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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 현감(知禮縣監) 노진(盧禛)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시호문효(文孝) 함양 출신.
한국문집총간 > 옥계집 > 玉溪先生續集卷之二 > 祭文 > 최종정보 대덕산기우제문 등을 남김
1556. 8월, 부교리가 되다. 외직을 구하려고 사직하였는데 공조 정랑에 제수되다.
사직하고 귀향하다.(1556~1557)
知禮에 遺愛碑가 세워지다.
이후백(李後白,1520~1578) 이 남긴 登第下鄕途中。寄知禮使君盧玉溪와 이후의 글들이 있음
■가계
>5 노흥길(盧興吉)
>4 노언(盧焉)
>3 노숙동(盧叔仝,1403~1463) [문1436] 예조참판
>2 노분(盧昐,1437~1478) [문1466]
>1 노우명(盧友明,1471~1523) [進1498]이며, 配사성원 권시민(權時敏)의女.
>0 ①노희(盧禧)
>0 ②노진(盧禛,1518~1578) [생1537][문1546] 시호문효(文孝). 이조판서 配안처순(安處順)[文]의女 함양 옥계거주
>-1 ①노사훈(盧士訓) [진] 음보(蔭補)로 별좌(別坐) 配참봉(參奉) 조언(趙堰)의女
>-2 노승(盧勝) [음보] 봉사(奉事) 配1 참판(參判) 정구(鄭逑)의女, 配2 하씨(河氏) 형달(亨達)을 낳았다.
>-3 노형우(盧亨遇) ,
>-2 女 여희좌(呂姬佐) >①여절(呂沏)은 2남을 두었고, >②여곽(呂漷)은 4남을 두었으며, >③여함
*감호집에는 여희좌가 노사훈의 사위로 기록되어 월사집의 옥계선생선도비명과 상이.
>-1 ⑦노사심(盧士諗) 配김효사(金孝思)의女
>-1 女1 유기(柳起) 무후
>-1 女2 허성필(許成弼) >허환(許寏)이고 딸은 최응형(崔應亨)에게 출가
>0 ③노관(盧祼)
■관력
이조판서 우부승지, 충청도관찰사
■기록
○ 지례현감 재임시절 시문이 있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몽량(李夢亮)이 염근(廉謹)한 수령인 지례 현감(知禮縣監) 노진(盧禛)을 천거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취문(金就文)·노진(盧禛) 같은 사람도 또한 모두 학행이 있어 염근(廉謹)으로만 지목될 사람은 아니니, 이들을 발탁하여 좌우에 두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그러나 높이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니, 당시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권한을 가진 자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 11월 4일 임오 1번째기사 1552년
지례 현감(知禮縣監) 노진(盧禛) ....이상 14인에게는 각기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 8월 1일 경진 2번째기사 1578년
이조 판서 노진(盧禛)이 졸하였다. 노진의 자(字)는 자응(子膺)인데 함양(咸陽)의 옥계(玉溪)에 살았으므로 문인들이 옥계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 노우명(盧友明)은 학문과 조행에 있어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오지 않았다. 노진이 겨우 강보(襁褓)에서 벗어날 때부터 그의 아버지가 성리학의 문자를 가르치니 노진이 기뻐하면서 힘써 읽혔다.
노진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 동안 복제를 어른처럼 지켰으며 장년이 되어서는 문학이 일찍 성취되어 그 명성이 대단했다. 과거에 급제하자 두 번이나 사관(史館)에 천거하였지만 나가지 않았으며 예조 좌랑으로서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자청하여 모친을 봉양하였다. 벼슬살이 30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일찍이 내직(內職)에 오래 있지 않고 네 번 목사와 군수가 되었고 두 번 감사가 되었던 것은 모두 모친을 위한 때문이었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잠깐 사이도 모친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손수 감지(甘旨)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끝내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친의 나이 70세가 되자 전적으로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간청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늘그막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복을 입었는데 여묘살이를 하면서 슬픈 각고속에 조석으로 묘소에 오르는 일을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시행하다가 결국 그로 인하여 병이 들고 말았다. 모친의 복을 마치고 나서 공의 왕후(共懿王后) 의 상사를 치르기 위하여 형조 판서로 대궐에 나왔으나 병세가 이미 위중하였다. 재차 대사헌으로 삼았으나 숙배하지 못하였고 병조에 옮겨 제수하였다가 또 이조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출사할 수가 없었다.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고 약을 하사했지만 얼마 후에 졸하고 말았다. 사대부가 서로 조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시골 사람들이 상구(喪柩)을 맞이하여 회장(會葬)하였으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사람이 모두 와서 조문하였다. 예조가 그의 효행을 상께 아뢰니, 그 문에 정표하라고 명하였다.
노진은 성품이 온화하고 장중하였으며 지조가 확고하여 간신들이 권병을 천단하던 때를 당하였지만 한번도 행적에 물들지 않았고 벼슬살이도 청렴하고 근실하게 하였으므로 상이 특별히 포상을 내려 아름답게 여겼다. 그는 관리의 사무에도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김계휘(金繼輝)가 영남 지방을 안핵하면서 그가 행한 공적을 조사해 보고 감탄하기를 ‘덕행과 문학에다 관리의 사무까지 이처럼 통달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은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으며, 뒤에 문효(文孝)란 시호를 내리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시호를 받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월사집 > 월사집 별집 제6권 > 신도비명 > 최종정보
문효공 옥계 노 선생 신도비명 병서 〔文孝公玉溪盧先生神道碑銘 竝序〕
이정귀
昔我宣廟勵精圖治。好尊用儒臣。其冢宰曰玉溪盧公。以道德文行伏一世。無何。卒于京城僦舍。宣廟慟惜輟朝。賜祭賻錫加常數。其年。禮部以公孝行聞。宣廟益嘉之。命有司棹楔公閭以旌之。公諱禛。字子膺。晩卜居玉溪。學者稱爲玉溪先生。系出豐川。國子進士諱裕。是其鼻祖。世有衣冠。麗末避虜。徙居咸陽。遂爲咸陽人。入我朝。諱叔同。以文章淸白顯。英廟朝。官至禮ⓟ曹參判藝文館提學。生諱昐。再擢第。爲藝文館校理。有三子。皆擧進士。其仲最賢。好學守志。名其堂曰信古。卽公考也。諱友明。慕齋金公薦于朝。除顯陵參奉。不赴。娶安東權氏生員時敏之女。以正德戊寅。生公於咸陽天嶺下。公英儁夙成。動止自矩。自在孩提知讀書。信古公奇愛之。手書中庸及朱子箴銘以敎之。一見輒誦。欣然若有心會。稍長。能自課學。文義日章。丁酉。中生員第七人。公年始二十。華譽藉甚。德器粹然。人咸愛敬之。所與遊。皆當世名人。如河西金公,高峯奇公,穌齋盧公。契許最深。相與爲道義交。丙午。擢第。選補槐院。再薦史局。ⓟ皆不就。竟以博士。例陞典籍。遂自南宮郞。出知知禮縣。蓋公素不喜榮進。家貧急於便養故也。朝廷命揀中外廉謹。公與焉。賜衣一襲。俄徵爲弘文館修撰。陞校理。入對。敷奏明剴。進止閑雅。宰相尹漑見謂人曰。眞講官也。轉持平。復爲修撰校理。選拜吏曹佐郞。戊午。陞弼善。遷副應敎。明年。自掌令遷授檢詳舍人。陞執義典翰。遂拜直提學。時權奸之當路者。與公連姻。重公才望。諂語求款。覬公一言相助。公閑戶不應。一未嘗濡迹。士論益重之。庚申。特旨陞秩。拜刑曹參議。轉入銀臺進右副。明年。以大夫人年踰七十。援法上章。懇乞歸養。明廟ⓟ命除傍近守令。仍賜豹褥。以章其孝。遂拜潭陽府使,晉州牧使。皆以病徑還。不久於治。而潭,晉之民。久愈思之。丁卯。以吏曹參議。出拜忠淸觀察使。病劇辭還。拜全州府尹。秩滿。以副提學承召上來。俄上疏乞歸養。宣廟慰諭。命給暇。帶職往還。公旣歸。又上辭章。附以箴警之辭。聖旨嘉奬。遂許遞職。仍命其道官給養親之需。公上箋陳謝。辛未。拜昆陽郡守。明年。以大司諫吏曹參議召。皆不赴。御筆陞嘉善拜慶尙觀察使。又明年。拜大司憲,同知春秋館事。赴召未月。三上章。乃得歸。亞西銓,長薇垣。旋拜吏曹參判。仍兼藝文提學。皆不赴。乙亥。ⓟ特進階資憲。拜禮曹判書。上疏固辭。兼陳時政闕失。略曰。由養神而養性。先定志而稽古。遠追帝王之遐軌。不狃近規之因循。毋恃獨運而輕一世之士。毋作聰明而兼庶司之務。嚴宮禁尊卑之分。杜近習浸潤之漸。毋進銳而退速。毋始勤而終怠。疏未達而移拜吏曹判書。又上章不赴。是年。大夫人卒。服闋。遭恭懿殿之喪。以刑曹判書奔臨。病遞。拜工曹判書。再爲大司憲。皆未出謝。俄拜大司馬。供職纔數旬。移告乞解。又拜吏曹判書。公病已亟不能起。政院啓言盧某素有德望。爲士林所宗。居喪執禮逾制。今病危劇。宜有問疾之禮。宣廟卽遣內ⓟ醫。連賜藥物。病革。言不及家私。但曰吾不得畢命松楸。實非平生之志。遂卒。春秋六十一。卒之日。家無甔石。賴賜賻乃克斂殯。洛中士夫。傾朝奔哭。街童走卒。無不悲慟。其返葬。咸之士民無少長。迎於境上。哭弔賻無不盡。其窆也。數郡畢至。未至者爲位而哭。公和而介。達而諒。安詳而莊重。鄙倍之言。粗俗之行。不形色辭。處心樂易。不爲崖岸。平居恂恂。若無甚可否。而及其臨事制行。毅然自持。一聽於義理。不以利害得失有所變易。接賓朋一以誠悃。與人語惟恐傷之。而見不善則斬然無所假貸。望之知其爲大德君子。至於孝友則天得也。孩提之ⓟ時。已知禮制。信古公之歿。公年尙少。哭泣悲哀如成人。從伯氏于山廬。大夫人泣謂曰。汝年幼血氣未成。宜食肉以全生。公曰。兒今六歲。及免喪則八歲。八歲之人。不服父喪可乎。夫人感其言莫能屈。遂守制終三年。常以早失庭訓爲至痛。大夫人亦鍾愛異常。乍出輒倚門而望。故少而游學。不敢稍遠。長而仕宦。未嘗經時。定省之職。怡愉之樂。至老如一日。家雖貧約。手具甘旨。不見窘色。事伯兄如事父。和敬兩至。旣歿。遇諸孤猶已出。悶宗事零替。再作祠廟。營備器具。祭需悉出於己。不令主祀者憂之。大夫人寢疾。公累月不解衣。嘗糞以驗吉凶。及ⓟ喪。公年已六十。而廬墓三年。執禮刻苦。雖祈寒盛暑。大風雨雪。不廢上塜。奉先之禮。必遵先儒定制。齋祭必浴。躬莅奠具。功緦之服。必盡其制。知舊之喪。必致其哀。撫孤寡賑窮乏。咸有恒式。家素淸貧。無田於野。無宅於京。雖屢典州府。脂瀡之外。自奉甚約。去官匹馬還鄕。幞被蕭然。每遇時和景明。携親舊帶冠童。僧廬溪舍。往來自適。惟以書帙自隨。煕然有浴沂之興。人不知爲宰相也。學徒之負笈者。日以益盛。談說道義。亹亹不倦。常尊信論語,小學,近思錄。與退溪先生講論大學宗旨。往復書札。深相敬重。公常曰。爲學不在多言。求之大學篇首十ⓟ六言足矣。是以其學必本諸身。告君必引三代。未嘗爲功利淺近之說。爲文章。不事浮靡。典雅贍暢。深得濂洛文體。於詩雖不屑意。而往往趣味悠遠。絶不蹈襲陳言。所著詩文若干卷行于世。公一生靜養。沈潛學問。若未嘗留意世務。而其爲州郡。祇愼事職。其所設張。必本於寛大。亦未嘗規小利以起事。飾聲章以立名。嶺南地大號難治。公爲按廉。以誠任煩。嚴不爲苛。宿訟滯獄。片言剖決。猾胥斂手。汚吏望風。民以順賴。一路大治。金公繼輝代按公績曰。不料德行文學兼通吏務乃如許也。公娶順興安氏己卯名人處順之女。濡染家庭。夙有幽閒ⓟ之德。爲婦而敬。爲母而慈。眞君子之配也。先公十歲。歲戊辰卒。葬咸陽酒谷子坐午向原。與公同兆。擧七男。長曰士訓。擧進士不第。蔭補別坐。娶參奉趙堰女。生一男勝。蔭補奉事。初娶參判鄭逑女。生一男。亨遇再娶河氏。生一男亨達。女適呂姬佐。生三男一女。長沏。生二男。次漷。生四男。次涵。皆幼。亨遇生二男。幼。曰士誨。以才行選入仕。累官至益山郡守。娶柳凝女。生二男三女。長亨緖。女適許欖。餘幼。女長適許𢜬。次適監察姜應璜。生一男珣。次適李益彬。生三男三女。亨後生二男。皆幼。曰士訢。娶趙完女。生一男脊。生一男二女。男亨弼。女適楊汝梅。ⓟ生一男一女。幼。次適朴商質。曰士諤,士詮。無后。曰士詹。娶牧使朴光玉女。無子。取士誨子肵+口爲后。曰士諗。娶金孝思女。生二男二女。長郁生員。生一男三女。男亨益。女幼。次縢。生二男一女。皆幼。女長適金汝鋌。生一女。幼。次適郭以峻。生一男一女。皆幼。公之二女。長適柳起。無后。次適許成弼。生一男一女。男寏。女適崔應亨。許寏生一男三女。崔應亨生二男。皆幼。噫。以公之才學德望。承宣廟不世之遇。天之降大任。似非偶然。窮養達施。是實平生抱負。而惟其親老且病。公身不得自由。釋褐三十餘年。在朝日月。不滿三年。未遑有設施之大業。及其服ⓟ闋。公亦委身還朝。宣廟再擢爲冢宰。且將相矣。公已病於毀瘠。竟不能起。公之忠孝。可謂兩全。而進退大節。亦可謂不負所學矣。不幸天不假年。半途而稅。豈非士林之長慟也。然其至行懿德。可以模範後世。遺風餘韻。足以聳動衰俗。南中士子。相與鳩材。立祠院於公所居及常所來往之地。以寓其尊慕之誠。信乎興感之效。不泯在人也。逮我上嗣服之初。命太常議易名之典。賜諡文孝。媺矣哉。惇史也。此可以盡公之德乎。遂演其說而爲之銘曰。天嶺之南。淑氣鍾焉。乃篤鉅人。公得其全。天敍五典。孝源百行。公實因心。粹然其性。纔免於ⓟ懷。已知愛敬。餘力學問。覃思賢聖。旣本諸身。乃徵於民。政事文章。隨遇驚人。治尙惇倫。人安俗厚。拱于法筵。士仰山斗。恒言孝悌。必稱堯舜。其詞甚忠。聽無不信。章疏勤懇。字字典謨。庶幾禮樂。陶鑄唐虞。進非求榮。退非忘世。時出緖餘。亦優經濟。所未盡者。崦嵫日短。義情重輕。能全者罕。公惟兩臻。盛名隨之。槩公平生。皆孝之推。名載太史。功在斯文。百世在後。不勝其芬。公之可傳。何待於碑。我言非諛。多士之思。
옛날 우리 선묘(宣廟 선조(宣祖))가 정성을 다해 정치에 힘쓸 적에 유신(儒臣)을 존중해 등용하기를 좋아하였다. 그 당시의 총재(冢宰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던 옥계 노공(盧公)은 도덕(道德)과 문행(文行)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감복(感服)시켰는데, 총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성(京城)의 셋방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묘가 비통해하고 애석해하며 애도의 뜻으로 조회를 중지하였고, 사제(賜祭)하고 부의(賻儀)를 내린 것이 일상적인 규례를 넘었다. 이해에 예부(禮部 예조(禮曹))에서 공의 효행을 아뢰자 선묘가 더욱 가상히 여기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의 집에 정려문을 세워 표창하도록 하였다.
공은 휘는 진(禛)이고, 자는 자응(子膺)이다. 만년에 옥계에 거처했으므로 학자들이 옥계(玉溪) 선생이라고 불렀다. 보계(譜系)는 풍천(豐川)에서 나왔는데, 국자 진사(國子進士) 휘(諱) 유(裕)가 그 비조(鼻祖)이다. 대대로 벼슬아치를 배출하였으며, 고려 말에 오랑캐를 피해 함양(咸陽)으로 옮겨 살면서 드디어 함양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숙동(叔同)은 문장과 청백리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고, 영묘(英廟 세종(世宗)) 때에 관직이 예조 참판과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분(昐)을 낳았는데 두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분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그중 둘째 아들이 가장 현명하였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지조를 지켰으며 거처하는 집을 신고당(信古堂)이라고 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이니, 휘는 우명(友明)이다. 모재 김공(慕齋金公 김안국(金安國))이 조정에 천거하여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안동 권씨(安東權氏) 생원(生員) 권시민(權時敏)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정덕(正德) 무인년(1518, 중종13)에 함양의 천령산(天嶺山) 아래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영특하고 조숙하여 행동거지에 절로 법도가 있었으며, 어린아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신고공(信古公)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여 손수 《중용(中庸)》과 주자(朱子)의 잠명(箴銘)을 써서 가르쳤는데, 한 번 보면 곧장 암기하였고 마치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있는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장성한 뒤에는 스스로 학문을 탐구할 줄 알아 문리가 날로 향상되었다.
정유년(1537) 생원시(生員試)에 제7위로 입격하였는데 공의 나이 겨우 20세였으므로 훌륭하다는 칭찬이 자자하였다. 공은 덕기(德器)가 순수하여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며 경모하였고,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으니, 하서 김공(河西金公 김인후(金麟厚)), 고봉 기공(高峯奇公 기대승(奇大升)), 소재 노공(穌齋盧公 노수신(盧守愼)) 같은 분들과 가장 깊이 서로를 인정하며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병오년(1546, 명종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보임되었고, 재차 사국(史局)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취강(就講)하지 않았다. 결국 박사(博士)로서 상례(常禮)에 따라 전적(典籍)에 올랐다가, 마침내 남궁(南宮 예조(禮曹))의 낭관(郎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맡았다. 이것은 평소 영예로운 승진을 좋아하지 않은 공의 성품과 집안이 가난하여 모친을 봉양하기에 편한 직책을 찾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중외(中外)의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를 선발하게 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뽑혀 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 얼마 뒤 조정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다. 입대(入對)했을 때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명백하고 절실하며 거동이 한아(閑雅)했으므로 재상 윤개(尹漑)가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진정한 강관(講官)이다.”라고 하였다. 지평(持平)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수찬과 교리가 되었으며, 선발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가 부응교(副應敎)로 옮겼다. 그 이듬해에 장령(掌令)을 거쳐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으로 옮겨 제수되었고, 집의(執義)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며, 마침내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요직을 차지한 권간(權奸)이 공과 인척간이었는데, 공의 재주와 명망을 높이 사서 교유하고자 아첨하는 말을 전하였고 자신을 도와줄 한마디 말을 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공은 문을 닫아걸고 응하지 않으며 한 번도 발걸음 한 적이 없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더욱 공을 추중하였다.
경신년(1560)에 공의 작질을 높이라는 특지(特旨)가 내려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우부승지에 올랐다. 그 이듬해에 대부인(大夫人)의 연세가 일흔이 넘었다는 이유를 들어 법에 근거해 소장을 올려 모친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간청하니, 명묘(明廟 명종(明宗))가 고향 인근 고을의 수령에 임명하게 하고 이어 표범 가죽으로 만든 깔개를 하사하여 공의 효성을 표창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담양 부사(潭陽府使), 진주 목사(晉州牧使) 등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병으로 인해 중도에 돌아와 오래도록 다스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담양과 진주의 백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공을 그리워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22)에는 이조 참의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어 나갔는데, 병이 심해져 사직하고 돌아왔다.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고 임기가 만료되자 부제학(副提學)으로 소명(召命)을 받들고 상경하였다. 얼마 뒤에 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모친을 봉양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자 선묘가 위유(慰諭)하며 휴가를 주도록 명하니, 직분을 그대로 지닌 채 고향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공은 돌아온 뒤에 다시 사직을 청하는 소장을 올렸고 그 소장에 간언(諫言)과 경계(警戒)의 말을 덧붙이니, 상이 성지(聖旨)를 내려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면서 마침내 체직을 윤허하였다. 이어 공의 고향이 있는 도(道)에 명하여 모친을 봉양할 물자를 공급해 주도록 하니, 공이 전(箋)을 올려 감사의 뜻을 아뢰었다.
신미년(1571, 선조4)에 곤양 군수(昆陽郡守)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 대사간(大司諫)과 이조 참의에 임명한다는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으니, 어필(御筆)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키고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한다.”라고 쓴 교지를 하사받았다. 또 그 이듬해에 대사헌(大司憲)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다. 소명을 받아 나아간 지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세 차례나 소장을 올리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전(西銓 병조)의 참판과 미원(薇院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575)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특진하고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固辭)하는 소장을 올렸다. 그 소장에서 시정(時政)의 잘못도 아울러 진언하였는데 그 대략에,
“정신의 수양을 통해 본성(本性)을 배양하시고, 먼저 뜻을 안정시킨 뒤 옛 일을 살피십시오. 멀리 제왕(帝王)들의 법도를 추념(追念)하시고, 천근(淺近)한 규례를 인습하는 데 얽매이지 마십시오.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 일세(一世)의 선비들을 경시하지 마시고, 스스로 총명함을 과시하며 모든 부서의 일을 다 처리하지 마십시오. 궁금(宮禁)의 존비(尊卑)를 엄격히 구분하시고, 근신(近臣)들의 침윤(浸潤)하는 참소를 막으십시오. 성급히 나아갔다가 대번에 물러나지 마시며, 처음에 부지런히 했다가 마무리를 나태하게 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상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자, 다시 상소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탈상한 뒤에 공의전(恭懿殿)의 상을 당하자 형조 판서로서 국상(國喪)에 달려가 임하였고,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공조 판서에 제수되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 사은(謝恩)하지 않았다. 얼마 뒤 대사마(大司馬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 직분을 수행한 지 겨우 수십여 일 만에 이고(移告)하여 해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지만 공은 병이 너무 심해 일어날 수 없었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모(盧某)는 평소에 덕망(德望)이 있어 사림의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모친상에 거상(居喪)할 때 예(禮)를 행한 것이 정해진 법도를 넘었다가 지금 병이 매우 위중해졌으니, 문병하는 예를 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선묘가 즉시 내의(內醫)를 보내고 약물(藥物)을 연이어 하사하였다. 병세가 위태로워졌을 때에도 집안의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내가 고향 집에서 생을 마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내 평소의 뜻이 아니다.”라고만 하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춘추는 61세였다.
돌아가셨을 때 집에는 약간의 곡식조차 없었으므로, 임금이 하사한 부의(賻儀)에 힘입어 겨우 염빈(斂殯)할 수 있었다. 도성의 사대부들과 모든 조정 사람들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길가의 어린아이나 천한 하인들까지 비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장(返葬)할 때 함양의 백성들이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함양의 경계까지 나와 맞이하였으며, 통곡하고 조문하고 부의함을 극진히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관(下棺)할 때에는 여러 군(郡)의 사람들이 다 찾아왔으며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은 신위(神位)를 만들어 통곡하였다.
공은 온화하면서도 꼿꼿하였고 통달하고 진실하였으며, 차분하고 장중(莊重)하였다.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과 거칠고 속된 행동을 얼굴빛과 말투에 드러내지 않았고, 마음이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하여 남다른 행동으로 고상한 체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신실(信實)하여 전혀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이 없는 듯 보였지만, 일에 임하거나 행동을 단속할 때에는 강직하게 자신을 지키며 오로지 의리만을 따랐고 이해와 득실 때문에 뜻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손님과 벗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였고, 남과 말을 나눌 때에는 자신의 말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하였다. 하지만 불선(不善)을 보면 준엄한 모습으로 관용을 베풀지 않았으니, 멀리서 바라보더라도 큰 덕(德)을 지닌 군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예제(禮制)를 알았으니, 신고공이 돌아가셨을 때 공의 나이가 아직 어렸지만 곡읍(哭泣)하고 비애(悲哀)하는 것이 마치 성인(成人) 같았다. 백씨(伯氏)를 따라 산소의 여막(廬幕)으로 가게 되자 대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는 나이가 어려 혈기(血氣)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으니, 고기를 먹어 생명을 온전히 유지해야 마땅하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제가 지금 여섯 살이니 탈상할 때가 되면 여덟 살입니다. 여덟 살이나 먹은 자식이 부친의 상에 복(服)을 입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하니, 대부인이 그 말에 감동하여 공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예제를 준수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공은 항상 정훈(庭訓)을 일찍 잃어버린 것을 지극한 아픔으로 여겼기에 대부인 역시 공에게 사랑을 쏟음이 남달랐으니, 공이 잠깐 밖에 나갔을 때에도 늘 대문에 기대서서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어려서 유학(游學)할 때에도 감히 조금도 멀리 간 적이 없었으며, 장성하여 벼슬할 때에도 오래도록 직책에 머물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성(定省)하는 직분과 이유(怡愉)의 즐거움을 노년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지켰고,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손수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올리면서 궁핍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형(伯兄)을 아버지처럼 섬기면서 화합하고 공경하는 두 마음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백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종사(宗事)가 영락해짐을 안타깝게 여겨 사묘(祠廟)를 다시 만들고 제기(祭器)와 제구(祭具)를 갖추었으며, 제수(祭需)는 모두 직접 도맡아 처리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로 하여금 걱정하지 않게 하였다.
대부인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공은 몇 달 동안이나 옷을 벗지 않았고 대부인의 변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다. 대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 공의 나이가 이미 예순이었지만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예제를 지켰고 혹한과 무더위가 닥치고 태풍과 눈비가 몰아쳐도 묘소에 올라가 참배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예법은 반드시 선유(先儒)들이 정한 제도를 준행하였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참여하여 제기를 올렸다. 대공(大功)과 소공(小功)과 시마(緦麻)의 상복을 입어야 할 상례에는 반드시 각각 그에 맞는 법도를 다하였고, 벗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고아와 과부(寡婦)들을 위무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휼함에도 모두 정해진 법도가 있었다.
집안이 본래 청빈하여 시골에는 밭이 없었고 서울에는 집이 없었다. 비록 여러 차례 주(州)와 부(府)를 맡아 다스리기는 하였지만 모친을 받들 기름진 음식 이외에 자신이 먹고 입는 것은 매우 검소하였다. 관직을 떠나올 때에는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왔고 행장(行裝)은 텅텅 비어 있었다.
화창한 날씨와 훌륭한 경치를 만날 때면 벗들과 어울려 관동(冠童)을 데리고서 산사(山寺)와 시냇가의 집을 오가며 유유자적했는데, 오직 서책만을 지니고 다니니 느긋하여 욕기(浴沂)의 흥취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의 신분이 재상(宰相)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책 상자를 짊어지고 찾아오는 학도(學徒)들이 날로 더욱 많아졌으니, 공은 부지런히 도의(道義)를 강설(講說)하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논어(論語)》ㆍ《소학(小學)》ㆍ《근사록(近思錄)》을 존신(尊信)하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대학(大學)》의 종지(宗旨)를 강론하며 서찰을 주고받았고 서로에 대해 깊이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공이 항상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것은 많은 말에 있지 않다. 《대학》의 첫머리 열여섯 글자에서 찾으면 충분하다.” 하였다. 그래서 공의 학문은 반드시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에 근본을 두었고, 임금에게 아뢸 때에는 반드시 삼대(三代) 시대를 인용하여 말하였으며, 공리(功利)를 따지는 천근한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내용 없는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아 전아(典雅)하고 섬창(贍暢)하였으니 염락(濂洛)의 문체를 깊이 터득한 것이었다. 시 짓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간간이 흥취가 유원(悠遠)하여 시를 짓게 되더라도 진부한 시어를 전혀 답습하지 않았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 약간 권이 세상에 전한다.
공은 일생토록 고요히 자신을 수양하며 학문에 침잠하였으니, 마치 한 번도 세상일에 뜻을 둔 적이 없는 듯하였다. 주군(州郡)을 다스릴 때에는 오직 맡은 바 직분을 신중히 처리하였고, 일을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관대함에 근본을 두었다. 또한 한 번도 작은 이익을 꾀하려고 일을 일으키거나 내실 없이 겉치레를 꾸며 명성만 세우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영남(嶺南)은 땅이 넓어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난 곳인데, 공이 영남을 안렴(按廉)하면서 정성으로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고 가혹한 짓을 못 하게 엄격히 단속하였으며 오래 묵은 옥사(獄事)들을 한마디 말로 판결하였다. 이에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몸을 움츠렸고 탐오한 관리들이 공의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버리니, 백성들이 순종하고 의지하여 영남 일대가 훌륭하게 다스려졌다. 김공 계휘(金公繼輝)가 뒤를 이어 영남을 안찰할 때 공의 업적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덕행과 문학을 지니고 아울러 관리의 일까지 능통함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다.
공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순흥 안씨(順興安氏) 안처순(安處順)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부인은 가풍(家風)이 몸에 배어 일찍부터 유순(柔順)하고 고요한 덕을 지녔으며, 며느리로서는 공경하고 어머니로서는 자애로웠으니 참으로 군자에게 어울리는 배필이었다. 공보다 10년 먼저 태어났고 무진년(1568, 선조1)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함양 주곡(酒谷)의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있으니 공과 합장되었다.
공은 아들 일곱을 낳았다. 장남 사훈(士訓)은 진사시에 입격했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음보(蔭補)로 별좌(別坐)가 되었으며, 참봉(參奉) 조언(趙堰)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아들 승(勝)을 낳았다. 승은 음보로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초취(初娶)는 참판(參判) 정구(鄭逑)의 따님으로 아들 형우(亨遇)를 낳았고, 재취(再娶) 하씨(河氏)는 아들 형달(亨達)을 낳았다. 승의 딸은 여희좌(呂姬佐)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여절(呂沏)은 2남을 두었고, 차남 여곽(呂漷)은 4남을 두었으며, 셋째는 여함(呂涵)인데 그 아들은 모두 어리다. 형우는 2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공의 차남 사회(士誨)는 재주와 덕행으로 선발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이르렀으며, 유응(柳凝)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형서(亨緖)이고, 형서의 딸은 허람(許欖)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자식은 어리다. 사회의 장녀는 허탁(許𢜬)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감찰(監察) 강응황(姜應璜)에게 출가하여 아들 강순(姜珣)을 낳았으며, 삼녀는 이익빈(李益彬)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형후(亨後)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삼남 사흔(士訢)은 조완(趙完)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아들 척(脊)을 낳았다. 척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형필(亨弼)이고, 장녀는 양여매(楊汝梅)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어리며, 차녀는 박상질(朴商質)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사남은 사악(士諤)이고, 오남은 사전(士詮)인데 후사가 없다.
공의 육남 사첨(士詹)은 목사(牧使) 박광옥(朴光玉)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어서 사회(士誨)의 아들 철(肵+口)을 양자로 삼았다.
공의 칠남 사심(士諗)은 김효사(金孝思)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욱(郁)은 생원이고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형익(亨益)이고 딸들은 어리다. 차남 등(縢)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사심의 장녀는 김여정(金汝鋌)에게 출가하여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사심의 차녀는 곽이준(郭以峻)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딸은 둘이다. 장녀는 유기(柳起)에게 출가하였고 후사는 없다. 차녀는 허성필(許成弼)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허환(許寏)이고 딸은 최응형(崔應亨)에게 출가하였다. 허환(許寏)은 1남 3녀를 낳았고 최응형은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아, 공은 재주와 학문과 덕망을 지녔고 세상에 보기 드문 선묘(宣廟)의 지우(知遇)까지 입었으니, 하늘이 큰 임무를 내려 준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문을 연구하며 자신을 수양하여 세상에 널리 시행하는 것이 진실로 평생의 포부였지만, 오직 모친이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공의 몸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벼슬길에 나선 30여 년 동안 조정에 있었던 것이 채 3년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대업(大業)을 베풀 겨를이 없었다. 또 모친상을 탈상한 뒤에 공이 또 임금을 섬기려 조정으로 돌아오자 선묘가 다시 발탁하여 총재(冢宰)로 삼아 재상의 임무를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상중의 슬픔으로 수척해진 몸에 병이 생겼기에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은 충성과 효성을 모두 온전히 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큰 절개 역시 자신이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하늘이 목숨을 연장시켜 주지 않아 중도에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사림(士林)의 지극한 아픔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의 지극한 행동과 변함없는 덕은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고,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쇠퇴한 풍속을 고무할 수 있었다. 남중(南中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함께 목재(木材)를 모아 공이 살았던 곳과 항상 왕래했던 곳에 사원(祠院)을 건립하여 존모(尊慕)하는 정성을 붙였으니, 진실로 공에게 감화되어 흥기한 효험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상께서 막 즉위하고 난 뒤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여 공의 시호(諡號)를 의논하도록 하여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하사하였으니, 아름답도다. 돈사(惇史)로다. 이것으로 공의 덕을 극진히 드러낼 수 있도다. 이에 그 설을 부연하여 명을 짓는다.
천령산 남쪽에 / 天嶺之南
맑은 기운 모여 / 淑氣鍾焉
이에 돈독한 위인 나왔으니 / 乃篤鉅人
공이 그 온전함을 얻었네 / 公得其全
하늘이 차례 매긴 오륜에서 / 天敍五典
효도가 백행의 근본인데 / 孝源百行
공은 실로 자신의 마음 따랐으니 / 公實因心
순수해라 그 본성이여 / 粹然其性
부모 품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 / 纔免於懷
이미 사랑하고 공경할 줄 알았고 / 已知愛敬
남은 힘으로 학문하며 / 餘力學問
성현을 깊이 생각하였네 / 覃思賢聖
이를 행실의 근본으로 삼아 / 旣本諸身
백성 다스림에 증명해 보였으니 / 乃徵於民
그 정사와 문장이 / 政事文章
가는 곳마다 사람을 놀라게 했네 / 隨遇驚人
다스릴 때 인륜 도탑게 함 숭상했으니 / 治尙惇倫
백성들 편안하고 풍속 돈후하였네 / 人安俗厚
경연에서 임금 모실 때 / 拱于法筵
선비들 태산북두처럼 우러렀네 / 士仰山斗
항상 효제를 말하고 / 恒言孝悌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나니 / 必稱堯舜
그 말씀 참으로 진실하여 / 其詞甚忠
듣고서 믿지 않는 자 없었네 / 聽無不信
상소한 문장 참되고 간절하여 / 章疏勤懇
글자마다 법도에 맞았으니 / 字字典謨
예악을 거의 다시 일으켜 / 庶幾禮樂
요순의 세상을 만들 만했네 / 陶鑄唐虞
벼슬 나간 것 영예 구함 아니었고 / 進非求榮
물러난 것 세상 잊음 아니었으니 / 退非忘世
때때로 서여를 내놓았고 / 時出緖餘
또한 경세제민에도 뛰어났네 / 亦優經濟
다하지 못했던 것은 / 所未盡者
엄자산의 해가 짧은 것 / 崦嵫日短
의리와 인정의 경중을 / 義情重輕
온전히 하는 자 드문데 / 能全者罕
공만은 둘 다 극진히 하여 / 公惟兩臻
성대한 명성이 뒤따랐다네 / 盛名隨之
공의 평생을 개괄한다면 / 槩公平生
모두 효성에서 미루어 넓혀 간 것 / 皆孝之推
그 이름 역사에 기록되고 / 名載太史
그 업적 사문에 남았다네 / 功在斯文
백세 지난 후세에도 / 百世在後
그 향기 이기지 못하리니 / 不勝其芬
후세에 전할 공의 행적을 / 公之可傳
어찌 비석에 새길 필요 있을까 / 何待於碑
나의 말은 아첨이 아니라 / 我言非諛
많은 선비의 생각이라네 / 多士之思
[주-D001] 취강(就講)하지 않았다 : 취강은 강론 시험을 보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 사국(史局)에 천거된 사람은 임용에 앞서 시험을 거치는데, 이를 ‘사관취재(史官取才)’라고 한다. 《성종실록(成宗實錄)》 7년 2월 4일 기사에 “사관(史官)에 결원이 생기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하의 관원이 삼관(三館) 관원의 4대조까지 세계(世系)를 자세히 검토하고 인품까지 살펴서 천거한다. 그러면 춘추관의 관원까지 의정부에 모여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며, 가(可)한 사람은 재주를 시험한 후에 뽑는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취강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시험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사관에 등용될 마음이 없었다는 말이다. 대본에는 ‘皆不就’로 되어 있는데, 《월사집》 권48의 〈이조 판서 옥계 선생 노공 묘지명(吏曹判書玉溪先生盧公墓誌銘)〉과 《월사집》 별집 권6의 〈이조 판서 옥계 선생 노공 시장(吏曹判書玉溪先生盧公諡狀)〉에 모두 ‘皆不就講’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就’ 다음에 ‘講’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2] 대부인(大夫人)의 …… 간청하니 : 이때 올린 소장이 〈신유귀양소(辛酉歸養疏)〉이다. 《玉溪集 卷4, 韓國文集叢刊 37輯》 법에 근거했다는 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 권1 〈이전(吏典) 토관직(土官職) 급가(給假)〉 주석에 “7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자는 한 명의 자식을, 8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자는 두 명의 자식을, 9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자는 모든 자식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부모를 봉양하게 한다.〔有七十歲以上親者一子 八十歲以上親者二子 九十歲以上親者諸子 歸養〕”라고 한 조항을 말한다. 당시 노진(盧禛)의 모친은 72세였다.[주-D003] 고사(固辭)하는 소장을 올렸다 : 〈사예조판서소(辭禮曹判書疏)〉를 말한다. 《玉溪集 卷4, 韓國文集叢刊 37輯》[주-D004] 침윤(浸潤)하는 참소 : 물이 스며들듯 조금씩 진행하여 결국 완전히 믿도록 만드는 참소를 말한다. 자장(子張)이 총명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물처럼 조금씩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에 와 닿을 듯한 절박한 하소연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총명하다고 말할 만하다.〔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한 데서 나왔다. 《論語 顔淵》[주-D005] 성급히 …… 마시며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나아가기를 빨리 하는 사람은 물러나는 것도 빠르다.〔其進銳者 其退速〕”라고 하였다.[주-D006] 공의전(恭懿殿)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존호이다. 인성왕후의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다.[주-D007] 정훈(庭訓)을 …… 것 :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훈’은 공자가 집 뜰〔庭〕에 서 있을 때 아들 백어(伯魚)가 지나가자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라는 가르침을 내렸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季氏》[주-D008] 정성(定省)하는 …… 즐거움 : ‘정성’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줄임말로, 자식이 이른 아침에 부모님의 침소를 찾아 문안을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돈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저녁에는 잠자리를 정돈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린다.〔昏定而晨省〕” 한 데서 나왔다. ‘이유(怡愉)’는 기쁘고 즐거운 기색으로 부모를 모시는 것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에 “기쁘고 즐거운 기색으로 태황후를 받들었다.〔怡怡愉愉 奉太皇后〕”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9] 대공(大功)과 …… 상복 : 친척의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상복들이다. 대공은 9개월, 소공은 5개월, 시마는 3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다.[주-D010] 욕기(浴沂)의 흥취 : 욕기는 기수(沂水)에서 목욕한다는 말로, 물욕(物慾)에 초연한 삶을 의미한다. 공자가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말해 보라고 하자, 증석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사람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단에서 바람 쐰 뒤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先進》[주-D011] 대학의 …… 글자 : 《대학장구(大學章句)》 경(經)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선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고 한 것을 말한다.[주-D012] 전아(典雅)하고 섬창(贍暢)하였으니 : 전아는 법도에 맞아 속되지 않은 것이고, 섬창은 글의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가 시원스레 통하는 것이다.[주-D013] 염락(濂洛)의 문체 : 세련된 기교보다는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도학(道學)의 의미를 잘 전달한 문장을 말한다. 염락은 북송의 대학자인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를 일컫는 말이다. 염은 주돈이가 살았던 염계(濂溪)를, 낙은 정호ㆍ정이가 살았던 낙양(洛陽)을 가리킨다. 장재(張載)가 살았던 관중(關中), 주희(朱熹)가 살았던 민중(閩中)과 함께 염락관민(濂洛關閩)으로 통칭된다.[주-D014] 여희좌(呂姬佐) : 《월사집》 권48의 〈이조 판서 옥계 선생 노공 묘지명(吏曹判書玉溪先生盧公墓誌銘)〉에는 ‘여희좌(呂熙佐)’로 되어 있다.[주-D015] 장남은 …… 어리다 : 이 부분은 대본에 누락과 착간이 있는 듯하다. 대본대로라면 노형서(盧亨緖)가 노사회(盧士誨)의 아들이 되지만, 실제로 노형서는 노사회의 손자이다. 《옥계집(玉溪集)》 권6에 이정귀가 지은 옥계 노진의 신도비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글에는 “노사회의 장남 노길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노길의 장남은 노형후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노사회의 차남 노철은 생원이고 6남 1녀를 낳았는데, 노철의 장남은 노형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長𦛋 生二男三女 長亨後 餘幼 次
生員 生六男一女 長亨緖 餘幼〕”라고 되어 있다. 이를 비교해 보면 대본에 노사회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고, 또 노형후와 노형서의 형제 순서도 뒤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옥계집》에 수록된 글을 참고하여 이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노사회의 장남 노길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노길의 장남은 노형후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노사회의 차남 노철은 6남 1녀를 낳았는데, 노철의 장남은 노형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노형서의 딸은 허람(許欖)에게 출가하였다. 노사회의 장녀는 허탁(許𢜬)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감찰(監察) 강응황(姜應璜)에게 출가하여 아들 강순(姜珣)을 낳았으며, 삼녀는 이익빈(李益彬)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두었다.”[주-D016] 돈사(惇史) : 덕행이 있는 자의 언행을 기록하여 후세에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다.[주-D017] 자신의 마음 따랐으니 : 억지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본심대로 행한 것이 효에 맞았다는 말이다.[주-D018] 서여(緖餘) : 실을 뽑아낸 누에고치에 남은 실오리를 이르는 말로, 근본이 되는 사상이나 학설 이외의 여론(餘論)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 간간이 시문을 창작한 일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주-D019] 엄자산(崦嵫山)의 …… 것 : 수명이 짧았다는 말이다. 엄자산은 태양이 들어가 쉰다는 전설상의 산 이름으로 만년 또는 노년의 비유로 쓰인다.[주-D020] 의리와 인정 : 군신 간의 의리와 부모에 대한 효성을 말한다.
墓表 ○明朝鮮國。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贈諡文孝公玉溪盧先生墓表。
[趙觀彬]
在昔宣廟之世。右文爲治。賢儁彙征。有以邃學淸文篤孝紙廉。大爲盛際之禮遇。善類之尊尙。曰吏曹判書玉溪盧先生。諱禛。字子膺。其先豊川人。麗朝。國子進士諱裕。乃其始祖也。自是世有冠冕。曾祖諱叔仝。禮曹參判,藝文館提學。以文望淸操。顯於英廟。登廉吏首選。章甫祀享之。祖諱昐。再擢第。藝文館校理,贈禮曹參判。考諱友明。號信古。受業於一蠧之門。用金慕齋薦。除參奉不仕。名在己卯名賢錄。醊食道谷。贈吏曹判書。妣安東權氏。生員時敏之女。以正德戊寅七月壬寅。生先生。天質英悟。自幼異凡。信古公奇愛之。手書中庸及朱子箴銘授之。乍讀輒成誦。若有心會。六歲。遭信古公喪。持制如成人。大夫人泣勸啖肉。先生曰。兒今六歲。終三年則爲八歲矣。安有八歲之人。不服父喪者乎。至終喪如禮。鄕人莫不歎異。稍長。能自劬學。日漸將就。講論義理。硏精處。雖宿儒。亦多讓焉。丁酉。中生員高等。弱冠也。德行彌著。華聞益蔚。如金河西,盧蘇齋,洪恥齋諸賢。托爲道義之交。相得甚章。丙午。闡別科。隸槐院。再薦史局。不就。講以博士例陞典籍。由禮曹佐郞。出爲知禮縣監。蓋自釋褐之初。不喜榮進。家貧急於便養故也。爲政。一境大治。明廟命揀莅官廉謹者。先生與焉。褒以在笥之錫。未幾。徵爲弘文館修撰。陞校埋。入講筵。奏對明切。容止閒雅。領事尹漑亟稱眞講官。移司憲府持平。還拜修撰校理。俄薦爲吏曹佐郞。戊午。自弼善遷副校理。陞副應敎。進講綱目王蠋去國事。明廟謂蠋不知君臣之義。先生對曰。諫不從言不聽而去。則非不知義者。時退溪屢辭召命。明廟頗未安。有此敎。先生所奏。深得因文納誨之道也。己未。特拜掌令。薦授議政府檢詳。陞舍人。歷執義,典翰。仍陞直提學。時權奸當路。人多和附。彼謂先生有姻婭誼。致意求款。先生若浼焉。士論益重之庚。申。特拜刑曹參議。遷同副承旨。陞右副。辛酉。又召以承旨。壬戌。以大夫人年踰七十。上章懇乞歸養。明廟命除旁近守令。仍賜豹皮褥。卽拜潭陽府使。癸亥。辭歸。甲子。又除晉州牧使。以興學勸善。戢强恤窮爲務。潭晉之民。久猶口碑。丁卯。由吏曹參議。拜忠淸監司。辭遞。旋拜全州府尹。秩滿。以副提學承召。未久。疏乞歸覲。宣廟慰諭。命帶職往還。先生還鄕。又上辭章。附以箴警之辭。賜批嘉奬。許遞職。仍命官給養親之需。卒未。除昆陽郡守。壬申拜大司諫。遷吏曹參議。又除承旨。未赴命。御筆陞拜慶尙監司。地大素號難治。先生用靜制煩。治蹟茂著。以病徑歸。癸酉。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赴召無何。乞暇歸。甲戌。拜兵曹參判,大司諫。俄拜吏曹參判兼藝文館提學。皆不赴。乙亥。擢拜禮曹判書。連章苦辭。兼陳時政闕失。疏未達而移拜吏曹判書。又力辭。是年。大夫人卒。先生年已五十八。侍疾不解衣帶。嘗糞以驗吉凶。居喪不脫衰經。廬墓往來。行朝夕祭。雖大風雨雪。未嘗或廢。先生素善病。又當不毁之年。其自盡於哀制者。如此。人皆憂其難保。丁丑。服關聞恭懿殿方喪。以刑曹判書奔臨。病遞拜工曹判書。再爲大司憲。皆以疾辭。拜兵曹判書。俄移吏曹判書。病轉危。上遺內醫。頒御藥。臨歿。言不及家事。惟曰余不得畢命松楸。非素志也。八月壬寅。易簀于城西寓舍。享年六十一。訃聞。上輟朝。恩賻甚厚。朝紳士林。咸有殄瘁之慟。栗谷先生歎曰。正二品無人。亦可見景慕悼惜之意矣。喪車之返鄕也。咸之人無少長。迎哭境上。觀葬。數郡畢至。以同年十月甲寅。窆孑咸陽治壯酒谷里子坐之原。配貞夫人順興安氏。己卯名人處順之女。襲訓家庭。婦德克備。先先生十年。戊辰歿。與先生同塋而異宣。有七男。長士訓。進士別檢。次士誨。郡守。次士訢。次士諤。夭。次士詮。天。次士詹。次士諗。司果。士訓有一男一女。男勝。奉事。女適呂姬佐。士誨有二男。長𦛋。次 肵+口。生員。出後士詹。士訢有一男。脊。士詹。繼子肵+口。士諗有二男二女。男長郁。生員。次縢。察訪。女長適柳起。次適許成弼。勝有二男。長亨遇。次亨達。𦛋有二男三女。長亨後。次亨述。縣令。女長適許𢜬。次適萋應璜。次適李益彬。脊有一男。亨弼。大君師傳。肵+口有五男。長亨敍。次亨望。生員。次亨泰。進士。次亨漸。次亨夏。文科。持平。郁有一男。亨佐。縢有二男。長亨濟。次亨命。餘多不盡記。先生資稟。高明而莊重和粹而簡潔。處心無自欺之事。發口無非禮之言。自少從事於學問上。於道誼功利。取舍甚明。與李一齋論大學。得其宗旨。常曰。爲學之要。朮之太學。篇首十六言。足矣。以經義質問於退溪先生。多往後書。牖後生。輒先論語,小學,近思錄。踐履之篤。造詣之深。可以攷信於先後儒賢之論矣。事親至孝。執喪於沖弱之年。致毁於哀暮之日。科第進身。亦由於爲親屈志。自近班至榮秩。惟乞恩專養。得以無憾於昊天之報。事伯兄如事父。和敬兩至。其亡也。撫諸孤無間已出。繕祠宇修祭器。令主祀者忘其貧。事君必引三代。爲格君治國之本。筵奏疏陳。無非古聖賢切實之語。治州郡。帷務寬仁。不事煩苛。訟簡獄平。吏戢民蘇。按嶺藩。威惠尤著。金公繼輝代先生。盛稱前政。謂有力學之實效。至於廉約自持。氷蘗非矯。鄕無一頃之田。京無數椽之屋。以先生之所抱負。承宣廟不世之遇。宜若大有展施。而直緣至誠愛日。靡遑從宦。決科三十餘年。在朝不滿三年。及後喪旣關。先生始委身于朝。宣廟畀以銓衡。且將降大任。先生已病。竟不起。豈非天耶。然先生可謂忠孝兩全。而進退大節。亦不負所學矣。儒林慕先生之德。立祠而俎豆之。禮部表先生之孝。豎閭而棹楔之。先生之卒未一朞。公議齊發。若是其難誣。其後太常議諡。諡曰文孝。又以淸白吏。載名選錄。有遺集行于世。所述恰是濂洛體。後生亦可師法而知所向學矣。嗚呼盛哉。先生之七世孫正字廷元。訪余鄕居。托以表塋之文。顧余無學不敢當。固辭而終不獲。先輩作者旣述隧道大碑。紀載頗詳。余惟摭此爲辭。謹敍其槪。且誦高山景行之詩。以系之云。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戶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趙觀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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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군수 노군 묘지명〔益山郡守 盧君 墓誌銘〕
군의 휘는 사회(士誨), 자는 □□이며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휘 노유(盧裕)는 진사였는데 군에게 시조가 된다. 고조부 휘 노숙동(盧叔同)은 벼슬이 가정대부(嘉靖大夫)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다. 증조부 휘 노반(盧盼)은 예문관 교리를 지냈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노우명(盧友明)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홀로 즐거움을 누리며 벼슬하지 않았는데, 천거로 현릉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모 정부인 권씨(權氏)는 고려 시중 문탄공(文坦公) 권한공(權漢功)의 후손이다. 부친 휘 노진(盧禛)은 자헌대부 이조 판서를 지냈다. 호가 옥계(玉溪)인데, 문장과 덕행으로 중망을 얻은 것이 세상에서 으뜸이었다. 향인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모친 정부인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판관 안처순(安處順)의 따님이다. 판관 안처순은 기묘명현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익혀 형 별좌 노사훈(盧士訓)와 함께 집안의 자랑스러운 자식들이었다. 모부인과 판서공이 돌아가시자 상에 임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몸을 상하면서 예를 지켰으니 그 집안 자제에 걸맞았다. 별좌 사훈은 결국 그 때문에 몸을 상해 죽고 말았다. 군이 선친의 묘에 비석을 세우려고 억지로 일에 매달리다가 병이 들어 위태로워졌는데 겨우 살아남았다.
선친의 오랜 친구에게 글을 청했는데 손에 넣지 못하여 항상 마음에 병이 되었다. 안씨 부인은 판서공보다 10년 먼저 죽었다. 판서공이 늙을 무렵 아내를 잃어 안에서 음식을 주관할 사람이 없는데도 그 모친은 아직 살아계셨다. 군이 직접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봉양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우 노사심(盧士諗)이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부친을 잃어서 어루만지고 길러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과 같이 하였다. 그 후한 태도를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고, 군은 이로써 아버지의 뜻을 넉넉히 채웠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발탁되어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되었다. 예산현은 명나라 군대의 수륙요충지였는데 조치가 시의적절 하였기에 고을 백성들이 덕을 입었다. 문묘를 건립하였는데, 비록 시세에 꺾이긴 했지만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완성을 보았다. 도적의 군대가 열읍을 침략하자 고을을 지키는 수령은 쥐새끼처럼 숨었지만, 홀로 강토를 지켰는데 그 일이 알려져서 직급이 올라갔다. 후에 어떤 일로 체직을 당하자 현의 백성들이 대궐로 달려가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허락을 얻지 못했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진위 현령(振威縣令)에 제수되었는데 사은숙배하기 전에 형조 좌랑으로 옮기라는 명이 있어, 열흘을 넘기고 정랑에 승진하였다.
무주 현감에 제수되어 막 떠나려 하다가 또 체직되어 공조 좌랑이 되었고, 곧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산 군수로 나가서 학교 교육에 힘쓰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바른 정사가 이루어졌다. 전에 공조에 있을 때의 일로 체직당해 집으로 돌아가는데 행색이 서생과 같았다.
고을 선비들이 남계서원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병이 들더니 오래도록 낫지 못하고 갑진년(1604, 선조37) 10월 10일에 돌아갔으니 운명이었다. 향년 60세였다.
군은 우아하고 중후하였으며 단정하고 어질었다. 모습에 게으른 면이 없었고 말씨는 비루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평안한 성품을 지녔으나 행동은 과감하였고,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나 결단력과 자제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으면 진심으로 도와주었고 선한 점을 보면 마음으로 좋아하였으니, 모두가 천성에서 나왔다.
서산 유씨 부정 응(凝)의 따님과 결혼하였는데 부드럽고 순종적이었으며 부덕이 있었다. 남편보다 먼저 죽었는데, 2남3녀를 두었다. 장남 모(某)는 사인 최항경(崔恒慶)의 따님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차남 모(某)는 사간 최상중(崔尙重)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아우 노사첨(盧士詹)의 후사를 이었다. 장녀는 허모(許某)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 강응황(姜應璜)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삼녀는 이익빈(李益彬)에게 시집가서 자녀를 낳았다. 소실이 딸 둘을 낳았는데 큰 애는 여섯 살이고 둘째가 네 살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사람은 후손이 잘된다.”라고 하였으니 군은 아마 후손이 잘 될 것이리라. 이 해 12월 16일 주곡(酒谷) 언덕에 장사지냈다. 나는 외람되게도 판서공의 외가 친족이라 일찍이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별좌군에게 자못 인정을 받았고, 군은 나를 더욱 더 신뢰하여 얼굴만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소명을 받고 대궐에 있었는데 마침 군이 좌랑이나 정랑으로 있을 때였는지라 날마다 서로를 찾으며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나누었다.
아아! 예전에 벼슬살이 할 적에 판서공의 부음을 들었고 이어서 별좌공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는데,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어 또 군을 곡하는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년간 군의 한 집안 삼부자를 잃었으니 인간세상에서 어떠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효성과 우애가 / 維孝與友
집안에 전해지는 경우가 드문데 / 人鮮家傳
군은 대대로 이어갈 수 있으니 / 君世克肖
조상에 영광이로다 / 有光于先
자신을 숨길 수 있고 드러낼 수도 있으니 / 能晦能明
그 뜻을 바르게 했기 때문이다 / 而正其志
덕을 쌓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 蘊德若無
또한 군자가 아닌가 / 不亦君子
함양 한쪽 산기슭 / 天嶺一麓
주곡에 언덕을 정하고 / 原卜酒谷
넉 자 봉분에 안장하니 / 安四尺封
여기가 군의 무덤이로다 / 是君攸宅
[주-D001] 노군(盧君) : 노사회(盧士誨, 1545~1604)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계시(啓時), 호는 서간(西澗)이다. 옥계 노진의 둘째 아들로, 저술 《습열당유고(習悅堂遺稿)》가 있다. 저본에는 형인 사훈(士訓)과 이름이 서로 바뀌어 있으나 묘지명의 내용은 모두 동생 사회의 것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사회(士誨) : 저본에는 형인 사훈(士訓)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3] 노사훈(盧士訓) : 1540~1579. 자는 학고(學古), 호는 운고(雲皐)이다. 저술로 《운고일고(雲皐逸稿)》가 있다. 저본에는 동생인 사회(士誨)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4] 노사심(盧士諗) : 1567~1609. 자는 충보(忠甫), 호는 서강(西岡)이다. 옥계 노진의 일곱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