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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十六 章 血風의 시작 만월은 휘황찬란하게 천공에 떠 있었고 수많은 군웅들이 둥그렇게 에워싼 광장의 한복판에는 위지강과 상관청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상관청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는 반면 위지강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철륭과 염서시, 그리고 남녀지존들은 모두 대전 입구의 계단 위에 늘어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둥근 원을 형성하고 있는 군웅들이 웅성거리며 수군거렸다. "상관장주가 무리하는 게 아닐까? 상대는 절정검마를 꺾은 당대 제일의 자객인데……." "무슨 소리야? 정통무예와 살수무예는 엄연히 틀린 거라구!" 다른 한쪽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만검산장의 장주 일천검후라면 평소부터 검계제일인(劍界第一人)의 자리를 놓고 절정검마와 우열을 가리고자 기회를 엿보았던 정통검가의 명인(名人)일세!" "어쨌든 서로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니 볼만 하겠군그래!" "왜 아니겠나? 더구나 상관장주는 아들의 죽음으로 잔뜩 독이 올라 있으니 아마 모르긴 해도 천하의 마도수라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후우우우웅! 한차례 강하게 불어닥친 야풍에 대치해 있는 두 사람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그들 사이에 형성된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주위의 공기가 일순간에 폭발할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다다다닷! 머리카락과 수염이 맹렬히 휘날리면서 상관청의 옷자락도 찢어질 듯 나부꼈다. 군웅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제 막 결투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인 것이다. 위지강은 고요한 시선으로 상관청을 주시했다. '바람도 없는데 옷자락이 저토록 나부낀다는 건 이미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는 증거!' 이때 장중한 기운에 휩싸인 상관청이 옆구리의 검자루에 손을 척 얹었다. "오너라, 자객!" 위지강은 조용히 응수했다.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와 겨룰 때도 먼저 검을 뽑아본 적이 없소." 상관청이 강렬한 눈빛을 발하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오만방자한 놈! 선공을 양보하겠단 말이냐?" "빚을 갚는 의미에서 삼초(三招) 정도는 양보할 용의가 있소." 상관청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치욕으로 인하여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해진 그는 두 눈을 한껏 치켜 뜨고 살기를 폭사시켰다. 위지강의 광오한 제안에 군웅들뿐 아니라 염서시를 비롯한 남녀지존들까지 모두 기겁을 하고 말았다. "맙소사! 감히 일천검후를 상대로 저런 턱없는 배짱을 부린다는 건가?" "저런 터무니없는 망종을 부리다니……!" 철륭은 무표정하게 염서시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심기를 뒤흔드는 기가 막힌 발상이군요." 살벌한 기운에 휩싸인 채 분노의 치를 떠는 상관청을 바라보며 염서시는 짙은 조소를 떠올렸다. "자식을 잃은 분노에 자존심까지 다친 저런 상태에선 부처의 정력을 지닌 자라 해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한껏 요염한 미소를 띠었다. "아무래도 남극벌에선 또 한 명의 아까운 인재를 잃을 것 같군요." 쿠우우우우! 상관청의 전신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빳빳하게 모조리 곤두섰고 두 눈에선 살벌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건방진 애송이!" 중단에 겨눈 그의 검에서 어른 주먹만한 백색검강이 마치 쏟아지는 폭우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츠츠츠층! "천지를 모르고 제멋대로 주둥아리를 나불댔으니 노부의 손속이 무정하다고 원망 말거라." 콰콰콰콰콰! 대리석 바닥을 통째로 뒤집으며 백색의 검강은 위지강을 향해 폭풍처럼 밀려갔다. 그 위력적인 공세를 바라보던 남녀지존들이 모두다 경탄성을 발했다. "검강(劍 )! 검기(劍氣)의 경지를 초월하는 검도(劍道) 최후의 단계다!" "오오, 일천검후가 평소 검가제일인(劍家第一人)을 자처해온 것은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었도다!" 쿠콰콰쾅! 땅거죽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엄청난 대폭발 속에서 위지강의 신형이 가랑잎처럼 퉁겨져 나갔다. 군웅들은 모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단 일수에 천하를 떨어 울리던 마도수를 격중시켜 날려보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무위인가? "맞았다!" "뭐야, 기고만장해서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겨우 일초도 못 받아낸다는 건가?" 후아아아앙! 장내는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먼지바람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휘날리는 낙진 속에서 위지강은 뒤쪽 멀찌감치 보이는 대전의 지붕으로 날려갔다. 상관청은 그런 위지강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닌 놈이……."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이 확 부릅떠졌다. '웃! 이게 아닌데……!' 상관청이 나직이 읊조리는 순간, 위지강은 연속적으로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지붕 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신형이 지붕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일초 지났소, 노선배!" 위지강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철륭을 비롯한 군웅들과 남녀지존들, 그리고 정작 위지강을 공격했던 상관청까지도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눈을 부릅뜬 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철륭의 주변에 서 있던 남녀지존들이 저마다 경악성을 토했다. "맙소사……!"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정통으로 격중당했는데?" "만근거석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는 검강을 설마 맨몸으로 받아냈다는 건가?" "맙소사! 금강불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일이……." 안색이 대변한 채 위지강을 주목하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철륭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접하면 접하는 대로 그 힘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의 도리!' 그의 눈에서 신광이 번쩍였다. '저 나이에 벌써 그토록 오묘무쌍한 무학의 이치를 체득하고 있으니 현 무림에 실로 괴물 같은 고수가 등장했다고 말할 수밖엔 없구나.' 상관청은 뿌드득! 이를 갈며 분노의 치를 떨었다. 가볍게 제압된 줄 알았던 위지강이 멀쩡한 것을 보자 그의 내부에서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군웅들이 지켜보고 있는 마당에 자칫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보태져 더욱 울화에 불을 지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층 더 무궁한 살심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제법 재간이 있구나. 놈!" 상관청은 폭갈을 내질렀다. 파아악! 그의 신형이 호선을 그리며 위지강을 향해 살처럼 쏘아져갔다. "이번엔 아예 박살을 내버릴 테다!" 쿠아아아아! 상관청은 검을 치켜든 채 무서운 기세로 위지강을 내리쳐왔다. "어기벽파(馭氣劈破)!" 무지막지한 기세로 내리쳐오는 검을 보면서도 위지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칼날은 위지강을 난자할 듯이 곧바로 들이닥쳤다. 지켜보던 군웅들이 눈을 부릅떴다. "피하기는 이미 늦었다!" "아까보다 기세가 더욱 흉험해 보이는데 또 맨몸으로 막아보겠다는 건가?" 염서시도 바짝 긴장하며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위지강이 갑자기 한 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잠깐만, 노선배!" 사정없이 칼을 내리치던 상관청이 흠칫하며 공중에 뜬 상태 그대로 검을 회수했다. 그의 얼굴에 차디찬 냉소가 피어올랐다. "객기를 부릴 땐 몰랐는데 죽을 때가 되니 유언이라도 생각났느냐?" 위지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니오. 어쨌든 공격을 하다가 멈추었으니 이초가 지난 것으로 간주하겠소." 상관청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당한 기색을 한 남녀지존들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철륭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노천주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지금 저 해괴한 계산법이 말은 되는 겁니까?" 철륭은 빙그레 웃었다. "되고말고. 초식을 전개한 사람이 스스로 초식을 거두어들였다면 그것은 당연히 초식의 수에 포함시켜야 하는 거요." 염서시도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때에 따라선 늑대의 민첩하고 사나운 기질을, 또 한편으로는 여우의 교활함도 겸비해야 하는 것이 자객의 자격요건이오. 그런 점에서 마도수는 최고의 자질을 지닌 살수라 할 수 있소이다." 쾌애애애액! 분기탱천한 상관청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놈!" 위지강의 신형이 슬쩍 옆으로 미끄러졌다. 쾅! 사정없이 내려친 칼날이 위지강 대신 지붕을 강타했다. 콰콰쾅! 굉음과 함께 지붕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자욱한 낙진 속에 내려선 채 상관청은 흠칫했다. 위지강은 온데간데없고 지붕만 산산조각 부서져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상관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놈이?' "약속한 삼초가 지났소." 순간 뒷덜미에 와 닿는 위지강의 음성에 상관청은 흠칫하며 신형을 홱 틀었다. 위지강은 건너편 대전 지붕의 용마루를 굳건히 딛고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태풍이 불어와도 꿈쩍하지 않을 그런 자세였다. 상관청이 놀란 마음을 채 추스르지도 못하고 있을 때 위지강이 검을 뽑아들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젠 내 차례요, 노선배!" 그는 상관청을 향해 검을 척 겨누었다. 불같이 노한 상관청이 재차 위지강을 향해 득달같이 쏘아져 가며 싸늘한 폭갈을 내질렀다. "건방진 애송이 놈! 도대체 얼마만한 재간을 믿고 이토록 오만방자한지 알아보겠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상관청을 응시하며 위지강은 검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방패 돌리듯 빙글빙글 돌렸다. 슈칵! 따다당! 무섭게 내리치는 상관청의 칼날이 빙글빙글 돌아가던 위지강의 검에 부딪치며 불꽃이 여기저기 튀었다. 상관청은 손목이 지르르 저려오는 충격을 받았다. '내공이 이 정도란 말인가!' 그가 내심 경악하고 있을 때 검을 콱 움켜잡은 위지강이 기묘한 검세를 형성하며 벼락치듯 검을 내뻗었다. 츄츄츄읏! "마도수의 검은 한번 검집을 벗어나면 피를 보기 전엔 절대로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길 바라오." 자신을 향해 어지럽게 덮쳐오는 검세를 보면서 상관청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무당(武當)의 태극혜검(太極慧劍)……!" 카카카캉! 마구 검을 휘둘러 위지강의 공세를 막아낸 상관청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츠파파파팟! 그러나 위지강은 계속 따라붙으며 절묘하게 그를 공격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검세를 보며 상관청은 경악성을 터트렸다. "곤륜(崑崙)의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무수한 환영을 창출하며 위지강은 공간을 평지처럼 밟고 압축해 왔다. "맙소사, 청성(靑城)의 회풍무류삼십육검(回風舞流三十六劍)까지?" 콰차차창! 콰차창! 허공을 날아가면서 숨막히는 결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지상의 군웅들은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화산(華山)의 매화산수(梅花散手)다!" "저건 점창(點蒼)의 자하구검(紫霞九劍)!" 남녀지존들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천하각파의 무공이 모조리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이 천하각파의 절학들을 모조리 연성했다니……. 더구나 그가 펼치는 초식은 오히려 각 문파의 장문인 수준을 능가하질 않는가?" 숨돌릴 틈도 없이 휘몰아치는 검세 속에서 상관청은 극도로 놀라고 있었다. '이놈이……?' 쾌애애액! 옆구리를 맹렬하게 후려쳐 오는 칼날을 보고 상관청은 기겁을 했다. "소림(少林)의 달마수미검(達魔須彌劍)?" 상관청은 이를 악물고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이놈! 이제 보니 천하를 돌아다니며 검법 도둑질만 했구나!" 콰차차창! 새파란 불똥을 튀겨 올리며 격렬하게 격돌한 두 사람이 서로 엇갈렸다. 상관청은 공중회전을 하면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그는 무겁게 지면에 내려섰다. 그러나 상관청은 바닥에 깊숙한 발자국을 찍으며 쿵쿵쿵 뒷걸음질 쳤다. "우욱!" 마침내 걸음을 멈춘 상관청이 시뻘건 선혈을 한 모금 토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놀라움과 불신이 뒤범벅이 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 보통 내공이 아니다!' 이때 상관청과 약간 떨어진 앞쪽에 위지강이 등을 보이고 내려섰다. 상관청은 일순 흠칫했다. 위지강은 뒤돌아선 자세 그대로 조용히 말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이 말은 상관청에게 치욕을 감내하라는 말과 진배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성은 그의 뇌리를 떠난 지 오래였고 마음속에는 살기만 가득 차 있었다. 파앗! 상관청의 신형이 검을 치켜든 채 위지강을 덮쳐갔다. 아울러 그는 흉흉한 폭갈도 내질렀다. "닥쳐라, 이놈!" 위지강의 성목이 차갑게 빛났다. "굳이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니 어쩔 수가 없군!" 슈와악! 오른발을 축으로 한 왼발이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위지강의 신형이 회오리바람처럼 맹렬히 휘돌아갔다. 가중되는 회오리바람의 압력에 상관청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저런 검법은 처음… 좋지 않다!' 그의 전신근육이 그 어느 때보다 팽팽히 긴장되었다. 무섭게 휘돌아 가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위지강은 검을 슈악! 내뻗었다. '천― 마― 대― 구― 식, 제이초 겁― 륜― 풍!' 쿠콰콰콰콰! 마치 부챗살을 펼친 듯한 형태로 수백 개의 검영들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대해를 가르고 태산을 뭉개버릴 듯한 엄청난 기세였다. 상관청은 극도로 경악하고 말았다. "이건 바로……!" 콰콰콰쾅! 그러나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전신이 걸레처럼 터지면서 퉁겨나갔던 것이다.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처절한 비명과 함께 군웅들이 사방으로 퉁겨져 나갔다. 쿠콰콰콰쾅! "으악!" "크아악!"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검기의 폭풍에 휩쓸려 군웅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했다. "도대체 이게 웬 괴변이냐?" "설마 검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이토록 가공하다는 건가?" 철륭을 위시한 염서시와 남녀지존들은 충격으로 눈을 부릅뜬 채 할말을 잊고 말았다. 이런 가공할 검법이 세상에 존재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때 무엇을 생각해냈는지 염서시가 경악성을 발했다. "맙소사! 저건 바로……!" 그러나 염서시는 이내 말을 중단하며 흠칫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움켜쥔 것이다. 염서시는 보지 않아도 그 손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철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염서시의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입을 다물라는 암시였다. 염서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철륭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순간 염서시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녀는 짐짓 멋쩍은 미소를 떠올리며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위의 남녀지존들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경황중이라 제가 착각을 한 것 같군요." 그녀의 말에 한껏 기대를 모았던 남녀지존들은 이내 실망스런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염서시가 위지강의 검법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니 별것도 아니질 않은가! 후아아아앙! 상관청은 멀리 대전의 기둥 쪽으로 날아갔다. 쾅! 마침내 그는 거대한 기둥과 충돌하고 말았다. 기둥은 그 여파로 부서져 내렸고 상관청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푸하학! 상관청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내며 처절한 모습으로 저만치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위지강을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저런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툭! 마침내 그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위지강은 경이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군웅들을 외면하며 검을 착검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한솥밥을 먹게 될 것 같아 목숨은 붙여두었소." 위지강은 신형을 틀었다. "한동안 요양하면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을 거외다." 그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문득 들려온 전음에 위지강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전음이 들여온 방향으로 고개를 약간 돌렸다. 죽립 아래로 검흔이 길게 난 왼쪽 뺨이 약간 보였다. 전음을 보낸 이는 바로 일천검후 철륭이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방금 자네가 사용한 검법은 천마검법이 틀림없네!) 철륭은 입술은 꽉 다문 채 눈에서는 강렬한 신광을 쏘아내었다. (마도수, 자네는 누군가?) 철륭이 정곡을 찔러 물어오자 위지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녀지존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위지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어진 그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들 속에서 유독 염서시만이 강렬한 눈빛을 빛냈다. 이윽고 위지강은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철륭을 향해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그 질문을 거절하는 대가로 북파무림맹을 쓰러뜨리는 조건이면 만족하시겠소?) 철륭의 미간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위지강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 * * 아름다운 숲 속에 자리한 팔각정자 안. 찻잔이 놓여진 정자 안 탁자에는 사마덕조와 잠영공 남궁린이 마주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친근한 미소를 띤 채 담소를 나누었다. 남궁린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날을 잘못 짚었군요."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있는 사마덕조를 미소 띤 얼굴로 쳐다보았다. "모처럼 나선 길에 아들놈 얼굴이나 보고 가려 했는데 하필이면 폐관수련이라니!" 사마덕조도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장소는 제 처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더군요.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사돈어른!" 남궁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뜻한 바가 큰 모양이니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더욱 큰 거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두 가문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남궁린이 혀를 끌끌 찼다. "그 아이 속은 애비인 나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저쪽에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동과 외출복 차림의 연해월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할아버지!" 소동은 사마덕조와 남궁린을 발견하고는 냅다 달음박질쳐왔다. 소동은 바로 연해월의 아들인 남궁진성이었다. 두 사람은 모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냐, 오냐! 어서들 오너라." 남궁린은 달려온 남궁진성을 두 팔을 벌려 덥석 안았다. "아이구, 이 녀석 제법 묵직해졌구나!"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마덕조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잔잔하게 퍼졌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선 연해월이 남궁린에게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버님께 문안인사 여쭈옵니다." 남궁린의 노안이 환해졌다. "그래, 나야 잘 있다만 애비가 없어서 네가 적조하겠구나." 연해월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니옵니다, 아버님!" 남궁린은 남궁진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음성으로 연해월의 마음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저 말뚝 같은 자존심만 살아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게 사내들인 게야." 남궁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연해월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네가 잘 참고 보살펴 주도록 해라." "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연해월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절 데려가려 온 거예요?" 남궁진성이 흑백이 또렷한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남궁린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남궁린은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인석아!" "이야, 할아버지 최고!" 남궁진성은 그 자리를 뱅뱅 돌며 방방 뛰었다. 지금까지 외출이라곤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그이기에 외가를 다녀오는 나들이는 어린 마음을 한껏 부풀고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다. 흡사 하늘의 선동처럼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투명하고 맑은 피부를 지닌 남궁진성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아버지인 남궁사를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고 연해월을 많이 닮아 있었다. 남궁진성이 좋아하는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남궁린이 연해월을 돌아보았다. "그래, 떠날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아버님!" 남궁린은 남궁진성의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을 뺏어 간다고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구려, 사돈어른!" 사마덕조는 짐짓 정색을 했다. "잠시 빌려드릴 뿐인데 아예 가로채실 생각이라면 곤란합니다." "하하하하!" "껄껄껄!" 두 사람은 마주보며 파안대소를 했다. 그그그긍! 북파무림맹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두두두두두! 상산남궁세가(常山南宮世家), 무쌍가(武雙家),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 이런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든 말 탄 무사들이 먼저 활짝 열린 성문을 빠져 나왔다. 뒤이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팔두마차 한 대가 중무장한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뒤를 따랐다. 콰두두두두! 북파무림맹을 뒤로한 채 팔두마차와 인마들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위풍당당한 기세로 치달려갔다. 구름 같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 일행을 사마덕조는 성벽 위에서 수하들을 거느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선 흐뭇한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수하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신형을 틀었다. "고 녀석이 떠나고 나서 그런지 성안이 온통 비어버린 것 같군그래!" 그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도 이제 늙었단 말인가?' 이제 손자의 재롱에 감지덕지하는 할애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사마덕조는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했다. 화아아아앙! 순간 갑자기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사마덕조는 흠칫했다. "갑자기 웬 강풍이……?" 그는 고개를 돌렸다. 후아아아앙! 무섭게 휘몰아치는 강풍에 성루에 세워진 많은 깃발들이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북파무림맹(北派武林盟), 신무제일(神武第一) 천하독보(天下獨步),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등. 모두가 북파무림맹을 상징하는 깃발들이다. 사마덕조는 뿌듯한 기분으로 깃발들을 올려다보았다. 휘우우우웅! 강풍이 좀더 세차지면서 깃대가 활처럼 휘어지며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저, 저것……!" "저러다 부러지겠다!" 심상치 않은 바람에 수하들은 저마다 염려스런 외침을 토했다. 그리고 그들의 염려는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우지지직! 깃대 하나가 부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이면 그 깃대는 북파무림맹이란 글귀가 써진 깃대였다. 뚝! 급기야 깃대는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후아아아앙! 한순간에 불어닥친 회오리바람이 부러진 깃대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사마덕조와 수하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날아가고 있는 깃대를 쳐다볼 뿐이었다. '맙소사!' 굳은 표정의 사마덕조 곁에 어느새 나타난 등표가 수하들을 향해 다급하게 대갈을 터트렸다. "빨리 깃발을 찾아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수하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마덕조의 시선은 깃발이 날려간 방향을 향한 채 안면은 더욱 더 굳어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집안을 상징하는 깃발이 부러지면 큰 화(禍)가 닥친다고 했거늘…….'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불길한 징조다.' * * * 휘영청 밝은 만월이 떠 있는 밤. 장강의 한 줄기를 끼고서 만장절벽 위에 거대한 성채가 웅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성채의 규모도 꽤 크거니와 성루에 꽂혀 있는 각종 깃발이 이곳이 예사 단체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 황하칠십이수로맹(黃河七十二水路盟). 그렇다. 이곳이 바로 장강을 주름잡고 있는 황하칠십이수로맹의 총단이었다. 성루에 꽂혀 있는 깃발에 쓰여진 글귀만 보더라도 이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가 가늠할 수가 있다. 황하칠십이수로맹, 건곤독보(乾坤獨步) 영세군림(永世君臨). 깃발에는 바로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 성채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성벽 저쪽에는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보였다. 지금 망루에는 호롱불을 밝힌 채 네 명의 수성무사가 탁자에 둘러앉아 마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 중 마른 체형의 무사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아이구, 졸려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이봐, 교대 시간 아직 멀었나?" 순간 나머지 세 사람의 눈초리가 험악해지더니 한마디씩 내뱉었다. "저 새끼 몇 푼 긁어가더니 벌써 체중조절에 들어간 거야 뭐야?" "이제 겨우 끗발 오르는데 초치지 말고 빨리 앉아!" 그러나 마른 체형의 무사는 좌우로 목운동을 하면서 능청을 떨었다. "잔돈푼 눈곱만큼 잃었다고 엄살들은……." 갑자기 목운동을 하던 그의 눈이 확 불거졌다. "어? 저게 뭐지?" 그는 정면을 가리키며 동료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더욱 험상궂은 인상을 쓰며 면박을 주었다. "거 자꾸 신경질 나게 굴 거야?" "자꾸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와서 앉아, 임마!" 두두두두두! 그들의 귓가에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모두 흠칫하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드디어 평지 저쪽에서 이곳을 향해 치달려오는 인마들이 보였다. 모습은 희미했으나 숫자는 모두 여덟이었다. 수성무사들은 그들을 자세히 살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시간에 이곳을 찾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누구지?" "이 시간에 손님이 찾아올 리는 만무하고……." 슈슈슈슉! 이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허공을 가르며 몇 가닥의 빛줄기가 쏘아져왔다. 퍼퍼퍼퍽! 엉거주춤한 자세로 전방을 살피던 수성무사들은 목덜미에 강한 충격을 받으며 두 눈을 확 부릅떴다. 쿠쿵! 쿵!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눈을 흡뜨고 죽어 있는 수성무사들의 목덜미에는 한 자루의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두두두두두! 여덟 필의 인마가 가까이 다가오자 달빛 아래 그들의 얼굴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잠송을 비롯한 주청산, 제중인 등 여덟 명이었다. 위지강과 함께 천금마옥을 탈출한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엔 어쩐 일이란 말인가? "첫 작품치곤 그럴듯했다, 포부동!" 전면의 성채를 향해 달려가면서 잠송이 포부동의 비도술(飛刀術)을 칭찬했다. 포부동은 멋쩍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고맙수!" 잠송은 포부동을 돌아보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앞으로 네 별호는 비도탈명(飛刀奪命)이다, 마음에 드나?" 포부동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만족이오!" 거대한 체구의 주청산이 불만스러운 듯 볼멘소리를 했다. "누구만 별호를 지어주고 누구는 안 지어주는 거요?" 호랑평과 축악도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사람 차별하면 죽어서도 좋은 데 못 가는 법이라고!" "말된다, 말돼!" 잠송의 진중한 음성이 이들의 불만을 일시에 잠재웠다. "오늘은 우리 형제들이 강호에 첫선을 보이는 뜻깊은 날이다. 각자의 별호는 잠시 후 가장 멋지게 지어줄 것이니 모두 그 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이들은 성채를 향해 질풍처럼 치달려갔다. "좋아!" "가자!" 콰두두두두! 성안 넓은 광장에는 여기저기 화롯불을 밝혀놓고 경비를 서고 있는 무사들의 무리가 대여섯 보였다. 두두두두두! 급박하게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에 경비무사들은 모두 흠칫하며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굉음이 들려오는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야색이 짙은 이 시간에 굉음이 웬말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소리지……." 콰쾅! 경비무사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갑자기 성문이 박살나며 폭발해 버렸다. 콰두두두두! 부서진 성문 안으로 잠송 등은 폭풍처럼 치달려 들어왔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그들을 보고 경비무사들이 경악성을 외쳤다. "적이다!" "경종을 울려라!" 주청산이 달려오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경비무사들을 향해 쌍권을 날렸다. "경종보다 더 확실한 것을 울려주마!" 콰우우우웅! 그의 원반 만한 주먹에서 맹렬히 소용돌이치며 뿜어져 나오는 두 갈래의 회오리 권풍을 바라보며 경비무사들이 기겁을 했다. "허억!" "피, 피해라!" 쿠콰콰쾅! 경비무사 두 명의 복부가 그대로 관통됐다.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대전의 기둥을 부수며 피범벅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뎅뎅뎅! 급박하게 경종소리가 울리자 사방에서 무사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적이 침입했다." "비상, 비상이다!" 무사들은 전열을 채 정비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주청산이 말고삐를 잡아채며 잠송을 돌아보았다. "어떻소? 이 정도면 기가 막힌 별호가 뇌리를 스쳐 갔을 법도 하오만!" 잠송과 주청산을 제외한 나머지가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용권풍(龍拳風)이면 어때?" 이때 많은 수의 무사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놈들이다!" "죽여라, 죽여!" 주청산은 앞쪽에서 우르르 몰려드는 무사들 속으로 몸을 날리며 쩌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단연 최고요!"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의 주먹은 무지막지한 기세로 무사들을 가격했다. 쿠콰콰쾅! "으악! 크아악!" 일권에 대여섯 명이 피곤죽이 되어 박살이 나버렸다. 주청산은 거대한 체구를 날려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경신법이다. 그는 잠송을 돌아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용권풍이 무슨 뜻이오?" 잠송은 허공에서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몇 명의 무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용이 그려진 흰 섭선을 촥 펼쳐들었다. "사막을 휩쓰는 죽음의 모래바람이라면 알아듣겠나?" "와하하하하!" 태산처럼 버티고 선 주청산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몰려드는 무사들을 쏘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알겠느냐 이놈들아! 이 몸이 바로 사막을 휩쓰는 죽음의 모래바람 용권풍 어른이시다." "미친놈들! "죽엇!" 슉! 슈쓕! 내리치는 무사들의 칼날을 잠송은 말 탄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상체만 교묘하게 움직여 슬쩍슬쩍 피해내었다. 슈슉! 슈슉!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잠송이 손에 든 섭선을 전광석화처럼 열십자 형태로 휘둘렀다. 슈칵! 쩌쩍! 미간이 갈라지면서 충격을 받은 무사들 몸이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쿠쿵! 쿵! 마침내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잠송이 타고 있는 말발굽 아래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잠송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섭선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 별호는 아무래도 백우선(白羽扇)이 가장 그럴듯할 것 같군!" 콰콰콰콰쾅! 이때 갑자기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낙진이 그를 향해 마구 덮쳐왔다. 잠송은 몰려드는 낙진을 섭선으로 가렸다. "이건 또 뭐야?" 쿠쿠쿠쿠쿠! "으아아아아!" "크아악!" 커다란 전각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무사들이 깔려 죽는가 하면 일부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담장 위에 호두알 크기의 벽력탄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축악이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흐흐흐! 무더기로 제사 상에 올려놓는 데는 화령신주(火靈神珠)가 최고지!" 잠송이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앞으로 자네를 천뢰협(天雷俠)이라 부르겠네." "웬만하면 이쪽도 신경 좀 씁시다." 자신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칼칼한 목소리에 잠송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끔찍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푸시시식! 푸시식! 피골이 상접한 채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며 매캐한 냄새를 동반한 몇 구의 시신들이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중간에 자리한 석탑 위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콧구멍을 후비고 있는 단엽의 모습이 보였다. 시신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불타고 있었다. 잠송은 타 들어가는 시체들을 일별한 뒤 단엽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친구들은 어쩌다 그 지경이 된 건가?" 단엽은 여전히 콧구멍을 후벼파며 능청을 떨었다. "당장 때려죽일 듯이 떼거지로 덤벼드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가루약을 약간 뿌렸더니 글쎄 이 모양들이지 뭐요?" 잠송이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였다. "자네 별호의 뒤에는 신(神)을 붙이고 앞에는 백독(百毒), 천독(千毒), 만독(萬毒)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게!" 단엽은 돌돌 말아 돌리던 코딱지를 탁 퉁기며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만독신(萬毒神)으로 하겠소!" "좋아, 오늘부터 자네는 만독신일세."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