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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년경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기록한 연화지 풍경.
부제 ; 김산봉황대 김산의 랜드마트가 되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연화지옆 대로변에 용금문(湧金門)이라는 2층의 새로운 건물이 등장한다. 풍월루(風月樓)라는 누각도 등장한다.이 건물들은 언제 건립되고 어떤 기능을 하였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산군
【누정】 풍월루(風月樓) 읍내(邑內).
봉황대(鳳凰臺) 대(臺)의 서쪽에 용금문(湧金門)이 있다.
1740년 3월 48세의 이화중(李華重,1693~1745.8)이 김산군수로 부임하여 5년간 재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긴다.
이화중의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이정기(李廷夔)이며, 조부는 이행(李涬)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병철(李秉哲)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박태상(朴泰尙)의 딸이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아래로 동생 넷이 있는데 이태중(李台重,1694~1756)[진1717][문1770], 이기중(李箕重,1697~1761), 이형중(李衡重)[생,진1717], 이상중(李商重) 이다. 이 네명의 동생 중 이상중은 김산에 내려와 김산 양사당기를 남기며, 이기중의 아들 이윤영도 백부를 따라 김산으로 내려온다.
이화중(李華重)은 김산군수로 부임하여 학문을 장려하여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먼저 무너진 양사당을 수리하여 선비들의 학문을 장려하는데 <김산읍지>에 실려 있는 이상중이 지은 '養士堂記(양사당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歲之庚申 家伯氏 來莅金陵, 邑士呂文周汝尙見曰, 郡治東南麓下有養士堂 堂之設殆三十餘年 境中人士 居接講述 徃徃有成就者, 嵗久不善守護 今至頹廢. 子盍爲多士 亟圖改建. 我是是堂任長 兹庸請焉.
경신년(1740년)에 큰 형님께서 금릉군수로 부임하자, 고을의 선비 여문주 여상이 와서 말하기를, “군의 치소 동남쪽 기슭 아래에 양사당이 있는데, 당을 지은 지 30여년이 되었습니다. 지역의 인사들이 거접하며 강술하여 종종 성취하는 이도 있었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잘 수호하지 못하여 지금은 무너져 폐하였습니다. 당신이 많은 선비들을 위하여 다시 세우는 것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바로 이 당을 맡고 있는 장으로서 이것을 청합니다.
무너져 폐한 양사당을 다시 건립하고 선비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자, 연화지 동쪽, 현재의 교동 마을 분위가 크게 변화한 것 같다.김산 군수로서 이화중이 남긴 공적은 김산향교에 있는 흥학비와 직지사에 있는 공적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먼저 김산향교 내에 있는 군수이화중흥학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郡守李華重興學碑(군수이화중흥학비)
公昔獎學(공석장학) 공은 지난날 학문을 장려하고자
於此堂而(어차당이) 여기에 양사당을 세워
文敎丕振(문교비진) 문교를 크게 떨쳐
流其芳而(류기방이) 세월 흘러도 아름답게 하였네.
侯今重葺(후금중즙) 군수가 지금 중수하여
于有光而(우유광이) 더욱 빛나게 되었으니
赫赫韓山(혁혁한산) 혁혁한 한산인
仰無疆而(앙무강이) 우러러보기를 끝없이 하네.
다음으로 직지사 산문 입구에 있는 청덕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글자의 마모가 심해서 판독이 어렵다.
郡守李候華重淸德萬歲不忘碑
五載■■
遺陰百歲
令寺淂休
■■■■
乙丑(1745년) 5月日時 住持太監立
이화중이 김산군수로 부임한지 3년째 되는 1742년에 연화지 끝자락에 풍월루(風月樓)를 건립하여, 구읍의 도시 외관도 많은 변화가 있게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한 풍월루가 이대 건립된다. 다행히 풍월루의 기문이 윤봉오(尹鳳五,1688~1769)가 남긴 <석문집(石門集)>에 수록되어 있다. ‘김산 풍월루기(金山風月樓記)’에 기록된 김산의 변화를 살펴보자.
吾友三山李子摶。倜儻喜劇飮。守金陵三年。而治理大著。乃就政閣南築小樓。名曰風月。
나의 친구 삼산 이자박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술 많이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금릉 군수가 된 지 3년 만에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는 이유로 정각의 남쪽에 작은 누각을 지어 이름을 풍월루라 하고
중략
樓凡四架。施以麗藻。上出樹梢。下臨淸池。
풍월루는 4칸으로 화려한 무늬로 꾸몄으며, 위로는 나무 끝에 솟아 나고 아래는 맑은 저수지 물에 임하여 있었다.
요약하면 ‘정각의 남쪽에 4칸으로 화려하게 꾸민 풍월루(風月樓記)라는 누각을 지었는데 아래에는 맑은 저수지에 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때 연화지는 현재보다 더 상류까지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풍월루는 봉황대와 다른 건물임은 앞서 살펴보았고, 1769년 동헌 서쪽으로 이건하는 기록이 보인다.
<영남읍지> 김산군
風月樓 壬戌 郡守李華重創建于舊衙南. 己丑 郡守金坦行移建于東軒西
풍월루 임술년(1742)에 군수 이화중이 구관아 남쪽에 창건하였다. 기축년(1769) 군수 김탄행이 동헌 서쪽에 이건하였다.
1742년경 구읍을 구역에 들어선 공공 건물들을 짚어가며 구읍마을 풍경을 그려 보자. 지금은 복개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인 구화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의 동서로 관아, 객관, 풍월후, 향교, 양사당, 마을, 봉황대, 용금문, 상가들이 들어서 있고, 그 아래에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연화지 뚝방이 있다. 연화지 뚝방은 마을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정원 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 소품들을 가지고 구읍의 일상적인 마을 풍경을 영상으로 복원해보자.
조금 떨어진 향교 양사당에서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가 양양하게 들려오고, 새로 세운 봉황루는 단청을 입혀 그 화려함을 더하고, 그 주변을 마을 주민들이 여유롭게 지나는 모습. 정원도시 김천 연화지의 300년 전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듯, 영남의 큰 사찰 직지사도 마침 중창을 하여 새롭게 단정하였으니, 지방 여행으로 연화지와 직지사를 묶어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김산의 봉황대가 중국 금릉의 봉황대보다 낫더라.” 하는 소문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서울에서 문사들과 어울리며 과거에 뜻이 없던 이윤영이 김산행을 결정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산 직지사와 봉황대를 서울에 소개하는 인물은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다. 자(字)는 윤지(胤之), 호는 단릉(丹陵) 또는 담화재(澹華齋)로 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김산군수 이화중의 조카이며, 단양부사를 역임하는 이기중(李箕重)의 아들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한국인물정보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평생을 보냈다. 평소에 단양의 산수를 좋아하여 즐겨 찾더니, 부친이 단양 부사로 재직한 일을 계기로 구담(龜潭)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단릉산인(丹陵散人)이라 불렸다.
윤리에 돈독하고 강직한 지조를 존중하여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불리는 이인상(李麟祥)과 절친한 벗으로 지냈다. 성품은 후덕하고 명료하였고, 큰아버지 태중의 영향으로 고기물(古器物)을 즐겼다.
이 정도의 이력이면 당대 최상류층 출신으로 그야말로 금수저다.
더군다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색의 후손이다. 그런 인물이 김산군수로 부임하는 백부 이화중(李華重)을 따라 김산에 내려와, 김산의 문사들과 교류하며 양사당에서 함께 공부를 하였다. 김산의 문예(文藝)가 빛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그가 교류하고 있는 인물들도 예사롭지 않다. 당대 최고 문인화가로 손꼽히는 이인상(李麟祥)이 절친한 벗이라 하고, 그 역시 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중이다. 과거 김종직이 개령현감이었던 아버지를 김숙자를 따라 개령에 내려와 문풍을 일으켰던 전례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이윤영은 김산을 떠난 다음 해인 ‘1743년 여름 '녹애정(綠靄亭)'에서 ‘(친구)김원박을 위하여 그리다.’라는 낙관이 있는 녹애정도(綠靄亭圖)를 통해 그의 면면을 살펴 볼 수 있다. 김산을 떠난 다음 해에 그린 그림이니, 김산에서도 한 두편의 그림을 남겼을 듯한데 아직 발견된 작품이 없다.
▲1740년경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기록한 연화지 풍경.
이윤영은 김산에서 머물며 김산과 낙동강 주변을 여행하던 소회를 <금릉록> <낙동록>에 담아 서울로 전달한다. 여기서는 <금릉록> 중에서 연화지 주변 풍경을 묘사한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시인이 김산에 내려온 1740년 가을부터 계절이 변하는 연화지 주변 풍경을 시인의 눈을 따라가면서 연화지 주변 풍경을 상상해보자.
김산에 내려온 이윤영은 군수인 백부가 설립한 양성재에서 다음 해 있을 식년시를 준비한 것 같다. 요즘으로 말하면 고시원에서 고시 공부를 하게 된다. 이 시절 공부만 하는 자신의 외로운 심사와, 방문객을 맞이하는 풍경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담담히 묘사한다.
寒齋
(쓸쓸한 서재)
寒齋淸復淸(한재청복청) 쓸쓸한 재실은 맑고도 맑은데
飛雪暮天盈(비설모천영) 눈바람이 저녁 하늘에 가득하네.
崖谷形無別(애곡형무별) 벼랑과 골짜기를 구별 못 할 정도로
松篁色敢爭(송황색감쟁) 솔바람 쌩쌩거리며 불어 닥치네.
羣狵相好戱(군방상호희) 무리진 삽살개 꼬리치며 노니는데
老馬忽悲鳴(노마홀비명) 늙은 말 갑자기 비명 울리며 닥치네.
把斝飜成悵(파가번성창) 술잔 기울이다 갑자기 슬픔이 일어
終南隔友生(종남격우생) 종남산 너머의 벗들이 생각나네.
*종남산(終南山) : 종남산은 장안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북쪽에는 위수(渭水)가 북쪽으로 흐르는데, 우리나라에서 서울의 남산과 한강의 별칭으로 흔히 써 왔다.
그리고 이어서 마실을 간다. 낯선 영남 땅의 낯선 마을에 도착하여 가장 눈에 들어온 풍경은 봉황대였던 듯하다. 봉황대에 올라, 찬 바람 불어오는 늦가을밤 연화지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담히 그려낸다.
봉황대(鳳凰臺)
이윤영(李胤永,1714~1759)
嶺南秋夜有高登(영남추야유고등) 영남 땅 가을밤 높은 대에 오르니
江斷雲空眼歇憑(강단운공안헐빙) 구름 사이 강이 끊어져 눈을 잠시 쉬는데,
片月平塘樓破碎(편월평당루파쇄) 너른 들판 조각 달은 루에서 흩어지고
長風遠野樹飛騰(장풍원야수비등) 먼 들에 장풍이 수풀 사이에 비등하네.
豪情不以千年隔(호정불이천년격) 호방한 정(情)은 긴 세월에도 다르지 않지만
詩運誰知一代興(시운수지일대흥) 한 시대 번성했던 시운(詩運)을 누가 알리오.
如盃東海吾生小(여배동해오생소) 잔과 같은 해동에서 내 생은 짧기에
笑拍闌干十二層(소박란간십이층) 난간에서 십이 층 경치에 웃으며 박수치네.
*십이층(十二層) : 열두 개의 봉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으로 유명한 중국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을 비유한 듯.
강, 달빛, 갈대숲, 바람
봉황대 앞에 펼쳐진 소재가 흡족하다.
이백이 지은 등금릉봉황대시(登金陵鳳凰臺詩)를 떠올려본다.
순간 자신이 조선 사람임을 깨닫고 김산 봉황대의 풍경에 빠져든다.
작지만 큰 풍경.
12폭의 병풍처럼 층층이 다른 풍경에 감탄의 박수를 친다.
단순한 언어 구조 속에서 김산 봉황대의 경치와 자신의 심사를 다 표현해 낸다.
이윤영이 마을에 한번 왔다 간 소식이 구읍의 호걸들에게 전해지자, 고을의 유력가들은 사또의 조카이자, 당시 한양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젊은 문사와 사귀기 위해 도심인 용금문으로 초대했을 법하다. 이어지는 시에서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연화지 동편 서재에서 홀로 공부하다, 꽁꽁 언 연화지 얼음 위를 건너 용금문으로 가는 풍경이다. 용금문 근처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에서 묘사한 ‘가기(歌妓)와 행주(行厨)’란 단어 만으로 용금문이 어떠한 곳인지 충분히 상상된다.
김산군 읍치의 용금문(湧金門)을 언제 건축했는지는 기록상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당시에 이윤영의 눈에 비친 용금문을 통해 우리는 용금문에 대한 작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적어도 1740년 이전부터는 존재했던 시설 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주변은 기루와 주점이 갖추어진 도시의 상업구역 기능을 하고 있었고, 새로 단장한 직지사를 오가는 스님들이 김산을 들러서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연화지 주변은 용금문, 봉황대를 갖춘 정원 도시의 면모를 구비하고 많은 여행객을 맞이하는 기착지로 발전한다.
이 시기의 연화지 아래쪽에 있었던 용금문을 방문하였던 시인의 눈을 통해 살펴보자.
雪日湧金門書卽事
눈 오는 날 용금문에서 있었던 일을 쓰다.
翛然雪晝出携朋(소연설주출휴붕) 문득 눈 내리는 날 벗의 손을 잡고서
意在金門最上層(의재금문최상층) 용금문 가장 높은 곳에 뜻을 두었네.
三尺漁竿高下水(삼척어간고하수) 세 칸 낚시대는 대 아래 물에 두고
一雙蠟屐淺深氷(일쌍납극천심빙) 나막신 한쌍으로 두꺼운 얼음 밟아가네.
文山驛外餘飛鳥(문산역외여비조) 문산역 너머엔 여유로이 새가 날고
黃鶴寺前失去僧(황학사전실거승) 황학사 앞에는 스님이 돌아갈 줄 모르네.
歌妓行厨非我事(가기행주비아사) 가기(歌妓)와 행주(行厨)는 내 아는 바 아니니
龍門諸子莫相稱(용문제자막상칭) 용문의 여러 자제들 나를 부르지 말게나.
*용금문(湧金門) : 김산 읍치에 있던 려문(閭門)의 이름이다. *금문(金門) : 한나라 궁문인 금마문(金馬門)의 약칭으로 보통 대궐이나 조정을 가리킨다. *납극(蠟屐) :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샅샅이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럴 때면 꼭 나막신을 준비하여 신고 다녔다는 고사가 있다. 《宋書 卷67 謝靈運列傳》 *행주(行廚) : 임금의 거둥 때 어선(御膳)을 담당한 임시 주방.
其二
阮咸阮籍自佳朋(완함완적자가붕) 완적의 조카 완함은 원래 좋은 벗이라
帶雪酣歌樓百層(대설감가누백층) 눈발에 노래 부르며 백층루에 나가는데
凍鵲迷巢埋短樹(동작미소매단수) 둥지 잃고 언 참새가 덤풀 숲에 묻혀있어
淸鷗閙夢點殘氷(청구료몽점잔빙) 젊은 서생 시끄러운 꿈에 잔빙을 점검하네.
將晡野望邀隣客(장포야망요린객) 오후에 들판에서 이웃 객을 맞이하여
欲霽山容送遠僧(욕제산용송원승) 산빛이 어둑할 무렵 멀리서 온 스님 보내고
興至揮毫眞偶爾(흥지휘호진우이) 붓을 휘둘러 흥에 닿아도 너의 짝이 아니기에
詩名不愛後人稱(시명불애후인칭) 명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후인이 칭하리.
*완적(阮籍) :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완적(阮籍)이 속된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 즉 흰 눈자위를 드러내어 경멸하는 뜻을 보이고, 의기투합하는 사람을 만나면 청안(靑眼) 즉 검은 눈동자로 대하여 반가운 뜻을 드러낸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簡傲》 *완함(阮咸) : 위씨(尉氏) 사람.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죽림 칠현의 하나로 완적(阮籍)의 조카이다. 완함(阮咸)이 재명(才名)이 있었으므로, 남의 조카를 아함(阿咸)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양에서 가을에 출발하여 세 번째 달을 맞았다. 군수인 백부가 흥학당을 세워 학문을 권장하고 있으니, 솔선수범해야 하는 게 당연할 하였을 것이다. 또 다음 해(1741년)에 있을 식년시를 대비해서 고을 유생들과 더불어 밤낮으로 공부 했을 것이다.
당시 구화산 아래에 세웠다는 양사당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장소를 이상중(李商重)이 지은 양사당기에 다음과 같이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歲之庚申 家伯氏 來莅金陵, 邑士呂文周汝尙見曰, 郡治東南麓下有養士堂 堂之設殆三十餘年
경신년(1740년)에 큰 형님께서 금릉군수로 부임하자 고을의 선비 여문주 여상이 와서 말하기를, “군의 치소 동남쪽 기슭 아래에 양사당이 있는데, 당을 지은 지 30여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연화지 동쪽 향교로 올라가는 골목 언저리쯤으로 추정된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1740년대의 연화지의 또다른 마을 풍경을 그려본다. 현재는 교동이라고 불리는 구읍의 동쪽 공간. 그 시절 흔적은 김산향교만 우뚝하니 남아 있고, 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상중이 묘사한 양성재 운을 통해 잊혀진 서사를 찾아보다. 향교 근처 양성재는 요즘으로 말하면 스쿨존이다. 그저 적막감이 감도는 고요한 학교 마을.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절은 신문물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시대였다. 그동안 오랑캐라 치부하며 애써 교류를 멀리했던 청나라가, 조선의 선비들이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웃한 조선도 이전 세대의 적대감을 털어버리고 청나라와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에 젖어들던 시대였다.
그러한 신문물의 변화상을 투영한 곳이 연화지 서편기슭 삼락동 마을이다. 용금문이 들어서고 주루가 들어서서 사람 냄새가 풀풀 난다. 선비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하리(下吏)와 상인과 여행객들로 북적거리는 활기찬 마을 풍경이 날마다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지금 교동 한 기슭에 지으진 양성재란 곳에서 글을 읽고 있지만,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보수적 성향을 띤 노론출신 들이다. 삐져 나갈 틈이 없다. 자유분방한 시인이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번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이 양성재운은 시인의 번뇌를 담아내면서, 주변 양성재 풍경을 살포시 그려낸다. 연화지 동편의 교동 마을은 시인이 표현한 그 몇몇 단어만으로 충분히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매화, 풍연, 대나무, 송하반환(松下盤桓), 풍아(風雅)
지금은 콘크리트 담벼락과 아스팔트로 포장된 그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지만, 그 시절 교동 마을 풍경을 따라가보자
偶拈楊誠齋韻
우연히 양성재 운을 얻다
九功山下鳳臺前(구공산하봉대전) 구화산 아래 봉황대 앞에
嬴得新詩眞幾錢(영득신시진기전) 새로운 시(詩) 가득하니 얼마나 값진 것인가.
雲際看鴻心獨遠(운제간홍심독원) 구름 사이 기러기 보니 마음 홀로 아득하고
梅傍邀月影三圓(매방요월영삼원) 매화 곁에 초대한 달, 세 번째 둥근 달이네.
遭逢聖世羞言賤(조봉성세수언천) 일찍 만난 태평성대에 바치는 말 천하겠지만
歸去寒江可食鮮(귀거한강가식선) 차가운 강에 돌아가면 생선회 맛보리
一洞風煙何所用(일동풍연하소용) 마을의 풍연은 무엇에 쓰이는가
但將淸氣立蕭然(단장청기입소연) 앞으로 맑은 기운 말끔히 세워보리.
其二
肴盡樽空惱眼前(효진준공뇌안전) 안주 없는 빈 술잔이 눈앞에서 번뇌하니
千書不及一囊錢(천서불급일낭전) 수천 권 책들이 몇 푼 돈에 못 미치네.
高人翫理枰碁覆(고인완리평기복) 고인은 노닐다 평평한 바둑판에 엎어지고
擧世觀天管竅圓(거세관천관규원) 온 세상 하늘 보니 피리 구멍처럼 둥그네.
步月脩篁同影瘦(보월수황동영수) 달 아래 긴 대나무 야윈 그림자와 동무하고
看山晴雪與心鮮(간산청설여심선) 산을 보니 맑은 눈이 선명한 마음 베푸네
淸宵無奈佳朋阻(청소무내가붕조) 맑은 밤에 어찌하여 좋은 벗이 멀리 있나
畫角三聲思黯然(화각삼성사암연) 화각 소리 세 번 울리니 생각이 슬퍼지네
其三
松下盤桓月在前(송하반환월재전) 송하(松下)를 거닐다가 달 앞에 서니
淵明應得始安錢(연명응득시안전) 연명(淵明)처럼 비로소 비상금 얻게 되네.
卷上唐虞空遠近(권상당우공원근) 책 속의 태평성대는 원근의 허공에 있고
意中天地一方圓(의중천지일방원) 천지의 의중은 땅과 하늘에서 하나되네.
風雅秪今無定主(풍아지금무정주) 지금의 풍아(風雅)는 정해진 주인 없어
衣冠當世獨朝鮮(의관당세독조선) 당세의 의관은 조선이 홀로하네.
醉倚孤筇何處向(취의고공하처향) 취하여 기댄 지팡이 어디로 향할 건가
桐江華𡽺夢依然(동강화악몽의연) 동강의 화악산이 꿈에 선하네.
*풍아(風雅) : 국풍(國風)과 대아(大雅), 소아(小雅)라는 뜻으로, 《시경(詩經)》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음해(1741년) 가을 식년시를 마치고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한다. 일단 연화지를 상징하는 전당의 밤놀이 시를 통해 연화지의 모습을 추정해보자.
錢塘夜遊詩
전당(연화지의 별칭)의 밤놀이
百年錢沼鑿(백년전소착) 백 년 전에 돈을 주어 소를 뜷었지만
寂莫夜遊名(적막야유명) 이름난 밤 놀이 적막하였네.
伯父淸閑治(백부청한치) 백부께서는 청한하게 다스리지만
姪兒雅勝情(질아아승정) 조카는 아치로 정을 돋우네.
雙雙松炬列(쌍쌍송거열) 쌍쌍의 소나무 횟불 열지어 서서
緩緩筍輿橫(완완순여횡) 천천히 순여(筍輿)에 가로 놓으니
灑落乘氷滑(쇄락승빙골) 얼음 타고 미끄러지듯 말끔히 떨어져
瑩晶望月淸(영정망월청) 맑은 달 바라보니 밝고 맑게 비치네.
美人紅綿袖(미인홍면수) 미인은 비단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童子寶金觥(동자보금굉) 동자는 금잔 들어 외치니
舞起潛龍睡(무기잠룡수) 잠룡은 잠자다가 춤추며 일어나고
嘯譍老木鳴(소응노목명) 노목은 휘파람 소리 울리네.
瑤宮如可入(요궁여가입) 대궐에 들어간 듯
流馬自然行(류마자연행) 유마(流馬)가 저절로 나아가
戱掇星河色(희철성하색) 은하수 빛 즐거이 주우니
疑持菡萏英(의지함담영) 연꽃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네.
南京樓觀借(남경루관차) 남경루 볼거리 빌리고
東海饌肴呈(동해찬효정) 해동의 찬과 안주 올리니
鸞鵠非今峙(란곡비금치) 난새는 지금 봉우리에 없지만
絃歌尙古聲(현가상고성) 거문고 소리는 옛 소리 여전하네.
驚來塩浦客(경래염포객) 염포(塩浦)의 나그네 놀라서 오고
癡殺酒泉生(치살주천생) 주천에서 나는 술을 어리석게 모두 마셔
黃𡽺吟肩聳(황악음견용) 황악을 읊으니 두 어깨 산처럼 솟아나고
金門醉筆撑(금문취필탱) 금(용)문에서 취하여 붓을 잡고 써내려 가네.
嚴寒忘十月(엄한망십월) 추운 날씨는 시월을 잊게 하지만
懽笑度三更(환소도삼경) 즐거이 웃으며 삼경에 이르니
借問終南下(차문종남하) 남쪽 여행 마친 걸 물어 온다면
幾人狹路爭(기인협로쟁) 협로를 다투던 이 몇 사람 있었던가.
*유마(流馬) : 목우유마(木牛流馬). 제갈량(諸葛亮)이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우마(牛馬) 모양의 독륜거(獨輪車)와 사륜거(四輪車)를 말한다. *견용(肩聳) : 맹호연(孟浩然)은 눈발이 휘날리는 파교(㶚橋) 위를 나귀 타고 지나갈 때 가장 멋진 시상(詩想)이 떠올랐다고 하는데, 소식(蘇軾)의 시에 “그대는 또 못 보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을, 시 읊느라 찌푸린 눈썹 산처럼 솟은 두 어깨를.〔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는 명구가 있다. 《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백 년 전에 돈을 들여 전당(錢塘)이라 불리었던 연화지를 준설한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1662년(숙종2년)에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여 전국의 제언을 수리하게 한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시기 김천 지방의 제언을 수리한 기록은 이하(李馥,1626~1688)의 문집 <양계집> 에 개령현 대양에 있는 학해지를 수리하는 과정을 기록한 ‘학해지기(學海池記)’가 있다.
이 시기의 제언 준설은 공사하는 인력도 줄이기 위해 준설한 흙을 저수지 안에 섬처럼 쌓아서 경관을 조성 하였던 것 같다. 아마 연화지도 준설한 흙을 저수지 안에 모아서 섬과 같은 풍광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경 제작된 김산군 지도는 연화지내에 3개의 도서(島嶼)를 표시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줄불놀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줄불놀이는 주로 강에서 배를 타고서 즐기는데, 연화지를 가로질러 줄불놀이를 하였음을 추정하게 하는 장면이다. 이날 주천(酒泉)에서 나온 술인 과하주를 많이 마셔 흥이 일었음인가. 금용문에서 취하여 붓을 잡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낸다.
題畫松
소나무 그림에 제목을 달다
淸風一牖雪千峯(청풍일유설천봉) 청풍 이는 창문엔 눈 덮힌 천봉이고
坐着蒼顔白髮翁(좌착창안백발옹) 자리엔 파리한 얼굴 백발의 늙은이네
春後軟華心不競(춘후연화심불경) 봄이 지나 꽃이 피어도 마음을 다투지 않고
且從筆下立寒松(차종필하입한송) 붓을 따라가니 차가운 소나무 서있네.
식년시를 마친 이후에 이윤영은 연화지 부근에서 시작하여 김산의 명승지를 답사한다. 이어서 상주도남서원에서 낙동강을 따라 칠곡에서 금오산, 가야산, 무흘계곡, 감호정을 거쳐 김산에 돌아오는 <낙동록>을 남긴다.
登衙後小麓
관아 뒤 작은 산기슭을 오르다
北麓悠然可散愁(북록유연가산수) 북쪽 기슭 아득하여 시름을 떨치고자
雲晴日午短筇遊(운청일오단공유) 구름 갠 오후에 단장 짚고 유람하네.
細泉不凍淸音走(세천부동청음주) 가는 샘물 얼지 않아 맑은 소리 울리고
病木多稜古氣留(병목다릉고기유) 시든 나무 많은 기슭에 고고한 기운 머무네.
黃𡽺千尋孤鳥逈(황악천심고조형) 황악산 깊은 곳엔 새 한 마리 배회하고
錢塘一半百家浮(전당일반백가부) 전당의 한쪽에는 여러 집 떠 있네.
十年經藉絆韁我(십년경자반강아) 십 년의 경전 공부 나를 옭아매었기에
喜見林蹊客跨牛(희견림혜객과우) 숲 속길 반가운 나그네 소 등에 걸터앉네,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김산에 머물며 연화지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받은 영감은 그의 작품에 오롯이 반영된다.
아래 그림에 대해 해설가는 이윤영이 27세인 1740년에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해설가의 시기 추정이 정확하다면 이 그림 속의 풍경은 마을 속에 있는 김산 연화지를 묘사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띠풀집 아래에 열려진 사립문이 보이고 그 사이로 초옥이 엿보이는 등 인간적 자취가 표현되어 있는 점이 이윤영 작품의 특징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혀 주는데, 사람이 오가는 호수가 마을, 멀리 보이는 둑방. 이윤영이 김산에 머물 때 연화지를 묘사한 그림이라는 느낌도 든다.
물론 이윤영은 김산에서 귀경하여, 서울 서대문 밖의 반송지(盤松池) 부근 연못가에 ‘담화재(澹華齋)’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다는 그의 이력으로 볼 때, 반송지 부근에 살았던 그의 집을 묘사한 것이라는 게 더 합리적인 설명 같다. 여하튼 연화지에서 받은 영감이 이후에 이윤영을 서호가에 살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 이윤영 화심유원도(花深柳遠圖) 紙本淡彩 48.3×86.5cm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이인상(李麟祥,1710~1760)이 쓴 화제(畵題)를 살펴보면 누각을 지은 1745년 이후의 작품임을 암시한다.
花深柳遠 不分行經 꽃이 가득하고 버들이 아득하여 길을 분간 못하겠네.
起樓水中 將以絶塵 물 가운데 누각을 지은 것은 세상 인연 끊고자 함이라.
彼倚欄而晤語者 저기 난간에 기대어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其有邵子之樂 소강절의 즐거움 있는 사람인가
而文山之悲耶 문천상의 비애가 있는 사람인가
題胤之畵扇 이윤영(李胤永)이 부채에 그린 그림에 쓰고
奉正泉齋 麟祥. 천재에게 질정(質正)을 구하면서 바치다. 인상(麟祥)
그림의 풍광이 어느 곳인들 어떠하겠는가. 이윤영 그린 그림속에서 연화지와 봉황대 풍경이 겹쳐보이는 것은 그가 시로 표현한 연화지 풍경의 잔상이 아닐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