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영상기록의 시작
독자 여러분께서는 조지 워싱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또 에이브라함 링컨의 사진은 얼마나 보았습니까? 성공적인 첫 사진술이 L.J.M. 다게르에 의해 발명된 것은 1835년으로 위싱톤이 사망한 후이고,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 이것이 발명되기 전에는 유명인의 초상도 화가의 수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게르가 최초의 사진을 촬영하는 데 사용 한 것은 '암상장치(camera obscura)'이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자의 한쪽 끝에 렌즈 가 있고 상이 초점을 맺는 위치에 간유리판을 장치한 것이었다. 암상장치는 수세기 전에 발명된 것으로서 레오나르드 다 빈치가 1519년 이전에 기술하고 있으며, 1573년에는 E. 단 티가 렌즈 뒤에 거울을 놓고 반전된 상을 다시 되돌리도록 고안하였다. 다게르 시절에는 유리판 위에 얇은 종이를 깔고 물체나 풍경을 추적하는 데 암상장치가 사용되고 있었다. 암상의 상을 고정시키려고 한 초기의 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 J.N. 니엡스였다. 그가 사용한 것은 아스팔트[유태역청]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빛에 노출되면 어떤 종류의 용매에도 잘 녹 지 않게 된다. 이 방법으로 1822년경에 그는 암상장치를 사용해서 일단 내구성이 있는 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 최초의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품상태가 만 족스럽지 못했으며, 방법 역시 실용적이지 못했다. 한편 다게르는 빛에 분해되기 쉬운 것으 로 알려져 있던 은염으로 실험했다. 니엡스가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된 다게르는 그를 만나 공동으로 일을 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니엡스가 곧 사망(1833)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이 시도르와 금융상의 언급은 있었지만 일은 혼자서 진행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은으로 도금한 동판을 번쩍번쩍 닦아내고는 요오드의 증기에 갖다대어 표면에 요 오드화은의 얇은 층을 만들었다. 암상장치를 사용해서 이 판을 노광시키자 희미한 형상이 생겼다. 이 상을 짙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어느날 그 는 다시 한번 사용할 목적으로 희미하게 형상이 나타나 있는, 노광이 끝난 판을 씻어서 약 품이 들어있는 선반에 넣어 두었다. 며칠 후 다시 그 판을 꺼내보니 놀랍게도 진한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발견된 것은 다게르에게 '통찰력'과 '마음의 준비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반 속의 약품 중에서 어느 것인가가 형상을 진하게 한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선반에다가 노광한 요오드화은의 판을 놓아둔 채 약품을 하 나씩 꺼냈다. 그런데 약품을 전부 꺼냈는데도 상이 진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선반을 조사 해보니 거기에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이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게르는 수은의 증기가 상을 짙게 한 원인이라고 추정하여 그 즉시 실험하여 확인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은판사진'인 것이다. 그 후, 사진가들은 섭씨 75도 정도로 가열한 수은 이 들어있는 컵 위에 노광한 판을 놓고 '잠상'을 현상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수은에 의한 발견에 관하여 "이미 수은화합물 실험을 하고 있었으므로 금속수은의 증기는 바로 가 까운 곳에 있었다. 행운은 내가 그것을 잡을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설명했다(한편 불행하 게도 지금 잘 알려져 있는 수은증기의 높은 독성 때문에 은판사진을 취급하는 많은 사진사 가 심한 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일찍 사망했다). 은판사진은 양화사진이었다. 요오드화은에 빛이 닿게 되면 그 부분이 광화학적 현상을 일으 켜 변질되며, 원소상의 은과 수은이 결합하게 되면 밝은 아말감(amalgam)이 생성된다. 광선 이 닿지 않은 부분의 요오드화은은 다음 과정에서 씻겨 없어진다. 은-수은 아말감 부분은 은도금 판인 거울 속에서 어두운 배경을 반사시켜서 밝은 상을 만든다(만일 창공이나 광선 아래에서와 같은 밝은 배경에서 은판사진을 보면 상은 어둡게 되고 배경이 밝게 된다). 변 화 안된 요오드화은을 제거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단순히 일반 소금(염화나트륨) 물로 씻었 으나 티오황산나트륨(소위 하이포)이 휠씬 좋은 정착액이라는 것이 알려져 바로 개량되았다. 은판사진은 금새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주로 몇 사람의 저명한 파리 과학자들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한사람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사무국장인 프랑소와 장 아라고이 다. 그는 1839년 8월 19일 아카데미회합에서 이 발명을 소개하고 다게르와 니엡스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의회에 제안했다. 상은 실제로 수여되었으며, 이것은 국가의 자랑임과 동시에 이 방법이 다른 나라로 건너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상 덕분으로 이 새로 운 사진술은 한층 널리 알려져 곧이어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도 인기절정에 다달 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가 염려했던 대로 그 이용과 발전은 주로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다게르의 선구적인 업적이 있은 후, 사진술은 많이 개량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음화-양화법 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일반대중의 은판사진에 대한 매료는 19세기 중렵의 사진술에 엄 청난 자극을 주었다. 은판사진과 그 발명가를 출범시칸 발견은 세렌디피티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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