲儀軌。雖暴吏殘人。不敢擅改。有欲改之者。則三老群吏。庭爭申申。必頷乃已。是故。擧行如國典。如此之類。於公雖細事。可以推小而測大。公歿之後。縣之吏。歲時則必進拜于夫人。夫人之沒。來役者如葬其父母。此非必當時蒙澤之人。而其子孫樂其樂利其利。追慕之深切如此。可謂沒世不忘者也。朱溪君深源,南秋江孝溫。亦嘗敬歎之。秋江嘗立傳家藏。而人鮮知者。中廟朝。朝廷議以鄭夢周,鄭汝昌,金宏弼東國理學之宗。宜極褒崇。以示尊尙之義。以明士趨。因贈議政府右議政。令邑守。春秋躬祭其廟。賜夫人爵貞敬。歲廩終其身。幷錄試其子孫。嗚呼。東方自箕子以後數千餘年。人不知學。昧失所趨。惟鄭文忠公。挺生麗末。爲我東理學之祖。厥後其傳無人。公幸與寒暄。生竝一時。奮然力學。以續夫烏川之緖。其爲學。一以伊洛爲法。讀書。以窮理爲要。處心。以不欺爲主。凡持己行事。一以誠敬爲日用工夫。至於治平之律令格例。無不究其極致。而不得大施於當世。惜哉。公娶宗室桃平君末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生子女六人。男希稷。直長。嫡無嗣。希卨。正郞。取堂弟希參之子彥男爲後。女長適副司直崔浩文。生子彥淸。壻觀察使任虎臣。二女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三女適李賢孫。生子承壽。四女適薛公諄。生子璿。公之兄弟三人。曰汝裕。縣監。曰汝寬。生員。妹嫁宗室寧仁君楯。公沒之四十五年。今本道觀察使任虎臣。欲立石爲表。謹具大槩。 | 來庵先生文集卷之十三 / 碑文 一蠹鄭先生墓表銘幷序 先生諱汝昌。字伯勖。河東其本貫也。曾王父之義。判宗府寺事。王父復周。判典農寺事。父六乙。贈漢城府左尹。先生景泰元年庚午生。生有異質。左尹爲義州通判時。華使張寧作說名之。後左尹死於叛將施愛之亂。先生號痛幾絶。亂定。入衆屍中求遺體。歸葬鄕山。先生時年十七。服關。自上錄左尹衛國功。爵其嗣。先生以父敗子榮。心不忍。辭之。不求仕進。奉母夫人甘旨不懈。凡母夫人所爲。不至不義。不敢違。母夫人亦不以非義。傷子志。故子母俱無過擧曲順之失。人稱行義家。母夫人以決科爲榮。乃遊太學。竝遊輩流皆尊敬之。南歸省親。親家癘染方熾。人勸令次外。先生便入。未幾母夫人病不起。哭泣幾滅性。俗多拘忌。先生直行不顧。襲歛殯奠皆如禮。癘患自熄。先生終無恙。人以爲癘不能相染也。及葬。方伯令郡官辦葬具。辭以煩民怨歸先親。郡守曺偉感其意。親往弔祭。人有助者亦不聽。又移左尹墓同穴。三年足不出墳山外。目不見婦人面。旣祥。入頭流山刹。遑遑如有求而不得者。或勸酒肉。輒涕泣不已。郡守親往。勉以先王中制不敢過之義。乃不敢辭。成廟特除昭格署參奉。先生以人子分內事。上章固辭。成廟題其紙尾曰。聞汝之行。予不覺涕出。今猶如此。是汝之善也。兄弟姊妹。分土田臧獲。其磽薄老弱者。先生自占。兄弟猶心不厭者。復以己所得與之。成廟庚戌。登丙科。補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不悅。便求補外。甲寅除安陰縣監。知民疾苦。明立科條。期年合境相戒。莫敢欺負。方伯信重。凡獄事難辨者。必與諮議。乃折自言。而不利者咸稱神明。莅事之暇。選鄕子弟秀者。親爲誘誨。學者多歸之。被戊午史禍。謫鍾城。無怨悔色。定庭燎役。每使星入公廨。執事惟謹。蓋行患難而自得者也。鍾城近胡境。舊無文風。先生敎誨不倦。未久有中進士科者。在謫所七年。甲子夏四月不淑。轝歸咸陽。葬昇安洞左尹墓傍某坐某向之岡。萬曆三十八年庚戌八月。國王遣官致祭于家。其文曰。曰眞儒。曰百世師也。士子建書院于郡東面。賜號蘫溪。春秋行享事。先生道德。於是乎彌彰矣。先生之學。以篤行踐實爲本。以不自欺爲日用工程。黯然之實。充積於在世之日。日章之美。自孚於歿世之後也。嗚呼。宇宙漫漫。犧黃而宋元。幾箇人是男兒。幾男兒是聖賢。況我東土聖遠地偏。道學不明。士趨多岐。訓誥以汨之。詞章以奪之。敺之以聲習。亂之以似非。故其能晦明謙光。不梏於俗學者。蓋絶無而僅有。先生以濂洛爲準的。不炫燿。不求知。爲己任者。斯道也。自期待者。聖賢也。故生事葬祭以禮者。平生之百源也。至于兄弟。信乎朋友者。百行中一事也。爲縣。吏慴民懷。愈久不忘者。設施之端緖也。惜乎道德。不咸于世。偏於一縣而已也。先生取婦宗室桃平君女。恭靖大王之孫也。生二子四女。男長曰希稷。次曰希卨。希稷嫡無嗣。更取良家女。生子如山。以母家非顯族。希卨自主後久不歸。如山生子天壽。天壽生子元禮。始以名賢後授參奉。桂壽生子興禮。亦授參奉。女長適副護軍趙 浩文。生子彦淸。女壻曰任虎臣。觀察使。次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次適李賢孫。生子承壽。又其次適薛公諄。生子璿。先生塋域。迄無表。桂壽倩工赴役。旣就緖。元禮立祠堂。妥靈承祀。後事其庶幾矣。銘曰。 鳳來周岐。去後遺儀。麟遊魯郊。僕且留蹤。惟我先生。鳳麟于東。昇安舊洞。水洋山崇。爰樹之石。三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也無窮。 |
一蠹先生遺集卷之三 / 附錄 / 行狀[從子希參]
公諱汝昌。字伯勖。河東人。曾大父諱之義。判宗簿寺事。大父諱復周。判典農寺事。父諱六乙。 贈漢城府左尹。公其長子也。左尹通判義州時。公八歲。天使張寧見之。歎異良久。作說名之。蓋以能昌其家也。公早失先考。不煩敎戒。勇於爲義。好讀書。務篤實。不爲崖岸斬絶之行。與金宏弼。遊畢齋門下。日講說道義。以相磨礱。然不以爲有得。入智異山三年。發憤勵志。明五經。究其歸趣。尤精於魯論。深探性理之源。遂窮體用之學。歲庚子。成廟論成均館。求經明行脩。館中擧公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公講經。公不就。癸卯。入上庠。同列以理學推尊之。嘗與群友寢。齋中鼾睡而獨不寐。人無知者。惟崔鎭國知之。播告諸友。館中以爲有思道之功。尤加敬焉。公居家。常以不及事先君爲恨。在母側如嬰兒。未嘗遠違。凡母之所爲。不至於不義。不敢忤焉。母之志。亦不欲以非義傷公之心。故母無過擧。子無苟順之失。人謂一家行義。丙午夏。母夫人病痢。公嘗糞。日號天請代。見聞者皆感泣下。及沒。祭如儀。葬用禮。期歠粥。不食蔬果。未嘗一日脫麻衣。三年不出山口。服闋。與二弟遊智異山。見晉山岳陽洞。愛之。率妻子築室于蟾津之口。種竹蒔梅。蓋將老焉。庚戌。寺正趙孝仝,參議尹兢。薦孝行學識士林無比。成廟特召爲昭格署參奉。公謂人子分內事。上書固辭。成廟題疏尾褒之曰。聞爾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不允。是年冬。登丙科。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不悅。甲寅。除安陰縣監。人謂理邑非其能。始至。知民疾苦在賦斂。遂作便宜數十條。行之期年。而政淸民悅。境內相戒莫以欺詐負公。方伯重之。凡獄事之盤錯未易解者。用律之未審精當者。必巡面質。然後乃行。由是。道之決疑者。遠近咸歸。辨而不得意者。皆不恨其敗。稱其神明。莅事之暇。選邑之聰明子弟。親加敎誘。日課講讀。學者聞之。自遠方來。春秋行養老禮。設內外廳。內則以夫人待之。有子女貧無資。久未婚嫁者。尤厚賙之。使不失時。一境大賴。然不樂居官。將有歸田之志。戊午。坐史禍配鍾城。七年甲子夏四月一日卒。返葬于咸陽昇安洞先公墓左。享年五十五。公性端重沈靜。不喜交遊。與金寒暄堂。許以爲知己。論道講書。未嘗相離。嘗爲近侍。出家輒遣乘迎致。告以所奏於上者何如。每引古今商確。以至達曙。與衆處則言語氣象如恒人。未嘗有異。而內實惺惺焉。中年。公與人飮酒過度。大夫人憂甚。遂終身不飮。鄕會。有殺牛者。以國禁訟于官。將抵罪。大夫人又驚惶如己事。復廢食牛肉。
嘗爲縣時。所行數十科條。
今至五十餘年。
1494+50=1544-1=1543
世守爲儀軌。
雖暴吏殘人。不敢擅改。有欲改之者。則三老群吏。庭爭申申。必頷乃已。是故。擧行如國典。如此之類。於公雖細事。可以推小而測大。公歿之後。縣之吏。歲時則必進拜于夫人。夫人之沒。來役者如葬其父母。此非必當時蒙澤之人。而其子孫樂其樂利其利。追慕之深切如此。可謂沒世不忘者也。朱溪君深源,南秋江孝溫。亦嘗敬歎之。秋江嘗立傳家藏。而人鮮知者。中廟朝。朝廷議以鄭夢周,鄭汝昌,金宏弼東國理學之宗。宜極褒崇。以示尊尙之義。以明士趨。因贈議政府右議政。令邑守。春秋躬祭其廟。賜夫人爵貞敬。歲廩終其身。幷錄試其子孫。嗚呼。東方自箕子以後數千餘年。人不知學。昧失所趨。惟鄭文忠公。挺生麗末。爲我東理學之祖。厥後其傳無人。公幸與寒暄。生竝一時。奮然力學。以續夫烏川之緖。其
爲學。一以伊洛爲法。
讀書。以窮理爲要。
處心。以不欺爲主。
凡持己行事。一以誠敬爲日用工夫。
至於治平之律令格例。無不究其極致。而不得大施於當世。惜哉。公娶宗室桃平君末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生子女六人。男希稷。直長。嫡無嗣。希卨。正郞。取堂弟希參之子彥男爲後。女長適副司直崔浩文。生子彥淸。壻觀察使任虎臣。二女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三女適李賢孫。生子承壽。四女適薛公諄。生子璿。公之兄弟三人。曰汝裕。縣監。曰汝寬。生員。妹嫁宗室寧仁君楯。
任虎臣 | 1506 | 1556 | 豐川 | 武伯 | 知足庵 | 貞簡 |
公沒之四十五年。今本道觀察使任虎臣。欲立石爲表。謹具大槩。
1504+45=1549-1=1548
국조보감 제22권 / 명종조 1 / 2년(정미, 1547)
○ 이 해 7월에 백악산(白嶽山)의 큰 바위가 추락하여 멀리까지 소리가 들렸으며, 팔도에 큰물이 져서 사람과 가축과 집이 무수히 떠내려갔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부모를 뵙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도로 임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상이 인견하여 백성을 안접시킬 방책으로 누누이 면려하고 신칙하였다.
忍齋先生文集卷之二 / 碑誌 /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任公行狀。
丙午(1546,명종1) 。陞右承旨。又陞左承旨。陞都承旨兼藝文館直提學。二聖繼陟。國家多事。公盡瘁於哀疚之中。惟允於出納之間。是冬。上親享大廟。加恩執事。賞公以嘉善階。病遞爲僉知樞府。未久。拜漢城府右尹兼同知春秋館事。參修中廟實錄。出爲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公之友趙松岡士秀贈之以詩曰。平生峻節忠公直。三世棠謠父子孫。蓋以昭簡父子。亦曾按是道。此句乃實錄也。嶺南一道。地大而廣。俗多訴訐。號稱難治。公政先敎化。不喜別立科條。簿領塡委。而左右酬答。見若容易。而審之皆得其中。 (1547,명종2) 瓜滿。入爲同知中樞。戊申(1548,명종3)九月。丁母夫人憂。
任虎臣 丁未(1547,명종2)<慶尙道 方伯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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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來庵集) 정인홍(鄭仁弘)생년1536년(중종 31)몰년1623년(인조 1)자덕원(德遠)호내암(來庵)본관서산(瑞山)봉호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특기사항조식(曺植)의 문인. 대북(大北)의 영수
來庵先生文集卷之十三 / 碑文 / 一蠹鄭先生墓表銘 幷序
先生諱汝昌。字伯勖。河東其本貫也。曾王父之義。判宗府寺事。王父復周。判典農寺事。父六乙。贈漢城府左尹。先生景泰元年庚午生。生有異質。左尹爲義州通判時。華使張寧作說名之。後左尹死於叛將施愛之亂。先生號痛幾絶。亂定。入衆屍中求遺體。歸葬鄕山。先生時年十七。服關。自上錄左尹衛國功。爵其嗣。先生以父敗子榮。心不忍。辭之。不求仕進。奉母夫人甘旨不懈。凡母夫人所爲。不至不義。不敢違。母夫人亦不以非義。傷子志。故子母俱無過擧曲順之失。人稱行義家。母夫人以決科爲榮。乃遊太學。竝遊輩流皆尊敬之。南歸省親。親家癘染方熾。人勸令次外。先生便入。未幾母夫人病不起。哭泣幾滅性。俗多拘忌。先生直行不顧。襲歛殯奠皆如禮。癘患自熄。先生終無恙。人以爲癘不能相染也。及葬。方伯令郡官辦葬具。辭以煩民怨歸先親。郡守曺偉感其意。親往弔祭。人有助者亦不聽。又移左尹墓同穴。三年足不出墳山外。目不見婦人面。旣祥。入頭流山刹。遑遑如有求而不得者。或勸酒肉。輒涕泣不已。郡守親往。勉以先王中制不敢過之義。乃不敢辭。成廟特除昭格署參奉。先生以人子分內事。上章固辭。成廟題其紙尾曰。聞汝之行。予不覺涕出。今猶如此。是汝之善也。兄弟姊妹。分土田臧獲。其磽薄老弱者。先生自占。兄弟猶心不厭者。復以己所得與之。成廟庚戌。登丙科。補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不悅。便求補外。甲寅除安陰縣監。知民疾苦。明立科條。期年合境相戒。莫敢欺負。方伯信重。凡獄事難辨者。必與諮議。乃折自言。而不利者咸稱神明。莅事之暇。選鄕子弟秀者。親爲誘誨。學者多歸之。被戊午史禍。謫鍾城。無怨悔色。定庭燎役。每使星入公廨。執事惟謹。蓋行患難而自得者也。鍾城近胡境。舊無文風。先生敎誨不倦。未久有中進士科者。在謫所七年。甲子夏四月不淑。轝歸咸陽。葬昇安洞左尹墓傍某坐某向之岡。萬曆三十八年庚戌八月。國王遣官致祭于家。其文曰。曰眞儒。曰百世師也。士子建書院于郡東面。賜號蘫溪。春秋行享事。先生道德。於是乎彌彰矣。先生之學。以篤行踐實爲本。以不自欺爲日用工程。黯然之實。充積於在世之日。日章之美。自孚於歿世之後也。嗚呼。宇宙漫漫。犧黃而宋元。幾箇人是男兒。幾男兒是聖賢。況我東土聖遠地偏。道學不明。士趨多岐。訓誥以汨之。詞章以奪之。敺之以聲習。亂之以似非。故其能晦明謙光。不梏於俗學者。蓋絶無而僅有。先生以濂洛爲準的。不炫燿。不求知。爲己任者。斯道也。自期待者。聖賢也。故生事葬祭以禮者。平生之百源也。至于兄弟。信乎朋友者。百行中一事也。爲縣。吏慴民懷。愈久不忘者。設施之端緖也。惜乎道德。不咸于世。偏於一縣而已也。先生取婦宗室桃平君女。恭靖大王之孫也。生二子四女。男長曰希稷。次曰希卨。希稷嫡無嗣。更取良家女。生子如山。以母家非顯族。希卨自主後久不歸。如山生子天壽。天壽生子元禮。始以名賢後授參奉。桂壽生子興禮。亦授參奉。女長適副護軍趙 浩文。生子彦淸。女壻曰任虎臣。觀察使。次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次適李賢孫。生子承壽。又其次適薛公諄。生子璿。先生塋域。迄無表。桂壽倩工赴役。旣就緖。元禮立祠堂。妥靈承祀。後事其庶幾矣。銘曰。
鳳來周岐。去後遺儀。麟遊魯郊。僕且留蹤。惟我先生。鳳麟于東。昇安舊洞。水洋山崇。爰樹之石。三也無窮。
[주-D001] 趙 : 《一蠹集》 遺集 卷3 行狀, 《桐溪集》 卷4 〈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 등에는 '崔'로 되어 있다.
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一蠹 鄭先生 墓表銘 幷序〕
선생은 휘가 여창(汝昌), 자가 백욱(伯勖)이며 하동(河東)이 본관이다. 증조부 지의(之義)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냈고, 조부 복주(復周)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으며, 부친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32)에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부친께서 의주 통판으로 계실 적에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명설(名說)을 지어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선생은 통곡하다 죽을 뻔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 부친의 시신을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선생은 당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삼년상이 끝나자 임금이 좌윤을 위국공신에 책록하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선생은 부친의 패전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짓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차마 견디지 못하여 사직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친을 봉양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친이 하시는 일이라면 불의한 일이 아닌 한 감히 어기지 않았고, 모친 역시 의롭지 않은 일로 자식의 뜻을 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자 모두가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뜻을 굽히고 따르는 잘못이 없어서 사람들이 ‘의리를 행하는 집안’이라고 칭송하였다.
모친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자 곧 태학에 들어갔는데,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이 모두 선생을 존경하였다. 남쪽으로 돌아와 모친께 문안을 드리려는데, 친가(親家)에 역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선생더러 집밖에 머물 것을 권했으나 선생은 곧바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통곡하다가 거의 죽을 뻔하였다. 속설에 좋지 않다고 하여 꺼리는 일이 많았으나 선생은 곧이곧대로 행하고 개의치 않았으며, 습렴(襲殮)과 빈전(殯奠)을 모두 예에 맞추어서 행했다. 역병이 저절로 가라앉고 선생도 끝내 아무 탈이 없자, 사람들은 역병도 선생은 침범할 수 없다고 여겼다. 장례를 치를 때가 되자 방백이 군수에게 일러 장례 물품을 마련해주도록 하였는데, 선생은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면 돌아가신 모친이 원망을 듣게 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군수 조위(曺偉)가 그 뜻에 감동하여 직접 가서 조문하고 제문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도우려하는 것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부친의 묘를 모친의 묘와 같은 자리에 합장하였는데, 삼년 동안 발걸음이 묘지가 있는 산을 벗어나지 않았고 눈으로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대상(大祥)을 마치고 두류산에 있는 절로 들어갔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마치 뭔가 찾는 것이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허전해 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권하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칠 줄을 몰랐다. 군수가 직접 가서, 선왕이 법도에 맞게 정해 놓은 제도이니 감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들어 권하자 그제야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성종이 특별히 소격서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사람의 자식으로 직분에 맞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소장을 올려 고사하였다. 성종이 그 소장의 말미에 쓰기를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지금도 이와 같이 사양하니 이것이 그대의 훌륭함이다.”라고 하였다.
형제자매들이 전답과 노복들을 나눌 때에 선생은 그 중에서 척박한 땅과 늙고 쇠약한 노복들을 자기 몫으로 하였다. 그런데도 형제 중에 오히려 마뜩해하지 않은 사람이 있자, 다시 자기의 몫을 그에게 주었다. 성종 경술년(1490, 성종21)에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시강원 설서에 보임되었다. 정도로 보좌하고 인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자 즉시 외직을 청하여 갑인년(1494, 성종25)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다. 백성의 질고(疾苦)를 알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니, 일 년 만에 온 고을이 두려워하여 감히 아무도 속이지를 못하였다. 관찰사가 깊이 신뢰하여 처리하기 어려운 옥사는 반드시 선생께 묻고 의논하였는데, 곧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를 말하지 않았으니, 불리한 판결을 받은 자들도 모두 귀신처럼 밝고 지혜롭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정사를 보는 여가에 고을 자제들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들을 뽑아서 몸소 가르치니,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료역(庭燎役)에 배정되자, 사신이 공관(公館)에 들어올 때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냈으니, 환난 속에 처했으면서도 자득한 면이 있었다 하겠다. 종성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 예로부터 문풍이 없었는데, 선생이 부지런히 가르치니 오래지 않아 진사과에 합격한 자가 있었다. 유배지에서 지낸 것이 7년이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10) 여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영구(靈柩)를 함양으로 모셔와 승안동 부친 묘 옆(昇安洞) 모좌 모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만력 38년 경술(1610, 광해군2) 8월에 국왕이 관리를 보내 가묘에 사제하였는데 그 제문에서 “진정한 선비”, “백 세의 스승”이라 칭하였다. 선비들이 군의 동면에 서원을 세우자 임금이 남계(灆溪)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니 선생의 도덕은 이에 더욱 드러났다.
선생의 학문은 독실하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매일의 공부 과정으로 삼았다. 은은한 덕의 실상은 살아계실 때 채워지고 쌓여서, 드러난 아름다움은 돌아가신 후에 저절로 빛났다.
아아! 우주는 다함이 없는데 복희(伏犧)와 황제(黃帝)로부터 송(宋)ㆍ원(元)대에 이르기까지 몇 사람을 남아라 할 수 있으며 그 남아 중 성현은 몇이나 되는가? 더구나 우리나라는 성인의 시대로부터 멀고 땅도 궁벽하여, 도학은 밝지 못하고 선비들이 취향도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훈고(訓詁)에 빠져들고 사장(詞章)에 뜻을 빼앗기며, 성망과 습속으로 핍박하고 그럴듯한 것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그리하여 자신의 덕을 안으로 감추어도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서, 속된 학문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전혀 없거나 겨우 남아있다.
선생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를 표준으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은 유학이었고 자신이 되고자 했던 것은 성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 섬기고 돌아가시면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일을 예에 맞게 한 것은 평생토록 행했던 모든 예의 근원이었다. 형제에게 지성으로 대하고 친구들에게 신뢰를 받았던 것은 많고 많은 일 가운데 하나였다. 고을을 다스릴 적에는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사랑하여, 그들이 오래될수록 잊지 못했던 것은 시혜를 베풀었다는 단서이다. 아쉽도다! 선생의 도덕은 세상에 두루 전해지지 못하고 한 고을에 치우치고 말았을 따름이니.
선생은 종실 도평군(桃平君)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니 정종(定宗)의 손녀이다.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희직(希稷)이고 차남은 희설(希卨)이다. 희직은 적실에 후사가 없어서 다시 양가(良家)의 딸을 맞이하여 아들 여산(如山)을 낳았지만, 어머니 집안이 현달한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희설이 제사를 주관하였는데 그 후로도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았다. 여산은 아들 천수(天壽)를 낳았고 천수는 아들 원례(元禮)를 낳았는데, 원례가 명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비로소 참봉에 제수되었다. 계수(桂壽)는 아들 흥례(興禮)를 낳았는데 역시 참봉에 제수되었다.
맏딸은 부호군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가서 아들 언청(彦淸)을 낳았다. 사위는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다. 차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안수(安壽)를 낳았다. 셋째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承壽)를 낳았다. 넷째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璿)을 낳았다. 선생의 묘역에 아직 묘표가 없어서 계수(桂壽)가 장인(匠人)에게 일을 시켜 일을 시작하였다. 원례는 사당을 세워 영령을 모시고 제사를 받들고 있으니 뒷일은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주나라 기산에 봉황이 날아오니 / 鳳來周岐
가신 후에 본보기를 남겼도다 / 去後遺儀
기린이 노나라 교외에서 노니 / 麟遊魯郊
나도 머무르며 따르네 / 僕且留蹤
아아, 우리 선생이시여 / 惟我先生
동방의 봉황과 기린이로다 / 鳳麟于東
승안동 옛 고을에 / 昇安舊洞
물결은 넘실대고 산은 높아 / 水洋山崇
이에 비석을 세우니 / 爰樹之石
세 가지가 무궁토록 전하리라 / 三也無窮
[주-D001] 정여창(鄭汝昌) : 1450~1504.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0년(성종21)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ㆍ세자시강원 설서ㆍ안음 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술로 《일두집》이 있다.[주-D002] 장녕(張寧) : 1460년(세조6) 2월에 중국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世祖實錄 6年 2月 6日》[주-D003] 습렴(襲殮) :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염포(殮布)로 묶는 일을 말한다. 염습(殮襲)이라고도 한다.[주-D004] 빈전(殯奠) :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 전에 시체를 안치하고 제사를 올리는 일을 말한다.[주-D005] 조위(曺偉) : 1454~ 150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5년(성종6) 문과에 급제했다. 함양 군수를 지낸 적이 있다. 무오사화로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술로 《매계집》이 있다.[주-D006] 도평군(桃平君) : 1402~1439. 정종(定宗)의 12남으로, 자는 계회(季悔), 호는 규은, 이름은 말생(末生)이다. 정여창의 부인은 도평군의 둘째 부인 전주 최씨 소생이다.[주-D007] 최호문(崔浩文) : 저본에는 '조호문(趙浩文)으로 되어 있으나, 《일두집(一蠹集)》 유집 권3 〈행장〉, 《동계집(桐溪集)》 권4 〈문헌공 일두 정선생 신도비명(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 등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8] 세 가지 : 입덕(立德), 입언(立言), 입공(立功)의 삼불후(三不朽)를 말한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