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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형장과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
[서 종 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1. 머리말
2. 남한산성 순교자들의 순교 방식
3. 남한산성 순교자들의 순교터
4. 순교 방식에 대한 인식과 성지 개발
5. 맺음말
남한산성에서 처형된 순교자들 가운데 한덕운(토마스)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서태순(아우구스티노)과 이조여(종여)는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순교하였으며,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또한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은 복에서 병으로 순교하였고,오 안드레아와 죽산 남광리 사람인 이 요한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순교방식을 알수없는 나머지 순교자들은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죽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에서 병사하거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 때 한덕문이 순교한 참수터는 동문 밖 물레방아간 아래쪽에 있는 평평한 너른 밭으로 이해된다. 여러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터는 로터리 주차장 근처의 천일관 옆에 포도청의 위치롤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지점이고,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는 판관이 집무하던 동헌 뜰과 중군이 집무하던 동헌 뜰,그리고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 뜰이었다.
순교 성지의 개발은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로 인식한 전통에 따라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참수형, 교수형,백지사형 등의 순교 방식은 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박해를 단행한 목적에 따라 결정된 것이므로 순교자들의 신심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1. 머리말
광주부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에서는 신유박해로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는 참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있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있으며,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순교한 신자들도 있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창호지를 붙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있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람들도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교회사 연구자들이 이들 남한산성 순교자들에 대해주목하였다.
1) 이들 선행 연구를 통해서 남한산성 순교자들과 순교터에 대한 많은 이해를 얻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남한산성 안에 순교 성지를 가꾸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찾아와 순교자들의 신심을 이해하고 본받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기왕의 연구들은 남한산성의 순교자들과 순교터를 전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연구한 것들이었다. 이와 같이 빈약한 연구성과 토대 위에서 성지를 가꾸다 보니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오류들은 다름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학문적인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성지개발에 직접 도움이 되는 기초적인 연구를 하고자 한다. 우선 남한산성 순교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순교하였는가 알아보고, 다음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순교한 남한산성 순교자들의 순교터를 차례로 고증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온 문제점에 대해서도 비판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가 남한산성 순교 성지의 개발과 순교자 현양 운동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 남한산성 순교자들의 순교 방식
달레 책에 보면, 신유박해 때 우덕운(禹德運)과 한(韓)덕원(토마스) 두사람이 광주, 곧 남한산성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덕운은 이만채(李晩采)의 《벽위편(關衛編)》3)과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關衛編)》4)에도 역시 우덕운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한덕운(韓德運)의 오기이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과 《사학징의(邪學懲義)》에 한덕운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수가 있다.
그리고 한덕운과 한덕원(토마스)은 순교한 날짜가 12월 27일과 12월 30일로, 순교할 당시의 나이가 50세와 52세로, 출신지가 홍주와 수원으로 각기 다르게 서술되어 있지만, 동일한 순교자에 대해 증언자들마다 서로 다르게 진술한 예가 많은 점과, 이만채의 《벽위편》에 신유박해 때 참수된 각 도의 신자들을 소개한 내용 가운데, 광주에서 처형된 신자로 우덕운, 곧 한덕운만이 언급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한덕운과 한덕원(토마스)은 동일한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요컨대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사람은 12월 27일 50세의 나이로 참수를 당한 한덕운(토마스)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기해박해(1839)때 구산 출신 신자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이 남한산성 감옥에서 병으로 순교하였다. 동생 김문집(베드로),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1839년 말경에 남한산성으로 붙잡혀 간 김만집은 관장 앞에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였기 때문에 옥살이를 계속하였다. 옥살이에 지친 그는 마음이 약해져 순교와 생명의 자유 속에서 괴로워하던 중께 병이 들어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1841년 1월 28일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가지고 감옥에서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으며, 김문집과 김주집은 오랜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58년(철종 9)에 특사로 석방되었다.페 물론 김만집이 병이 들어 죽게 된 것은 심한 고문을 당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우선 교회측 기록인 《병인치명사적》,《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치명일기》등의 증언 자료에 의하면, 1866년에 윤 서방, 이화실, 정여삼, 이 요한, 오 안드레아, 이종여, 서 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로), 정 베드로, 김 아니체토 등 10명이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죽산 남광리 사람으로 광주 먹방이로 가서 살다가 피난지인 충주에서 잡혀 38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 요한니)과 양성 사람으로 34세의 나이로 순교한 오 안드레아12)는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양지 사람으로 38세의 나이로 순교한 서 아우구스티노네와 진천 사람으로 처가를
따라가 살다가 붙잡혀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종예4)는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매 맞아 죽었으며, 이천 단내 사람으로 12월 8일에 60여세의 나이로 순교한 정은(베드로)과 그의 재종손으로 그와 같은날 함께 순교한 정 베드로는 백지사형으로 처형되었다. 나머지 공주 관불산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로 이사하여 살다가 10월에 붙잡혀 40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화실베과 직산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로 이사하여 살다가 10월에 붙잡혀 45세의 나이로 순교한 정여삼미과 하우현 출신인 김 아니체토대》는 구체적인 순교 방식을 알 수가 없다.
1867년에는 양주 일담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홍성국이 광주 정임 새말로 이사하여 살다가 4월에 붙잡혀 56세의 나이로 남한산성 에서 순교하였고, 백 1868년에는 구산 신자들인 김문집(68세), 김성회(암브로시오, 54세), 김차희(40세), 김경희(46세), 김윤희(35세) 등이 붙잡혀 2월 15일에 함께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으나계) 이들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 순교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1869년에는 포천서 대대로 살아온 이 요한이 광주 먹방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2월에 붙잡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고, 18기년에는 포천 솟다리 사람인 이치재가 9월 6일에 붙잡혀 40세의 나이로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으며, 연도를 알 수 없는 해에 양지 정쇠 사람인 서 바오로(50여세)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도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 순교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요컨대 교회측 기록에 의해 확인된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이 요한과 오 안드레아는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는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이종여와 서 아우구스티노는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이화실, 정여삼, 김 아니체토, 홍성국, 김문집, 김성회,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 포천 출신의 이 요한, 이채재, 서 바오로, 김 아니체토 등 12명은 어떠한 방식으로 순교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한편 관변측 기록인 《광주부유영장계등록(廣州府留營狀啓騰錄)》에도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1860년부터 1893년까지 광주부 유수가 의정부에 올린 보고서인 계문(啓文)을 엮어 놓은 이 책에 보면 광주부에서 병인박해 때 매년 1월경에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처리한 내용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있는데, 1867년 1월 9일과 1868년 1월 4일에 올린 보고에는 체포한 천주교 신자들의 명단과 그들을 처리한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곧 1867년 1월 9일자 보고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처음 발생하고 나서부터 1867년 1월 9일까지 광주부에서 체포한 신자는 모두 20명인데, 그중 1866년에 체포된 권경보(權京甫), 김준원(金俊元), 김하상(金M商), 서상철(徐相哲), 서태순(徐泰淳), 엄쾌길(嚴快吉), 오선장(吳善長), 이기좌(李奇住), 이재금(李在琴), 이정현(李正錢), 이조여(李祖汝), 이학록(李學綠), 정성재(鄭成才), 정원명(鄭原明), 한경조(韓敬詐), 한동원(韓東源) 등 16명은병으로 물고, 곧 죽었고, 윤재현(尹在敍), 이장복(李長 卜), 정오복(鄭五 卜)등 3명은 조사 중에 있으며, 홍학주(洪鶴周)는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68년 1월 4일자 보고에는 1867년 1월 9일자 보고에서 조사중에 있다고 언급했던 윤재현, 이장복, 정오복과 1867년에 체포한 김상희(金尙喜), 송일지(宋一知), 송칠지(宋七知) 등 6명이 병으로 물고, 곧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광주부의 보고 내용은《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騰錄)》에 수록되어 있는 1866년 2월자 광주 중영(中營)에 보낸 공문24)에도 서태순, 이조여 등이 붙잡혀 중영에서 신문을 받다가 서태순과 이조여 두 사람이물고, 곧 매 맞아 죽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임을 알수가 있다. 아울러 여기서 서태순과 이조여가 1866년 2월에 순교한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런데 관변측 기록에 보이는 순교자들은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순교자들과 중복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1867년 1월 9일자 보고에 들어 있는 정성재는 교회측 기록에 보이는 정은(바오로)의 자가 '성재'이므로 정은(바오로)과 동일한 인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같은,날짜의 보고에 들어 있는 정원명은 교회측 기록에 보이는 정은(바오로)의 재종손 정 베드로로 믿어진다.
또한 같은 날짜의 보고에 보이는 서태순과 이조여는《우포도청등록》 에 수록되어 있는 1866년 2월자 광주 중영에 보낸 공문에도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은 서양 선교사를 집에 모신 혐의를 받고 있었고, 중영에서 신문을 받다가 물고, 곧 매 맞아 죽은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런 데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서 아우구스티노와 이종여도 1866년에 서양 선교사를 집에 모신 혐의로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었다. 이로써 볼 때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서태순과 이조여는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서 아우 구스티노와 이종여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와 같이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순교자들과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순교자들이 서로 겹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서 바오로, 오 안드레아, 윤 서방은 관변측 기록에 보이는 서상철, 오선장, 윤재현이 아닐까 한다. 또한 교회측 기록에 보이는 이화실과 정여삼 은 1866년 10월에 용인 삼베일에서 함께 체포되어 한가지로 순교한 점으로 보아 1868년 1월 4일자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이장복과 정오복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죽산 남광리 사람으로 1866년에 체포된 이 요한은 관변측 기록에 보이는 이기좌, 이재금, 이정현, 이학록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으며, 교회측 기록에 나오는 하우현 출신의 김 아니체토는 관변즉 기록에 나오는 김준원, 김하상, 김상희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관변측 기록에 병 으로 물고되었다고 언급된 신자들 가운데는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와 같이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병 으로 물고되었다는 관변측 기록의 내 용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아마도 번거로운. 보고나 조사를 피하기 위하여 모두 병으로 물고되었다고 보고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관변측 기록에 병으로 물고되었다고 보고된 사람들과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처형 방식을 알수 없는 순교자들은 참수형, 교수형, 백지사형, 장폐(杖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되었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참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은 없었다고 보아진다.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광주부에서 병인박해 때 매년 1월경에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처리한 내용을 의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어디에도 신자들을 남한산성에서 참수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가 않다. 참수형은 왕으로부터 허락올 받아 공개적으로 시행하고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매년 천주교에 관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누락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참수형으로 신자들올 처형한 사실을 보고한 적 이 없다는 것은 병 인박해 때 남한산성 에 신자들을 참수형으로 처형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다시 말해서 남한산성 순교자들 가운데, 교회측 기록에 순교 방식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은 사람들과 관변측 기록에 병으로 물고되었다고 보고 된 사람들은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죽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에서 병사하거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남한산성에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한덕운(토마스)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서태순(아우구스티노)과 이조여(종여)는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순교하였으며,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또한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은 옥에서 병으로 순교하였고, 오 안드레아와 죽산 남광리 사람인 이 요한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순교 방식을 알 수 없는 나머지 순교자들은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죽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에서 병사하거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하겠다.
3. 남한산성 순교자들의 순교터
남한 산성 순교자들의 순교터와 관련하여 우선 살펴볼 것은 신유박해때 한덕운이 순교한 참수터이다. 연구자들 중에는 남한산성의 참수터를 성안 저자 거리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남한산성 순교성지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 배포한 지도에도 성안 저자 거리가 참수터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성안 저자 거리가 김치순 노인이 증언한 바와같이 참수터로 사용된 적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이 순교한 장소는 분명히 성안 저자 거리가 아니다. 이기경의 《벽위편》에 보면, 한덕운의 처형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광주부 동문 밖에서 백성들을 모아놓고 한덕운을 처형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이로써 한덕운이 순교한 참수터는 성안 저자거리가 아니라 동문밖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면 한덕운이 순교한 참수터는 동문 밖 어느 지점에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정확한 지점은 어느 자료에도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가 않다. 따라서 동문 밖으로 나 있는 옛길을 따라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참수형을 거행할 만한 곳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지난 8월에 여러 해 동안 남한산성 성지 개발을 위해 노력해온 김유신 신부의 안내를 받아 하성래 선생과 함께 골짜기 개울을 따라나 있었던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서 마땅한 곳을 찾아보았다. 많은 백성
들을 모아놓고 많은 병사들이 수비하는 가운데 참수형이 거행되었으므로 참수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너른 장소이어야 하고, 옛 길가에 있어야 하며, 동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장소로 김유신 신부는 물레방아간이 있었던 곳의 주변이라고 일러주었다.
윤민구 신부도 이곳을 참수터로 추정하였다고한다. 필자는 하성래 선생과 함께 물레방아간이 있었던 곳의 주변을 둘러본 결과 매우 타당한 장소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물레방아간이 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을 쉽게 모을 수가 있고, 동문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물레방아간 아래쪽에 평평한 너른 밭이 있어서 참수터로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신유박해때 한덕운이 순교한 참수터는 동문 밖 물레방아간 아래쪽에 있는 평평한 너른 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다음으로 감옥터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87년에 간행한《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교수형은 주로 감옥 안에서 행해졌다. 물론 감옥 밖의 공개된 장소에서도 교수형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교수형이 행해진곳은 모두 감옥 안이었다고 이해된다.
만약 감옥 이외의 공개적인 장소에서 교수형이 행해졌다면 광주부 유수가 의정부에 올린 보고에 그런 내용이 누락될 수가 없다. 그러나 병인박해 기간에 광주부 유수가 의정부에 올린 보고 가운데에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수형이 모두 감옥 안에서 행해졌음을 말하여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이 요한과 오 안드레아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죽산 남광리 사람인 이 요한과 함께 여러 교우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는 증언기록으로 보아 두 사람 외에도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사람이 더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김만집도 기해박해 때인 1期9년 말경에 체포되어 1841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김만집, 이 요한, 오 안드레아 외에도 여러 사람이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김만집, 이 요한, 오 안드레아 외에도 여러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은 어느 지점에 있었올까?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보면, 남한산성에 형옥(刑獄) 21칸이 있다고 언급되어 있고, 홍경모(洪敬誤)가 1846년에 편찬한《중정남한지(重討南漢誌)》에 보면, 남자 죄수들을 수감한 옥(獄)과 여자 죄수를 수감한 여옥(女獄)이 따로 있으며, 남자 죄수들을 수감한 옥에는 방(S)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남한산성 안에 감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 지도에도 감옥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위치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감옥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그 실마리는 바로 남한산성에 포도청(捕盜廳)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가 있다. 홍경모가 1846년에 편찬한 《중정남한지》에 보면, 포도군관청(捕盜軍官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섹 1842-1843년(헌종 8~9)에 편찬된《경기지(京鐵誌)》에 수록되어 있는 〈광주부음지(廣州府邑誌)〉제와 18기년(고종 8)에 편찬된 《경기읍지(京銳邑誌)》에 수록되어 있는 〈광주부지(廣州府誌)〉체에 보면, 포도청 9칸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포도청은 포도군관청을 줄여서 표기한 것으로 동일한 관청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서울의 좌 , 우포도청과 마찬가지로 남한산성의 경우도 감옥이 포도청에 딸려 있었다고 보아진다. 물론 어떤 지도에도 포도청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주민들의 구전을 바탕으로 포도청의 위치를 확인하여 표지석을 세워놓은 것이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가 있다. 바로 로터리 주차장 근처의 천일관 옆에 포도청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일찍이 오기선 신부가 확인한 포도청 자리와도 일치한다.
오기선 신부는 1976년 8월 26일 포도청 바로 아래 편편한 곳에서 살았다는 당시 81세(1985년 출생)인 김치순 노인의 도움으로 옥터, 포도청터 등을 확인하였다. 즉, 당시 돌축대가 있던 언덕 위의 밭(지금 포도청 표지석이 놓여 있는 자리인 듯》이 포도청 자리이고 그 위쪽으로 10m 떨어진곳에 있던 4백 평 남짓한 콩밭이 옛날 옥터였다는 것이다.
이 감옥터와 포도청터를 하성래 선생과 함께 김유신 신부의 안내를 받아 살펴보았는데, 김유신 신부는 변기영 신부도 일찍이 이 포도청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는 지점의 부근을 감옥터로 보았다고 일러주었다. 요컨대 포도청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 9칸의 포도
청이 있었고, 그 위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21칸의 감옥이 있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신자들이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다가 순교한 장소에 대하여 알아보자. 병인박해 때 서태순(아우구스티노)과 이조여(종여)는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었다. 백지사형도 신문을 하는 과정에서 행해졌으므로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가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곳도 관장이 신문하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가 백지사형으로 순교할 때 여러 교우들도 함께 처형되었다는 증언기록에)으로 보아 두 사람 외에도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사람들이 더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관장이 신문하던 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서태순, 이조여, 정은(바오로), 정 베드로 외에도 여러 명이 더 있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면 서태순(아우구스티노), 이조여(종여), 정은(바오로), 정 베드로 외에도 여러 명의 신자들이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다가 순교한 장소는 어디였을까? 이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광주부의 관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조대 이후 광주부의 중요한 관원으로는 유수(留守), 중군(中軍), 판관(判官)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던 관원은 중군39)이었다. 원래는 광주부의 부윤(府尹)이 수어사(守饌使)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으나 정조대에 와서 부윤을 유수로 승격 시키면서 토포사의 권한을 혁파하고 중군에게 도둑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중군은 주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도둑을 다스리는 임무는 주로 판관이 담당하였다. 판관은 수어사 종사관으로 전영장을 겸하였으며 광주부를 실질적으로 다스렸다.
실제로 병인박해 때 광주부의 판관은 천주교 신자의 체포를 진두지휘하고 그 처리 결과를 포도청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광주부 유수가 천주교인들의 동태를 적발하여 보고하라는 의정부의 공문을 받고 그일을 판관에게 위임하여 그가 보고한 대로 의정부에 1867년 1월 9일 보고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광주부의 최고위 관장으로서 수어사(守饌使)를 겸하고 있던 유수도 당연히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유수는 중군이나 판관이 신문을 한 신자들 가운데 특별히 유수가 나서서 다스릴 필요가있는 신자들만을 신문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여러 신자들이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순교하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는 판관이 집무하던 동헌 뜰과 중군이 집무하던 동헌 뜰, 그리고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 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주된 역할을 한 판관이 집무하던 동헌은 어디에 있었을까? 판관이 집무하던 동헌은 1748년(영조 24)에 광주 부윤 남태온(南泰溫)이 세운 제승헌(制勝으로 수어영(守饌營)뒤쪽에 있었다. 이 제승헌은 이아(威衝)로도 불렸으며씨 12칸 규모의 건물이었다. 이아 곧 제승헌은 수어영 안에 있다고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백칸 규모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수어영 역내에 있었다고 이해된다. 수어영은 연무당(鍊武堂), 연병관(鍊兵諸), 연무관(演武館), 학무당(學武堂)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지금 연무관이 있는 일대가 수어영이 있었던 장소이며, 바로 이 연무관 뒤쪽에 제승헌 곧 이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광주전도[1872년 제작, 규1218이 참조).
다음으로 중군이 집무하던 동헌은 어디에 있었을까? 중군은 3개의 아문(衝門)이 남한산성에 설치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서울에 머물게 하였던 점에)으로 보아 남한산성에는 별도로 중군이 집무하던 동헌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중군은 서울에 머물다가 이일 있을 때만 남한산성으로 내려와 근무하였는데, 이때 아마도 수어영에서 집무하지 않았을까 한다.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騰錄)》에 수록되어 있는 1866년 2월자 광주 중영(中營)에 관한 기사에 보면, 서태순, 이조여 등이 붙잡혀 중영(中營)에서 신문을 받다가 서 태 순과 이 조여 두 사람이 물고되었다고 언급되 어 있는데, 여기서 중영은 중군의 군영 곧 중군이 서울서 내려와 집무하던 수어 영으로 이해된다.
병인박해가 발생한 시기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군이 서울서 내려와 직접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해석이 맞는다면 서태순(아우구스티노)과 이조여(종여)가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순교한 곳은 수어영 곧 연무관 뜰이 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은 어디에 있었을까?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이 따로 없던 1817년(순조 17) 이전에는 행궁(行宮)에서 집무를 하였다. 그러다가 1817년에 행궁에서 집무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행궁 상궐(上闕) 담 밖에 좌승당(坐勝堂)을 짖고 그곳에서 집무하기 시작 하였다.
따라서 신유박해 때는 신자들이 행궁에서 신문을 받았다고 생각하기쉽다. 그러나 행궁에서 집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조심스럽고 두렵게 여겨졌으므로 행궁에서 죄인을 신문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으므로 신유박해 때는 수어영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 좌승당이 세워진 뒤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좌숭당에서 신문하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수어영에서도 신문하지 않았을까 한다.
다음으로 옥에서 교수형이나 병으로 순교한 신자들이나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은 신자들의 시신을 시구문을 통해 성밖으로 가지고 나가 버린 장소에 대한 논의도 여기서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순교자들의 시신을 성밖으로 가지고 나간 시구문에 대해 살펴보자.
성안에서 보아 동문 오른쪽에 골짜기의 개울물이 홀러나가는 수구문이 있는데, 여기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에 보면, 이 수구문을 통해 순교자들의 시신을 버렸으며, 이 때문에 그 이름이 뒤에 시구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성안 주민들이 사망하였을 경우에 수구문을 통해 시신을 성밖으로 끌어내 장사를 지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수구문은 본래 폭이 188cm이고 높이는 205cm로서 산성내의 일반적인 암문의 크기보다 더 컸으며, 바닥과 천장에 폭 23cm 정도 간격으로 구멍을 파고 쇠창살을 가로 질로 놓아 적이 수구문을 통해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함께 이곳을 답사했던 김유신 신부는, "수구문 오른쪽에 수레가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성안 주민들의 공동묘지가 나온다"고 소개하면서, "이 작은 문이 시구문으로 생각되며, 이 문으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가서 버렸을 것으로 이해된다"고 일러주었다.
이러한 김유신 신부의 설명을 듣고 필자는 하성래 선생과 함께 수구문 오른쪽에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하여 성안 주민들의 공동묘지로 나 있는 길과 주변의 지형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공동묘지로 나 있는 길 왼편에는 높고 가파른 비탈이 있으며, 그 비탈 아래에는 동문 옆 수구문에서 홀러나온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기 때문에, 이 공동 묘지로 나 있는 길 왼편에 시체를 버리게 되면 그 시체가 비탈을 타고 아래 개울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증언 기록과 잘 부합된다. 《정씨가사》에 보면, 1866년에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남한산성 동문 밖 개울에 버려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7) 또한 구산 순교자들의 후손들도 1868년에 순교한 5명의 경주 김씨 순교자들의 시신이 남한산성 동문 밖 성 밑 개천에 버려져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로써 보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이 동문 밖 개울에 버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시신은 처음부터 개울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개울 위에 있는 언덕에 버려진 시신들이 개울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씨가사》에, "증조부의 시체는 언덕에서 나려 굴러 낭떠러지 바위밑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풀을 베어 덥고 돌로 표를 하고 도라 오다가(하략)"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동문 밖 개울 옆에 낭떠러지가 있고 그 낭떠러지 위의 언덕에서 버린 시신들이 낭떠러지 아 래에 있는 개울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볼 때,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성밖으로 나갈 때 이용한 시구문은 동문 오른쪽 수구문 우측에 있는 작은 문으로 이해되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은 시구문을 나가 공동묘지로 나 있는 길 왼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들 가
운데는 가족들이 찾아다 안장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가족들이 거두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순교자들의 시신은 이곳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곳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진 곳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 는 곳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4. 순교 방식에 대한 인식과 성지 개발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순교 사적지는 순교자의 목을 벤 참수터, 교수형이 행해지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한 감옥터,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이 행해진 관아의 뜰, 순교자들의 시신을 버렸던 곳 등 여러 곳이 있다. 이러한 여러 순교 사적지들 가운데 오늘날 성지로 개발된 곳은 주로 참수터나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들이다. 예컨대 서울의 경우 4대 순교 성지인 서소문 밖, 새남터, 절두산, 당고개 성지가 모두 참수터이며,삼성산 성지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경기도의 죽산 성지도 참수터에 조성되었고, 양근 성지도 참수터 부근에 조성되고 있으며, 구산 성지와 어농리 성지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개발되었다. 충청도의 황새바위 성지와 갈매못 성지도 참수터에 조성되었고, 성거산 성지와 해미 성자 등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전주의 숲정이 성지와 치명자산 성지도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여산의 숲정이 성지와 천호 성지도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또한 대구의 관덕정 성지, 부산의 장대벌 성지, 강화의 갑곶돈대 성지 등도 참수터이다.
이상에서 알아보았듯이 여러 순교 사적지 가운데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은 성지로 개발된 곳이 많다. 그러나 참수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자들이 교수형이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교한 감옥터는 성지로 개발된 곳이 한 곳도 없다. 그리고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순교한 관아터도 백지사형이 행해진 여산의 경우만이 성지로 개발되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순교 성지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터나 관아터를 방치한 채 주로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개발되어 온 것은 무엇보다도 박해기 신자들의 순교 방식에 대한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것같다. 박해기 신자들은 여러 순교 방식 가운데서도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로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17년 10월에 덕산 고을 배나다리에서 해미 포졸들에게 끌려간 몇몇 신자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가 주로 사형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달레가 지적한 것을 통해서 알 수가있다. 즉, 교우들이 기록으로 남길 때에 혼히 사형 집행인의 손에 죽은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 많이 하고, 옥에서나 귀양살이 가는 도중에 그보다 못지 않게 영광스러운 죽음을 당한 교우들 이야기는 덜 하기 때 문에 그들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박해기 신자들이 옥에서나 귀양살이 가는 도중에 죽은 신자들의 이야기보다 참수형을 받아 죽은 신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감옥에서 교수형이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는 것과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는 것보다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더 영광
스러운 순교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최여겸(崔汝嫌, 마티아)은 관장이 자신을 매질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므로 그렇게 되면 자기 제헌(祭獻)에 무슨 부족한 것이 없을까 봐 겁이 나서 여러 날 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러한 박해기 신자들의 순교 방식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달레는 김강이(시몬)가 1815년 11월 5일에 원하던 영광스러운 참수를 못하고 원주에서 옥사하였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와 같이 참수형을 받아 죽은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로 인식한 박해기 신자들의 전통에 따라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순교 성지를 개발하게 되었으며, 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이나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관아터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순교자들에게 적용된 참수형, 교수형, 백지사형 등의 순교 방식은 그들의 신심을 주된 기준으로 삼아 서로 다르게 결정되었다고 보기는어렵다. 순교자들의 순교 방식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박해를 단행한목적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병인박해 때 절두산에서 신자들을 처형하면서는 프랑스 함대의 내침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무겁게 묻고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목적에서 신심의 깊은 정도에 관계없이 주로 외적을 불러들인 혐의가 있는 신자들을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절두산에서 참수형을 받아 죽은 신자들 가운데는 최수, 김인길, 김진, 원후정, 성연순 등과 같이 배교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등의 발생으로 박해가 격화되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된 병인박해 때는 절차가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참수형보다는 주로 간편하게 시행할 수 있는 교수형으로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순교자들에게 적용된 순교 방식이 순교자들의 신심을 주된 기준으로 삼아 서로 다르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실제로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1866년에 3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죽산 남광리 사람인 이 요한은 관장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으며, 1866년에 3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양성 사람인 오 안드레아 도 처음에는 무수히 가해지는 혹형을 참지 못하고 잠시 굴복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치고 관장 앞에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다.
1866년에 38세의 나이로 매맞아 순교한 양지 사람인 서태순(아우구스티노)은 자원으로 잡혀 신문 과정에서 신부를 집에 모셨다는 죄로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 매를 이기지 못하고 순교하였다. 또한 1866년 12월 8일에 60여세의 나이로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이천 단내 사람인 정은(바오로)은 피신하라는 아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원으로 잡혀가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으며, 그의 재종손 정 베드로도 재종조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스스로 나가 잡히려고 하자 그의 아내가 만류하였지만 끝내 아내의 간청을 뿌리치고 자원으로 잡혀가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재종조와 함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상에서 알아보았듯이 순교자들에게 적용된 참수형, 교수형, 백지사형 등의 순교 방식은 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박해를 단행한 목적에 따라 결정된 것이지 순교자들의 신심을 주된 기준으로 삼아 서로 다르게 결정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 참수형 이외의 방식으로 순교한 신자들을 살펴보아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로 인식한 박해기 신자들의 전통에 따라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순
교 성지를 개발하는 것을 지양하고, 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이나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매 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관아터도 성지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감옥은 신자들이 모진 굶주림과 추위와 더위를 참으며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옥사하거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곳일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순교 신심을 다지고, 또한 배교자를 권면하여 다시 뉘우치고 순교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자들을 신문한 관아터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의 요구에 맞서 당당하게 천주교가 올바른 도리임을 성서의 내용을 인용해 가며 논리 정연하게 진술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곳이기도 하다.
만약 이번 학술 심포지엄을 토대로 남한산성의 순교 성지를 개발하고자 한다면, 참수터 뿐 아니라 감옥과 신자들을 신문한 관아터, 그리고 시구문 밖의 순교자들의 시신을 가져다 버린 곳도 아울러 성지로 개발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성지 개발도 좀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한다.
5. 맺음말
이상에서 남한산성 순교자들과 순교터에 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글을 통하여 밝혀진 몇 가지 사실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남한산성에서 처형된 순교자들 가운데 한덕운(토마스)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서태순(아우구스티노)과 이조여(종여)는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순교하였으며,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또한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은 옥에서 병으로 순교하였고, 오 안드레아와 죽산 남광리 사람인 이 요한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순교 방식을 알 수 없는 나머지 순교자들은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죽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에서 병사하거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 때 한덕운이 순교한 참수터는 동문 밖 물레방아간 아래쪽에 있는 평평한 너른 밭으로 이해된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너른 장소이고, 옛길 가에 있고, 동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참수터로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다.
김만집, 이 요한, 오 안드레아 외에도 여러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터는 로터리 주차장 근처의 천일관 옆에 포도청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지점이다. 이곳에 9칸의 포도청이 있었고, 그 위쪽으로 10m떨어진 곳에 21칸의 감옥이 있었다.
여러 신자들이 관장에게 불려가 신문을 받다가 매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는 판관이 집무하던 동헌 뜰과 중군이 집무하던 동헌 뜰, 그리고 유수가 집무하던 동헌 뜰이었다. 신자들을 신문하는 데 있어서 주된 역할을 하던 판관이 집무하는 동헌은 제승헌(制勝ff) 곧 이
아(威衝)로 연무관 뒤쪽에 있었고, 서울에 있다가 일이 있을 때만 내려와 신자들을 신문하던 중군이 집무하는 동헌은 수어영 곧 연무관이었으며, 특별한 경우의 신자들만을 신문하던 유수가 집무하는 동헌은 신유박해 때는 수어영이었고, 기해 , 병인박해 때는 좌승당 또는 수어영이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성밖으로 나갈 때 이용한 시구문은 동문 오른쪽 수구문 우측에 있는 작은 문으로 이해되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은 시구문을 나가 공동묘지로 나 있는 길 왼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들 가운데 가족들이 거두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시신들은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곳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진 곳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곳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순교 성지의 개발은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로 인식한 박해기 신자들의 전통에 따라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순교자들에게 적용된 참수형, 교수형, 백지사형 등의 순교 방식은 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박해를 단행한 목적에 따라 결정된 것이지 순교자들의 신심을 주된 기준으로 삼아 서로 다르게 결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 참수형 이외의 방식으로 순교한 신자들을 살펴보아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참수형을 받아 죽는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로 인식한 박해기 신자들의 전통에 따라 참수터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순교 성지를 개발하는 것을 지양하고, 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감옥이나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매 맞아 죽거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관아터도 성지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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