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지역 천주교회사
▲ 황새바위성지 순교탑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정환 요한 신부가 "공주지역 천주교 유적과 활용"이란 주제로 발표한 내용 중 일부를 참고로 합니다.
1) 황새바위 성지
황새바위는 천주교의 순교성지이다. 천주교에서 순교란 자신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순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최고 표현으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고 그분과 일치하는 방법이며 최고의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여겼기 때문에 신자들은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하였다.
황새바위가 순교터가 된 근원을 따지고 보면 충청도의 감영이 공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학죄인으로 취급된 충청도의 천주교인들이 감영이 있는 공주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처형된 곳이 황새바위였다. 따라서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있던 공주감영 역시 천주교의 중요한 유적이 된다. 신자들이 심문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한 자리이기에 순교터와 더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순교자들이 심문을 받던 장소는 순교자들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리는 시복시성(諡福諡聖) 절차에서 꼭 확인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공주감영터의 경우 2006년 5월 9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성시복특별위원회 위원들과 대전교구 책임자들이 방문하여 직접 확인한 바 있다.
2) 장깃대나루
장깃대나루는 옛날 사형(死刑)을 집행하던 깃발이 꽂혀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곳은 공주대교가 생기기전 옥룡동과 시목동을 연결하는 나루였다. 이곳에서 1894년 7월 29일 프랑스 선교사 죠조(Jozeau) 신부가 피살되었다.
죠조 신부의 피살은 동학농민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다고 여겼던 상황에서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또 다른 박해의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 반외세를 기치로 내건 농민군들은 서양 세력과 동일시하던 천주교 선교사들과 신자들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과거 장깃대나루에는 죠조 신부의 죽음을 기리는 십자가가 새겨진 나무 표지가 있었다.6ㆍ25전쟁 이전부터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옛날에는 홍수가 지면 모래사장도 사라지곤 하였는데 이런 영향으로 나무 표지도 사라진 듯하다.
3) 박해시대의 교우촌
산간지대에 위치한 공주지역은 충청도의 내포지역 보다 천주교의 전파 시기는 늦지만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은신처였다. 이런 이유로 여러 곳의 신자들이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루었다.
교우촌명 | 현재 지명 | 비고 |
국실 | 반포면 국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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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리 | 반포면 봉곡리 | 산우리 |
지석골 | 반포면 학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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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티 | 사곡면 가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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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밧 | 사곡면 신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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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골 | 사곡면 유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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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우성면 안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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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치골 | 신풍면 봉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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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시니 | 신풍면 선학리 | 사랑골 |
만년동 | 유구읍 만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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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골 | 신풍면 백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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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골 | 사곡면 유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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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이 | 신풍면 조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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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재 | 우성면 봉현리 | 무티 |
관불 | 유구읍 녹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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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룰 | 정안면 고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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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랑이 | 정안면 내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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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에 언급한 교우촌들은 대부분 1937년에 발행한 <<공주천주교회 연혁>>에 ‘박해시의 천주교
표1)에 언급한 교우촌들은 대부분 1937년에 발행한 <<공주천주교회 연혁>>에 ‘박해시의 천주교도의 은거지’로 분류된 교우촌으로 당시 공주 본당 관할에 있는 지역이었다. 이들 중 몇몇은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 잘 알려진 교우촌들이다.
먼저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은 페레올(J. Ferréol)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신부가 ‘성모성심회’를 창립한 곳으로 유명하다.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면서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인 병오박해가 발생하였다. 9월 16일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된 후 박해가 잦아들었으나 선교사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1846년 11월 2일자로 성모성심회를 수리치골에 창립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까지 항해를 할 때에 성모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여 무사히 항해를 마친 것과 같이 박해 속에 살고 있는 조선천주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성모성심회는 기도에 주력하는 단체로 창립되었으나 박해 이후 변화를 겪으면서 ‘성모회’로 명칭과 활동 내용이 바뀌었다. 지금은 각 본당 안에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활동단체이다.
3. 박해 이후의 유적
병인박해(1866)의 여파가 잦아들면서 1876년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잠입하기 시작하였다. 입국한 선교사들이 활동을 위해 주로 은신처로 삼은 곳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고산지역과 산간지대인 공주지역이었다.
1) 공소와 본당
공주지역의 교우촌들은 대부분 공주 외곽의 산간지대에 분포해있었다. 이것은 같은 충청도에 속하면서도 지리ㆍ문화적으로 구분되는 내포지역과 대별되는 특징이다. 산간에 위치한 특성 때문에 공주지역의 교우촌들은 공식적인 박해 후에도 계속되는 사사로운 박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1880년에 작성된 한 선교사의 보고서가 이를 잘 말해준다.
“1868년까지 모든 박해를 이겨냈던 내포 공소는 오늘날 그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금년도 이 지방의 성사집행은 불과 몇몇 마을로 국한될 뿐입니다. ㆍㆍㆍ 우리 불쌍한 교우들은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 대부분이 지금 서남부 지방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 지방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3천 명에게 고해를 주었고 성인 59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각 지역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큰 교우촌을 중심으로 공소가 형성되었다. 공소(公所)는 본당 신부가 상주하지 않으나 본당에서 소속 신자 집단으로 인정한 교우촌, 또는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소도시의 한 장소나 건물을 지칭한다. 이는 본당(本堂)의 상대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주임 신부가 거주하는 본당이 본가(本家)의 역할을 한다면 공소는 작은 집을 역할을 하는 곳이다.
교우촌, 공소명 | 설립연도 | 설립시 신자수 | 현재 지명 | 비고 |
요골 | 1884년 이전 | 42명(1884) | 유구면 명곡리 2구 | 배실 위 골짜기 |
적바위 | 1884년 이전 |
| 유구면 문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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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 1884년 이전 | 76명(1884) | 유구면 명곡리 1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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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리 | 1884 | 65명 | 신풍면 선학리 | 버시니 |
산막 | 1885 | 90명 | 사곡면 구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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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실 | 1886 | 20명 | 이인면 운암리 | 삼바실, 삼밭실 |
사기점골 | 1886 | 81명 | 유구면 명곡리 1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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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말(광정) | 1887 | 47명 | 정암면 내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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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산 | 1887 | 27명 | 탄천면 운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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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 1887 | 20명 | 공주읍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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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악골 | 1888 | 60명 | 유구면 명곡리 1구 | 만앵골, 말안골 |
청룡 | 1890 | 164명 | 의당면 청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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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광정) | 1891 | 24명 | 정안면 광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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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 | 1891 | 26명 | 정안면 내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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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라니 | 1892 | 32명 | 정안면 산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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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실 | 1893 | 49명 | 유구면 명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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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 | 1895 | 38명 | 우성면 단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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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울(광정) | 1897 | 69명 | 정안면 고성리 | 질그릇 점 |
놋점 | 1898 | 31명 | 탄천면 운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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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 | 1900 | 2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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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동 | 1903 | 14명 | 의당면 덕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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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 1909 | 103명 | 의당면 송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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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산리 | 1909 | 32명 | 유구면 탑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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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군 | 1909 | 3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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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골 | 1909 | 55명 | 신풍면 평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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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성 | 1910 | 108명 | 계룡면 상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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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 | 1910 | 30명 | 유구면 녹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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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지역은 교우촌에서 공소로의 전환이 용이했기 때문에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공소들이 25곳이 넘는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공소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몇몇 곳은 기억할 만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요골, 사기점골, 사랑골 공소가 대표적이다.
요골(유구면 명곡리 2구) 공소는 박해를 피해 경기도 고양에서 피난을 내려온 신자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비롯되었다. 1884년 이전부터 신자들이 거주하였으며 한때 400여명에 이르렀다. 산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구분되어 있는 사기점골(명곡리 1구) 공소와 더불어 오랜 역사도 가지고 있다. 두 공소가 있는 지역을 서재라고도 불렀는데 공주 본당이 설립되던 초창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초대 주임 신부가 공주읍내에 본당 자리를 정하기전 서재에 기거하면서 본당의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현재 요골 공소에는 공소 건물이 있고 그곳의 역사를 기리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사기점골 공소에는 1910년에 건축된 공소 건물이 있었으나 한 신자의 실화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한때 80여명의 신자들이 거주하였고 6ㆍ25전쟁 중 2명의 신자가 공산군에 의해 피살된 아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1953년에 신축된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공주 본당 최종철 신부가 기증한 종이 유품으로 남아 있다.
사랑골(신풍면 평소리) 공소는 박해 이후 모여든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에서 비롯되었다. 1906년경 김치삼과 다른 세 가족이 이주하여 옹기를 굽기 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한때 200여명이 넘었다. 이 공소에 관해서는 1920년대 신자들의 모범적인 모습이 천주교 잡지에 소개된 바 있다. 하나는 죽음을 앞둔 신자가 공주 본당까지 직접 찾아가 종부성사(병자성사)를 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9살 꼬마 아이가 동네 어른을 설득하여 죽어가는 아이에게 대세를 준 이야기이다. 사랑골에는 1957년에 건립한 5량식 공소 건물이 남아 있다.
2) 중동 성당과 사제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때 공주(중동) 본당의 가장 훌륭한 유적은 1937년에 지어진 성당과 사제관이다. 두 건물은 1998년 7월 25일자로 시도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프랑스 신부가 설계한 성당과 사제관은 공주지역에서 흔하지 않은 서양식 적벽돌 건물이다. 당시 한국에는 벽돌을 이용한 건축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시공이 이루어졌다. 변형된 라틴 크로스형과 고딕양식이 결합되어 있는 성당은 전통적 목조건물에서 근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동 성당 역시 한국의 유서 깊은 성당들처럼 언덕이라는 장소성을 한껏 살려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