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영화 “영웅” 관련. 여순(뤼순) 감옥
▲ 당시, 감옥의 구조
▲ 당시, 감옥식당 밥그릇
▲ 당시, 감옥의 죄수들의 부역으로 일을 시키던, 인쇄기와 애래 재봉틀
▲ 당시, 감옥에서 사형시킨 죄수들의 관이다.
▲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묻는 장면.
▲ 흙이 파헤쳐진 후 관이 드러난 모습.
▲ 전시관
▲ 전시관
사진: 여순 감옥
한국어 발음은 여순감옥, 뤼순형무소, 여순형무소로도 불린다. 일본 제국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898년부터 1945년까지 지금의 중국 랴오닝 성 뤼순 시 뤼순커우 구에 있었던 감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박희광 등이 처형당하거나 수감생활을 했던 감옥이다.
뤼순감옥({{llang|zh|旅顺监狱}})은 그저 중국의 관광명소 중 한 곳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가슴 아픈 장소이며,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장소입니다.
당시 이 감옥은 일제에 저항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신채호, 박희광 등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했던 감옥으로 많은 독립투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가슴 아픈 장소입니다. 상해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후손들의 역사교육을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장소입니다.
최초 러시아 건축물의 외형에서 일본이 큰 대(大)자 형태로 증축하였다. 수용규모는 275실 약 2천여 명이며, 실제 약20,000명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내부 구조는 수색실, 동쪽 감방, 암방, 사형집행실, 고문실과 밭과 과수원, 벽돌공장 등 15개의 공장과 밭이 있었다.
면적 226,000m2
시대 1898년 ~ 1945년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뤼순 시 뤼순커우 구
중국어: 旅顺监狱 또는 뤼순형무소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뤼순 시 뤼순커우 구에 있었던 감옥이다. 한국어 발음으로 여순형무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면서 중국, 한국, 러시아인들을 더 수감하기 위해 1907년까지 증축하였다.
1906~1936년동안 수감자는 11개국의 항일운동가 약 2만여 명에 달하였고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수감되었다. 한국인으로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이 수감생활을 했었다.
뤼순감옥을 중국 정부는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으로 명명하여,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왔지만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불허해오다 2009년~2010년에 걸쳐 외국인에게 개방하였다.
2009년 중국 정부는 일본에 대응하는 대한민국정부와의 공조와 상호신뢰를 위해 전시실 우측에 600m2 규모의 '국제항일열사전시관'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항일운동 사료와 기사들을 정리한 전시물들을 전시하여 사실상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던 유상근, 최흥식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과 사료들을 소개하는 총 4개의 소규모 전시실로 나뉘어 전시하고 있다.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에게 이토의 포살 이유를 15가지로 지적하였다. 즉 명성황후의 시해, 고종의 폐위, 을사늑약 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한국 침탈 등을 이토의 죄라고 하였다. 11월 3일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같이 여순 형무소로 이송된 후 열한 번의 신문을 받았다.
1910년 2월 7일 관동도 독부 지방 법원장 마나베의 심리 아래 첫 공판이 시작되었는데, 일제는 정당한 권리인 변호권마저 박탈하여 국내외 변호사들을 불허하고, 일본인 관선 변호인만을 허용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포살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한 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 전쟁 중에 수행한 정당한 행위로, 이토의 포살은 한국 독립 전쟁의 일부이고, 동양의 평화를 위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포로가 되었다고 밝히면서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판은 2월 14일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결국 2월 14일에 열린 제6차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 각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쯤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안중근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옥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빌렘 신부가 3월8일부터 11일까지 안중근을 면회하고 그에게 성사를 주었다.
안중근은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인《안응칠역사)〉를 집필했다.
그리고《동양평화론》의 저술에도 착수하였지만 끝맺지는 못했다. 그는 예수 수난일(성금요일)인 3월 25일에 자신의 사형이 집행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안중근은3월 26일에 순국하였다. 일제는 유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여순 감옥의 죄수묘지에 매장하였는데,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중근의 애국 애족 정신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드러난다.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날 그는 동포들에게,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해서, 내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목숨을 바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 그가 바로 안중근이다.
이토 포살은 그 당일 한국 천주교회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이토를 저격한 이가 안중근이라는 사실은 곧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10월 28일 뮈텔 주교는 동경대교구의 뮈가뷔르 주교로부터 “일본의 유력 신문이 이토의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고 있으므로 그 가부를 즉시 회답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뮈텔 주교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답전을 보냈다. 10월 29일 국내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뮈텔 주교는 항의하기도 하였다.
10월 30일 뮈텔 주교는 이토를 저격한 이가 안응칠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가 안중근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11 월 2일 뮈텔 주교는 안응칠이 안중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뮈텔 주교는 이토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11월4일 일본 헌병대 병사(兵舍)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안중근을 면회하고 그에게 성사를 주었다. 이로 인해 3월 15일 그는 뮈텔 주교로부터 2개월 동안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빌렘 신부가 교구장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여순에 간 것은 안중근 의거를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의 자녀인 안중근을 끝까지 인도하고, 이토 처단을 ‘교회 회오’ 하도록 하며, 선량한 신자로 복귀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안중근 의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리하여 안중근 의거는 천주교회 내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오랫동안 애국자로서의 안중근은 기억된 반면,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은 잊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