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벽 게시판에 토왕 공지가 올랐다.
고질적인 무릎 관절 문제로 꿈도 꾸지 않았는데, 정말 오랜만에 산빛에 토왕 원정 공지가 올랐다.
나는 토왕 등반을 ‘원정’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 년을 기다리고, 새벽에 별을 보며 랜턴을 켜고 오르고, 달을 보면 랜턴을 켜고 내려오는—
내게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이지만, 내가 가진 거라고는 ‘고기’뿐이다.
그 옛날 토왕에 가면 회원들이 서포트도 해주고, 내려와서 함께 식사도 했던 시절도 있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때 은수가 회장이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토왕에 가는 팀들이 있으면 고기를 구워 주면서
“라떼는 이랬어” 하며 설화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세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고기를 구워 술 한잔하고 오려고 했는데,
인생이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아침이면 무릎이 멀쩡해서 토왕에 가고
저녁이면 무릎이 아파 포기하기를 여러 번.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허가받은 네 명 말고 나와 한 명만 더 있으면 과태료 물고라도 오르다 안 되면 내려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정모와 인수에게 SOS를 쳤다.
하지만 둘 다 선약이 있단다.
그러던 중, 인선이가 작년에 갔다 왔다며 양보한다고 했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둘이 투톱으로 오르고,
내가 포기하더라도 세 명이 등반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간다고 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니, 아침에 성원이 한 차로 가자며 가게로 온단다.
“어, 이거 아닌데…” 하면서도 빙벽 8한군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토왕에서 추락을 한 번 겪은 이후로, 떠나기 전에는 가족 사진 앞에서
“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가는 길에 매바위 후등으로 정상 120미터 되는 길을 올랐는데,
전혀 팔에 무리가 없었다.
역시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일 찍기를 300번씩 4세트를 했다.
성원이가 2시 30분쯤 아침을 준비하려고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수없이 토왕을 다녀왔어도, 내가 선등서는 날에는 잠을 설치는데 선무는 코를 골며 잘도 잔다.
보통 멘탈이 아니다.
자기도 초저녁에는 잤어도, 결국에는 잠을 설쳤다고 한다.
대표 강사도 잠을 설칠 정도로, 토왕은 늘 압박감을 준다.
정확히 3시에 은나라가 도착해서 밥을 먹고, 주차장에서 4시에 출발했다.
출발한 지 30분도 안 돼서 무릎이 신호를 보낸다.
이상하다. 이렇게 빨리 아플 리가 없는데… 매바위 등반 때문인가?
토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이기에, 이들을 고생시킬 수 없어 팀을 불러 놓고 나는 포기하겠으니 셋이서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나 천천히 오르면서 7시에 등반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함께하자고 한다.
선무가 “몸이 안 풀려서 그렇다. 몸이 풀리면 나아질 거다.“라며돌팔이 원장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럼 일단 첫 번째 크럭스가 비룡폭포 위이니, 거기까지 가서 결정하자고 하고 출발했다.
이때 거절하지 못한 것이, 고난과 고통의 서곡이었다.
비룡폭포에 도착해서 체인 아이젠을 차고 폭포 고개에 오르니,마취가 됐는지 돌팔이 원장 말이 맞는지, 괜찮은 것 같았다.
또 걷는다.
별따 앞에 도착하니 무릎이 뜨끔뜨끔하며 정말 힘들다.
팀원들을 불러놓고 2차 회의다.
미안하다. 나는 못 가겠다. 잘 다녀오라고 사정조로 이야기하니, 성원이가 여기서 형 혼자 보낼 수 없으니 토왕 하단만 찍고 함께 내려가자고 한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도, 안 그래도 되는데… 하면서도 혼자 돌아가는 것도 끔찍스럽고, 솔직히 무섭다.
한참을 걷는데, 얼음이 얇아져서 세 번이나 빠졌다.
진상은 진상이다.
다행히 오후에는 영상이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2차 회의 전에 빠졌다면, 탈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내가 뭘 잘못했나 내 전생을 돌아봤다.
천신만고 끝에 와이 계곡에 도착했다.
선무 말대로 정확히 7시다.
장비를 차고, 어둠이 깔린 토왕을 보니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눈에 들어오는 곳은 온통 눈이 없고 얼음뿐이다.
출발부터 줄을 까네마네 하다가, 그냥 자유 출발하기로 했다.
두 발로 걸어가는 곳은 10%도 안 되고,
그마저도 크램폰을 꽉꽉 찍으며 올라야 한다.
오케스트라 같은 원형극장에 무대가 하단폭포이다.
등반자가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웅장함이다.
우리는 “화이팅!“을 외치며 출발했다.
내 바일이 320미터 거대한 얼음기둥에 꽂히는 순간,
토왕이 꿈틀대고 움직이는 전율이 바일 끝을 통해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아!”
이제는 내려가서 신체적인 그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이 전율, 이 환희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하단 등반을 완료하니, 헐!
중단에는 눈 하나 없고, 맨땅 하나 없는 얼음 바닥뿐이다.
자기 집은 북향집이 좋다고 하고,
자기 등반은 어떤 이유로든 어렵다고 하듯이,
토왕을 10여 차례 와봤지만 이런 중단은 처음이다.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곳은 크램폰을 찍으며 올라야 하니,
무릎 통증이 심해 엎드려 네 발로 발뒤꿈치를 들고 바일로 찍으며 올라가니 장딴지와 허리가 너무 아프다.
너무 힘들어 집에 있는 아내도 원망했다.
‘왜 안 붙잡았지?’
물에 빠져 체온을 빼앗길까 봐 우목복을 입고 등반했는데,
그것도 또 다른 고통이었다.
성원이한테 이제 후퇴는 없고 전진뿐이다라고 했더니,
성원이는 특유의 단답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이 한 마디.
벌써 선무는 상단 중간쯤을 오르고 있다.
‘그래, 나도 마지막 힘을 내자.’
심호흡을 하고 나도 출발했다.
하지만 정신력도 한계가 있나 보다.
등반은 발이 중요한데, 다리가 아파 질질 끌다 보니 킥도 제대로 안 되고,
발을 믿지 못하니 팔로만 끌어올려서 금방 펌핑이 왔다.
두 번째 스크류를 박고 생각했다.
‘내가 고집 부려서 더 올라가면, 주차장 도착이 12시다.’
혹시라도 사고라도 나면, 저 동료들이 얼마나 고생할까.
한번 이곳에서 헬기를 타 본 경험이 있어서,
그 고생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기어서라도 내 스스로 내려가는 것이 모두가 덜 고생하는 길이다.
인경아! 그만 내려가자.
할 만큼 했다.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여기서 내려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르느라 못 보았던 토왕골을 돌아보니, 그 어느 때보다 장관이었다.
눈으로 보고,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도록 가슴에도 담았다.
한때는 윤신원에게 “토왕의 사나이” 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다.
눈가가 촉촉해짐을 느끼며,
성원에게 “탈출하자” 고 무전을 하라고 했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선무가금방 “오케이” 싸인을 보냈다.
마침 선무와 나라도 상단 테라스에 도착했으니,
등반의 90%는 끝난 셈이라 덜 미안했다.
힌등 대표와 KMG 대표 학생이 탈출을 시도하니,
막힘없이 일사천리로 와이 계곡에 도착했다.
하강하며 이곳을 그렇게 많이 다녀도 못 보던 세 가지를 발견했다.
와이 계곡부터 상단까지 온통 얼음,
주말인데도 앞팀 세 명과 우리 팀 네 명, 총 일곱 명뿐인 적은 인원.
이 적은 인원이 등반하는데도 나라가 콧등에 낙빙을 맞아 퉁퉁 부었다.
별일 없어야 할텐데.
보통 주말이면 20-30명이 등반하니 낙빙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낙빙을 맞고 하강하는 팀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마지막, 탈출 포인트가 이렇게 많은건 처음보았다.
장비를 정리하며, 이곳에서의 수많은 추억들이 스쳐 갔다.
빙벽을 처음 배우면, 토왕 등반이 로망이지만 막상 다녀오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토왕이다.
와이 계곡에서 야영을 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먼저 간 악우들의 동판에 담배 한 대를 올려놓고,
나는 오늘 이 곳이 마지막이지만, 이곳을 찾는 산빛 악우들을 잘 굽어살펴 주시라고 작별 인사를 하는데 눈시울이 붉어진다.
짐을 정리하는데, 나라가 자기 짐이 가볍다며 내 짐을 달라고 했다.
염치 불구하고 선등 장비를 주고, 성원이가 스크류를 갖고 갔다.
겨울 등반에서만 볼 수 있는, 악우들의 우정이다.
4시에 출발해서 5시 30분이면 도착할 거였는데,
나 때문에 7시 30분에야 소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정말 살았구나.”
4시에 출발해, 19시 30분에 도착했다.
15시간 30분의 긴 등반.
운행 시간 6시간 30분을 빼면,
무려 9시간을 얼음벽에 매달려 있었다.
나에게는 정말 사투의 시간이었다.
먼저 도착해서 내 배낭을 들어주겠다고,
미리내까지 마중 나온 나라에게
정말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진상 처리반으로 끝까지 나와 같이 내려온 성원!
고맙고, 사랑한다.
그리고,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
이 등반에서 제일 고맙고 감사한, 등반 대장을 맡아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선물을 준 선무에게 고맙다.
짧은 시간이지만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엄청 가까워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토왕 등반을 10번넘께 등반했는데 딱 두번 선무와 토왕을왔는데 맨처음과 오늘 토왕마지막 등반이다.
처음과 마지막을 선무와 함께했다는 것이 소름 끼치는 인연 같다.
이 세 명은 나에게 그 어떤 선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선무, 성원, 나라!
끝까지 함께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긴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올라온 온 글 얼떨결에 클릭하고
단숨에 읽어내리다보니
발끝에서 부터 올라오는
전율이 가슴까지 전해지며
뭉클뭉클
눈물이 다 글썽글썽;;;
함께 하지 않았다면..
온전히 다 느낄 수 없는 감정이겠지만
구구절절하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생생하게 글로 전해 주신 형님
토왕의 4인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월례회의 참석하는
성원씨에게 세세한 감동스토리를
기대헤 봅니다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하산까지 마치고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멋진 산빛산악회에 전우애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선배님 멀티도 참석 부탁드립니다~~
저도 선배님과 줄 묶어보고 싶습니다^^
문득 들어왔다가 글을 읽는데,
선배님만의 유머러스한 비유들이 마치 소설의 한 부분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마지막 토왕이란 제목이 무색하게 이 후, 이어질 올 산빛등반 여정의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서로의 곁을 묵묵히 함께하는 마음이 너무 따뜻하게 전해졌네요~~
선배님의 향수, 정, 뜨거움, 애잔함, 뭉클함, 기쁨 너무도 많은 감정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함께하신 네분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멋진 글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열정과 멀어지고 있는 토왕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깊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감동에 눈물도 찔끔...
토왕 다녀오신분 모두 훌륭하고 멋집니다~~
태블릿 이나 휴대폰이 아닌 서재에서 꺼내 먼지 쌓여 있는 진짜 책을 읽는 느낌이 들었어요.
선배님의 토왕에 대한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 해 봅니다.
마지막 이라니요. 마지막 이라니요. 처음과 끝, 마지막이라니요.. 그 말씀이 먹먹하네요.
유튜브랑 넷플릭스등 영상매체만 보다가 오랜만에 멋진 필체 (심지어 정말 손글씨 느낌이 들어)
영광스럽게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有口無言!
감사합니다.
이번에 선배님과 줄을 묶지는 않았지만 줄을 묶은 것 같은 마음으로 꼭 함께 올라가실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인경 선배님의 도전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넘 재밌게 읽었습니다^^* 형님
120자 메고 크램폰끼고 토왕밑에 도착해서 “ 난 여기까지…” 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나중에 토왕폭밑에까지 에스카레이터를 설치하지고 피켓시위를 해야겠어요
인경형님~글을 읽는데 눈물은 왜 나는걸까요?
우리 멋진 인경형님~
내년에도 화이팅입니다 ~^^
얼음 운동은 못 해봤지만서도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사진으로 만 보아 온 토왕의 얼음에 저도 함께 서있는 듯한.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매우 특별하지요.
그게 세월이 자연스럽게 준 의미라면 더욱.
토왕 처럼 제 마음도 웅장해 집니다.
모두 애쓰셨어요~~~~~~~^^
형,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추워지면 또 가슴 설레이는 병 이 오겠죠!
인경 형님 요즘 빙벽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저희에게는 마지막 이란 말씀이 어울리지 않네요 항상 전진 해야 합니다 ㅡ 파이팅 해요
끝이 아닌 새로운시작!!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