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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본래적 실존
비본래적 존재에서 벗어나 본래적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유한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극 사이에 처박혀진, 해명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불안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주위세계를 배려하고 동료 인간들을 심려하고, 자기 자신에는 염려로 처신하는,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nichtigen Kreatur)’」
첫째, 인간은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존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청탁을 받거나 선택되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의사와 관계없이 탄생된다. 인간은 수억 개의 정자 중 한 개와 한 개의 난자가 결합하여 탄생한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도, 탄생 자체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가 없다. 인간은 수동적이고 우연적인 존재이고, 하나의 던져진 존재(being thrown)에 불과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피투성(被投性)이다.
동물이나 돌·나무도 피투적 존재이다. 동물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돌과 나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사람의 힘에 의하여, 바람에 의하여, 우연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인간은 동물이나 돌·나무와 달리 존재의 피투성과 생명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둘째, 인간은 피투성과 유한성의 자각에 의하여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물음과 함께 죽음에 의하여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이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미리 죽음의 상황으로 가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죽음으로의 선구(先驅)’라고 한다. 예컨대, 오늘 내가 죽는다고 가정해 본다. 이때 나는 그동안의 삶을 후회하며 회한에 젖기도 하고,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성찰하기도 한다.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하여 죽음 자체를 수용하고, 지금까지의 삶의 존재 방식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즉 죽음으로의 선구가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 존재에서 본래적 존재로 되는 것이라고 한다. 비본래적 존재는 죽음을 망각하고,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관하여 생각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타인이 사는 모습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퇴락한 삶’이며 가식적인 삶이다. 세속에 젖어 재물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탐미적 쾌락에 빠져, 아등바등하면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본래적 존재는 삶의 유한성과 죽음을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고, 참된 자신을 찾아 사는 삶이다. 삶의 의미와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죽음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삶을 반성하게 만들고 스스로 결단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게 된다. 즉 선구적 결단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 이를 기투성(企投性)이라 한다.
최근 노후에 후회하거나 자기 성찰의 의미로 ‘3사 3걸 3기’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3사는 친절하게 ‘인사’하기, 매사 ‘감사’의 뜻을 표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섬기는 ‘봉사’이다. 3걸은 평소 좀 더 잘할 걸, 진작 그럴 걸, 좀 더 참을 걸이다. 3기는 욕심 버리기, 활동과 규모 줄이기, 다른 사람과 나누기이다.
노후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하여 비본래적 존재에서 벗어나 본래적 존재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죽음 앞에서 재산과 명예와 권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無)의 상태가 된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삶의 가치와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가식적이고 관행적인 삶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나, 진정한 나의 삶을 찾아 기투하여야 하겠다.
이장욱, 「당신이 말하는 순서」감상 / 김예강
당신이 말하는 순서
이장욱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
그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
반드시 그 순서로
당신은 말한다.
당신은 사차선 도로를 건너가는 개에 대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외투에 대해
카드놀이의 불운에 대해
조금씩 넘친다
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춤을 추며 우리 앞에 나타나듯
당신은 말하는 법이니까
뒤꿈치를 들고 걷다가도
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도
생일 다음에는 불안.
드디어 당신은 기우뚱한 느낌이 든다
만원 버스 안에서 빽!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묻는다
개들은 평생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대체 춤이란
몸의 어디서 탄생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
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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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생년월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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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과 불안…불안…불안. 이장욱의 이 시에는 한 점 붉은빛처럼 일상의 벽 한가운데 불안이 붙어 있다. 우리는 생의 한계에 대한 불안을 품고 태어난다. 내가 하루 동안 가지게 되는 사소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 앙징스러운 언어를 내려놓게 한다. 여기에서 불안은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불안이다.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삶이라면 대체 춤이란 몸의 어디에서 탄생하는 것일까.
김예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