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년 김산 양사당기(養士堂記) 송상기(宋相琦,1657~1723)
◾윤택(尹澤,1665~1719)[진1668] [음] 본관은 해평. 1707. 7.17.~1711. 1.20. 김산군수로 재임하면서 興學에 힘씀.
◾송상기(宋相琦,1657~1723)[진1646][문1684] 본관 은진. 字옥여(玉汝), 號옥오재(玉吾齋). 학유(學諭) 송희원(宋希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국전(宋國銓)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송규렴(宋奎濂)이다. 어머니는 동지(同知)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김산군읍지>1899년 간행 <국역,김천역사지리지> p472 참고 재번역
養士堂記(양사당기)
송상기(宋相琦,1657~1723)
國家養士之制備矣 自太學達于州郡 以至遐陬僻壤 莫不有學. 又有書院 起于中古 愈久愈盛 今則殆無邑無之 其誘掖藏修之具 可謂盡矣. 然則金山倅尹春卿之剏設養士堂之者豈不贅哉. 且春卿之言曰 嶺南舊以文献名 近雖日就汚下 他邑則猶多以科第進者. 而金陵獨無聞 此非其才之罪 将由敎養之闕而然也. 吾之爲此 盖欲振其衰而勖其成也.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제도를 갖추어, 태학에서부터 주와 군에 이르러 먼곳의 벽지의 외진 땅까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다. 또 서원이 중고에 일어나 오래도록 번성하여 지금은 거의 없는 읍이 없이 그 유액하고 장수하는 도구로서 다하였다. 그렇기에 김산군수 윤춘경이 양사당을 창설한 것은 어찌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또 춘경의 말에 “영남은 예로부터 문헌으로 유명했지만, 근래에 오히려 날마다 낮은 곳으로 나아갔기에 타읍들이 오히려 과거에 나아가는 이들이 많다. 금릉이 홀로 (급제자를) 들을 수 없으니, 이는 그 재주 때문이 아니라,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결여된 것에서 기인한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그 쇠함을 떨쳐내고 그 성공에 힘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추(遐陬) : 먼 곳의 벽지. *윤춘경(尹春卿) : 윤택(尹澤,1665~1719) [진1688] 字춘경(春卿). 김산군수 역임(1707~1710) *오하(汚下) : 낮은 곳
夫文詞於士己末矣. 而况又以科第導之 不亦末之末乎. 贅且末如是 豈可謂知所先後者哉. 嘻是亦有說, 夫學校之政 不講久矣, 敎率全廢 習俗日渝, 爲士者 未聞有一人講學於其中. 其獘也 雑流庸, 呂謀漏尺籍者 皆歸之朝庭之待之也 亦不以章甫視之 是何可與論於養之之道哉. 至於書院則視校 稍彬彬可觀. 間亦有能文詞 識道理者 此不可少也. 而然以其議論趣舍之常悖 紛爭攻擊 無復有群居講誦之美. 如是 欲望士風之變而學業之傳 其可得乎.
대저 문사(文詞)는 선비에게 하찮은 일이거늘, 하물며 또 과거시험으로 이끄는 것은 하찮은 것 중의 하찮은 것이 아니겠는가. 군더더기와 하찮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선후를 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아. 여기에 대해서 말을 하면, 대저 학교의 운영에서 강의를 하지 않은지가 오래되어,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완전히 폐지되고 습관과 풍속이 날로 달라져, 선비된 자로서 한 사람도 그 속에서 강학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 폐해로 류민들이 섞이고, 향약은(여씨는) 군적에서 빠질 것을 도모하여, 모두 조정에 대비하는 것에 귀결되어 공부하는 선비를 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어떻게 선비를 기르는 도를 함께 논의 하겠는가.
서원은 향교에 비해 조금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다. 간간이 문사에 능하고 도리를 아는 이가 있었으나, 이들은 적다. 그래서 그 의론은 나아가고 머무는 것이 항상 어긋나고 다투어 공격하니, 여럿이 거주하며 강송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할 수 없다. 이와 같은데 선비의 기풍이 변해 학문에 전념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류용(流庸) : 가난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품삯을 받고 일을 하던 사람을 가리킨다. *척적(尺籍) : 군령(軍令)과 군공(軍功)을 기재한 장부. *장보(章甫) :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 *취사(趣舍) : 나아감과 머무름.
今此養士之方 雖未之詳 槩聞其規制, 則擇其士之秀者. 勿拘冠童 勿限員額, 輪畨試藝 一月而三之. 又以年老儒生有學識者 推而爲師, 倣古山長以考其等第而率其怠惰. 又割官俸以贍之 定邑吏以掌之 要爲久遠之圖. 而其程督科條 纎悉備具 不至於有成則不己. 盖校之雜非所憂 而院之爭無由起矣.
지금 이 양사의 방안은 비록 상세하지 않지만 그 규제의 대략을 들으니, 선비의 우수한 이를 택하는 것은 기혼 미혼에 구애받지 않고 인원에 한계를 두지 않으며, 한 달에 세 번 돌아가며 기예를 시험하였다. 또 연로한 유생 중에 학식 있는 이를 스승으로 추천하고, 옛것을 모방하여 산림의 어른으로 그 등급을 살펴보고 게으른 것을 이끌게 하였다. 또 관봉을 쪼개어 넉넉하게 하고 읍리를 정해 관장하게 하여서 오래도록 할 수 있도록 계부획하였으며, 그 정독과 과조를 상세히 갖추었으니, 성공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향교의 잡배들은 걱정할 바가 아니며, 서원의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기(不己) : 멈추지 않다. 《시경》정풍(鄭風)〈풍우(風雨)〉에 나오는 시인(詩人)의 ‘비바람이 싸늘한데 닭울음 소리 멈추지 않는구나.(風雨凄凄 鷄鳴不己)
傳所謂 不見異物而遷者 亦畧近之. 其爲風勵 作成之效 豈校院之比哉. 况居今之世 科第亦何可廢也. 夫以初學之士遽語以向上事業 豈人人所可承當. 聖賢之言 布在經傳 爲士子但當誦讀服習則學卽在是 亦豈外此而他求哉. 况古今儒賢 亦多出自科目, 此先儒所以有不患妨功 惟患奪志之言. 而退溪先生亦於伊川書院記文 因其居接之名而推論講學之義甚備者也. 由此觀之 科目亦何甞累人. 旦不當以利害得失 汩扵心耳.
경전에 말하기를 ‘보지 않고 옮긴다’하는 것도 역시 대략에 가깝다. 그 장려하고 만들어 이루는 효력이 어찌 교원에 비교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세상에서 살면서 과거 역시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처음 배우는 선비가 사업을 향상시키는 것을 갑자기 말하면 어찌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성현의 말씀이 경전에 펼쳐 있으니, 선비가 되어 다만 읽고 외우며 복습하면 학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정식의 글이라도 어찌 이것을 외면하고 다른 것을 구하겠는가.
하물며 고금의 유현들이 과목으로 공부한 데서 나왔으며,거공부에 대해 선유는 “공부에 방해될 것이라고 근심하지 않더라도, 오직 뜻을 빼앗기지 않도록 걱정한다.”라고 말하였다. 퇴계 선생 역시도 이천서원기문에 “거접하는 곳의 명칭은 강학하는 뜻을 추론하도록 매우 잘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볼 때 과거시험이 어찌 사람을 얽매었겠는가. 다만 이해득실을 감당할 수 없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다.
*不患妨功 惟患奪志(불환방공 유환탈지) : 정이천(程伊川)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학문 연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자신의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科擧之事 不患妨功 惟患奪志]”라고 한 말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있음. *거접(居接) : 과거를 보려고 글방이나 조용한 곳에 모여 공부하는 것
諸生之居扵邑者 苟能以此存心 勉其精専 戒其荒嬉, 攻文力學 卓然有立. 終至發軔清朝 接武先哲 一洗汚下之風 進復文獻之盛 則奚但無負賢太守之意 而爲一郡之榮 而己他邑之士 亦將有聞風興起者 而仰禆國家樂育之化 不淺鮮矣. 然則春卿此舉 雖謂之急先務可也. 安得以其贅且末而忽之乎. 諸生其勉矣哉. 歲己丑三月恩津宋相琦記
읍에 사는 유생들은 진실로 이것을 마음에 새겨서, 오로지 정진하며 노는 것을 경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우뚝하게 서거라. 마침내 맑은 흐름을 시작하여 옛 성인을 차례로 잇고, 더러워진 풍조를 씻어버리고 문헌이 번성했던 시절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어진 태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 뿐이겠는가. 한 고을의 영광이 될 것이고, 다른 고을의 선비들의 모범이 될 것이며, 장차 풍문을 듣고 흥기하는 이들이 나라의 교육정책을 우러러 돕는 것이 뚜렷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춘경의 이 일은 비록 급한 일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그 전말에 대해 사소한 것이라도 소홀히 하겠는가. 제생들은 그 것을 힘스거라. 기축년(1709년) 3월 은진인 송상기
*발인(發軔) : 수레가 떠나간다는 뜻으로, 어떠한 일을 처음 시작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춘경(춘경) : 윤택(尹澤,1665~1719)[진1668] [음] 보노간은 해평. 1707. 7.17.~1711. 1.20. 김산군수로 재임하면서 興學에 힘씀. *송상기(宋相琦,1657~17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 자는 옥여(玉汝) , 호는 옥오재(玉吾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