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가장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인사이드 잡(Inside Job)>과 <노 엔드 인 사이트(No End In Sight)>를 만든 찰스 퍼거슨 감독을 꼽겠다.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늘 다큐인데 꼭 그런 타이틀 때문에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노 엔드 인 사이트>는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의 이라크 재건 정책이 얼마나 소수의 무모한 정책자들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결정되었고, 그로인해 이라크 국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전쟁 그 자체 보다 장기적으로 지속된 전후의 혼란과 반정부사태와 내전, 테러 등이 이라크 민중들의 삶을 철저하게 망가뜨려벼렸다. 수천년 역사를 가졌고 수천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이라크의 운명이 부시를 비롯해 체니 부통령, 럼스펠트 국무장관, 폴 월포비츠 등 몇몇 신보수주의자에 의해, 운 좋게도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에 태어나 좋은 대학을 나오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는 것 말고는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철학이 지극히 협소하고 왜곡된 사내들에 의해 간단하게 결정되었던 현실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재밌는 것은 전후 이라크의 정책을 좌지우지한 이들 중 누구도 제대로 군대 생활을 하고 미국의 해외 주둔지에서 근무한 경험자가 없다는 것. 주둔지의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베테랑 군인들의 의견은 이들에게 철저히 무시된다.(군 미필자들이 모여 국가안정보장 회의를 하는 어느나라와 비슷하다)
<인사이드 잡>은 80년대 이후 무조건적인 탈규제로만 일관한 신보주주의 금융정책이 결국 2008년 월가 사태를 불렀다는 감독의 주장을 신뢰할만한 증언과 각종 자료를 통해 보여주는 다큐다. 또한 개혁과 변화를 내세워 당선된 오바마가 가장 강력한 금융 개혁론자인 폴 보커 대신 ‘월가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인 서머스와 가이트너를 경제 책임자로 임명했을 때 이미 금융 개혁은 시늉에 그친것이라는 결론을 설들력있게 증명한다.
두 작품의 특징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순을 지적하고 개혁을 요구하지만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차분하고 지적이다. 특히 <인사이드 잡>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러브스토리>의 쇼맨십과 이벤트성 구성과는 완전히 대비된다. 그러면서도 주로 인터뷰 위주인 90분 이상의 논픽션 영상물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힘과 연출자의 내공이 대단하다. 바로 ‘인터뷰이’들의 힘이다. 어떻게 저런 (높은)위치의 사람들, 기득권층 인사이더들을 섭외해서 저런 증언이 나올 수 있게 이끌었을까하는 감탄이 나온다.
인사이드 잡에는 월가 관계자와 경제 학자는 물론 유럽의 주요 재무 책임자들이 인터뷰이로 출연해 금융위기의 원인을 증언한다
다큐를 직접 만들어 본 감독들은 다 인정할 것이다. 취재원에 대한 접근 여부가 가장 힘들고 결국 그것이 작품의 성패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예를 들어보자. 철거민에 관한 다큐를 찍는다고 치자. 감독은 당연히 사회고발적인 작품을 주로 만들어 온 독립영화인이다. 철거민들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어가고 무자비하게 철거용역 깡패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이 생생히 담긴다. 메시지도 확실하고 비쥬얼도 강하다. 실제로 한국 장편독립다큐의 효시격인 80년대 작품 <상계동 올림픽>은 감독이 철거민과 함께 생활하고 투쟁하는 과정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90년대에도 2012년에도 똑같은 형식의 다큐를 만든다면 의미는 여전하겠지만 ‘새로움’은 전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만약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만든 다큐의 주인공이 용역깡패들과 악질 개발업자라면? 그들이 솔직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카메라에 통해 밝힌다면? 같은 소재를 두고 전혀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이 나올것이다. 물론 거의 불가능한 기획이다. 용역깡패와 개발업자가 인터뷰나 취재에 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약자와 고통받는자들은 쉽게 다큐멘터리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주류 매체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를 지배하는 강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미디어의 프레임만 활용할 뿐 결코 대안적이거나 비판적인 매체에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지난주에도 한국의 방송국에 보낼 그림을 얻기 위해 월스트릿 점령 시위자들을 거리에서 쉽게 인터뷰했다. 그들은 기꺼이 취재에 응했다. 그러나 월가를 움직이는 큰손들을 만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찰스 퍼거슨 감독은 바로 거기에 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왜냐면 그는 미국사회의 1% 아니 0.01%에 속하는 학벌과 재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퍼거슨 감독은 애초부터 필름메이커가 아니었다. MIT 박사 출신의 엔지니어로 프론트페이지를 만든 버미어사를 세워 후에 마이크로소프트에 1억4천만달러에 팔아버린 거부다. 회사를 넘긴 후엔 미 정가에 가장 큰 영향을 가진 브루킹스 인스티튜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최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이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정치적인 영향력과 재산을 활용해 바로 자신이 속한 지배 계층의 아픈곳을 확실하게 찌르는 다큐를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이다.
MIT에서 박사를 받은 백만장자 엔지니어에서 다큐 감독으로 변신한 찰스 퍼거슨 감독
박원순 서울시장의 자녀에 대해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솔직히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실망스러울 것같다.
그런데 이런 문제점을 제기하는 주체들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이 있다. 자녀 문제에 곁들여 또 수백만원 강남 월세값 타령하면서 박
시장에 대해 “서민을 위한다지만 결국 자신이 1%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비아냥거림이다. 자식 병역 문제로 대선꿈이 날라간 사람도
있고 공직에서 짤린 사람도 있다. 형평성을 따진다면 박 시장이 이번 일로 시장직을 내놓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이번일을 포함해
앞으로도 무수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진자는 절대로 가난한자를 대변할 수 없다” 혹은 “1%는 절대 세상을 개혁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몰고가는 음모는 경계해야 한다. 이미 안철수 교수가 소유한 주식 가치를 밝히면서 교모하게 국민 정서를
몰고가는 수법, 김어준 총수의 성북동집 보도 등 보수 언론의 유치한 수법들을 보고 있다. 진보 세력을 철저하게 계급,
계층적으로 주변화(marginalize)시키고 진보의 가치에 합류하고 동조하는 기득권층 인텔리와 기업인들을 위선과 허구의
대상으로 몰고가려는 수법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불리는 마이클 무어 감독은 미시건의 전형적인 노동자 가정 출신이지만 <보울링 포
컬럼바인>과 <식코>의 대성공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가 <자본주의:러브스토리>를 발표했을때 보수
언론들은 “5번가 맨션에서 사는 감독이 무슨 자본주의 비판 영화를 만느냐”고 비아냥거렸다. 할렘의 다락방에 살아야만 자본주의
비판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 >로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감독상을 받은 데이비스 구겐하임은 미
공교육의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무척 고민했다. 자신의 두 자녀는 1년 학비 수만달러의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만든 <수퍼맨을 기다리며(Waiting for superman)>는 이제껏 나온 어떤
다큐보다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이 망가진 공교육 시스템으로 고통받고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5번가 고급 맨션에서 사는 마이클 무어는 여전히 노동자 정서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리버럴 영화인이다
‘강남좌파’, ‘알마니 좌파’, ‘샴페인 사회주의자’ 뭐라고 불러도 좋다.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이면 다 연대해 야 하지 않을까? 이미 그런 단어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속셈이 계급과 계층을 초월하는 연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알마니 투피스만 주로 입는 넨시 펠로시 전 미 하원의장은 (아주)부자집 딸로 태어나(아주) 부자 남편과 결혼한 여성이다.
하지만 펠로시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한국으로 치면 국가보안법 폐지와 맞먹을 정도로 힘들었던 의료보험의무화 입법은 불가능했다.
미국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위치인 하원의장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1%도 진보적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리고 1%는 1%기 때문에 더 급진적인 개혁도 할 수 있다.