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취) [원각사 초청강연] 진여와 열반 특강 - 견성의 핵심, 청정광명심 2강
0:00
부처님 때부터 경허스님까지 이런 진여와 열반에 관련된 경전들을 다 뽑아 가지고 해 드릴 거예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도 있고 반야심경(般若心經)도 산스크리트어 버전 다 해가지고 최신 버전으로 해서 제가 번역해서 웬만한 경전을 다 다룰 거거든요. 수심결(修心訣)이니 뭐니 웬만한 경전을 한번 싹 훑는 경전 강의가 있는데 이 안에서 그중에 그냥 제가 일부만 나눠드리려고 뽑아왔어요. 강의로서는 지금 앞부분 하고 있는데 저 뒷부분까지 부러 그냥 제가 뽑아서 오늘 나눠 드린 거고요. 요거 한번 제가 같이 보게요. 우리가 지금 왜냐면 일단 체험을 하고 봐야 이해가 되거든요. 저는 간단합니다. 반야라는 건요 진실을 그대로 안다고 했잖아요. 딱 이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반야는 아주 간단합니다. 체험 플라스 개념이에요.
1:07
과학도 이거예요. 실험하고 개념화하고. 자 부처님께서도 육근의 체험 영적 체험에 기반해서 제법무아라고 개념화하신 거예요. 이 두 개(체험+개념)만 만나면 돼요. 이렇게 외워두세요. 이거 두 개가 만나면 뭐가 돼요? 체․념이 됩니다. 이게 자명하면 돼요. 인가가 돼요. 인가한다는 건 체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도저히 다른 답을 낼 수가 없다”라고 체념하셔야 돼요. “맞네” 해야 인가예요. 수용이라는 건요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네” 하고 받아들이는 게 수용이에요. 그래서 인가가 인욕바라밀이요. 그래서 불경에서 인욕바라밀 파트를 보면 다 인가 얘기만 나와요. 진리의 인가. 그게 엄청난 치욕이거든요. 진리 인가한다는 게 치욕이에요. 내가 몇 십 년간 연구해 놓은 오만 개똥철학을 다 내려놓고 다르마를 영접하는 그게
2:05
인욕이에요. 인욕 중의 인욕이에요. 그래서 화엄경도 인욕바라밀조 가면요 진리의 인가 얘기만 해요. 화 참고 하는 거는 더 저급한 문제고 진짜 이제 보살이 되는 데 더 궁극적인 의미는 인욕이 진리를 수용했는가 안 했는가 예요. 다른 사람을 수용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수용했을 때 이 모든 게 원만하게 일어나니까요. 자 그래서 오늘 한번 저기 석가모니부터 경허까지인데 그래서 일부러 석가모니 부처님도 자료를 뽑아서 넣었고 경허스님도 끝에 한번 넣어봤습니다. 달려 볼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요 진여 열반을 얘기할 때 제일 핵이 돼야 되는 게 이거여야 된다고 제가 말하고 싶은 게 이겁니다. 2페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의식’(열반의식)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
3:05
의식은. 자 이거 기억하세요. 육근 작용.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게 육근이고 육근은 다른 말로 오온(五蘊)입니다. 그러니까 관점이 좀 다르기 때문에. 하지만 같은 거예요. 결국 뭐예요? 둘 다 정신과 물질 작용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뭐라고요? 무상(無常). 이 공식이 있습니다. 무상‧고‧무아가 공식이에요. 이 열반 자리는요 열반 자리는 적정(寂靜), 고요함이 핵심이고요. 이 열반의 4덕으로 말하는 게 열반사덕이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상‧락‧아‧정. 청정하고. 자 보세요. 청정하고 무상의 반대입니다. 영원하고. 육근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4:05
무상한데요 이 자리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다는 거예요. 일어나고 사라진 모든 걸 알아차릴 뿐이거든요. 텅 비어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텅 비지 않았다면 상(常)에 걸렸겠죠.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걸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 무상함에 반대해서 영원하고 괴로움에 반대해서 지복, 락이며 무아가 아니라 나입니다. 이게 참나예요. 참 자아(自我), 참아(我)죠. 진아(眞我). 이걸 힌두교식 진아로만 보시면 안 돼요. 상락아정이 들어 있는 거기 때문에. 그리고 청정해요. 어떤 번뇌에도 물들지가 않습니다. 어떤 번뇌도 없고 지복이면서 자, 아(我)라는 거는 의식성이에요. 알아차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알아차리는데 영원해요. 보세요. 몰라 하고 계시면요, 육근을 잊고 몰라 하면요, 시간 공간 나라는 이름을 잊고 몰라 하고 계시면, 내 나이도 잊고 계시면 상락
5:04
아정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게 열반이라는 거예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상(常), 모른다 하고 있으면 나이가 뭔지 몰라요. 모른다 하고 있으면요 다 몰라가 되는데 내 의식만은 몰라가 안 됩니다. 생생해져요. 오히려 생생해져요. 자 그때 그 의식이 영원하겠죠? 왜? 무상함을 모르니까요. 락이겠죠? 왜? 그 상태에서는 번뇌가 없거든요. 부족한 게 없고 어떤 번뇌도 없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리고 있어요. 나예요. 그리고 번뇌가 없으니까 청정해요. 상락아정 조건에 맞는 건 그 자리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우주 내에서, 각자의 우주 내에서 결국 정신과 물질 작용인데 그 정신작용의 핵까지 들어가 봤을 때 상락아정 조건에 부합하는 게 열반이겠죠. 그런데 보세요. 부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의식은 볼 수도 없고. 이거는요
6:00
청정하다는 얘기고 번뇌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형체도 없대요. 무한하고요. 영원하단 얘기고요.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 나라는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뭔가 의식은 있다. 이때 나는 에고적인 내가 아니에요. 온 우주를 통틀어 나라고 보는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나와 남이 다른 나가 아니라 의식이라는 면에서 우리 자아의 본질이라고 해서 참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상락아정에 해당되는 표현을 이렇게 해 놓으셨어요. 이런 의식이 있다. 이게 부처님의 선언이었어요. 청정광명한 마음이 있다. 요거를 부정하고 불법을 닦으니까요 “참나가 있네 없네. 무아네.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네.” 이런 쓸데없는 지엽적인 논쟁에 빠져드는 겁니다. 윤회는 누가 해요? 육근이요. 육근이 윤회하는 거예요. 윤회는 육근이 하고 이 자리는 윤회를 초월해 있어요. 열반은 윤회의 세계가 아니에요. 부처님이래로 여긴 이 세계는 인과가 없어요. 인과 없다는 얘기는요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7:04
스스로 현존하는 세계지. 이거는 스스로 현존입니다. 그래서 지금 뭐라고 했냐? 볼 수도 없고 무한하대잖아요. 그런데 이런 빛나는 자리가 있대요. 그래서 보세요. 이 자리에는요 ‘지수화풍’(4대) 물질도 설 수 없으며 길고 짧고 미세하고 거칠고 아름답고 더럽다는 이런 이원성, 그리고 정신과 물질(5온), 즉 오온과 육근이죠. 일체가 소멸된다. 알음알이마저 소멸하면. 이때 알음알이라는 건요 보세요. 생각 감정 요 의식으로써의 알음알이를 말해요. 이것마저 다 소멸된 뒤에도 뭐는 있어요?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은 있다. 그러면 이게 열반이지 다른 게 열반이 아니에요. 지금 얘기 하나만 해도 엄청난 얘깁니다. 지금 열반을 상상 속의 열반을 찾고 있어요. 몰라 하면 바로 열반인데. 몰라 하면 바로 열반이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아라한이 일주일 만에 아라한이 나왔어요. 지금 아라한이 안 나와요. 왜 그런지 아세요?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에요. 머리가 안 좋아져서도 아니에요. 열반을 상상 속에서 찾고 있어요.
8:06
아잔 브람스님 이런 분들 강의 들어보세요. 아주 탐진치가 없는 그 어떤 아주 최고의 상태를 열반이라고 하고 찾고 있으니 중생심에서 그런 게 있을까요? 중생심의 근원에 들어가야 있는데 중생심의 말단에서 열반을 찾으면요 언제 한번 우리가 탐진치가 없는 그 마음이 있을까요?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태풍 도는 데서 맑아지기를 찾고 있으면 영원히 못 찾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는 안 찾았어요.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 일주일 만에 아라한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일주일, 길면 보름. 이거를 찾았으니까요. 이게 께왓다경 디가니까야라는 초기불경에 있는 거고요. 께왓다 맛지마니까야에 범천의 초대경에서도 똑같은 말 하세요.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열반의식)이 있다. 놀라운 건요 지금
9:03
힌두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을 내시는 분이 있는데요. 지금 서양학자들은, 우리나라 학자 분들은 이런 얘기를 잘 안 하시는데 서양학자는 뭐에 의문을 가지는지 아세요? 분명히 석가모니는 우파니샤드 시대의 성자입니다. 브라만교가요. 베다 시대는 진짜 종교성이 강해서요 브라만 계급 아니고는 진리를 들으면 안 돼요. 베다라는 경전을 외는 소리를요 계급이 낮은 하층민이 듣잖아요. 불러다 귀에다 쇳물을 부어버립니다. 우리 양반 사대부(士大夫) 이상이에요. 철저한 신분사회고 브라만들만이 진리를 다룰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파니샤드 시대가 오면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누구나 다 자기 안에서 아트만, 브라만, 신성을 찾아요. 신과 합일되는 사상이 일어나요. 우파니샤드 시대가 오면서 브라만 계급이 아닌 크샤트리아 그 밑에 계급도 출가해 가지고 도 닦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려요. 그래서 부처님도 출가할 수 있게
10:00
된 거예요. 안 그러면 출가 못 해요. 그래서 그렇게 생긴 출가자들은 브라만이라고 안 하고 사문(沙門)이라고 불렀어요. 사문. 그래서 부처님이 사문이 되신 거예요. 그래서 우파니샤드 시대에 성자가 됐는데 부처님의 스승들도 당시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의 성자들이었어요. 출가 막 해서 배우신 두 명의 스승, 이분들도 결국은 다 우파니샤드식 공부를 했겠죠? 우파니샤드 공부의 제일 핵심이 뭔지 아세요? 스스로 빛나는 의식이에요. 지금 부처님 말씀에 그대로 들어 있죠. 그래서 이 경전을요 전재성 박사님이나 각묵스님 번역을 보시면 이렇게 번역을 안 했습니다. 알아볼 수 없게 틀어서 번역했어요. 지금 제가 한 이 번역은 서양학자들 견해에 따라서 다시 번역한 겁니다. 서양학자들은 이 부분에 주목해 가지고 뭘 보냐면 우파니샤드 시대와 부처님이, 즉 브라만교와 불교가 그렇게 둘이 아니었단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요게 지금 최신 연구인데 우리나라 학자 분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 불교가 수행이 힌두교 하면은 힌두교는 빨갱이라는 식이에요.
11:03
“힌두교, 오 힌두교 너 잘 걸렸다. 불교의 불온 분자, 외도.” 그런데 보세요. 지금 방금 이 구절을 잘 음미해 보세요.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 무한하게 이 모든 곳이라는 게 결국 뭐예요? 육근이요 육근 안에서 항상 빛나고 있는 의식이 있대요. 특징도 한계도 없기 때문에 육근들처럼 무상‧고‧무아가 아니라는 소리에요. 무상‧고‧무아란 특징이 없이 상락아정으로 빛나고 있는 의식. 여기까지 기억해 보시고요. 세 번째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이 빛나는 마음을 한문으로 정광명심(淨光明心)이라고 그래요. 달라이라마 존자도 이 부분은 정광명심이라고 합니다. 청정광명심(淸淨光明心)이 있는데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 것일 뿐 결국 그 빛나는 게 오염된 건 아니기 때문에 번뇌가 물러나면 다시 그 마음은 빛남을 회복해요. 빛남을 잃은 적은 없어요. 번뇌에 가렸던 적이 있는 거죠. 자 지금 저 등(燈)이 있지만
12:04
등이 새카맣게 유리에 때가 끼면 빛이 안 드러나겠죠? 그 안에서는 빛이 꺼진 적이 있을까요? 없어요. 똑같아요. 지금 이 얘기예요. 마음은 속성이 빛나는 거예요. 그 빛이 나지 않으면 이미 마음이 아닌 거죠. 이런 의식이 있다라고 부처님께서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빛난다는 건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여러분 막 빛나는 걸 상상하시면 안 돼요. 그건 유형의 빛이에요. 무형의 빛난다는 거는 뭘까요?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육근이 일어나고 사라지면 귀신같이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태양이 빛을 비춰서 사물을 비추듯이 육근의 무상‧고‧무아의 모든 작용을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알아차리고 인과법대로 딱 정확하게 집행하는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불성 자리고 우리 진여 자리예요. 이거를 힌두교식으로 말하면 참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이 참나 이론과 다르지 않다는 게 바로 증명될 겁니다. 지금 이미 나온 얘기로 충분히 보셨을 거예요. 네 번째 일체라는 건 육근 밖에 없다.
13:05
요거의 근거입니다. 잡아함경 13권 319편이요. 요거. 일체라고 하는 거는 12처인데 12처라는 건 뭐예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근작용 밖에 없다. 나는 이 일체 외에 다른 일체를 별도로 세우겠다라고 누군가 한다면 그건 말뿐이다. 개념만 있지 체험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런 거는 있지 않는 것이고 이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얼마나 체험을 중시했는지 아시겠죠? 부처님은요 진짜 자명 덩어리에요. 내가 경험한 육근 후에 다른 세계는 설정 안 해요. 그 육근을 관찰했더니 무상‧고‧무아고요, 그 육근을 알아차리는 그 의식 자체는 열반적정이고, 거기엔 지수화풍도 이원성도 오온도 없는 거예요. 부처님 깨달으신 거 이게 다예요. 여러분도 지금 이걸 깨달으시면 견성하신 거예요. 그래서 지적인 장애가 벗겨지면서 아 진리를 알게 돼요. “아 무상‧고‧무아구나. 열반적정이구나. 만법이 오온이 본래 공이구나.” 이 진리를
14:04
알게 되고요. 번뇌장이 떨어져 나가면, 아니 진리를 알았는데 육바라밀에 맞게 못 살겠어요? 육바라밀에 맞게 살아가는 삶으로 인격이 바뀌어가요. 이 두 가지 수행이 돈오와 점수입니다. 아시겠죠? 자 또 더 가볼게요. 바로 우파니샤드 준비했습니다. 이거 찾아보려면 힘들어요. 근데 바로 보실 수 있어요. 여러분은 지금 체험도 하셨죠? 몰라 체험도 하셨죠? 이제 이거 읽으시면 맛이 달라요. 체험과 개념이 만나기 때문에 이제 맛이 다릅니다. 여러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이 도시의 지배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참자아다. 도시라는 건 육근의 성입니다. 당신의 육근의 성에 지배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참자아. 남에 의해서 존재하는 게 뭐예요? 육근이요. 자 보세요. 요거(생수)는 남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알아차리는 자가 있어야지 요 대상으로써 색깔이 있고 소리가 있는 거 아니에요?
15:00
그리고 이거를 또 인연으로 해서 생각이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요. 이걸 가지고 좋다. 싫다. 물이네. 이 모든 거는 인연 따라 일어났어요. 이 모든 걸 떠나서 원래부터 알아차리고 있던 그 거울 같은 존재가 참자아예요. 자 거울은요 사물을 비추죠? 사물을 안 비쳐도 거울은 원래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게 여러분의 본마음입니다. 공적영지. 본래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알아차리는 데 노력을 안 해도 돼요. 자 수행할 때 하는 노력이 알아차리려고 하는 노력 같죠? 알고 보면요 알아차리는 노력이 아니에요. 알아차림이라는 건요 여러분 마음에서 태양처럼 늘 빛나고 있어요. 여러분 알아차리려고 노력 안 하세요. 여러분이 노력하는 건요 요 태양빛을 모아다가 불을 내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돋보기를 통과해야만 태양이 불을 내거든요. 즉 마음챙김이라는 건요 돋보기예요. 즉 어디에 내가 집중할지 정하시는 거지 알아차리는 능력은 원래 여러분이 노력 안 해도
16:04
늘 알아차리고 있다니까요. 자다가도 부르면 일어난다니까요. 잘 때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서 일어나시겠어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자도 부르면 일어납니다. 알아차리는 능력은 어디를 안 가요. 다만 이걸 알아차리려는 마음이 흩어지려고 하는 거죠. 자꾸 딴 놈을 알아차리거든요. 펜을 보자 하면 바로 “아 오늘 김치는 냉장고에 넣었나?” “설거지를 하고 나서 가스는 껐나?” 오만 생각이 그쪽을 알아차리는 거지 알아차리는 데 노력이 안 든다니까요. 왜? 스스로 알아차리는 자예요. 알아차리는 자가 그게 여러분 참나라니까요. 그래서 우파니샤드는 별게 아니에요. 힌두교 도인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스로 존재하는 참나를 안 거예요. 이 참나가 있는데 그 의식은 영원히 빛을 발한다는 건 영원히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참자아에 머물러 있는 사람, 여기에 몰입한 사람은 마음챙김을 육근에다 안 하고 참자아에다 몰입해
17:04
버린 사람, 마음을 거기다 집중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자 보세요. 여러분은 눈의 색깔이 보이면 색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은 영원해요. 노력도 안 해요. 옮겨 다니니까 데려오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다시 보는 데 집중하자. 국어 영어면 국어 국어. 영어로 계속 가는 마음을 끌어오는 거지 알아차림은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뭐 색깔에 몰입하거나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생각에 몰입하는데 몰입하는 이건 뭐냐고요? 이게 이뭐꼬 예요. 이걸 다른 말로 회광(回光), 밖으로 빛은 뻗어 나가게 마련인데 이게 태양빛인데 요 빛을 되돌려 가지고 반(返) 뒤집어서 비춘다(照). 플래시를 뒤집어 버리면 어떻게 돼요? 보통 우리 육근을 이렇게 비추고 있는데 색깔 소리
18:00
냄새 맛 생각 감정 하다가 이뭐꼬가 뭐냐면 이거라니까요. 이건 뭐지? 그럼 견성입니다. 그럼 견성. 쉽죠? 어렵다고 못 하실 걸요? 분명히 못 하십니다. “아 이해해 버렸네.” 자 보세요. 영원히 변치 않으니까 참자아의 마음이 머물렀다는 건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한 거예요. 반조해버렸더니 어떻게 됐어요? 반조하는 제일 쉬운 법이 몰라라니까요. 몰라 해버리면 육근이 다 날아가 버려요. 이놈만 남고. 요거 외엔 자 날아가요. 몰라 할 수 있는 모든 게 날아가요. 몰라 할 수 없는 게 뭐냐면, 몰라 하는 그 의식 자체는, 알아차림 이거는 내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알아차려지는 거를 어떻게 해요? 깊은 마취해도 알아차리는 의식은 어디 안 가요. 있다가 작동할 수 있게만 되면 다시 작동하는 거예요. 여러분 깊은 잠 잘 때 알아차리는 의식이 없는 거 같죠? 무의식 속에 있어서 그렇죠
19:03
나오면요 “잘 잤다” 그래요. 깊은 잠 속에서도 다 알아차리고 있었어요. 깊네 얕네. 뭔가 있어요. 일어나자마자 바로 평가합니다. 꿈꿀 때도 저 의식이 또 꿈속에서 또 다른 몸뚱이랑 세계를 알아차리는 게 꿈이에요. 자 이 마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슬픔의 바다를 건너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세계에 도달한다. 열반에 든다. 이게 불교랑 달라요? 자 이게 초기불교 이론입니다. 남방불교 소승불교 이론이요 육근은 무상‧고‧무아니 상락아정한 열반에 접속해서 여기에 딱 내 안에 섬을 만들어서 여기 들어앉는 게 이게 해탈이에요. 이게 우파니샤드식 해탈입니다. 소승적이에요. 대승적이지 않죠? 여기서 벗어난 게 대승이에요. 소승불교는 사실은 우파니샤드 브라만교의 가르침과 정말 통합니다. 통하니까 멀리 하는 거예요. 캐릭터 겹치거든요. 그러니까 멀리 하는 거예요. 공격하고
20:03
외도라고 자꾸 비방하는데요. 놀라운 점은 서양학자들이 의문 낸 게 있어요. 왜 석가모니는 우파니샤드 성자들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육사외도(六師外道)는 까는데 우파니샤드는 육사외도가 아닙니다. 정도(正道)예요. 육사외도는요 우파니샤드 시대의 신생 철학자들이구요. 우파니샤드 본진은 부처님이 치질 않았다니까요. 이게 의문이었다니까요. 그런데 이 의문을 보시면 알아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초기에 막 출가하자마자 스승들한테 배운 게 이거라고 추정해 왔겠죠. 영원히 변치 않은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을 보는 사람. 보세요. 자기 내면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 이게 부처님 불경이랑 다를까요? 자기 내면에 머물고 있는 그 유일한 참자아를, 이걸 참자아라고 한다고 했죠? 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를 누린다. 열반에 들어간다. 여러분 이게 되나 안 되나? 해보세요. 내가 해서 됐는데 그럼 난 힌두교인가? 어때요?
21:02
이렇게 고민하시는 게 좋아요. 내가 돼보시는 게. 이거 해 보시고 나면요 힌두교라고 비방한들 뭐라고 한들 우습죠. 왜냐하면 그건 언어 이전의 자리인데. 아니 언어 이전에 그 알아차린 자를 내가 느껴서 지금도 몰라만 하면 그 의식이, 원래 있던 의식이 훤히 드러나는데 이걸 힌두교, 불교 뭐라는 거예요. 불교도 여기에 뿌리박고 있지 어떤 불교가 있다는 거예요? 힌두교 불교 나눠서 싸우는 거는요 아 뭐랄까요? 적을 설정해 놓고 싸움으로써 계속 뭔가 내부 결속 다지는 거 밖에 안 됩니다. 포교 전략 밖에 안 돼요. 진리에서는 안 통할 말이에요. 보세요. 만약에 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 석가모니 가르침이 지금 뭔가 상충된다면 지금 이런 글들이 안 읽혀야 돼요. 또 다음 글 볼까요? 이건 파드마 삼바바라고 지금 티벳 불교 밀교의 시조죠. 티벳 불교 밀교의 시조입니다. 연화생(蓮華生) 보살
22:02
파드마 삼바바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 아시죠? 티벳 사자의 서 저자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만 쓰신 게 아니고요. 제목이 길어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결국 반야로, 반야로 그 자리에서 절대자유 열반에 드는 길 “반야로 해탈에 이르는 길”이란 책을 쓰신 분이에요. 여기 내용 좀 볼까요? 8세기 인도 파키스탄 왕족 출신입니다. 밀종(密宗)의 대사인데요 이 알아차리는 본성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투명한 비어 있음이며. 텅 비어 있고. 그러니까 무상‧고‧무아의 세계가 아니죠. 텅 비어 있으면서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비어 있음이다. 이런 어려운 말이 이해되시려고 하지 않으세요? 아직까지 막 자제하고 계시죠? “아니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이럴 리가 없어.” 자 한번 4번 가볼까요. 4번 그 각성, 깨달아 알아차림이란 뜻입니다, 그 알아차리는 본성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23:04
벌써 무상‧고‧무아랑 안 맞죠? 스스로 존재하는 투명한 빛이다. 투명한 알아차림. 이 각성은 부모 없는 자식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이 알아차린 자는 부모가 없다는 건요 태어난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태어난 적이 없다니 놀랍지 않은가? 각성이 만들어내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는 지혜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각성이라는 이 자리가 지혜 자리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태어나지도 않고 따라서 죽지도 않는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지금 스님 입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파드마 삼바바라는 티벳 최고의 고승이 하신 얘기예요. 뒤에 넘어가 보시면 5번. 마음은 투명한 지성으로 빛나고 있다. 투명한 지성을 한문으로 공적영지라고 하는 거예요.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니까 너무 신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오온이 공하단 말을요 진짜 오온이 텅 비었다고만 보시면 재미없어요. 오온 자리는요 공하단 얘기는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까지
24:04
아셔야 돼요. 태어난 적이 없는 텅 비어 있는 알아차림이 오온이다. 반야심경은 육근이 그대로 알아차리는 자란 소리예요. 여기까지 가면 가장 깊게 반야심경을 이해하신 겁니다. 그럼 요 말들이 다 이해돼요. 마음은 비어 있으면서, 즉 텅 비어 있으면서 투명한 지성으로 충만하다. 알아차림으로 충만하다. 비어 있음과. 지금 텅 빈 공적이죠. 투명한 지성 알아차림은 분리할 수 없다. 분명히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고 있대요. 신기하죠? 어떤 사람들은 이걸 마음의 실체라고 부르고 어떤 보수적인 사람들은. 힌두교 쪽이에요. 참자아라고 부르고, 성문승(聲聞乘)들은, 소승불교 성자들은 무아(無我)라고 부르며, 나라는 걸 초월한 자리라고 부르며, 관념론자는 마음이라고 부르고. 참마음이란 뜻이죠. 어떤 사람은 초월적 지혜 또 누군가는 불성 이렇게 부른다. 마지막에 누군가는 평상심이라고도 부른다. 선불교적인
25:02
가르침도 들어가 있어요. 어떠세요? 자 스스로 빛나는, 스스로 알아차리는 그 의식 하나 가지고 불교가 전개되고 있다는 걸요 이 관점에서 보시면 알 수 있어요. 또 갈게요. 족첸(大圓滿) 명상법이요 티벳불교 최고의 명상법입니다. 달라이라마께서 강의한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라는 책에 나와요. 거기 보세요. 여러분 우리 아까 한 거예요. 여러분 최상승법 하신 거예요. 이게 티벳의 선불교예요. 최상승선. 첫째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지 마라. 과거 몰라. 미래 몰라. 두 번째 나와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마음이 그 자신의 흐름대로 가도록 놓아둬라. 아까 1번에서 과거 몰라 미래에 몰라가 다 나왔죠. 과거 몰라 미래 몰라. 두 번째는요? 분별하는 마음내지 말라는 건? 몰라, 마음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몰라 해버려라. 세 번째 마음의 빛나는 명료함이라는 본질을 관찰한다. 네 번째 알아차리는 그 본질을 인식하며 한동안 머무른다. 이게 닝마파 최고의
26:06
수행법입니다. 전체적으로 몰라만 하면 돼요. 지금 이 말에 다 좋은데 몰라가 빠졌어요. 다 몰라 하라는 얘기입니다. 과거 몰라. 미래 몰라. 나도 몰라. 괜찮아. 근데 괜찮아 하고 계시면 돼요. 오직 알아차릴 뿐이야 하고 계시면 돼요. 됐죠? 최상승선 배우신 거 맞죠? 이게 티벳 거 따로 있고 동양 거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똑같아요. 대반열반경에서는요 상락아정을 강조하는 경인데 맨 끝으로 가볼게요. 8페이지 5번. 시간이 없기 때문에 8페이지 5번. 나, 이 자리를 나라고 합니다. 나, 보세요. 이 자리가 나예요. 자 상락아정에서 아(我)라니까요. 나. 나라고 할 수 있어요. 왜 나는 안 돼요? 여기서 나라는 건요? 이 무상할 때 나는 나와 남이 다른 나는 무상한대요. 그냥 오직
27:03
나는요 나와 남을 나누지 않는 알아차리는 자로서 나는 영원하거든요. 그래서 보세요. 나라는 건 바로 여래장이다. 불성이다. 열반경에서 얘기한 겁니다. 나라는 게 불성이다. 여래장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니 바로 나라는 거다. 여러분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게 꺼진 적이 없는 게 뭐냐면 “나라는 존재감”이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꺼지신 적이 없었을 거예요. 나라는 존재감은 그게 아까 기절해도 있어요. 그게 “알아차림”이라니까요.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감”이에요. 존재는 있습니다. 생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존재한다는 건 어디 안 가요. 그래서 이게 나라는 게 바로 불성이고.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라는 거다. 이와 같이 나라는 건 애초부터 항상 무량한 번뇌에 덮여 있으나, 중생들이 보기 어려우나 선남자여 오늘 여래가 설한 참나라고 부른다. 그거를 참나라고 부른다. 여기 한문으로 보시면 밑에 진아(眞我)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예 참나라는 말을 열반경은
28:05
다시 갖다 씁니다. 대승열반경에서요. 요 앞 구절도 심심해서 보시면요 “그러면 왜 처음에 참나 없다고 무아라고 하셨나요?” 그러면 이 얘기를 해요. “힌두교들이 나를 엄지손톱만 하다 그러니까 형상에서 나를 찾고 있으니까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진짜 내가 없어서 뭐라고 한 게 아니다. 이제 너희들은 참나 알만하니까 나라고 해라.” 이렇게 요게 비유로 설명된 걸 뽑아 놨어요. 보시면 돼요. 승만경(勝鬘經)은 건너뛰고요. 여기도 그냥 상락아정을 얘기한 겁니다. 상락아정을요 2번 보면 상바라밀 락바라밀 아바라밀 정바라밀이라고 불러요. 이게 승만경의 특징인데요. 보시면 열반의 사덕을요 열반 사덕이라고 하는 상락아정을 청정바라밀 지복바라밀 영원바라밀 참나바라밀이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29:01
바라밀을 궁극이라고 그랬죠? 궁극의 나, 궁극의 즐거움, 궁극의 영원함, 궁극의 청정함이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참나를 더 또렷이 설명했다는 거예요. 승만부인경(勝鬘夫人經). 이것도 승만부인(勝鬘夫人)의 가르침이거든요. 대승경전 중에 파격적인 게 주인공이 승만부인이에요. 왕 부인이에요. 왕 부인이 도를 논해요. 남녀노소 차별하지 말고 공부하자는 대승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누구나 부처될 수 있다. 자 원효스님으로 올게요. 한마음이란 무엇이든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 있는 얘기입니다. 일체의 현상계는 오염됨과 청정함의 구분이 있으나. 현상계는요 더럽고 깨끗하고 구분이 있어요. 하지만 본성 자리는. 자 보세요. 육근의 세계는 더럽거나 청정함이 있죠? 근데 이 세계는요 더럽고 청정함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라고 한다는 거예요. 하나다. 텅 비어 있어서 하나예요. 텅 비어 있어서 하나요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구요. 여기서는 그 구분이 없으니 하나요. 그래서 오직 하나요. 밑에 보시면 본성은.
30:05
그런데 그러면 텅 비어 있기만 해야 되잖아요. 텅 비어 있으면, 하나라는 건 텅 비어 있다는 얘기인데 청정과 오염이 없는 이분법이 없는 세계고 텅 비어 있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그 이원성이, 구분이 없는 그 자리는 온갖 현상계의 실체가 되지만 텅 비어 있기만 하면 허공과 같으냐? 그건 아니다. 텅 비어 있는데 뭐라고요? 알아차린다. 본래 그 본성은 스스로 신령스러운 인식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붙여준다. 그래서 일심이라고 한다. 이게 결국 뭐랑 똑같아요? 아까 말한 텅 비어 있는 빛. 알아차림. 공적영지. 지금 다 같은 얘기만 하죠? 부처님 때부터 형상은 없는 빛나는 의식, 우파니샤드도 똑같은 소리하고. 파드마 삼바바도 그렇죠. 텅 비어 있으면서 투명한 지성. 원효스님은요? 청정과 오염이 구분이 없는 텅 비어서 하나 된 상태에서도 허공과 달리 알아차리고 있다. 신령한 인식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자 이
31:07
자리가 부처 자리겠죠? 이 자리 찾아보세요. 찾으시면 여러분 땡잡은 겁니다. 여러분 의식 안에서 육근이 작동하지 않는데, 육근이 없고 잡념이 없는데 의식은 또랑또랑한 상태, 그게 참나예요. 잡념은 없는데 자지는 않은 상태가 참나예요. 요즘 사람들이 거기에 가까이 가고 있어요. 하도 힘드니까 멍 때리고 있어요. 멍 때린 거 비슷해요. 근데 멍 때림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눈이 풀려 있는 멍 때림하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멍 때림. 그게 선이에요. 최상승선은 멍 때림인데요 눈이 더 빛나요. 멍 때릴수록 의식이 더 선명해지거든요. 근데 그 멍 때림은 하도 힘드니까 무의식에 들어가는 멍 때림이 있어요. 눈이 풀려 있어요. 실제로 멍 때리기 대회도 하잖아요. 하도 죽겠으니까 판단 중지에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근데 이 판단 중지에 두 길이 있다고요. 무의식으로 들어가서 멍해져 있는 판단 중지와 이건
32:02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기공(無記空)에 빠져 있는 판단 중지예요. 불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느 때보다 투명한 지성이 작동해서 알아차림이 극대화돼요. 여기에 이제 나중에 뭐까지 비추냐면요 전생도 비추고 아직 안 온 일도 비추고 해서 신통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도 다 이 공적영지 자리에 있어서예요. 공적영지에 오래 머무시면요 뭔가 비추기도 합니다. 하도 빛나니까. 요거는 이제 양념으로 잠깐. 해보세요. 혹시 뭐가 이상한 게 나오고 하더라도 자명한지만 따지지 그거 가지고 막 끌려가지 마세요. 또 몰라 해버리세요. 몰라. 그러면 나는 오히려 더 빛나요. 계속 빛나야지 거기 끌려가면 안 돼요. 그러면 작은 거 하나 보려다가 그걸로 인해 어두워져 버려요. 자 법신은. 이 법신 이 자리를, 이걸 또 진리의 몸이라고 법신이라고 해요. 법신은 끊임없이 이어져 영원히 존재한다. 이런 의식이 우리 안에 있다니까요.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다. 자 뒤로 가시고요.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스님이 영지라고. 공적영지라는
33:05
말을요 쓰시기는 수심결에서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이 공적영지를 쓰셨어요. 공적진심(空寂眞心) 공적지심(空寂之心) 이런 말을 쓰신 것은 규봉 스님인데요. 자 한번 볼까요? 2번 한번 볼까요? 11페이지 2번. 미혹하거나 깨달았거나. 자 보세요. 육근은, 여러분 이 육근의 세계에서는요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가 있어요. 육근의 세계에서 여러분 부처와 중생이 나뉩니다. 여기서는 부처와 중생이 나뉠까요? 안 나뉠까요? 안 나뉘어요. 여기서만 나뉘어요. 그러니까 미혹하거나 깨달았거나 범부거나 중생이거나 이런 차별이 있죠. 그런데 범부일지라도 범부인 줄 알아차리는 자리가 있고요. 부처도 부처인 줄 알아차리는 자리가 있어요. 이 자리는요 본래 스스로 알아차린다. 이는 인연에 의지하여 생겨난 게 아니고. 인과법에 들어가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경계로 인해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항상 알아차리고 있어요.
34:00
미혹할 때는 번뇌에 빠지나 알아차림 자체는 번뇌가 아니며. 깨닫는다고 해서 신령하게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알아차림 자체는 그렇게 변화하는 물건이 아니다. 놀랍죠. 이 얘기를 딱 해주세요. 이러면서 이분이 뭐라고 예를 드냐면? 밑에 보시면 물의 젖는 성질과 똑같다. 여러분 흙탕물도 있고 맑은 물도 있지만 젖는 성질은 똑같죠? 그러니까 범부의 마음도 있고 부처의 마음도 있지만 알아차리는 놈은 똑같습니다. 이게 불성이 동일하다는 거예요. 6번 보시면 이거를 본각진심(本覺眞心)이라고 해요. 본래부터 깨달아 알아차리는 참된 마음, 이걸 불성이라고 하고 여래장이라고 한다. 어떠세요? 이해되시죠? 자 전심법여(傳心法要) 가볼까요? 황벽(黃檗希運, ?~850) 스님이면요 임재(臨濟義玄, ?~867) 스님의 스승이고, 성철(性徹, 1912-1993) 스님도 가장 강조하는 분입니다. 전심법요는 해인사에서도 아주 강조하는 경전이에요. 거기 뭐라고 가르쳤느냐?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은 오직
35:00
한마음일 뿐 다시 다른 법이 없다. 이 마음은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다. 요거 이해되시죠? 밑에 가볼까요? 이 본원의 청정한 마음은 항상 스스로 원만하고 광명하게 두루 비추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여 다만 견문각지(見聞覺知). 견문각지는요 봤다(견)는 건 안식(眼識)이고요. 들었다(문)는 건 이식(耳識)이고 깨달았다(각)는 건 나머지 삼식(三識: 비식‧설식‧신식)이고 지(지)라는 거는 마지막 의식(意識)을 말합니다. 견문각지가 6식 작용 총괄했어요. 육근이 작동해서 육근 작동을 마음으로만 알고 있다. 그리하여 견문각지에 잠식돼 버린다. 그래서 맑고 광명한 본체를 보지 못 한다. 답은 뭐예요? 다만 곧장 무심하기만 하면. 몰라가 이거예요. 곧장 몰라만 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이게 최상승선입니다. 오직 모를 뿐. 이것만 이루면 본체가 절로 드러날 것이니 마치 큰 태양이 허공에 떠서 시방을 두루 비추는 것과 같아서 어떤 장애도 없을 것이다. 이걸 단박무심이라 그래요. 단박무심해 버리면 바로 견성이다. 너무
36:02
쉽죠?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따지지만 마라. 이거냐 저거냐 간택만 안 하면 바로 견성이다. 단박무심하면 바로 견성이다. 같은 소리입니다. 그래서 옆에 임재 스님의 무위진인(無位眞人) 선문답을 해놨는데요. 그게 별 내용이 아니고 이겁니다. 선문답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임재스님이요 대중한테 설법해요. 지금 여러분들이 임재스님 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자리 없는, 어느 자리가 없다. 육근에 자리가 없다. 육근에 자리가 없는 한 자리가 있는데. 그게 알아차리는 자리죠. 이게 무위진인. 자리가 없는 한 사람이, 시공 안에 자리가 없는 한 사람이 늘 너희들, 그대들의 얼굴을 지금 드나들고 있다. 그 자리가 계속 육근을 알아차리고 있다. 아직 이걸 확증 못한 초심자들은 이 자리를 잘 살펴보라. 몰라 더 해보시라 이겁니다. 어떤 스님이 “도대체 어떤 게 무위진인입니까?” 체험을 안 해보고 개념으로 요구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체험을 시켜줘야겠죠? 그러면 임재스님이 바로 뛰어와서 체험을 시켜줍니다.
37:05
멱살을 잡아버려요. 여러분 선생님한테, 스승한테 “부처가 뭔가요?” 했는데 와서 멱살을 잡고 흔들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 하얘지겠죠. “그거야!” 그때 하얘질 때가 참나 상태예요. 깜짝 놀라서 육근이 하얘지고 알아차리는 놈만 있어요. 그러니까 임재가 지금 체험시켜줬어요. 그 다음 뭐라 그래요? “무의진인은 무슨 똥막대기 같은 소리야!” 여러분 “부처가 뭡니까?” “똥 막대기야.” 그러면 “똥 묻은 막대기에도 도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가면 땡이에요. 그럼 개념에서 개념으로 흘러 버렸어요. 체험으로 못 가요. 선문답은 체험으로 들어가게 해줘야 돼요. “부처가 뭡니까?” “똥 막대기 같은 소리하지 마.” 똥 막대기는요 똥 누고 똥 휘젓는 거거든요. 똥 누고 똥 휘저었으면 거기 놓고 나와야지 똥 막대기를 들고 나온 격이라는 거예요. “부처라는 말 하지 마. 그게 부처야.” 여러분 선문답은 간단해요. 저한테 “부처가 되고 싶다”고 그러면 저는 “그 말만 하지 마세요. 지금 몰라 하고 있어 보세요. 그 자리입니다.
38:05
저한테 물었던 그 자리가 부처 자리입니다. 부처가 왜 부처를 묻습니까?” 자 이게 응용이요 부처가 뭡니까? 제가 여러분 이름을 불러요 “아무개야.” “네.” 한다고요. 방금 불성이 대답했잖아요. “거기 있네.” 이겁니다. “거기 있네.” 새가 유리병 안에 있어서 못 나오고 있어요. 유리병 안 깨고 새 좀 나오게 해 보세요. 어떻게 할까요? “아무개야.” “네.” “나왔네.” 이거 이제 이해되시죠? 자 지금 보세요. 왜 이걸 치는지? 부처가 뭡니까? “탁” 방금 몰라 상태였죠? 깜짝 놀라서. “탁” 아니 육근을 초월해서 알아차리고 있는 자가 있었죠? 이거 알아라고 체험시켜주는 거예요. 선문답은 체험시켜 주기 위한 거예요. 언어를 통해서 체험. 개념에서 개념으로 가면 교학(敎學)이에요. 개념에서
39:00
체험으로 가야지 선학(禪學)이에요. 이제 아셨죠. 알아 버리신 분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도(道)로 나가셔야 됩니다. 자 마지막 경허(鏡虛, 1849-1912)스님으로 끝낼게요. 경허스님 가르침. 청정광명한 있는 그대로의 불성. 15페이지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함이 없되 지극히 즐겁고 항상 존재하며 어떠한 막힘도 없이 자유자재하니. 상락아정한 불성자리를 얘기한 겁니다. 흰 구름 흐르는 물처럼 이르는 곳마다 고요하고 광명한 곳 좋은 국토로다. 보세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는 다 불국토예요. 왜? 알아차리는 불성이 지금 알아차려서 존재해요. 불성으로 인해서 지금 이 죽비니 물이니 다 존재하는데 여기가 정토가 아니라고요? 내가 정토가 아니란 생각만 안 하면 정토입니다. 몰라 하시면 단박무심하면 내가 보고 듣고 하는 그대로 오온이 공하고 그대로 정토예요. 그럼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 있든 내가 주인공이고, 입처개진(立處皆眞) 내가 서 있는 데는
40:04
다 참된 정토예요. 깨어 있는 사람한테는, 그분 우주는 항상 정토라고요. 부처가 한번 데워놓으면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인가? 여러분 제발 부처되세요. 견성하세요. 한 번만 데워놓으면 뭔 걱정합니까? 보고 듣고 안고 눕고 밥도 먹고 옷 입고 이 모든 육근 작용을 다 그 자리에서 하는데. 이제 중심이 잡혀 버렸는데. 운전자가 생겼는데요. 원래도 있었지만 이제 알았으니까. 셀 수 없는 묘한 작용 모두 지니고 있으니 얼굴 앞에 분명하고 이마 뒤에 신기롭다. 내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게 그 자리 작용입니다. 찾는 길이 여럿이나 온갖 참선들이 있지만 아주 옅게 말할진대 반조(返照) 공부가 가장 신묘하다. 그냥 그 자리 들여다보는 게 제일 짱이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 한없는 마음 지수화풍 모든 내려놓고 찾아보니 도무지 없다. 형체가 없으나 신령한 알아차림이 분명히 어둡지 않으니 우습지 아니한가? 거기 늘 있었다. 자 석가모니도 이 얘기했고, 모든 역대 불보살이
41:00
얘기했고, 조사스님도이 얘기했고, 마지막 경허스님도 이 얘기했어요. 하나로 꿰면 뭐예요? 스스로 현존하는 영원한 그 알아차리는 의식, 어떤 노력도 없이, 인과도 없이 존재하는 그 알아차리는 의식, 이 자리 알아차리시는 게 이게 진여고 이게 열반입니다. 진(眞), 참돼서 진이에요. 거기만큼 참된 자리가 없고, 여(如), 항상 똑같아서 여입니다. 상주불변해서 여(如)예요. 거기만 여(如)하지 나머지는 여여(如如)하지가 않아요. 육근의 세계는 여여하지 않아서 무상합니다. 오직 여여한 한 자리가 여기에요. 알아차리는 의식 그 자체. 그런데 이 알아차림이 육근을 만나면 그것들은 무상합니다. 배고픈 줄 아는 건 무상해요. 근데 배고픈 줄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무상하지가 않아요. 배고픔도 무상하고 배고픈 줄 아는 것도 무상해요. 배고픈 줄 안다는 게 오온 중에 식(識)입니다. 색깔, 뭘 봤어요. 색(色). 수(受) 좋다 싫다. 상(想) 이거는 물병이다. 행(行) 그래서 먹고 싶다 안 먹고 싶다. 식별(識別) 내가 그러는 줄 안다. 이런 짓을 하고 지금 이 물병을 가지고 수작하는 걸 다 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몰라 했을 때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42:05
거울에 물건 다 치워도 거울은 빛나듯이 항상 빛나고 있어요. 거기가 진여고 열반이에요. 그걸 참나니 아니니 아주 싸우고 있는 거는 정말 하급 이야기입니다. 참나라고 안 해도 하등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름 안 붙여도 됩니다. 그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 아시는 분만이 부처님의 정수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42:25
[출처] (녹취) [원각사 초청강연] 진여와 열반 특강 - 견성의 핵심, 청정광명심 2강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