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라
빌립보서 3장 7-9절『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먼저 그리스도를 얻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자기가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화로, 어떤 왕이 혼인잔치에 이 세상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초청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복을 입지 않는 자의 수족을 결박하여 어둠에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혼인잔치에 예복을 준비하여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는다고 말들을 하지만 거듭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는 것이 거듭남이다.
등불을 켜고 신랑을 맞으러 준비하던 열명의 처녀가 있었는데, 다섯은 기름이 모자랐다. 잘 믿다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넘어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율법적 사고다.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을 피했다. 소알성으로 가는데,『뒤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앞만 보고 계속가라』고 하셨다. 구원받는 믿음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죽을 때까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출발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다 이겼는데, 뒤돌아보는 자아의 문제로 소금기둥이 된 것이다. 그것은 잘 하다가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교회생활을 수십년하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천국간다고 믿고 왔지만, 내속에 생명이 느껴지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말한『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에서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그 대상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역사하지 않는다. 구약의 성소마당에서 죄인은 어린양을 죽이고, 그 다음에 피를 바른다. 그리고 죽은 고기를 태우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양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린양에게 안수하는 것은 죄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됨이 전가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죄인이 죽은 어린양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죄인이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죄를 용서받는다. 죄인과 죽은 어린양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죄인과 죽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과도 같다. 히브리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애굽을 나왔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은 없었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피하는 것이다. 가나안이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래서 회개는 광야에서 외쳐지는 것이다. 애굽에서는『회개하라』는 말이 없다.『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는『회개하라』는 것이다. 애굽은 세상을 나타낸다. 애굽을 나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는 것이다. 애굽을 나온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과 평강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애굽조차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애굽을 나왔지만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교회안에서 거듭나는 것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발견한다. 거듭나는 것은 죄의 처리가 아니라 자아(옛사람)의 처리다.
오늘 죽으면 천국가는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열매는 무엇인가? 거듭남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다. 물은 노아의 방주때 죽은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물에 수장되는 것을 나타낸다. 죄를 씻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는 것이 회개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변화받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이 된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다.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다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믿음이 와야 함을 말하고 있다.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이 되어야만 한다. 내가 믿기로 결단하고 예수를 영접한다고 되는 믿음이 아니라, 거듭나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믿음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회개하여 물에서 장사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믿음이 오는 것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말하는『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로마서 4장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는 것은 죄인이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바라보고 내가 죽은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율법 아래 갇혀있는 자들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만 율법에서 나와 성령의 법으로 인도된다. 갈라디아서 3장 25절에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율법에서 나오면 적용되는 법이 다른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에서는『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 믿음은 하나하나님부터 온 믿음이다.『누구든지』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얻는 믿음이다. 오늘날 옛사람이 죽지 않은 세례는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마술장이 시몬에게 말한 것이 적용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지는 것이다. 세례는 로마서 6장 3-4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될 때 그리스도가 그 죄를 사해주신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양의 가죽옷을 입어, 죽은 양과 같이 되는 것이 구원이 된다.『당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까? 그의 죽으심과 그 피로 모든 죄를 사하심을 믿습니까? 아멘』이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넌 것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예수의 피 공로만으로 구원을 가르치고 있으면, 중세 때 면죄부를 파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된다. 온 땅에 미혹이 만연하면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워져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믿음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안에 없는 새생명을 얻는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나』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 된다. 십자가의 공로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 혼적인 존재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것은 영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